전통문화

황산대첩 개관

 

전황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몽고·홍건적·일본인 등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는데, 그 중 일본인의 침입이 가장 많았다. 특히 일본인의 침탈(侵奪)로 고민하던 고려 말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 국운을 보전해야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일본인는 진포에서 원수 나세와 최무선의 화포로 격파 당한 왜선 500여 척의 패잔병들이었다. 해상 퇴로를 잃은 일본인 잔여세력은 소백산 줄기를 따라 남하하다가, 우왕 6년(1380) 8월 함양의 사근내 역(수동)에 진을 쳤다. 이 때 도원수 배극렴(裵克濂)이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일본인를 공격하였으나 박수경·배언 등 장수 2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처럼 일본인의 규모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승세를 탄 일본인는 다시 남원성을 공격하다 물러가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장차 광주 땅의 금성산성(담양)에서 말을 먹인 뒤 곧 북상하리라.」는 소문을 냈다. 이에 나라가 크게 긴장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북방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로 삼아 부장으로 하게 하고, 평리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 도길부(都吉敷)·지문하 박임종(朴林宗)·상의 홍인계(洪仁桂)·밀직 임성미(林成味)·척산군 이원계(李元桂)를 원수로 삼아 일본인 섬멸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일본인는 칼과 창·활 등으로 무장하고 약탈한 馬를 사용하였다. 전술로는 인월역을 중심으로 황산천(荒山川)을 주둔지의 해자(垓字)로 이용하면서 제2차 방어선으로 활용하고, 500여 미터 전방의 동무 마을과 서무 마을의 양쪽 산등성이에 일본인를 매복시켜 최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남원에 주둔하던 이성계는 승전을 기원하는 출전 제례를 올린 후 운봉 황산을 향하여 나아가 사창리 마을 앞 해발 531m의 정산(鼎山) 봉우리에 올랐다. 그리고 일단 동무듬과 서무듬 사이의 매복 방어선을 돌파하여 인월역에 주둔하고 있는 敵의 주력을 단숨에 격파하고자 하였다. 먼저 여러 장수들이 정산봉 좌측 동무듬 평탄한 쪽을 공격하자, 대비하고 있던 敵의 예리한 반격에 쫓겨 번번이 퇴각하였다. 이러한 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하루해가 벌써 기울었다.

이성계는 작전을 바꾸어 우측 험한 길을 택하여 서무듬 산등성이에 매복하고 있는 敵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과연 태조가 전진하자 매복하고 있던 敵의 군사가 대거 튀어나왔다. 이성계는 의연하게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敵의 얼굴에 명중시키니 모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는 중에도 일본인들은 몇 번이고 집요하게 기습을 시도하였다. 드디어 황산천의 진흙탕 속에서 아군과 敵을 구별할 수 없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3 차례에 걸친 敵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뒤범벅이 되어 끝내 일어서는 자는 정작 모두 고려 군사들뿐이라고 사료는 기록하고 있다. 싸움에 밀린 일본인들은 황산 동쪽 기슭 험준한 산 위에 굳게 웅거하고 지키며 대적하였다. 이성계는 군사를 요해처(要害處)에 나누어 지키게 하고, 휘하 이대중 등 10여 명의 군사를 독려하여 敵을 올려쳤으나 결국 사력을 다해 반격하는 敵에게 쫓겨 내려오고 말았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인지라 태조는 다시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 나팔을 불어 총 돌격을 명하였다. 군사들은 개미떼처럼 산을 기어올라 적진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敵의 장수 하나가 창을 겨눈 채 장군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위급하였다. 이를 본 편장 이두란이 큰소리로 이성계를 부르며 말을 달렸다.

”영공(令公)은 뒤를 보시오. 영공은 뒤를 보시오.”

거듭 소리치며 달렸으나 장군은 미쳐 손을 쓸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의 화살이 먼저 바람을 가르고 날랐다. 화살은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꿰뚫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이성계는 의연히 싸움에 임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바꿔 타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적이 쏜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꽂히자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급하게 적을 쳐 나아갔다. 군사들은 이성계가 부상한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싸움은 급박하였다. 이성계가 화살을 맞고 부상하자 敵이 몰려와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나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며 그 자리에서 敵 8명을 베어 죽이니 감히 적이 달려들지 못하였다.

