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일본의 구석기 유물과 고려청자 날조에 관한 기사모음
 

  일본인들은 무엇이 그렇게 조급하여 있지도 않은 구석기 유물을 날조하고 지금 까지 밝혀지지 않은 고려청자 유약의 비밀을 밝혀냈다고 세계를 돌며 사기를 치고 다니는지 알수가 없다.가만 있으면 누가 뭐라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일본인 들은 역사 날조와 조작에 그토록 혈안일까?고대사를 비롯해 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일본을 미화하지 못해 안달이다. 지금도 잘살건만 무엇이 부족하여 과거를 그렇게도 미화하려 든단 말인가? 무릇 인간은 생긴대로 살고 생긴대로 놀아야 한다. 허위로 과거를 화려하게 치장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200년 조금 넘은 미국은 과거 역사가 화려해서 그리 잘사는건가?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일본인 들이여 제발 생긴대로 놀아라 억지로 이쁜 얼굴하려 하지 말고 . 그러니까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남의 것을 빼앗을 생각도 말고 착하게 살아라. 그리고 잘못을 했을 때는 뉘우치고 사과를 해야 하는거다. 너희들의 몸부림은 다 그걸 못해서 일어나는 몸짓이니라.

  작년 2000년11월5일 처음 보도된 구석기 유적 날조사건 이후의 정황에 관한 한국일보 기사들을 모아 보았다. 교과서 왜곡과 비슷한 시기에 펼쳐지고 있는 고대사 날조의 작태를 계속해서 지겨 보기로 하자.
          *2001년9월30일밤 한가위를 맞으며 <운영자>


日 70만년전 구석기는 날조(
the Palaeolithi  fabrication )

발굴전 석기묻는 장면 탄로… 조사단장 “자기 소행” 실토

일본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의 연대를 70만년전으로 끌어 올려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발굴 성과가 공명심에 눈이 먼 고고학자의 날조극으로 밝혀졌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5일 미야기(宮城)현 쓰키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 현장에서 발굴 조사단장인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ㆍ50)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몰래 석기를 땅에 묻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했다.

10월27일 70만년전의 석기가 발굴됐다고 대서특필되기 5일전인 10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그는 마이니치신문의 취재에 대해 “마(魔)가 끼었다”며 이 유적에서 올해 발견된 6개 유구(遺構)와 유물 31점 중 27점을 모두 날조했다고 시인했다. 또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에서 올해 발굴된 석기 29점 모두가 자신의 석기 수집품을 묻은 것이었다고 실토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1992년 8월 목초지 개간을 위해 파헤친 가미타카모리의 구릉에서 석기를 발견한 이래 1993년부터 이곳에서 40만년전, 50만년전, 60만년전의 석기를 잇달아 발굴, 일본 최고(最古) 석기 기록을 연례행사처럼 경신해 왔다.

일본 고고학회는 이 성과는 물론 그동안 그가 관여한 140개소의 유적 발굴에 대한 재평가를 서두르고 있다. 또 그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2월 사이타마(埼玉)현 치치부(秩父)시 오가사카(小鹿坂) 유적에서 발굴된 40~50만년전의 세계 최고급 유구 등 전기구석기시대 유물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고교 졸업후 독학으로 고고학에 투신했다. 1972년부터 발굴 작업에 참가,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최고(最古)인 4만 수천년전의 석기를 발굴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동안의 발굴에서 그가 파 보라는 곳을 파면 늘 유물이 나와 `석기의 신” `신의 손”으로 불렸다.

그의 자작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석기의 연대 측정법이 아직 애매한 데다 석기의 형식보다는 발굴된 지층의 연대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일본 고고학계의 해묵은 관행 때문이었다.

일본사의 연대를 위로 끌어 올리려는 일본 고고사학계의 퐁토도 일조했다. 일본에 12만년전 이전의 전기 구석기시대 문화가 있었느냐에 대한 오랜 논쟁이 매듭된 것도 자자라기 유적에서 그가 발굴한 석기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고교 역사 교과서에 실리고 대학입시에 출제되기까지 한 일본의 전기 구석기시대 문화 전체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05 19:55

日문부성, 구석기 발굴 전면 재조사

일본 문부성은 5일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부이사장이 석기를 파묻었다가 발굴 성과를 날조한 문제와 관련해 정밀 조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문부상은 이날 “후지무라씨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정밀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면서 “문화청과 상의해 그가 말한 2개소 이외에도 조사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교과서와의 관점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 교과서의 기술을수정해야 된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금년 10월에 발굴한 미야기(宮城)현의가미다카모리(上高森)유적과 9월 홋카이도(北海道)의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유적의 날조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한편 관련학계 등은 이번 날조사건으로 고고학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뒤집혔다고 지적하고 일본내에 10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의 발굴작업 대부분을 그가 관여해왔기 때문에 발견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 대해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밝혔다.

(도쿄= 연합뉴스) 문영식특파원

입력시간 2000/11/06 10:53

고고학자에 놀아난 日역사

구석기발굴 날조 “기원 다시 써야”

일본 문부성은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부이사장이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날조한 2개소의 유적은 물론 다른 구석기 시대 유적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재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문부성 장관은 5일 “후지무라씨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를 여러 가지로 조사할 것”이라며 “문화청과 상의해 그가 날조한 2개소 이외의 유적도 대상에 넣고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교과서와의 관계도 연구해야 한다”고 밝혀 교과서 기술의 수정 가능성도 시사했다.

문화청 관계자는 후지무라씨가 날조를 실토한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과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의 신뢰성을 현지 연구소·대학과 함께 재확인하고 문화청이 관계한 다른 유적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2개소의 유적 이외에는 날조하지 않았다는 후지무라씨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가 관여한 약 140개 유적을 모두 재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사이타마(埼玉)현은 6일 지치부(秩父)시의 오가사카(小鹿坂) 유적과 나가오네(長尾根) 유적의 발굴에 대한 정밀 재조사를 선언했다. 오가사카에서는 2월 세계 최고(最古)급인 약 50만년 전의 원인(原人) 생활 유구가, 나가오네에서는 7월 세계에 예가 없는 원인의 묘혈(墓穴) 유구가 발견됐다고 발표된 바 있다.

또 이번 사건이 일본 선사 고고학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는 점에서 일본 고고학회는 구석기 시대 유적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다짐하고 있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06 17:50

”日 석기문화 전면 재검토해야”

일본 구석기유적 날조 국내반응

“고고학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이제 일본 구석기 역사는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5일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의해 폭로된 일본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 날조 사건(본보 6일자 35면 보도)을 바라보는 국내 고고학계의 반응은 격앙된 분위기 그 자체이다. 국내 학자들은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현장에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ㆍ50)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자신이 소장중인 석기를 땅에 묻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국내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충북대 이융조(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후지무라 단장이 땅을 파서 유물을 묻었다면 그 지층은 다른 곳보다 부드럽기 마련인데 이를 발굴대원 중 어느 누구도 몰랐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이는 우익적 성향이 강한 일본 학계가 후지무라 단장의 권위를 맹신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일본 사학계는 과거 일본 구석기 유적 연대가 매번 한국보다 늦는 것에 대해 커다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선문대 이형구(사학과) 교수는 “그동안 일본이 구석기시대 출발 시기를 자꾸 끌어올리는 바람에 동북아시아 고고학이 뒤죽박죽이 됐었다”며 “이제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1만 2,000년 전에 시작됐다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도 다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유적과 유물의 연대측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도 많다. 특히 일본 고고학계의 경우 석기의 형식이나 출토 당시 배열상태보다는 발굴된 지층의 연대를 최우선으로 삼는 고질적인 관행부터 고쳐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가장 과학적인 연대측정장치로 인정받고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기의 `오차 가능성”을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단국대 손보기 석좌교수는 “1998년 미야기현 발굴현장을 방문했을 때, 출토 당시 석기유물이 마치 요즘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다소 의심이 갔었다”며 “방사성 탄소연대측정기도 사람 입김이나 토양의 불순물이 섞일 경우 오차가 나올 수 있으므로 이것이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명기자 kimkwmy@ hk.co.kr

입력시간 2000/11/06 18:13

[사설] 일본의 고대사 날조 파문

일본의 한 고고학자가 일본의 구석기시대를 조작하려 한 사건은 일본 교과서의 침략사 왜곡 못지 않게 새삼 일본인의 역사관을 되짚어 보게 한다.

발굴단장이라는 사람이 유물의 연대를 70만년전으로 끌어 올리려고 자신이 소장한 석기 수집품을 발굴현장에 묻었다니 이것은 역사 왜곡 차원이 아니라 숫제 날조다. 일본인의 역사관에 먹칠을 한 이 사건은 어쩌면 일본 고대사 전반에 걸쳐 대내외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5일자 보도에서 일본에 전기 구석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적으로 알려진 미야기(宮城) 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유적이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50) 발굴단장이 조작한 가짜 유적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후지무라 단장이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날조했다고 자백했는데, 그의 “업적”은 98년부터 고교 역사교과서에 실려 널리 가르쳐 왔다고 한다.

일본은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국 중국 등 이웃국가들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20세기 전반기 한국 중국 등을 침략해서 만행을 자행한 여러 명백한 역사적 사실 마저 왜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이 교과서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 거짓 사실을 가르쳐 결과적으로 미래의 국제우호까지 해칠 가능성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고고학자의 비학자적 양심이 초래한 날조사실 자체보다 그가 받은 “심리적 압박”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금 일본은 극우세력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평화헌법 개정, 자위대 활동 범위의 확대, 역사교과서 개악 등 여러 문제가 동시에 터져나오고 있다.

