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성 [金城山城]
전라남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8월 24일 사적 제353호로 변경되었다. 삼국시
대에 처음 축조하였으며 1409년(조선 태종 9)에 개축했다. 임진왜란 후 1610년(광해군 2)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하였으며 1622년에 내성 안에 대장청(大將廳)을 건립하
고 1653년(효종 4)에 성첩(城堞)을 중수하여 견고한 병영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603m)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호남
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담양읍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6㎞ 떨어져 있다. 외성은
6,486m, 내성은 859m에 이르며 돌로 쌓았다.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
량미 창고가 있었으며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
동 때 불타 없어졌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 터가 있는데 통로 이외에는 사방이 30여m
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통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금성산의 주봉인 철마봉을 비롯하여
일대의 산지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또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成安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
어 있으며 가운데는 분지여서 요새(要塞)로는 완벽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같은 지
리적인 특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 성안의 모든 시설이 불에 탔다. 내성 앞에는 별장(別將)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국문영(鞠文榮)의 비가 있다.
문루는 두 군데 남아 있다. 外남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 지붕을 얹은 누각이
다. 內남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얹은 중층 누각이다. 정상에 오르면 담
양읍을 비롯하여 금성산성으로 오르는 평야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앞에는 무등산과
추월산(秋月山)이 보이고 아래로는 담양호가 펼쳐져 있다.
충용문(忠勇門)
보국문(補國門)
金星酸性 [金城山城]
全羅南道記念物第52号に指定されてから 1991年 8月 24日史蹟第353号に変更された. 三国の時
台に初めて逐造したし 1409年(朝鮮太宗 9)に改築した. 壬辰の乱後 1610年(光海君 2)に
破壊された城郭を個数して耐性を構築したし 1622年に耐性の内に大状請(大将庁)をゴンリブハ
と 1653年(曉鐘 4)にソングチォブ(城〓)を修理して堅固な兵営基地で規模を取り揃えた.
潭陽郡錦城面と全羅北道淳昌郡の境界を成す金星山(603m)に位した金星酸性は湖南
の 3台酸性の中一つで数えられる. 潭陽邑では東北方へ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