휘하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었으나 싸움의 승패는 가늠할 수 없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태조는 하늘을 향해 소리쳐 맹세했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敵에게 죽겠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크게 감동하고 용기 백배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敵의 사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敵들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敵의 대장은 백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날래기가 어느 장수와 비할 수가 없었다. 倭軍의 대장은 阿只拔都라 하였다. <阿只>란 어리다는 뜻이고 <拔都>란 몽고말로 용감하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의 용맹을 아껴서 생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두란이 말하기를 생포하려면 많은 우리 군사가 희생될 것이라 하여 만류하였다. 阿只拔都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활을 쏠만한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성계는 말하였다.「내가 활로 투구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저자의 목을 쏘아라.」라고 말하며 박차를 가해 말을 몰았다. 이윽고 활을 들어 투구 꼭지를 쏘니 투구 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자 아지발도는 황급히 투구를 고쳐 쓰려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두 번 째 활을 쏘아 투구 끈을 맞히니 투구는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두란이 활을 당겨 적장의 목을 쏘았다.

적장이 죽었다. 敵이 통곡하며 우는소리가 계곡을 진동하니 마치 만(萬)마리의 소가 울부짖는 것과 같았다. 순식간에 우두머리를 잃은 일본인는 놀라 혼비백산하였다. 敵의 전세가 기울자 상승세를 탄 우리 군사들은 총 공세를 펴 무려 10배가 넘는 일본인를 섬멸시켰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 적은 겨우 70명만이 덕두산을 타고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전과

전투 결과 노획한 馬가 1,600여 필, 빼앗은 병기와 敵의 수급을 바친 것이 산을 이루었다. 또한 敵이 흘린 피가 황산천을 붉게 물들여 7일 간이나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고『동국여지승람』은 적고 있다. 황산 전투는 고려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과감한 전술과 목숨을 건 분전 결과 이룬 대승첩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적이 두려워 싸우지 못한 장수들은 태조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부딪치며 죄를 빌었다.

이성계 장군은 정벌 도중에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개선 도중에 장군은 전주 오목대(梧木臺)에서 잠시 머물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불러 승전의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 싸움을 황산대첩 또는 운봉정산전(雲峰鼎山戰)이라 불렀는데, 나세와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과 정지의 남해대첩(1383), 그리고 최영의 홍산대첩(1383)과 함께 고려 4대 승첩이라 한다. 이중 전북 지방의 2대 승첩이 황산대첩과 진포대첩이다.

 

 

 

 

황산대첩에서 7000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이성계가 통솔하는 

고려군에게 敗하여 전멸한 후 고려에서 일본인들의 침략은 감소하게 됩니다. 

 

제가 황산대첩에 대한 지식을 접하고 나서 倭軍의 將帥 阿只拔都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게 되었는데 혹시 일본의 역사 기록이나 史書에서

阿只拔都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없는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日本人は 阿只抜都が分かっていますか?

荒山大捷開館

 

戦況

煮こもうとする初期からキタイ・モンゴル・紅巾の敵・倭寇など幾多の叫ぶことを受けて来たが, その中倭寇の侵入が一番多かった. 特に倭寇の侵奪(侵奪)で悩んだ高麗ではない荒山大捷は歴史的に国運を保全しなければならない重要な戦闘だった.

当時倭寇はジンポで元首羅世と崔茂宣の火砲で撃破当ぎり倭船 500余尺の敗残兵たちだった. 海上退路を失った倭寇残余勢力は小白山脈に付いて南下してから, ウ王 6年(1380) 8月涵養の事根内駅(受動)に陣を張った. この時桃源数べ・クックリョム(〓克濂)が役東 3里支店で倭寇を攻撃したが拍手頃・ベオンなど長寿 2人を含んだ 500余名の軍事が戦死するさんたんな敗北に喫した. このように倭寇の規模は決して無視することができない勢力だった.