일본에 전기 구석기가 존재한다는 거짓사실도 일본열도와 일본인의 우월감을 강조하려는 이같은 분위기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경제선진국 일본의 위치는 대단하다. 반면에 그 위상에 따른 지도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군국주의 일본 부활의 우경화된 역사날조가 아니기를 바란다.

내일의 일본을 담당할 젊은 세대가 자국문화와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왜곡된 고고학 “업적”이 끼여들 틈이 없기를 바란다.

입력시간 2000/11/06 18:27

[기자의 눈] 先史의 날조...왜?

5일 오전 미야기(宮城) 현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60~70만년 전의 석기를 날조한(6일자 사회면) `배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미야기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에서 올해 발굴된 유물 65점 중 61점,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에서 출토된 29점 모두를 날조했다고 실토하면서도 더 이상의 날조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 고고학의 신뢰성을 뿌리채 흔든 그의 말이 곧이 믿길 리가 없다.

그가 관여한 발굴은 물론 모든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 작업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데 국민과 학계, 당국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언제나 같은 사람이 깨끗한 상태의 유물을 발견, 이상하게 여겼다”거나, “현장에서 복수의 연구자가 자세하게 검증했으면 충분히 진위를 가릴 수 있었다”는 등 학계의 뒤늦은 자탄은 “그럼 왜?”라는 의문만 부추긴다. 단서는 있다.

주류 학계는 뒤늦게 “일본에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연대 측정의 결정적인 방법이 없었다”며 “아시아 대륙에서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과 같은 연대의 석기군이 발견되지 않아 아예 언급을 피해 왔다”고 밝혔다. 아마추어 연구자 모임인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와 도호쿠대학이 손잡은 발굴 작업을 일부러 외면해 왔다는 얘기다.

주류 학계의 이같은 침묵은 일본의 구석기 시대를 60만년 전으로 끌어 올린 교과서의 기술로 보아 학계의 자존심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번 사건은 결국 일본 열도의 `사람 흔적”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리려는 집단적 강박 관념과 여론의 압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긴 눈앞의 현대사마저 “아시아 공생을 위한 선택”으로 덧칠되는 마당에 옛 원인(原人)의 발자취쯤이야 더 간단한 일이었던 지도 모른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a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06 18:36

[뉴스초점] 일본, 역사왜곡도 모자라 역사조작까지

2000년 11월5일, 일본 역사학계는 자신이 어떻게 역사를 조작했는지 생생히 보여줬다.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역사적 사실 자체를 조작하는, 범죄행위나 다름없는 `차원높은”사기술이었다.

역사날조의 현장은 일본의 구석기 문화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린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지.

일본 고고학 발굴단은 10월말 이 유적지에서 70만년 석기 31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일본에 전기 구석기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함으로써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석기는 본래 묻혀있던 게 아니라 발굴조사단장이 소장중이던 구석기 유물을 사전에 파묻었던 것임이 드러났다. 마이니치(每日) 신문은 5일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당시 조사단장이 발굴장소에 구덩이를 파고 은밀히 석기를 묻는 장면을 촬영해 폭로했다.

본인도 조작사실을 시인했다. 후지무라는 지금까지 잇단 석기발굴로 일본 구석기 연대를 끌어올리면서 일본 고고학계에서 `신의 손”으로 불려온 인물. 그는 “작년 이전의 발굴품은 조작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학계에서는 그가 발견한 상당수 유물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후지무라가 역사를 조작한 것은 일단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사의 연대를 위로 끌어 올리려는 일본 고고학계의 풍토와 천황중심의 역사관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천황중심 역사관과 연관된 일본의 사실조작 의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880년대 광개토대왕비 비문조작 및 천황가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칠지도 음각문 조작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침략주의와 만행을 부정하는 역사의 왜곡 해석을 넘어 사실을 조작하는 몰(沒)역사적 행태에 두려움마저 생긴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seapower@hk.co.kr

입력시간 2000/11/07 14:49

[한국시론] 日집단의식이 빚은 비극, 先史날조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3일부터 사흘간 일본 시마네(島根)대학에서 개최된 제 2회 한ㆍ일 인문ㆍ사회과학 학술교류 강연회는 한국측에서 27명, 일본측에서 45명의 연구자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그런데 둘째 날인 4일 회의에서는 심포지엄 내용보다는 모두들 일본 역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70만년 전의 가미타카모리(上高森)유적 발굴 사건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 유적 발굴의 성과를 토대로 중국의 북경원인과 버금가는 전기 구석기시대가 일본에 존재했으며 층위의 연대로 보아 일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유적이라는 일본의 자랑거리가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일본 도후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는 일본 선사문화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기관으로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일본에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불분명하던 1946년 군마(群馬)현에서 2만5,000년전의 석기가 발견되었을 때 사실 여부를 놓고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도후쿠연구소가 1981년 미야기(宮城)현 이와데야마마치에서 자자라기 유적을 발굴한 결과 4만∼5만년전 석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의문은 사라졌다.

이러한 발굴을 주도한 후지무라(藤村) 단장은 일본의 역사를 무려 70만년전까지 올려놓은 신화적 존재이다. 그는 제6차 가미타카모리 유적 설명회에서 일주일 전에 묻어 놓은 석기 31점을 찾아냈다고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영웅이자 일본인의 긍지를 올려놓은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19개의 고교 교과서 중 10개 교과서가 그의 발굴 결과를 실었고, 일본 사립의 명문 와세다대학에서는 입학시험에까지 출제했다.

고고학 발굴을 둘러싼 역사왜곡은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1908년 영국 서색스주 필트다운에서 발견된 사람의 턱뼈와 두개골을 두고 대영박물관이 그 연대가 5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원숭이와 현대인의 연결고리가 되는 발견이라고 흥분하면서 대영제국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부르짖은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 불소연대측정법에 의해 과학적으로 측정한 결과 두개골은 불과 600년전 인간의 것으로 밝혀졌다. 1953년 11월 대영박물관은 “필트다운인은 속임수였다”고 공식발표했다.

일본의 가미타카모리 석기유적 날조사건도 일본 역사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일본인의 집단의식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동안 일본에는 사실에 바탕하지 않은 역사 왜곡과 미화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일본이 4대문명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국민의 역사”라는 역사책은 70만부 이상이 팔렸다. 이 책의 서두는 바로 조작된 가미타카모리 유적으로 시작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일본 고고학 관계자들은 한국측 참석자들에게 5일에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으로 가는 계획을 잡아 놓았으니 차질없이 해달라고 수차례 전화를 걸어 당부했다. 물론 4일의 사건 공표 후로는 그들의 연락도 두절됐지만. 하는 수없이 서울대 노태돈 교수 등 우리 일행 5명은 시마네(島根)현 이즈미(出雲) 근처의 고진다니(荒神谷)유적을 방문했다.

이 곳은 358개의 청동검(靑銅劍)이 산 사면(斜面)에서 한꺼번에 나온 곳이다. 이제까지 일본 전국에서 나온 청동검이 300개이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한 번에 나온 곳인데도 현장을 보는 순간 우리 일행은 감탄하기 보다는 약속이나 한듯이 “저것도 혹시…”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고고학적 발굴, 역사 교과서, 한일 관계사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ㆍ일 관계를 원점부터 재정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학계도 구석기 연구의 추정 연대나 석기의 진위, 유적의 진위여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입력시간 2000/11/07 18:54

구석기유적 날조학자 日고고학회 제명처분

일본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구석기 유적 날조사건과 관련, 일본고고학협회(회장 아마카스 겐ㆍ甘粕健)는 12일 도쿄(東京)에서 긴급 위원회를 개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ㆍ50) 전 부이사장을 제명처분하고, 그가 관여한 유적을 전면 검증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키로 했다.

특별위는 날조가 드러난 가미타카모리 유적과 홋카이도(北海道)의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은 물론, 그가 관여했던 다른 유적에 대해서도 이미 검증작업에 들어간 문화청과 협력해 재조사할 방침이다.

아마카스 회장은 이날 회견에서 “연구자 간의 상호 비판 등을 통해 날조를 방지해야 하는데, 이같은 결과를 빚어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전ㆍ중기 구석기 시대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추진, 신뢰회복에 전력하겠다”고 표명했다.

협회는 앞으로 지질학회 등 타 학회 연구자를 포함한 10명 안팎으로 특별위 준비회를 구성, 검증방법을 검토한 후 내년 5월 총회에서 정식으로 특별위원회를 발족할 계획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1/13 17:56

日교과서 “구석기날조” 부분 삭제키로

일본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 전 부이사장의 유적발굴 날조문제와 관련, 고교 일본사 교과서를 발간하는 짓교 출판사는 22일 마야기현 가미타카모리 유적에 대한 기술을 삭제키로 결정, 문부성에 정정을 신청했다.

이번 날조사건이 표면화한 이후 교과서 기술에 대해 정식으로 정정이 신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짓교 출판사는 “고교 일본사 A”에 기술된 “미야기현 가미다카모리 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약 60만년전의 석기가 발견되고 있다”는 부분을 삭제키로 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산세이도와 야마카와 출판사, 도쿄서적도 관련 기술을 삭제하거나 수정키로 하고 가까운 시일내에 문부성에 정정을 신청할 예정이다.

