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있는 절이다. 법주사의 개조로 알려진 의신이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인도)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경전을 얻어 귀국하여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신라 진흥왕 14)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절이라 하여 법주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미륵신앙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은, 혜공왕 때 이 절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진표와 그의 제자 영심에 의하여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덕왕 때 중수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석물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경내에는 유명한 법주사팔상전(국가보물 55)을 비롯하여 쌍사자석등(국가보물 5), 석련지(국가보물 64), 사천왕석등(보물 15), 마애여래의상(보물 216) 등의 국보와 보물을 비롯하여 법주사세존사리탑(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 법주사사천왕문(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 순조대왕태실(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호)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 대웅보전·조사각·일주문·홍전문·대종각·능인전·석조·수정암·중사자암 및 여러 대사의 비, 암지 등 많은 유물이 있다. 또 조선 후기까지 35칸에 2층으로 된 이 사찰의 중심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었고, 이 전각 안에 금색의 육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1872년 당백전 주조 명목으로 대원군에 의해 육장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도 헐리게 되었다. 1989년 사월 초파일에 옛 용화보전 자리에는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이 점안되어 법주사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법주사는 진표·영심 이후 도생·자정·신미·수미·일선·각성·희언 등 고승들이 그 법통을 이어 왔다.
1966년 6월 24일 사적 및 명승 제4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으로 지정되었으나 2009년 12월 21일 지정해제됨과 동시에 사적 제503호 보은 법주사와 명승 제61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으로 다시 지정되었다.
忠清北道報恩郡 俗吏山面 俗離山にあるお寺だ. 法住寺の改造で知られたウィシンがかつて不法を求めに天竺(引導)で渡ってその所で経典を得て帰国してろばに積んで俗離山に入って行って 553年(新羅真興王 14) このお寺を創建したが, 法が安住することができる脱俗の漬けなさいと言って法住寺という名称が付けられたと言う. しかし法住寺の精神的支えになった弥勒信仰や 法相宗の 有識思想は, 恵恭王 時このお寺の中興に大きく寄与した濃い表と彼の弟子ヤングシムによって発現されたものと言える. 成徳王 時修理したが, 今残っている石物は皆この時作られたものと言う. その後何回も修理して現存する木造建物は皆朝鮮後期の物だ.
境内には有名な 法住寺捌相殿(国家宝物 55)を含めて 双獅子石燈(国家宝物 5), 石蓮池(国家宝物 64), 四天王石等(宝物 15), 磨崖如来衣装(宝物 216) などの国宝と宝物を含めて 法住寺世尊舍利塔(忠清北道有形文化財第16号), 法酒師事天王門(忠清北道有形文化財第46号), スンゾデワングテシル(忠清北道有形文化財第11号) などの地方文化財がある.
が外に大雄宝殿・照射角・一周門・洪専門・大宗閣・ヌングインゾン・石造・修正癌・中佐者癌及び多くのせりふの雨, 巌地など多い遺物がある. また朝鮮後期まで 35間に 2階になったこの査察の中心法堂である縁化保全があったし, この全角中に金色の肉醤上があった. しかし 1872年 当百銭 鋳造名目で 隊員軍によって肉醤上は押収されて縁化保全も取り払われるようになった. 1989年 四月陰暦8日に昔の縁化保全席には高さ 33mの青銅彌腕仏が点眼されて法住寺の新しい象徴物になった. 法住寺は濃い表・ヤングシム以後倒生・夜の十二時・辛未・首尾・一線・覚醒・フィオンなど上人たちがその法統を続いて来た.
1966年 6月 24日 史蹟及び名勝第4号 俗離山法住寺一円に指定されたが 2009年 12月 21日指定解除されることと同時に史蹟第503号恩返し法住寺と 名勝第61号 俗離山法住寺一円にまた指定され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