乗勢に乗った倭寇はまた南原性を攻撃して退いて雲峰県を燃やして仁月役に駐屯こんにちはだった. そして 「将来光州地の金星酸性(潭陽)で言葉を食べさせた後すぐ北上しよう.」はうわさを立てた. ここに国が大きく緊張して民たちの民心が動搖した.

高麗朝廷では北方戦闘で経験が多い李成桂を陽光・全羅・軽傷三道ドスンチァルサで任命して, 賛成社梓安烈(辺安烈)をドチェチァルサにして部長にするようにして, 平里往復人(王福命)・平里禹仁烈(禹仁烈)・優思ドギルブ(都吉敷)・ジムンハ朴臨終(朴林宗)・相議洪イン係(洪仁桂)・ミルジック林気性(林成味)・尺山君二元係(李元桂)を元首にして倭寇殲滅作戦に出るようにした.

倭寇は刀と矛・弓などで武装して掠奪した 馬を使った. 戦術では仁月役を中心に黄山河(荒山川)を駐屯地の垓字(垓字)で利用しながら第2次防御線で活用して, 500余メートル前方の友逹村と庶務村の両方尾根に倭寇を待ち伏せさせて最前防御線を構築した.

南原に駐屯した李成桂は承前を祈る出場祭礼をあげた後雲峰硫酸を向けてひいては社倉里村前海抜 531mの精算(鼎山) 峰に上がった. そして一応ドングムドムとソムドムの間の待ち伏せ防御線を突破して仁月役に駐屯している 敵の主力を一気に撃破しようとした. 先に多くの長寿たちが精算峰左側ドングムドム平坦な方を攻撃すると, 備えていた 敵の鋭い反撃に追い回されていつも退却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のような進退を繰り返えす間一日がもう傾いた.

李成桂は作戦を変えて右側険しい道を選んでソムドム尾根に待ち伏せている 敵を誘引しようとした. 果して太祖が進むと待ち伏せていた 敵の軍事が大挙飛び出した. 李成桂はもとのままに大宇前 20発と柳葉前 50発をうって 敵の顔に命中させたら皆秋風落葉のように倒れた. そうな中にも倭寇たちは何番(回)も執拗に不意打ちを試みた. いよいよ黄山河のどろの中で我軍と 敵を区別することができない白兵戦が起った.

3 回にわたった 敵の不意打ちにもかかわらず泥にごたまぜになって結局立ち上がる者はいざ皆高麗軍事たちだけだと史料は記録している. けんかに滞った倭寇たちは硫酸東岸険峻した山の上に固く雄拠して守りながら対敵した. 李成桂は軍事を要害処(要害処)に分けて守るようにして, 旗下梨花女大中など 10余名の軍事を督励して 敵をオルリョチョッウや結局死力をつくして反撃する 敵に追い回されて下ってしまった. 実に勝敗を見積ることができない大変なけんかだった. しかし一寸も退くことができない状況だから太祖はまた軍事を整理して進撃喇叭を仏語すべて突撃を命じた. 軍事たちはゲミテのように山を這い上がって敵陣で衝突するようになった. 切迫な状況の中で 敵の長寿一つが窓を狙ったまま将軍の後に飛びかかっていた. 危急だった. これを見た偏長この二つ欄が大きい声で李成桂を呼びながら言葉を走らせた.

領空(令公)は後を見ます. 領空は後を見ます.

重ねて叫びながら走ったが将軍は及んで手を使うことができない切迫な状況だった. 名弓この二つ欄の矢が先に風を切って運んだ. 矢は飛びかかる賊将の首を突き通した. 危急な状況の中でも李成桂は依然とけんかに臨んだ. 言葉が矢にそう倒れればまた言葉を乗り換えるのを何回繰り返した. 激しい戦闘の続く間敵のうった矢が李成桂の左側足にささると矢を抜いて投げ出してもっと急に少ない打って進んだ. 軍事たちは李成桂が負傷したことを分からないほどにけんかは切迫だった. 李成桂が矢を当たって浮び上がると 敵が群がって来て畿重にもかこんだ. しかし勇将らしい気迫を高くふるってその席で 敵 8人を切っておかゆだから敢えて少なく飛びかか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旗下騎兵とともに包囲をくぐったがけんかの勝敗は見積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多くの長寿と軍事たちはくたびれていた. 太祖は空を向けて叫んで誓った.

