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광개토왕비문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 야마토이신 묘년, 래항해파, 백잔□□라이위신민. 이


日本の古代史 - 来渡海破

廣開土王碑文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이를) 깨뜨리니,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6년 丙申년에 호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來渡海破 부분은 변조설로 말도 많고 說도 많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碑文 몇자 변조했다고 해서 흐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碑文에 나와 있는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본서기의 연대를  바로잡아 보기로 한다.

 

왜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다음을 읽어 보세요.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来渡海破 部分は変造説で言葉も多い 説も多い.

巨大な歴史の水かさが 碑文 何文字変造で流れが変わることではない.
今日は 碑文に出るある 王躬率水軍, 討伐残国が何を意味することか調べるために日本書紀の年代を直して見る事にする.

 

どうしてこんなにつまらない事をするあるのかに対する疑問を持つ人は次を読んで見てください.

これからの話展開を暗示してくれます.

 

吉備의 割譲
http://blog.naver.com/marich77/40111373765

 

 

垂仁紀3年3月条
 新羅の王子・天日槍(あめのひほこ)が来朝した。(宝物を持ってきたが朝貢ではない。)
   신라의 왕자 천일창이 입궐했다.


垂仁紀88年7月条
 昔、新羅の王子・天日槍が来朝時持参した宝が、今、但馬(たじま)にあるという。天皇は「この宝を見たい。」とおっしゃられた。
   옛날, 신라의 왕자・천일창이 일본에 오면서 지참한 보물이, 지금, 但馬에 있다고 한다.천황은「이 보물을 보고 싶다.」라고 말씀하였다.


仲哀紀8年9月条
 天皇が熊襲(くまそ)征伐を計画されると、神が皇后にのりうつって「熊襲を討つな、新羅を討て。」との啓示があった。
   천황이 熊襲정벌이 계획되면, 神이 황후에 올라 옮겨「熊襲를 토벌하지 말아라, 신라를 토벌해라.」라는 계시가 있었다.


神功:在位     201年 - 269年6月3日(4月17日)
神功皇后摂政前紀
 神功(じんぐう)皇后は、軍船を率いて新羅に進んだ。新羅王は降伏し、(王子の)微叱己知波珍干岐(みしこちはとりかんき)を人質に差し出した。それを聞いて高麗(こま=高句麗)と百済(くだら)も服従した。神功皇后は三韓(新羅、百済、高句麗)を従属させ、新羅からお戻りになった。
징구황후는, 군선을 인솔하고 신라로 나아갔다.신라왕은 항복해, (왕자의) 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보냈다.그것을 들은 고려와 백제도 복종했다.진구고고는 삼한(신라, 쿠타라, 고구려)을 종속시켜, 신라로부터 돌아오셨다.

神功皇后摂政紀52年9月条
 百済の使者が来朝し、七枝刀(ななつさやのたち=奈良県天理市の石上神宮に今につたわる七支刀)をはじめ、数々の宝を献上した。
최근 고려대연구원인 홍성화의 연구에 따르면 NHK의 X-레이 촬영으로 칠지도의 명문의 연(年)과 월(月) 사이에 十자가 검출됨에 따라 제작일을 11월16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1월16일이 병오(丙午)의 일간지(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면 369년이 아니라 408년이 되어 칠지도는 백제의 전지왕(腆支王)4년 11월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명문(銘文)의 "泰□四年"은 전지왕4년으로 추정되어 백제가 연호를 썼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명문(銘文)의 "侯王"은 백제에 신속하고 있던 후왕(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인 구이신(久爾辛)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에 의해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에 근거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最近 高麗大研究員の Hong  Sung Hwaの研究によれば NHKの X-レイ撮影で七支刀の銘文 の年と月 の間に 十字が検出されるによって製作日を を 11月16日に見られるようになった. したがって 11月16日が丙午の日干支を持った年度を算出すれば 369年ではない 408年になる七支刀は百済の腆支王(直支王)4年 11月16日に作られたのが分かって銘文の "泰□四年"は腆支王(直支王)4年に推定される百済が年号を使った事実を確認することはできる. また銘文の "侯王"は百済に臣屬だあった侯王という意味に解釈される百済王世子である久爾辛が珍しく生まれたことをきっかけで倭王に下賜された刀で見られるようになった. この研究によってその間七支刀を 『日本書紀』 神功紀に根拠して 369年百済で製作される 372年百済が日本に献上したという説は根拠を失うようになった.


