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룡사 복원사업 내용
9층목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탑조와 〈찰주본기 〉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가 이간·용춘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 9층탑은 불력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 872, 1012, 1022, 1064년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장육존상을 안치한 금당이 조성되고 60여년이 지난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구층탑이 조성되었다. 이 구층탑의 창건 기연에 대해서도 ꡔ삼국유사ꡕ에 기록되어 있다. 자장 율사가 636년에 당에 유학하여 태화 연못 가를 지날때 신인이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해 있으며 그리고 고구려 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라”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에서 법을 수호하는 용은 곧 나의 큰 아들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고 했다.
자장은 634년에 당태종이 준 경전과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했다. 왕은 백제의 목수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도목수로 삼고,4)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으로 하여금 공사 감독관으로 삼아, 작은 목수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된 것이다. 자장의 발원으로 이 탑이 건립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층탑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고승들이 양나라 수나라 당나라에 계속 유학하여 중국 문물을 수입했으며, 이들은 정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구층탑은 자장의 발원 이전에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지을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속에 황룡사 구층 목탑은 643년에 짓기 시작하여 646년에 완성되었다.
구층 목탑의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인데, 여기에 높이가 183척, 상륜부가 42척, 합해서 225척(80 미터, 요즘 약 20-30층 되는 건물 높이)이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다. 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00알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금강 계단과 태화사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탑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일곱칸의 사각 평면식이었다. 이것을 세운 것은 신라의 자존심, 즉 외적의 시달림을 막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제압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 탑이 9층이며, 각 층마다 이웃나라를 제압하는 의미가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북 중국), 3층은 오월(남 중국), 4층은 탁라(가야 지방),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여진족),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누르는 것이었다.
이 탑은 높이 때문에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았고, 또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증수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 내의 찰주본기(刹柱本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 때에 한번 더 고쳐서 6차례에 걸친 수리를 했다. 685년 동안 숭앙받아 오다가 1238년 고려 고종 25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그 모습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황룡사의 가람 변천에 관한 고찰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 가람은 진흥왕 14년 (서기 553)에 창건된 가람에서 고려 고종 25년(서기 1238)에 전쟁으로 불타 없어질 때의 가람에 이르기까지 사이에 크게 세번의 변화를 겪었다.
현재는 다른 곳에 82m의 모형만 복원되어 있고,예산도 만만치 않게 많이 필요할 뿐더러,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어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와 비슷한 곳은 전주 익산의 미륵사가 있는데,백제에 의해 지어졌으며, 미륵사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최하단의 그림은 미륵사의 복원모형이다.
<황룡사—현재 아파트(일본에서는 맨션) 30층의 높이에 해당하는 황룡사9층목탑이 있었으며,황룡사의 거대한 불상과 함께 신라의 3개의 보물이라고 여겨졌다.>
<미륵사-전주 익산에 돌탑의 하나와 함께 터가 남아있으며,당시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백제에 의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