/도쿄=연합

입력시간 2000/11/23 20:31

日 이번엔 “고려청자 사기극”

한국인 복원작품 속여 10년간 국제展

일본인 도자기상인이 우리나라 도예가들이 복원한 고려청자를 자신이 복원한 것처럼 속여 국제전시회를 갖고 일본 외무대신의 표창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일본 도예상의 고려청자 국제사기극은 구석기유물 조작사건의 파장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불거져 나와 일본 문화예술계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도예가 작품 사들여 국제사기극

경기 이천 민속도자기사업협동조합(이사장 이대영)은 27일 “도자기 중간상인 다니쥰세이(谷俊成ㆍ72)씨가 이천 도예가들의 고려청자 작품을 사들인 뒤, 자신의 낙관을 찍어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전시ㆍ판매했다”고 밝혔다. 일본의 도쿄(東京)신문도 이날자 1면에 “고려청자 복원은 거짓말” 제목의 머리기사로 다니씨의 고려청자 사기극을 대서특필했다.

이천 도자기조합과 도쿄신문 등에 따르면 다니씨는 72년초 해강(海剛) 유근형(柳根瀅ㆍ93년 작고)선생과 우현(又玄) 이기휴(李奇休ㆍ90년 작고) 선생 등이 원본에 가깝게 복원한 고려청자를 사들여 일본에 판매해 오다 두 도예가가 작고한 뒤 본격적으로 사기극을 벌여왔다.

■10년간 유럽 등 다니며 전시 판매

다니씨의 국제사기극은 무려 10년동안 계속돼 왔다. 그는 1990년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고려청자 복원에 성공했다”고 발표, 이목을 끈 뒤 이듬해에는 일본 아키타(秋田) 현립미술관에서 사기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93년 유네스코 파리본부, 95년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도예전을 열었고, 밀라노에서는 최고의 영예인 “안브로지노 금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97년에는 일본 외무대신 표창과 은배를 수상한 데 이어 일본 미술작가명감(名鑑)에도 이천 도예가의 작품들이 버젓이 다니씨의 이름으로 소개됐다. 지난 10월에도 주오스트리아 일본대사관, 일본국제교류기금, 교토(京都)시의 후원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우리측 끈질긴 항의, 다니씨 사죄

다니씨의 사기행각은 그나 지난 4월4일자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문화면에 “고려청자 환상의 기법을 풀었다”라는 기고문을 내면서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글에서 “한국정부와 도예가들로부터 고려청자 복원 의뢰를 받고 80년대 중반에 청자 유약에 어떤 금속이 사용되는지를 규명했다”며 “30년전부터 고려청자복원에 매달려 지금까지 1,200종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일본 와세다대 교육학과 고바야시야스히로(小林保治)교수가 이천의 도예가 방철주(78)씨에게 문제의 기고문을 보여줬고, 방씨 등 이천 도예가들과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끈질기게 항의, 다니씨의 사죄를 받아냈다.

다니씨는 26일 오후 4시 이천의 도자기협동조합 사무실에서 고려청자 위조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는 그러나 “유럽의 박물관에 이천자기를 기증한 것이지 판매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방씨는 “세계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 미술도감에는 아직도 복원된 고려청자가 다니씨 명의로 돼 있다”며 “진실이 드러난 이상 작품의 제작자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입력시간 2000/11/27 19:57

일본은 역사왜곡의 천국인가

선사·고려청자 날조- 공명심 배경에 日 특유의 강박관념

지난 11월말 일본 문화계는 도쿄(東京)신문이 1면 머릿기사로 특종 보도한 고려청자 사기극으로 흔들렸다.

도예상 겸 아마추어 도예가인 다니 순제이(谷俊成?2)씨가 1990년 고려청자의 유약에 얽힌 비밀을 독자적으로 밝혀내 복원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중견 도예가로 급부상했다.

이듬해 아키타(秋田) 현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은 이래 잇따라 일본 국내에서 전시회를 연 것은 물론 93년 유네스코 파리본부, 95년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전시회를 가졌다.

밀라노 전시회 당시에는 안브로지노 금화상을 받아 이탈리아 도예계에 깊은 인상을 심는 등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97년 일본 외무장관 표창을 받았고 일본 미술작가 명감에 작품이 올라 있을 정도의 지위를 확보했다.

올 10월에도 주 오스트리아 일본대사관과 외무성의 국제교류기금, 교토(京都)부 후원으로 빈에서 개인전을 열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 도예가 작품에 서명만 넣은 것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기였다. 올 4월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고려청자 환상의 기법을 해명했다”는 기고문을 실으면서 꼬리가 잡혔다.

그는 한국 정부 및 도예가들로부터 고려청자 유약에 어떤 금속이 사용됐는지를 밝혀달라는 요청을 받아 30년전부터 고려청자 복원에 매달려 왔다고 밝혔다.

일반인들은 무심히 지나쳤지만 전문가인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바야시 야스히로(小林保治)교수의 눈에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고바야시 교수는 이 기고문의 내용을 친분이 있는 이천의 도예가들에게 알렸다. 조사 결과 다니씨의 작품은 한결같이 이천 도예가들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만 넣은 것이었다. 사기극이 드러나자 다니씨는 11월 26일 이천 도자기협동조합에서 고려청자 위조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그는 일본내의 여러 미술관과 밀라노 박물관, 모나코 왕궁 등이 소장한 “고려청자”는 모두 기증한 것으로서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무엇보다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기본적인 동기였다고 용서를 빌었다.

이 사기극의 동기는 개인의 공명심이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도예가 경력이 불투명한 그가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한국이 자랑해 온 고려청자의 비법을 일본인이 풀었다는 일본 도예계의 인식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이런 인식은 현재 도자기 왕국으로 부상했으면서도 “원천 기술”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한 집단적 강박관념을 읽을 수 있다.

이에 앞서 11월 5일 마이니치(每日)신문이 1면 머릿기사로 특종보도한 “선사 날조” 사건은 이런 성격이 훨씬 짙다.

미야기(宮崎)현 쓰기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현장에서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소장으로 발굴 조사단장을 맡았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0)가 석기를 땅에 파묻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도됐다.

선사 날조로 사기극 드러나

10월27일 일본 언론들이 “70만년전 석기 발굴”을 대서특필하기 5일전인 10월22일 아침 6시18분께의 행동이 마이니치 신문 취재팀이 몰래 설치한 비디오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취재팀의 추궁에도 한동안 발뺌을 하던 후지무라씨는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잡힌 사진을 대하고야 비로소 그동안의 날조극을 털어 놓았다.

그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올해 발견된 31점의 석기 유물 가운데 27점이 모두 자신이 수집해 두었던 석기를 파묻은 것이라고 시인했다.

또 올해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에서 발굴한 석기 29점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묻었던 것이라고 실토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의 6개 유구는 물론 자신이 발굴작업에 관여한 다른 유적지의 유물은 진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홋카이도 소신후도자카 유적의 석기 날조를 함께 시인한 것은 마이니치 신문 취재팀에 증거 사진이 확보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재팀은 소신후도자카 유적 발굴 당시에도 비슷한 몰래 카메라 사진을 찍었으나 초점이 흐려 후지무라씨임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어려워 추가 증거 확보에 매달려 왔다. 그는 이미 증거가 잡힌 2개소의 유적에서만 날조를 시인했을 뿐이다.


손대면 유물 쏟아져 “석개의 손”으로 불려

고교 졸업후 독학으로 고고학에 투신한 후지무라는 7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가, 기초를 닦아 오다 81년 미야기현 자자리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일본 최고(最古)인 4만수천년전의 석기를 발굴해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가 발굴한 유적에서는 어김없이 구석기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공동 발굴 작업에서도 “저기를 파 보라”면 예외없이 유물이 나와 “황금의 손” “석기의 신”으로 불릴 정도였다.

특히 93년 이후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40만년전, 50만년전, 60만년전의 석기를 잇달아 발굴해 내면서 일본 전기구석기 시대를 10만년씩 위로 끌어 당겨 왔다.

또한 2월 사이타마(埼玉)현 치치부(秩父)시의 오가사카(小鹿坂) 유적에서는 40만~50만년전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고급 유구와 석기 유물을 동시에 발굴하기도 했다.

그의 성과는 일본 학계에서 어느덧 정설로 인정됐으며 고등학교 교과서가 일본 전기 구석기 시대의 시작을 모두 60만년전으로 기술하기에 이르렀다.

날조극이 드러난 후 문부성은 그가 관여한 140여개소의 유적 발굴 작업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지시했고 교과서 출판사들이 전기 구석기 관련 기술의 삭제를 잇달아 신청하고 나섰다.

또한 석기의 연대 측정법이 애매한 상태에서 연대 추정에 대한 전면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출토 지층의 연대 측정에 대해서도 재검토 주장이 활발해 일본의 구석기 연구전체가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날조극에 대한 주류 학계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일본 고고학계는 1946년 군마(群馬)현에서 2만5,000년전의 지층에서 석기가 발굴되면서 본격적인 구석기 시대 연구에 매달렸다.