恐れた者等は退きなさい. 私は 敵に死ぬ.

多くの長寿と軍事たちが大きく感動して勇気百倍して死に物狂いで争った. しかし 敵の買うことは少しも搖れなかった. 敵らが空のように信じてよる大将があったからだ.

年やっと十5・6歳になる 敵の大将は百馬に乗って窓を振り回すのに, 手早いのがどの長寿と比べ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倭軍の大将は 阿只抜都だと言った. <阿只>欄幼いという意味で <抜都>欄モンゴル語で勇ましいという意味だ. 李成桂は賊将アジ発島の勇猛を惜しんで生け捕るように命じた. しかしこの二つ欄が言うのを生け捕ろうとすれば多くの私たち軍事が犠牲されるものと言って引き止めた. 阿只抜都は顔までよろいで武装していて弓を射るに値する振ることがなかったのだ.

すると李成桂は言った.「私が滑路かぶとをうつはずだからかぶとが落ちたら君がすなわち著者の首をうちなさい.」と言いながら拍車をかけて言葉を駆った. やがて弓を持ってかぶと取っ手をうったらかぶと紐が切れてかぶとが傾くとアジ発島は慌ててかぶとを直してひりひり痛んでした. この時太祖は二番目弓を射ってかぶと紐を当てたらかぶとはつい地に落ちてしまった. この時を逃しやしないかこの二つ欄が弓を繰り上げて賊将の首をうった.

賊将が死んだ. 敵が泣きわめいてウヌンソリが谷を震動したらまるで万(万)匹の牛が泣き叫ぶこととようだった. あっという間に親分を失った倭寇は驚いて驚いて肝をつぶした. 敵の借りる費用傾くと上昇勢に乗った私たち軍事たちはすべて攻勢を開いておおよそ 10倍が越える倭寇を殲滅させた. 死骸が山のように積もって流した血が小川を成した. 少ないやっと 70人万がドックドサンに乗って智異山で逃げた.

 

前科

戦闘結果捕獲した 馬が 1,600余ピール, 奪った兵器と 敵の需給を捧げたのが山を成した. また 敵の流した血が黄山河を赤く染めて 7日間や飲むことができずに, 器に盛って長く沈めた後こそ飲むことができたと『東国輿地勝覧』は少ない. 硫酸戦闘は高麗軍の劣勢にもかかわらず太祖の果敢な戦術と命をかけた奮戦結果成した大勝捷だった. けんかの終わった後敵が恐ろしくて争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長寿たちは太祖の前に出てひざまずいて地に額をぶつかって罪を祈った.

李成桂将軍は征伐途中にすんごうも民弊をかけないように多くの長寿たちに厳命を下げた. 改善途中に将軍は前週梧木台(梧木台)でしばらくとどまって前週李さん宗親たちを呼んで承前の宴会を施したりした.

がけんかを荒山大捷または雲峰精算前(雲峰鼎山戦)と呼んだが, 羅世と崔茂宣のジンポデチォブ(1380)と止まりの南海大勝(1383), そして崔ヨンの鴻山大捷(1383)と一緒に高麗 4台勝捷と言う. この中全北地方の 2大勝捷が荒山大捷とジンポデチォブだ.

 

 

 

 

荒山大捷で 7000人に達する倭寇たちが李成桂が 統率する 

高麗軍に 敗して 全滅した後 高麗で倭寇たちの侵略は減少するようになります. 

 

私が荒山大捷に対する知識を接してから 倭軍の 将帥 阿只抜都に対して

知りたい事を持つようになったがもし日本の歴史記録や 史書で

阿只抜都に対して情報を得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分かりたくて質問させていただ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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