神功皇后摂政紀55年条
 百済の国内記事(百済の肖古王〈しょうこおう〉がお亡くなりになる。)
초고왕(肖古王, ? ~214년, 재위 : 166년~214년)은 백제의 제5대 왕
肖古王, (? ~214年, 在位 : 166年~214年)は百済の第5代王


神功皇后摂政紀56年条
 百済の国内記事(百済の王子・貴須〈くいす〉が王となる)

   백제의 국내 기사(백제의 왕자・貴須가 왕이 된다)
구수왕(仇首王, ? ~234년, 재위 : 214년~234년)은 백제의 제6대 왕이다. 귀수왕(貴須王)
仇首王, (? ~234年, 在位 : 214年~234年)は百済の第6代王だ. 貴須王


神功皇后摂政紀64年条
 百済の国内記事(百済の貴須王〈くいすおう〉がお亡くなりになり、王子の枕流王〈とむるおう〉が即位した。)

   백제의 국내 기사(백제의 귀수왕이 죽으셔, 왕자의 침류왕이 즉위 했다.)
침류왕(枕流王, ? ~385년, 재위 384년~385년)은 백제의 제15대 왕
枕流王, (? ~385年, 在位 384年~385年)は百済の第15代王


神功皇后摂政紀65年条
 百済の国内記事(百済の枕流王がお亡くなりになり、叔父の辰斯〈しんし〉が王となる。)
   백제의 국내 기사(백제의 침류왕이 죽으셔, 숙부인 진사가 왕이 된다.)

진사왕(辰斯王, ?~392년, 재위 385년~392년)은 백제의 제16대 왕

辰斯王 (?~392年, 在位 385年~392年)は百済の第16代王


応神:在位     270年2月8日 - 310年3月31日 (390~430)
応神紀3年是歳条
 百済の辰斯王(しんしおう)は日本の天皇に対して無礼があった。使いを遣って王を交代させ阿花王(あくえおう)を立てた。

   백제의 진사왕은 일본의 천황에 대해서 무례가 있었다.사신을 보내 왕을 교대시켜 阿花王을 세웠다.
진사왕(辰斯王, ?~392년, 재위 385년~392년)은 백제의 제16대 왕
辰斯王 (?~392年, 在位 385年~392年)は百済の第16代王


応神紀8年3月条
 百済人が来朝した。
 百済記によると(百済の阿花王は、日本に対して無礼があったので日本に領地を奪われた。百済は王子・直支〈とき〉を人質として遣わし、友好を戻した。)

   백제인이 입궐했다.

   백제기에 의하면(백제의 阿花王은, 일본에 대해서 무례가 있었으므로 일본에 영지를 빼앗겼다.백제는 왕자・直支를 인질로 보내, 우호를 되돌렸다.)
아신왕(阿莘王, ?~405년, 재위 392년~405년)은 백제의 제17대 왕이다. 침류왕(枕流王)의 맏아들로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華王)이라고도 부른다.
阿莘王 (?~405年, 在位 392年~405年)は百済の第17代王だ. 枕流王の長男で阿芳王 または阿華王とも呼ぶ.


応神紀14年是歳条
 秦(はた)氏の祖先といわれる弓月君(ゆつきのきみ)が来朝して言うには、「百済から多くの人民を連れてきたが、新羅の妨害にあって加羅国から日本に来ることが出来ない。」と言う。弓月(ゆつき)の人民を連れて来るために、葛城(かづらき)襲津彦(そつびこ)を加羅に派遣したが戻ってこない。
   진(하타) 씨의 조상이라고 하는 궁월군이 입궐하여 말하기를 , 「백제로부터 많은 인민을 데려 왔지만, 신라의 방해에 있어 가야국으로부터 일본에 올 수 없다.」라고 한다.궁월의 인민을 데려 오기 위해서, 葛城과 襲津彦을 가야에 파견했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応神紀15年8月条
 百済王は、阿直伎(あちき)という者を使者として良馬2匹を献上した。阿直伎は学問に優れていたが、王仁(わに)という者の方がもっと上であるという。

   백제왕은, 아직기라고 하는 사람을 사자로서 준마 2마리를 헌상 했다.아직기는 학문이 뛰어났지만, 왕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더 위이다고 한다.
아직기(阿直岐, 아치키)는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건너간 학자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 ~375년, 재위 346년~375년)은 백제의 제13대 왕
阿直岐は百済近肖古王の時日本に渡った学者だ.
近肖古王 (? ~375年, 在位 346年~375年)は百済の第13大王


応神紀16年2月条
 百済から王仁(わに)が来朝した。皇太子・菟道稚郎子(うぢのわきいらつこ)の教師とした。

   백제로부터 왕인이 입궐했다.황태자・菟道稚郎子의 교사로 했다.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近仇首王 (?∼384년. 백제 제14대왕. 재위 375∼384년.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다.