한동안 3만년전 이전의 광의의 전기구석기 시대가 있었느냐는 논쟁이 치열했으나 후지무라가 자자라기 유적에서 4만수천년전의 석기 유물을 발굴하면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원형에 가까운 유물에 의문”

논쟁에서 진 주류학계는 도호쿠 대학과 아마추어 연구자들이 주축이 된 도호쿠구석기문화연구소가 잇달아 3만~12만년전의 중기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고 나중에는 12만년전 이전의 협의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을 잇달아 발굴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짐짓 외면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런 주류 학계가 날조극이 밝혀진 후 “언제나 같은 사람이 깨끗한 상태의 석기를 무더기로 발굴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든가 “현장에서 다른 연구자들이 제대로 의문을 표하기만 했어도 금세 진위를 밝힐 수 있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또 “애초에 결정적인 연대측정 방법이 없으니 무의미한 논란이라고 생각했다”며 “아시아 대륙에서 가미타카모리 유적과 같은 연대의 석기군이 발견되지 않아 언급을 피해 왔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자존심에서 비롯한 주류 학계의 침묵이 후지무라의 날조극을 방조한 셈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존심만이 아니었다.

후지무라 스스로가 “보다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을 발굴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고 시인했듯 일본 고고학계 전체에 사회적 압력을 받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영향”에 대한 두려움

일본에는 고유의 역사, 독자적 문화에 대한 열망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에서 “역사”를 얘기할 만한 청동기 시대는 BC 3세기경에 시작된 야요이(彌生) 시대 들어서였다. 그러나 미작(米作) 농경 문화가 정착한 이 시대의 주인공은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3~7세기 고분시대의 주역들도 역시 한반도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다.

궁내청 관리하에 있는 당시의 고분들이 발굴은 커녕 측량조사나 현장 시찰조차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현실을 두고 일본 학계조차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영향을 입증할 증거, 특히 천황가의 정체를 밝힐 물증이 나올 우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최근 야요이 시대 이전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繩文) 시대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한반도의 영향을 배제한 보다 일본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의식의 표현이다.

구석기 시대에 대한 집착도 같은 맥락이다. 우익 세력이 “성전(聖典)”이라고 내놓은 “국민의 역사”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을 예로 들면서 “일본 문명”을 논하고 있을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세계사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명의 개념을 의심하게 될 이런 광적인 집착을 축으로,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사 강박관념이 일본 사회에 넓게 퍼져 있다.

근현대사의 진실조차 감추고 왜곡하려는 마당에 현재의 일본인들과 별 관계도 없는 선사시대의 왜곡 따위야 “손바닥 뒤집기”였을 수도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2/12 20:32

”日 유일 구석기시대
인골·석기도 조작의혹”


日 고고학 심포서 제기

일본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시대의 인골과 석기가 함께 출토된 오이타(大分)현 히지리다키(聖嶽) 동굴 유적에 대해서도 인골 연대와 석기 발견 상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고 마이니치(每日)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21일 도쿄(東京)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고고연구부장은 발굴된 인골이 약 550년 전의 것이라고 감정 결과를 밝히면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립과학박물관의 바바 히사오(馬場悠男) 인류연구부장도 “인골이 17세기 이후의 에도(江戶) 시대 인골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어 기껏해야 조몬(繩文)시대 이후, 즉 기원전 3세기 이후의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인골과 함께 나온 석기는 구석기 시대 유물인 것은 사실이나 재료인 흑요석이 현지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며 직선거리로 180km 떨어진 사가(佐賀)현의 석재인 것으로 추정되며 흩어진 상태에서 발견됐다는 점 등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인골의 DNA 감정 등 히지리다키 동굴 유적에 대한 전면 재조사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히지리다키 동굴은 1962년 일본 고고학협회 조사단이 발굴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 후반(약 1만4,000년전)의 석기와 뒷머리뼈 등은 일본인의 기원을 해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중ㆍ고교 교과서에 실려 왔다.

한편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을 날조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전 부이사장이 발굴 작업에 관여한 186개 유적을 모두 재조사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1/22 17:18

`구석기 유적논란” 日벳부대 교수 자살

일본 벳부(別府)대학의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 78) 명예교수가 10일 자신이 발굴한 구석기 유물에 신석기 유물이 포함됐다는 학계의 논란과 관련, 목을 매 자살했다고 교도(共同)통신이 보도했다.

가가와 교수는 지난 1962년 오이타(大分)현 히지리다키(聖獄) 동굴유적의 발굴에 참여해 동일한 지층에서 후기 구석기 유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와 석기를 발견,일본사 교과서에도 소개되는 등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그러나 지난 99년 재발굴과정에서 발견된 인골이 구석기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데다 이번주 초에는 60년대 출토된 석기가운데 주로 신석기에 걸쳐 있었던조몬(繩文)시대 석기가 섞여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불만을 표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가와 교수는 “(60년대 출토기록이 날조됐다고 보도된데 대해) 목숨을 걸고 항의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유족측은 전했다.

(도쿄=연합뉴스) 고승일특파원

입력시간 2001/03/10 17:52

日 “구석기 인골” 15세기 것 판명

고고학계 거듭 망신살

일본 도치기 현 구즈(葛生)마을에서약 3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져 온 인골이 정밀조사 결과 15세기 전후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일본 언론들이 11일 보도했다.

1950~51년에 발견돼 ‘구즈원인’으로명명되고, ‘아카시(明石) 원인’과 함께 일본의 전기 구석기 시대 원인을 대표했던 인골이 15세기 전후의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일본 고고사학계의 신뢰성은 더욱 실추됐다.

더욱이 일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구즈 마을을 구석기 시대 인골 출토지로 기술하고 있어 교과서의 수정이 불가피해 졌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1월 미야기(宮城)현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과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의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가 한 고고학자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밝혀진데 이어 올들어 구석기 시대 인골로 여겨져 온 오이타(大分)현 히지리다키(聖嶽) 동굴의 인골도 중세 이후의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

‘구즈 원인’의 인골은 발견 이래 오랫동안 일본인의 기원을 찾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져 왔으나 동물 뼈와 함께 출토된 데다 지층과 인골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의문이 일어 수년 전부터 재조사가 이뤄져 왔다.

오차노미즈(お茶の水) 여자대학 연구팀의조사 결과 애초에 ‘구즈원인’의 인골로 여겨져 온 뼈는 작은 호랑이의 것으로 확인됐으며 함께 출토된 인골 4점 중 측정 가능한 3점의 탄소 연대측정법으로분석한 결과 15세기 전후의 것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7/11 20:54

日 구석기 유적지도 날조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을 날조, 커다란 파문을 불렀던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전 부소장이 발굴에 관여한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 유적의 재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은 물론 유적지 자체의 날조가 드러났다고 일본 언론들이 4일 전했다.

일본 고고학협회 조사단이 재발굴한 결과에 다르면 후지무라 전부소장이 1998년과 99년 중기·전기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소신후도자카 유적은 구석기 시대 당시 인간이 거주하기 어려운 습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은 후지무라 전부소장이 발굴에 관여한 구석기 유적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에 들어가 있으며 지금까지 재조사가 끝난 3개 유적지는 모두 날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9/04 21:03

日 구석기 유적 또 날조

일본 도호쿠(東北) 구석기 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 전 부이사장이 발굴에 관여했던 미야기현의 2개 구석지 유적지가 날조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고고학협회 재발굴조사단은 지난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후지무라씨의 유적날조 의혹에 대한 검증조사를 벌인 결과, 미야기현내 자자라기 유적 등에서 출토된 석기에서 철조각이 발견되는 등 날조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 전기(前期) 구석기 시대가 있었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으나, 지난 1981년 자자리기 유적에서 4만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석기가 발견돼 이런 논란을 종식시켰다.

/도쿄=연합

입력시간 2001/09/24 14:07

日 구석기 유적 날조 20곳 이상”

일본 구석기 유물 날조 사건의 장본인인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50) 도호쿠(東北) 구석기 문화 연구소 전 부이사장이 자신이 그동안 발굴에 관여한 유적 가운데 20여 곳에 대한 날조를 시인했다고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29일 보도했다.

신문은 후지무라 씨가 구석기 날조 사건을 전면 조사해온 일본 고고학 협회 특별 조사위에 이같이 고백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특별 조사위는 진상 규명을 위해 조사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특별위 등에 따르면 후지무라 씨가 날조를 시인한 유적은 사이타마(埼玉)현 지치부(秩父)시의 오가사카(小鹿坂) 유적 등 1999년과 2000년에 발굴이 이루어진 유적에 집중돼 있다.

특히 지난 97년 12월 후지무라 씨가 “세계 최고의 접합(接合)석기”가 발굴됐다고 발표했던 미야기(宮城)현의 유적에 대해서도 날조를 시인했다고 마이니치는 덧붙였다.

일본 고고학 협회는 지난 해 11월 후지무라 씨의 구석기 유적 날조 사실이 마이니치 신문의 특종으로 보도돼 파문이 일자 전.중기 구석기 유적에 대한 특별 조사위를 구성, 후지무라 씨가 관여한 유적에 대한 검증 작업을 벌여 왔다.

고고학 협회는 1948년 결성된 고고학분야의 일본내 최대 학회로, 회원은 3천600명이다.

