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단지 아름다운 성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화성.
그러나 2년 9개월만의 공사 끝에 지어진 수원 화성은 당시 최고 지식인과 장인들의 치밀한 연구와 계획에 의해 설계된 최고의 철옹성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평산성의 형태, 그리고 공심돈을 비롯한 포루 등의 첨단 방어시설로 구성된 동양 성곽의 백미를 수원 화성에서 만나본다.
화성은 화포시대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진 성곽이다!
서양 근대전쟁의 혁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화포의 등장! 수원 화성은 화포의 발달로 달라진 성축조술의 최첨단 성과를 반영해 만들어진 전투요새의 결정체였다!
벽돌과 돌의 교축, 자연형세 그대로를 이용해 만든 화성은, 과연 화포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화포의 공격에 대비해 견고하게 만들어진 수원 화성만의 축성법을 알아본다.
한양 사수의 보루! 화성은 과연 적들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까?
단 한차례의 전쟁도 치른 경험이 없는 화성. 만약 화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그 양상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200년전, 화성에서의 가상전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이번주 역사스페셜, 수원 화성의 건축기술을 통해, 고대로부터 발달해온 우리나라의 성건축술과 무기 및 군사체계에 따라 변화해온 성제의 독창성을 조명해 본다.
1. 세부내용
1) 조선시대 성곽의 꽃, 수원 화성
팔달산아래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수원 화성. 화성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 곳에 신도시를 계획하면서 만들어졌다.
화성의 내부는 원래 수원의 중심가로 관청은 물론 시장과 사람들의 생활터가 함께 있던 곳.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 현대적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화성은, 현재 성 내부는 거의 없어진 것에 반해 성곽 주변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2) 화성은 화포시대의 전쟁에 대비한 성곽이었다.
5km에 달하는 화성의 크기에 비해 성곽의 높이는 최고 5m를 넘지 않는다. 전투시 방어에 불리할 정도로 낮은 성곽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창이나 활이 주요 무기였던 과거 전쟁시엔 높은 곳에서 공격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다.
이후 화포의 등장으로 전쟁의 상황은 달라지게 되는데, 만일 성 아래쪽에 포를 맞을 경우엔 성이 한방에 무너질 위험이 있었던 것! 때문에 성벽은 차츰 낮아지고 두터워 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수원 화성의 성벽이 낮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화성이 화포에 대응한 성임을 보여주는 또 있다. 성벽 축조시 각 크기가 다른 석재를 지그재그로 끼워놓은 것. 그 중 하나가 공격을 받아 부서지더라도 앞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또한 화성의 정문이나 건물의 각 요소에 맞게 석재와 벽돌을 적절히 사용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건축 기술이 동원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3) 화성의 전투력 점검- 화력①「공심돈과 포루」
화성 곳곳에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시설이 바로, 공심돈. 동북 공심돈은 벽돌로 원통형으로 쌓아진 건물인데 벽에는 수십개의 총구와 포구가 나있다.
각 총구과 포구에 무기를 설치할 경우, 공심돈은 한꺼번에 화력을 뿜어 낼 수 있는 화성 최고의 전투요새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서북 공심돈은 성벽보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정면은 물론 측면을 방어할 수 있도록 돼있다.
포를 쏘기 위한 포루 역시 마찬가지로 속을 비워서 앞으로 돌출시켜 놓았다. 건물 아래까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에 유리하다. 화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이 같은 방어시설들은 그 위치와 필요에 따라 응용한 결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방어·공격라인을 형성한 독창적인 창작품인 것이다.
4) 화성의 전투력 점검- ② 입체성곽
화성의 4개 성문에는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옹성은 정문을 바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시설이다. 옹성안으로 들어온 적은 갖힌 형상이 되어 이들을 공격하는데 훨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게 되는 셈.
성문에는 “적대”라는 방어시설이 더 마련되어 있는데, 적이 옹성을 정면 격파하지 않고 측면으로 공격하려 들 때, 앞으로 튀어나온 적대에서 공격하면 효과적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다.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하는 이같은 방어라인은 성곽곳곳에서 발견된다. 경사가 완만한 평지 직선 성벽에 치성이라고 불리는 돌출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적들이 성벽을 공격해올 때를 대비해 치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같이 화성의 구조물 하나하나가 방어할 수 있는 공간을 확인해보면 화성을 완전히 한 겹 둘러싸는 수비라인이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수원 화성은 이렇게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최고의 철옹성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
5) 수원 화성은 전력적 요충지에 위치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화성의 수비를 담당한 군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화성에는 조선군 최고의 정예부대인 장용영의 군사들이 수비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다시 수도방어를 위한 내영과, 화성방어를 위한 외영 나누었는데, 당시 외영만 해도 3천이 넘는 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급시엔 약 1만3천명의 전력이 수원을 중 심으로 모이도록 해놓았다.
이렇게 조선의 병력을 수원을 중심으로 배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방위의 새로운 대안으로 내세운 지역은, 바로 수원이었다.
수원은 한반도의 목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남북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물론, 방어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수원은 바닷가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막기 에도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200년전 정조가 이곳에 전투시설을 갖춘 성을 만든 것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화성의 입지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