百済近仇首王の時の学者に考えられる

近仇首王 (?~384年. 百済第14大王. 在位 375~384年. 近肖古王の長男だ.

百濟國 若有賢人者貢上 故 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即論語十卷 千字文一卷 并十一卷付是人即貢進

応神紀16年是歳条
 百済の阿花王がお亡くなりになった。天皇は人質の百済王子・直支(とき)を呼び「国へ帰って王位につけ。」とおっしゃられての東韓(とうかん)の地を与えた。

   백제의 아신왕이 죽으셨다.천황은 인질의 백제 왕자・직지를 불러「나라로 돌아가 왕위에 올라.」라고 말씀하셔 동한의 땅을 주었다.
아신왕(阿莘王, ?~405년, 재위 392년~405년)은 백제의 제17대 왕이다. 침류왕(枕流王)의 맏아들로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華王)이라고도 부른다.

阿莘王 (?~405年, 在位 392年~405年)は百済の第17代王だ. 枕流王の長男で阿芳王または阿華王とも呼ぶ.

応神紀16年8月条
 天皇は、「襲津彦(そつびこ)が帰ってこないのは、新羅が妨害しているからである。」として、新たに将軍を加羅に派遣した。将軍は新羅との国境まで進軍して新羅を防ぎ、弓月が連れてきた百済の人民を連れ、襲津彦と共に日本に戻った。
    천황은, 「襲津彦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신라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하고, 새롭게 장군을 가야에 파견했다.장군은 신라와의 국경까지 진군 하고 신라를 막아, 궁월이 데려 온 백제의 인민을 따라 襲津彦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応神紀25年条
 百済の直支王(ときおう)がお亡くなりになった。子の久爾辛(くにしん)が王となったが、まだ若いので木満致(もくまんち)が国政を執った。木満致は不祥事があったので天皇は呼びつけた。
 百済記によると(木満致の父が新羅討伐に功があったので、任那で取り立てられていた。その後、百済に来てから、日本と関係を深かったので政治に携わるようになった。)

   백제의 전지왕이 죽으셨다.아들 구이신이 왕이 되었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목만치가 국정을 맡았다.목만치는 불상사가 있었으므로 천황은 불러냈다.
 백제기에 의하면(목만치의 아버지가 신라 토벌에 공이 있었으므로, 임라에서 내세울 수 있고 있었다.그 후, 백제에 오고 나서, 일본과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정치에 종사하게 되었다.)
전지왕(腆支王. ? ~ 420년, 재위: 405년 ~ 420년)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이름은 여영(餘映) 또는 영(映).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腆支王(? ~ 420年, 在位: 405年 ~ 420年)は百済の第18代王だ. 名前は餘映または映. 《日本書紀》では直支王, 《三国有史》王暦では真支王, また 《翰苑》に引用される 《宋書》, 《通典》では 夫餘腆などと呼ばれたりする.


応神紀39年2月条
 (応神紀25年条と矛盾するが)百済の直支王(ときおう)は妹を遣って天皇に仕えさせた。
   (응신기 25년조와 모순되지만) 백제의 腆支王은 여동생을 시켜 천황을 시중들게 했다.


仁徳:在位     313年2月14日 - 399年2月7日
履中:在位     400年3月12日 - 405年4月29日
反正:在位     406年2月3日 - 410年2月12日
允恭:在位     412年12月 - 453年1月14日
安康:在位     454年1月28日 - 456年9月24日

 

이상 五王의 통치 기간에 백제의 기록이 사라졌다.
倭五王의 시대에 포함되어 있다.

以上 五王の統治期間に百済の記録が消えた.
倭五王の時代に含まれるあ

표기된 연대는 일본 wiki를 참고했다.
表記した年代は日本 wikiを参考した.る.