(도쿄=연합뉴스) 김용수특파원

입력시간 2001/09/29 10:03

日 구석기 유적 날조파문 확산

일본의 구석기 유적 날조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이 사건을 조사중인 일본고고학회는 구석기 유적을 변조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전 부이사장으로부터, 작년 11월 시인했던 2곳 외에도, 20여유적의 날조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일본의 구석기문화연구 전체가 의심 받을 처지에 몰렸다. 가뜩이나 역사교과서 왜곡사태로 인접국들로부터 불신 당하고 있는 일본 처지가더욱 곤혹스러울 것 같다. 일본은 근대화 초기 아시아국가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탈아론(脫亞論)이다.

요즘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70만년 전으로 되돌려 이집트문명과 맞먹는 고대문명이 일본에 존재했음을 믿고 싶어한다. 또 다른 역사 날조행위다. 구석기 유물 날조는 이런 분위기에서 잉태되었다. 70만부가 팔렸다는 ‘국민의역사’라는 책은 ‘일본이 세계 4대문명의 하나’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를 체험한 바 있는 한국과 중국 등은 이번사건을 한 고고학자의 비양심적인 날조사건만으로 보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한 사실은 일본 고고학계가 이 사건을 검증하면서 하나하나 진실에 다가가고있는 점이다. 일본학계뿐 아니라 일본사회도 이번 사건을 과거 반성의 기회로


倭人たちは本当に恥ずかしい.

日本の旧石器遺物と高麗青磁捏造に関する記事一覧
 

  日本人たちは何がそんなに心忙しくてあらなかった旧石器遺物を捏造して今まで明かされない高麗青磁上薬の秘密を明かしたと世界を回りながら詐欺を働いて通うのか分からない.黙っていれば誰がムォラグロはのでもないのにどうして特に日本人たちは歴史捏造と操作にそのように血眼だろう?古代史を含めて現代史にのぼるまで絶えず日本を美化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やきもきする. 今もザルサルゴンだけ何が不足で過去をさしも美化しようとしたという話か? 凡そ人間はできたとおり暮して生じたとおり遊ばなければならない. 虚偽で過去を派手に飾ったところでそれが何の所用か? 200年少し超えたアメリカは過去歴史が派手であまりよく暮らすのか? 過去が何の所用か? 日本人たちよ是非生じたとおり遊びなさい無理やりにきれいな顔しようと思うのしないで . だから最初に過ちをやらかさずに他人の物を奪うつもりも馬で善良に買いなさい. そして過ちをした時は悔やんで謝らなければならない. 君たちの身震いはすべてそれができなくて起きるモムジッイニだと.

  去年 2000年11月5日初めて報道された旧石器遺跡捏造社でも以後の情況に関する韓国日報記事たちを集めて見た. 教科書歪曲と似ている時期に開かれている古代史捏造の策略を続いてジギョ見る事にしよう.
          *2001年9月30日夜中秋にあって <運営者>


日 70万年前旧石器は捏造(
the Palaeolithi  fabrication )

発掘前ソックギムッヌン場面綻露… 調査団長自分の所作告白

日本前期旧石器時代遺物の連帯を 70万年前で引き上げて世界的気を引いた発掘成果が公明心に目がくらんだ考古学者のナルゾグックで明かされた.

毎日(毎日)新聞は 5日宮城(宮城)現スキダテチォ(築館町) 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発掘現場で発掘調査団長である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50) 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副理事長が密かに石器を地に埋める場面を盛ったビデオテープを公開した.

10月27日 70万年前の石器が発掘されたと特筆大書される 5日前である 10月 22日朝の仕事だった.

彼は毎日新聞の取材に対して “魔(魔)が立ち込めた”とこの遺跡で今年発見された 6個悠久(遺構)と遺物 31点の中で 27点を皆捏造したと自認めた. また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で今年発掘された石器 29点皆が自分の石器コレクションを埋めたことだったと白状した.

フジムだと副理事長は 1992年 8月草木地開墾のために暴いた加味タカ森の丘陵で石器を見つけた以来 1993年からこちらで 40万年前, 50万年前, 60万年前の石器を相次いで発掘, 日本最古(最古) 石器記録を年例行事のように更新して来た.

日本考古学会はこの成果はもちろんその間彼が関与した 140ヶ所の遺跡発掘に対する再評価を急いでいる. また彼が直接関与しなかったが 2月埼玉(埼玉)現チチブ(秩父)時オがサカ(小鹿坂) 遺跡で発掘された 40‾50万年前の世界最高級悠久など電気旧石器時代遺物に対する全面的な再調査が成り立つ見込みだ.

フジムだと副理事長は高校卒業の後独学で考古学に身を投げた. 1972年から発掘作業に参加, 1981年宮城県刺字と言う(座散乱木) 遺跡で当時としては最古(最古)である 4万数千年前の石器を掘り出しながら名声を得た. その間の発掘で彼がほって見なさいという所をほれば常に遺物が出て `石器の申¥" `シン・イソン¥"と呼ばれた.

彼の自作劇が成功することができたことは石器の連帯測定法がまだ曖昧のうえ石器の形式よりは発掘された地層の連帯を最優先にした日本考古学界の古い慣行のためだった.

日本史の連帯を上で引き上げようとする日本考古史学係のポングトも助けになった. 日本に 12万年前以前の電気旧石器時代文化があったのかに大韓長年の論争が結び目されたことも刺字と言う遺跡で彼が掘り出した石器によってからだった.

したがって高校歴史教科書に載せられて大学入試に出題されるまで一日本の電気旧石器時代文化全体に対する見直しと修正が不可避であるように見える.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0/11/05 19:55

日文部省, 旧石器発掘全面再調査

日本文部省は 5日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の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副理事長が石器を埋めてから発掘成果を捏造した問題と係わって精密の調査に取り掛かる方針だ.

いらっしゃるよダダ森(大島理森)文部大臣はこの日フジムラシがあくまでグァンヨヘッヌンジゾングミルの調査に入って行くはずだと言いながら文化庁と相談して彼が言った 2ヶ所以外にも調査すると付け加えた.

彼はまた教科書との観点も研究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指摘, 教科書のギスルウルスゾング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立場を示唆した.

フジムだと副理事長はこの日記者会見で今年 10月に掘り出した宮城(宮城)ヒョンウィがミダカモリ(上高森)遺跡と 9月北海道(北海道)の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遺跡の捏造を公式と認めて謝罪した.

一方関連学界などは今度捏造事件で考古学に対する信頼が根こそぎ引っ繰り返ったと指摘して日本内に 10ヶ所があることと知られた電気旧石器時代遺跡の発掘作業大部分を彼が関与して来たから発見のどこまでが事実なのかに対して徹底的に検証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明らかにした.

(東京= 連合ニュース) ムンヤングシックトックパワン

入力時間 2000/11/06 10:53

考古学者に浮気をするようになった 日歴史

旧石器発掘捏造祈願また使うと

日本文部省は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の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副理事長が電気旧石器時代の石器を捏造した 2ヶ所の遺跡はもちろん他の旧石器時代遺跡に対しても全面的な再調査に乗り出す方針だ.

いらっしゃるよダダ森(大島理森) 文部省長官は 5日 “フジムラシがあくまで関与したのかをいろいろに調査すること”と言いながら “文化庁と相談して彼が捏造した 2ヶ所以外の遺跡も対象に入れて調査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明らかにした. 彼は引き続き “教科書との関係も研究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明らかにして教科書記述の修正可能性も示唆した.

文化庁関係者はフジムラシが捏造を白状した宮城(宮城)現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と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の信頼性を現地研究所・大学とともに再確認して文化庁が関係した他の遺跡に対しても調査すると明らかにした.

一方 2ヶ所の遺跡以外には捏造しなかったというフジムラシの主張にもかかわらずその間彼が関与した約 140個遺跡を皆再調査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指摘が続いている.

これによって埼玉(埼玉)玄銀 6日紫根部(秩父)時のオがサカ(小鹿坂) 遺跡と出て来るのね(長尾根) 遺跡の発掘に対する精密再調査を宣言した. オがサカでは 2月世界最古(最古)汲引約 50万年の前の原因(原人) 生活悠久が, ナがオネでは 7月世界に例がない原因の墓穴(墓穴) 悠久が発見されたと発表された事がある.

また今度事件が日本プレゼント考古学の信頼を根こそぎ振ったという点で日本考古学会は旧石器時代遺跡に対する全面的な再調査の念をおしている.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0/11/06 17:50

日 石器文化全面見直しすると

日本旧石器遺跡捏造国内反応

“考古学籍常識では到底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が起った.”“もう日本旧石器歴史は全面見直しに入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ようだ.”

5日日本毎日(毎日)新聞によって暴露された日本前期旧石器時代遺跡捏造事件(本報 6日付け 35面報道)を眺める国内考古学界の反応は激昂された雰囲気そのものだ. 国内学者たちは宮城(宮城)現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発掘現場で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50) 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副理事長が自分が所長中の石器を地に埋める場面を眺めながら “国内では想像もできない事”と口をそろえて言った.

忠北大イユングゾ(考古美術史学科) 教授は “フジムだと団長が地を売って遺物を埋めたらその地層は他の所より柔らかいものと決まっているのにこれを発掘隊員の中で誰も分か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腑に落ちない”と “これは右翼的性向が強い日本学界がフジムだと団長の権威を盲信した結果”と言った.

が教授はまた “日本史学係は過去日本旧石器遺跡連帯が毎度韓国より遅れることに対して大きな強迫観念に捕らわれていたようだ”と付け加えた.

先文台異形区(史学科) 教授は “その間日本が旧石器時代出発時期をしきりに引き上げるせいで東北アジア考古学がごちゃまぜになった”と “もう旧石器時代だけではなく 1万 2,000年前に始まったという日本の新石器時代もまた見直し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

古代遺跡と遺物の連帯測定方式に問題を申し立てる学者も多い. 特に日本考古学界の場合石器の形式や出土当時配列状態よりは発掘された地層の連帯を最優先にする慢性的な慣行から直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指摘だ. ここに一番科学的な連帯測定装置で認められている放射性炭素連帯測定器の `誤差可能性¥"を指摘する学者もある.

檀国大手入れする碩座教授は “1998年宮城県発掘現場を訪問した時, 出土当時石器遺物がまるでこのごろのようにきちんと整理されていたという説明を聞いてちょっと疑心が行った”と “放射性炭素連帯測定器も人息づかいや土壌の不純物がまじる場合誤差が出ることができるのでこれが絶対的な判断基準になってはいけないこと”と言った.

金官名記者 kimkwmy@ hk.co.kr

入力時間 2000/11/06 18:13

[社説] 日本の古代史捏造波紋

日本の一考古学者が日本の旧石器時代を操作しようと思った事件は日本教科書の侵略社歪曲劣らず今更日本人の歴史観をドエジブオ見るようにする.

発掘団長という人が遺物の連帯を 70万年前で引き上げようと自分が所蔵した石器コレクションを発掘現場に埋めたなんてこれは歴史歪曲次元ではなくいっそのこと捏造だ. 日本人の歴史観に泥ぬりを一この事件はもしかしたら日本古代史全般にわたって対内外の不信をもたらすようにならないかも知れない.

毎日(毎日) 新聞が 5日付け報道で日本に電気旧石器の存在を証明する遺跡と知られた宮城(宮城) 現加味タカ森(上高森)遺跡が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50) 発掘団長が操作したにせ物遺跡だと明らかにした.

なおかつフジムだと団長が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もそのような方法で捏造したと自状したが, 彼の ¥"業績¥"は 98年から高校歴史教科書に載せられて広く教えて来たと言う.

日本は歴史教科書問題で韓国中国など隣り国家たちと葛藤が絶えていない. そのわけは 20世紀前半期韓国中国などを侵略して蛮行をほしいままにした多くの明白な歴史的実はマージャー歪曲するのに止めない.

日本はこの教科書を通じて新しい世代に偽り事実を教えて結果的に未来の国際友好まで害する可能性のためだ. 今度事件も例外ではない.

しかし私たちは一考古学者の非学自適良心がもたらした捏造事実自体より彼がいただいた心理的圧迫に注目しようとする. 今日本は極右勢力の莫強した影響力のため平和憲法改訂, 自衛隊活動範囲の拡大, 歴史教科書改悪など多くの問題が同時に出ている.

日本に電気旧石器が存在するという偽り事実も日本列島と日本人の優越感を強調しようとするこのような雰囲気と関連がないか憂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

国際社会で経済先進国日本の位置はすごい. 一方にその位相によるリーダーシップには同意しない. すぎ去った事に対する真正な反省がないからだ. 今度事件がミリタリズム日本復活の右傾化された歴史捏造ではないように願う.

明日の日本を担当する若い世代が自国文化と国際関係を理解するのに歪曲された考古学 ¥"業績¥"の介入するひまがないように願う.

入力時間 2000/11/06 18:27

[記者の目] 先史の捏造...なぜ?

5日午前宮城(宮城) 県庁で開かれた記者会見で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東北(東北) 隅奇聞花宴旧ソ副理事長は結局頭をあ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60‾70万年の前の石器を捏造した(6日付け社会面) `配布¥"とは捜してみにくい, 懦弱きわまりない姿だった.

彼は宮城県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で今年発掘された遺物 65点の中で 61点, 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で出土された 29点皆を捏造したと白状しながらもこれ以上の捏造はなかったと強調した. しかし日本考古学の信頼性をプリチェ振った彼の言葉がありのまま信じられるわけがない.

彼の関与した発掘はもちろんすべての旧石器時代遺跡発掘作業を再調査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ところ国民と学界, 政府の意見が一致している.

いつも同じな人がきれいな状態の遺物を発見, 変に思ったり, 現場で複数の研究者が詳しく検証したら充分に真偽を選り分け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など学界の遅い自歎(自嘆)はそれではなぜ?という疑問だけけしかける. 団ではある.

主類学界は一歩遅れて日本に電気旧石器時代遺物が存在することはできるが最初に連帯測定の決定的な方法がなかったとアジア大陸で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のような連帯の石器君が発見されなくて初めから言及を避けて来たと明らかにした. アマチュア研究者の集まりである東北隅奇聞花宴旧ソと東北大学が手を取り合った発掘作業をわざわざそっぽを向いて来たという話だ.

主類学界のこのような沈黙は日本の旧石器時代を 60万年前に引き上げた教科書の記述で見て学界の自尊心だからとだけ表示は難しい.

今度事件は結局日本列島の `人跡¥"を少しでも逆ってあげようとする集団的強迫観念と世論の圧力を反映することではないか. と思うことは目の前の現代史さえ ¥"アジア共生のための選択¥"に上塗りされるというのに昔の原因(原人)の足跡くらいはもっと簡単な仕事だった指導分からない.

黄令息東京特派員 yahwang@hk.co.kr

入力時間 2000/11/06 18:36

[ニュース焦点] 日本, 歴史歪曲も足りなくて歴史操作まで

2000年 11月5日, 日本歴史学界は自分がどんなに歴史を操作したのかありありと見せてくれた. 歴史を自分に有利に歪曲解釈する水準を越して歴史的事実自体を操作する, 犯罪行為に違いない `次元高い¥"詐欺術だった.

歴史捏造の現場は日本の旧石器文化を 70万年前に引き上げた宮城(宮城)現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地.

日本考古学発掘団は 10月末この遺跡地で 70万年石器 31点を見つけたと発表した. この発見は日本に電気旧石器文明が存在したことを証明することで世界考古学界の注目を引いた.

ところでここで発見された石器は本来つけていたのではなく発掘調査団長が所長中だった旧石器遺物を前もって埋めたことなのが現われた. 毎日(毎日) 新聞は 5日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当時調査団長が発掘場所に窪みをほって隠密に石器を問う場面を撮影して暴露した.

本人も操作事実を自認めた. フジムという今まで相次ぐ石器発掘で日本旧石器連帯を引き上げながら日本考古学界で `シン・イソン¥"と呼ばれて来た人物. 彼は “去年以前の発掘品は操作しなかった”と言ったが学界では彼が見つけたかなり多い数遺物が操作された可能性が大きいことで見ている.

フジムラが歴史を操作したことは一応個人の公明心によることで見当がついている. しかし日本史の連帯を上で引き上げようとする日本考古学界の風土と天皇中心の歴史観も一分け前をしたことに解釈されている.

天皇中心歴史観と連関された日本の事実操作疑惑は昨日今日の事ではない. 1880年代広開土大王碑碑文操作及び天皇加衣 3台宝物中の一つの漆紙もウムガックムン操作などが代表的だ. 日帝侵略注意と蛮行を否定する歴史の歪曲解釈を越して事実を操作するモール(沒)歴史的行動に恐れさえ生ずる.

排煙して週間韓国部記者 seapower@hk.co.kr

入力時間 2000/11/07 14:49

[韓国の時では] 日集団意識がもたらした悲劇, 先史捏造

イムヒョゼ

ソウル大考古美術史学科教授

3日から三日間日本島根(島根)大学で開催された第 2悔恨・仕事人文・社会科学学術交流講演会は韓国側で 27人, 日本側で 45人の研究者が参加した中に進行された.

ところで二番目捺印 4日会議ではシンポジウム内容よりは皆日本歴史の署長を飾る 70万年の前の加味タカ森(上高森)遺跡発掘事件に関心が集中された.

が遺跡発掘の成果を土台で中国の北京原因と劣らない電気旧石器時代が日本に存在したしツングウィの連帯に見て日本歴史の手始めを知らせる遺跡という日本の自慢の種が皆操作されたことだと発表されたからだ.

問題になった日本ドフク(東北)隅奇聞花宴旧ソは日本プレゼント文化研究に大きな業績を残した機関で国内外学界の注目を引いて来た.

日本に旧石器時代の存在が不明だった 1946年軍馬(群馬)現で 2万5,000年前の石器が発見された時実は可否をおいて疑問が申し立てられたがドフクヨングソが 1981年宮城(宮城)現イワデヤママチで刺字と言う遺跡を掘り出した結果 4万〜5万年前石器が発見されたと発表することで疑問は消えた.

このような発掘を主導したフジムだと(藤村) 団長は日本の歴史をおおよそ 70万年前まで乗せた神話的存在だ. 彼は第6次加味タカ森遺跡説明会で一週間の前に埋めておいた石器 31点を捜し出したと発表することで学界の英雄と同時に日本人の矜持を乗せた英雄で浮び上がった.

その間 19個の高校教科書の中で 10個教科書が彼の発掘結果を積んだし, 日本私立の名門早稲田大学では入学試験にまで出題した.