 

일본 고대사 - 길비의 난
日本古代史 -吉備の乱
http://blog.naver.com/marich77/40111373875


雄略:在位     456年12月25日 - 479年9月8日
雄略紀2年7月条  
 天皇は、日本に来ていた百済の池津媛(いけつひめ)を召し上げようとしたが、従わないので焼き殺した。
 百済新撰(百済の史書)によると(百済の蓋鹵王〈こうろおう〉が即位すると、日本の天皇が女人を求めてきたので、身分のある女〈むすめ〉を献上した。)

   천황은, 일본에 와있던 백제의 지진원을 몰수하려고 했지만, 따르지 않기 때문에 구워 죽였다.
 百済新撰에 의하면(백제의 개로왕이 즉위 하면, 일본의 천황이 여인을 요구했기 때문에, 신분이 있는 여자를 헌상 했다.)
개로왕(蓋鹵王, ? ~475년, 재위: 455년~475년)은 백제의 제21대 왕
蓋鹵王 (? ~475年, 在位: 455年~475年)は百済の第21代王


雄略紀5年4月条
 百済王は池津媛が焼き殺されたことを聞き、「今後は女人を献上しない。」と言って、弟の軍君(こにきし)を日本に遣わして天皇に仕えさせた。
 百済新撰(百済の史書)によると(百済王は、弟の昆支君〈こにききし〉を大倭〈やまと〉へ遣って、天皇に仕えさせ好意を表した。)

   백제왕은 지진원이 구워 살해당한 것을 듣고, 「향후는 여인을 헌상 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남동생의 軍君을 일본에 보내 천황을 시중들게 했다.
 百済新撰에 의하면(백제왕은, 남동생의 昆支君을 大倭에 보내고, 천황을 시중들게 하는 호의를 나타냈다.)
문주왕(文周王, ? ~477년, 재위: 475년~477년)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문주(汶洲)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유랴쿠기(雄略紀)에는 개로왕의 모제(母弟, 동생)로 기록되어 있다. 즉위 전에, 부왕(父王) 개로왕을 도와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文周王 (? ~477年, 在位: 475年~477年)は百済の第22代王だ. 汶洲とも言って蓋鹵王の息子だ. 日本書紀 雄略紀には蓋鹵王の(母弟,(妹))に記録されるある. 即位の前に, 父王 蓋鹵王を手伝って上佐平を執り行なった.

雄略紀20年冬条
 高麗王は大軍をもって百済を滅ぼした。すこしの百済軍が残ったが、高麗王は「百済の国は日本(やまと)の国に仕えている。」と言ってそれ以上攻めなかった。
 百済記(百済の史書)によると(狛〈こま=高句麗〉の大軍が王城を攻めた。百済軍は敗れ王都を失い、王と王子たちは殺された。)

   고구려왕은 대군을 가지고 백제를 멸했다.조금의 백제군이 남았지만, 고구려왕은「백제의 나라는 일본의 나라를 시중들고 있다.」라고 해 그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百済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대군이 왕성을 공격했다.백제군은 져 왕도를 잃어, 왕과 왕자들은 살해당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혀 아차산성 근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475年高句麗 長壽王の攻撃で高句麗軍事たちにつかまる阿嵯山城近く再曾桀婁と古爾萬年という人に殺された.


雄略紀23年4月条
 百済の文斤王(もんこんおう)がお亡くなりになった。天皇は百済王族の末多王(またおう)を可愛がっていたが、500人の兵に護らせて故国に帰らせた。東城王(とうせいおう)である。

   백제의 문근왕이 죽으셨다.천황은 백제 왕족의 말다왕을 귀여워하고 있었지만, 500명의 군사에게 지키게 하고 고국에 돌려 보냈다.동성왕이다.
동성왕(東城王, ? ~501년, 재위: 479년~501년)은 백제의 제 24대 왕
東城王 (? ~501年, 在位: 479年~501年)は百済の第 24代王

 

  • 『百済記』…神功紀から応神紀にかけてと、雄略紀に引用されている。百済の王で言うと、肖古王から蓋鹵王までの九代(三四六~四七五)。
  • 『百済新撰』…雄略紀と武烈紀に引用されている。百済王では、蓋鹵王から武寧王まで五代(四五五~五二三)。
  • 『百済本記』…継体紀、欽明紀に引用。百済王なら、武寧王から威徳王までの三代(五〇一~五五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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