考古学発掘を取り囲んだ歴史歪曲は他の国にもあった. 1908年イギリス西セックス株ピルトダウンで発見された人のトックピョと頭蓋骨を置いて大英博物館がその連帯が 500万年前にさかのぼって, 猿と現代人の連結の輪になる発見だと興奮しながら大英帝国が人類文明のメッカだと叫んだ事件は非常に有名だ.

しかし 1940年代後半フッ素連帯測定法によって科学的に測定した結果頭蓋骨はわずか 600年前人間の物で明かされた. 1953年 11月大英博物館は “ピルトダウンインは中でした”と公式に発表した.

日本の加味タカ森石器遺跡捏造事件も日本歴史を 70万年前に引き上げて, エジプト文明と立ち並ぶ古代文明が存在したと信じたがる日本人の集団意識がもたらした悲劇だ.

その間日本には事実に土台しない歴史歪曲と美化の雰囲気がはびこっていた. “日本が 4大文明の一つ”と主張する `国民の歴史¥"という歴史書は 70万部以上が売れた. この本の急ぐすぐ操作された加味タカ森遺跡で始まる.

今度シンポジウムでも日本考古学関係者たちは韓国側参席者たちに 5日には加味タカ森遺跡に行く計画を取っておいたから蹉跌なしにしてくれと何回電話をかけて頼んだ. もちろん 4日の事件公表後では彼らの連絡も途絶されたが. 仕方なくソウル大ノ−テドン教授などうちの連中 5人は島根(島根)現和泉(出雲) 近くのゴジンダだから(荒神谷)遺跡を訪問した.

こちらは 358個のチォングドングゴム(青銅剣)が住んだ四面(斜面)でいっぺんに出た所だ. 今まで日本全国から出たチォングドングゴムが 300個であるからそれよりもっと多いことが一番(回)に出た所なのに現場を見る瞬間うちの連中は感嘆するよりは約束やハンドッが “あれももし…”という言葉が飛び出した.

今度事件をきっかけで日本の考古学籍発掘, 歴史教科書, 韓日関係詞を見直ししなければならない. 日本教科書を新たに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勿論で韓・日関係を原点から再整理し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同時に我が学界も旧石器研究の推定連帯や石器の真偽, 遺跡の真偽可否をもうちょっと真剣に考えるきっかけになってほしい.

入力時間 2000/11/07 18:54

旧石器遺跡捏造学者 日考古学会除名処分

日本宮城(宮城)現加味タカ森(上高森) 旧石器遺跡捏造事件と関連, 日本考古学協会(会長多分カスには・甘粕健)は 12日東京(東京)で緊急委員会を開催, 東北(東北) 隅奇聞花宴旧ソの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50) 前副理事長を除名処分して, 彼が関与した遺跡を全面検証するための特別委員会を設置する事にした.

トックビョルウィは捏造が現われた加味タカ森遺跡と北海道(北海道)の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は勿論, 彼が関与した他の遺跡に対してももう検証作業に入って行った文化庁と協力して再調査する方針だ.

多分カス会長はこの日会見で研究者の間の相互批判などを通じて捏造を防止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 このような結果をもたらして申し訳ないと謝った後私は・中期旧石器時代に対して真摯な検討を推進, 信頼回復に力をつくすと表明した.

協会はあと地質学会など他の学会研究者を含んだ 10人内外でトックビョルウィ準備回を構成, 検証方法を検討した後来年 5月総会で正式に特別委員会を発足する計画だ.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0/11/13 17:56

日教科書 ¥"旧石器捏造¥" 部分削除することに

日本東北隅奇聞花宴旧ソフジムだとShinichi前副理事長の遺跡発掘捏造問題と関連, 高校日本史教科書を発刊するジッギョ出版社は 22日マヤ期県加味タカ森遺跡に対する技術を削除することに決定, 文部省に訂正を申し込んだ.

今度捏造事件が表面化した以後教科書記述に対して正式で訂正が申し込みされたことは今度が初めてだ.

ジッギョ出版社は ¥"高校日本史 A¥"に記述された宮城県加味ダカー森遺跡で旧石器時代前期にあたる約 60万年前の石器が発見されているという部分を削除する事にした.

今度事件と関連, 山勢利刀とヤマカと出版社, 東京書籍も関連記述を削除するとか修正する事にして近くの時日内に文部省に訂正を申し込む予定だ.

/東京=連合

入力時間 2000/11/23 20:31

日 今度には ¥"高麗青磁詐欺劇¥"

韓国人復元作品の中よ 10年間国際展

日本人陶磁器商人が我が国のドイェがドルが修復した高麗青磁を自分が修復したようにの中よ国際展示会を持って日本外務大臣の表彰まで受けたことで現われて衝撃を与えている.

日本陶芸上の高麗青磁国際詐欺劇は旧石器遺物操作事件の波長がまだ沈む前にはみだして日本文化芸術界の道徳性に大きい打撃を与えるように見える.

■国内陶芸が作品買受けて国際詐欺劇

京幾利川民俗陶磁器史業協同組合(理事長李対英)は 27日陶磁器中間業者であるダニジュンセイ(谷俊成・72)さんが二千ドイェがドルの高麗青磁作品を買受けた後, 自分の楽観を取ってイタリア, フランスなどで展示・販売したと明らかにした. 日本の東京(東京)新聞もこの日の 1面に高麗青磁復元は嘘題目のトップ記事でダニシの高麗青磁詐欺劇を特筆大書した.

二千陶磁器組合と東京新聞などによればダニシは 72年の初め解強(海剛) 幼根型(柳根〓・93年死亡)先生と右舷(又玄) イギヒュ(李奇休・90年死亡) 先生などが原本に近く修復した高麗青磁を買受けて日本に販売して来て二つの陶芸家家作故した後本格的に詐欺劇をして来た.

■10年間ヨーロッパなど通って展示販売

ダニシの国際詐欺劇はおおよそ 10年間続いて来た. 彼は 1990年誰も明か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高麗青磁復元に成功したと発表, 耳目をひいた後翌年には日本Akita(秋田) 県立美術館で詐欺展示会を開いた.

以後 93年ユネスコパリ本部, 95年イタリアフィレンチェとミラノで陶芸前を開いたし, ミラノでは最高の栄誉である ¥"アンブロジノ−金貨¥"賞を受賞したりした.

特に 97年には日本外務大臣表彰と銀杯を受賞したのに相次ぎ日本美術作家名艦(名鑑)にも二千陶芸加衣作品が堂堂とダニシの名前に紹介された. 去る 10月にも株オーストリア日本大使館, 日本国際交流基金, 京都(京都)時の後援でオーストリアウィーンで個展を開いたりした.

■我が方しつこい抗議, ダニシお詫び

ダニシの詐欺行為は彼や去る 4月4日付け日本経済(日本経済)新聞文化面に ¥"高麗青磁幻想の技法を解いた¥"という寄稿文を出しながらしっぽがつかまり始めた.

彼はこの文で韓国政府と陶芸家ら路から高麗青磁復元依頼を受けて 80年代中盤に青磁上薬にどんな金属が使われるかどうかを糾明したと 30年前から高麗青磁復元にぶら下げられて今まで 1,200種に達する作品を製作したと主張した.

早い怪しげにここは日本早稲田大教育学科小林Yasuhiro(小林保治)教授が利川の陶芸が部屋鉄柱(78)さんに問題の寄稿文を見せてくれたし, 部屋さんなど二千陶芸家ら科ゾングヤングモの前国立中央博物官長などがしつこく抗議, ダニシのお詫びを受け出した.

ダニシは 26日午後 4時利川の陶磁器協同組合事務室で高麗青磁偽造を認めて公式謝った. 彼はしかしヨーロッパの博物館に利川自分を寄贈したことであって販売しなかったと主張した.

部屋さんは世界主要博物館と美術館, 美術図鑑にはまだ復元された高麗青磁がダニシ名医になっている真実が現われた以上作品の製作者も直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ギムテフンギザ oneway@hk.co.kr

入力時間 2000/11/27 19:57

日本は歴史歪曲の天国か

プレゼント・高麗青磁捏造- 公明心背景に 日 特有の強迫観念

去る 11月末日本文化界は東京(東京)新聞が 1面頭記事で特種報道した高麗青磁詐欺劇で搖れた.

陶芸上かたがたアマチュア陶芸佳人つけたらスンゼイ(谷俊成?2)さんが 1990年高麗青磁の上薬に縛られた秘密を独自的に明かして復元に成功したと発表しながら中堅陶芸横急浮上した.

翌年Akita(秋田) 県立美術館で展示会を開いて好評を博した以来相次いで日本国内で展示会を開いたことはもちろん 93年ユネスコパリ本部, 95年イタリアフィレンチェとミラノなど世界各地を回って展示会を持った.

ミラノ展示会当時にはアンブロジノ−金貨上を受けてイタリア陶芸係に深い印象を植えるなど国内外で高い評価を受けた. 97年日本外相表彰を受けたし日本美術作家名艦に作品が上がっているほどの地位を確保した.

今年 10月にも株オーストリア日本大使館と外務省の国際交流基金, 京都(京都)部後援でウィーンで個展を開いて喝采を浴びた.


韓国陶芸が作品に署名だけ入れたこと

しかしそのすべてのものが詐欺だった. 今年 4月日本経済(日本経済)新聞に ¥"高麗青磁幻想の技法を解き明かした¥"は寄稿文を載せながらしっぽがつかまった.

彼は韓国政府及び陶芸家ら路から高麗青磁上薬にどんな金属が使われたのかを明らかにしてくれと言う要請を受けて 30年前から高麗青磁復元にぶら下げられて来たと明らかにした.

一般人たちは無心に度が外れたが専門家である早稲田(早稲田)大学小林Yasuhiro(小林保治)教授の目には変きわまりない内容だった.

小林教授はこの寄稿文の内容を親しみがある利川のドイェがドルに知らせた. 調査結果ダニシの作品は専ら二千ドイェがドルの作品に自分の署名だけ入れたのだった. 詐欺劇が現われるとダニシは 11月 26日二千陶磁器協同組合で高麗青磁偽造事実を自認めて謝った.

彼は日本内の多くの美術館とミラノ博物館, モナコ王宮などが所蔵した ¥"高麗青磁¥"は皆寄贈したこととしてお金を目的にしたのではないと解き明かした. 何より高麗青磁の優秀性を世界に広く知らせたいことが基本的な同期だったと容赦を謝った.

が詐欺劇の同期は個人の公明心が出発点であることができる.

しかし陶芸が経歴の不透明な彼がそのように高い評価を受けたことは韓国が誇って来た高麗青磁の秘法を日本人が解いたという日本陶芸係の認識を抜いてからは説明しにくい.

もこんな認識は現在陶磁器王国で浮び上がったけれども ¥"源泉技術¥"が韓半島から来たという事実に対する集団的強迫観念を読める.

これに先たち 11月 5日毎日(毎日)新聞が 1面頭記事に特種報道した ¥"プレゼント捏造¥" 事件はこんな性格がずっと濃い.

宮城(宮崎)現スギダテチォ(築館町) 加味タカ森(上高森) 遺跡発掘現場で当時東北(東北) 隅奇聞花宴旧ソ副所長で発掘調査団長を引き受けた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0)が石器を地に埋める場面がいきいきと報道された.

プレゼント捏造で詐欺劇現われて

10月27日日本言論たちが ¥"70万年前石器発掘¥"を特筆大書する 5日前である 10月22日朝 6時18分頃の行動が毎日新聞取材チームが密かに設置したビデオカメラにそのままつかまった.

取材チームの追及にもしばらく足を抜くことをしたフジムラシは自分の顔がそのままつかまった写真を対したあと初めてその間のナルゾグックを打ち明けた.

彼は加味タカ森遺跡で今年発見された 31点の石器遺物の中 27点が皆自分が収集しておいた石器を埋めたことだと自認めた.

また今年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で掘り出した石器 29粘度同じ方法で埋めたことだと白状した. といえども彼は加味タカ森遺跡の 6個悠久はもちろん自分が発掘作業に関与した他の遺跡地の遺物は本当という主張を曲げなかった.

しかしこれを信じる人は誰もいなかった. 彼が北海道ソシンフドザカ遺跡の石器捏造を一緒に自認めたことは毎日新聞取材チームに証拠写真が確保されていたからだった.

取材チームはソシンフドザカ遺跡発掘当時にも似ている隠しカメラ写真を撮ったが焦点が曇ってフジムラシなのを決定的に現わしにくくて追加証拠確保にぶら下げられて来た. 彼はもう証拠がつかまった 2ヶ所の遺跡でばかり捏造を自認めただけだ.


手をつければ遺物零れ落ちて ¥"ソックゲの手¥"と呼ばれて

高校卒業の後独学で考古学に身を投げたフジムという 72年から発掘作業に参加, 基礎を修めて来る 81年宮城県刺字里期(座散乱木) 遺跡で当時としては日本最古(最古)である 4万寿千年戦の石器を掘り出して名声を得た.

以後彼が掘り出した遺跡では間違いなく旧石器遺物が溢れ出た. 共同発掘作業でもあそこをほって見なさいといえば例外なしに遺物が出て ¥"黄金の手¥" ¥"石器の神さま¥"と呼ばれるほどだった.

特に 93年以後加味タカ森遺跡で 40万年前, 50万年前, 60万年前の石器を相次いで掘り出しながら日本電気旧石器時代を 10万年ずつ上で引き寄せて来た.

も 2月埼玉(埼玉)現チチブ(秩父)時のオがサカ(小鹿坂) 遺跡では 40万‾50万年前に推定される世界最高級悠久と石器遺物を同時に掘り出したりした.

彼の成果は日本学界でいつのまにか定説で認められたし高等学校教科書が日本前期旧石器時代の手始めを皆 60万年前で記述するのに至った.

ナルゾグックの現われた後文部省は彼が関与した 140余ケ所の遺跡発掘作業に対して全面的な再調査を指示したし教科書出版社たちが電気旧石器関連記述の削除を相次いで申し込んで出た.

も石器の連帯測定法が曖昧な状態で連帯推定に対する全面的な疑問が申し立てられているし出土地層の連帯測定に対しても見直し主張が活発で日本の旧石器研究全体が信頼の危機にあっている.

ナルゾグックに対する主類学界の反応はもっと不様な様子だった. 日本考古学界は 1946年軍馬(群馬)現で 2万5,000年前の地層で石器が発掘されながら本格的な旧石器時代研究に没頭した.

しばらく 3万年前以前の広義の電気旧石器時代があったのかは論争が熾烈だったがフジムラが刺字と言う遺跡で 4万寿千年戦の石器遺物を掘り出しながら論争に終止符を取った.

原型に近い遺物に疑問

論争でチン主類学界は東北大学とアマチュア研究者たちが主軸になった東北旧石器文化研究所が相次いで 3万‾12万年前の中期旧石器遺物を掘り出して後には 12万年前以前の協議の電気旧石器時代遺物を相次いで掘り出すと首を傾げながらもわざとそっぽを向く姿勢に一貫した.

そんな主類学界がナルゾグックが明かされた後いつも同じな人がきれいな状態の石器を大量で掘り出して変だと思ったとか現場で他の研究者たちがまともに疑問を示してばかりしても忽ち真偽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たと指摘して出た.

また最初に決定的な連帯測定方法がないから無意味な論難だと思ったとアジア大陸で加味タカ森遺跡のような連帯の石器君が発見されなくて言及を避けて来たと責任を回避するような発言をこぼし出した.

自尊心から始めた主類学界の沈黙がフジムラのナルゾグックを傍助したわけだ. しかし単純な自尊心だけではなかった.

フジムだと自らがより連帯をさかのぼる遺物を掘り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強迫観念に苦しんだと自認めたように日本考古学界全体に社会的圧力を受けて来た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

¥"韓半島影響¥"に対する恐れ

日本には固有の歴史, 独自的文化に対する熱望が長い間存在して来た. 理由は簡単だ.

日本で ¥"歴史¥"を話すに値する青銅器時代は BC 3世紀頃に始まった彌生(彌生) 時代立ち入った. しかし米作(米作) 農耕文化が定着したこの時代の主人公は韓半島から渡って来た人々だった.

も 3‾7世紀古墳時代の主役たちもやっぱり韓半島の力強い影響の下にあった.

宮内庁グァンリハにある当時の古墳たちが発掘はどころか測量調査や現場視察さえ厳格に統制されている現実を置いて日本学界までも韓半島から渡って来た人々の影響を立証する証拠, 特に天皇加衣正体を明らかにする物証が出る憂慮のためだと思っている.

最近彌生時代以前の新石器時代の繩文(繩文) 時代研究が引き立っていることも韓半島の影響を排除したより日本的な要素を捜そうとする意識の表現だ.

旧石器時代に対する執着も同じな脈絡だ. 右翼勢力が ¥"聖典(聖典)¥"と出した ¥"国民の歴史¥"は加味タカ森遺跡を例であげながら ¥"日本文明¥"を論じていそうだ.

少しでも世界史の常識がある人なら文明の概念を疑うようになるこんな狂的な執着を軸で, 濃度の差はあろうとも歴史強迫観念が日本社会に広く広がっている.

近現代史の真実さえ隠して歪曲しようとする庭先に現在の日本人たちと別に関係もない先史時代の歪曲なんかなの ¥"手の平逆転¥"だった首都ある.

黄令息東京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0/12/12 20:32

日 唯一旧石器時代
人骨・石器も操作疑惑


日 考古学シンポジウムで申し立て

日本で唯一に旧石器時代の人骨と石器が一緒に出土された大分(大分)現ヒジリダキ(聖嶽) 洞窟遺跡に対しても人骨連帯と石器発見状況に対する疑問が申し立てられたと毎日(毎日)新聞が 22日報道した.

が新聞によれば 21日東京(東京)で開かれたシンポジウムで国立歴史民俗博物館の一日ゆりヒデだ(春成秀爾) 考古研究部長は発掘された人骨が約 550年前の物だと感情結果を明らかにしながら見直しが必要だと指摘した.

国立科学博物館のババヒサオ(馬場悠男) 人類研究部長も人骨が 17世紀以後の江戸(江戸) 時代人骨のような特徴を持っていてたかが繩文(繩文)時代以後, すなわちB.C. 3世紀以後の物だと明らかにした.

また人骨とともに出た石器は旧石器時代遺物であることは事実や材料である黒曜石が現地では生産されないし直線距離で 180km 離れたサガ(佐賀)現の石材であることに推定されながら散らばった状態で発見されたという点等操作疑惑が申し立てられた. これによって人骨の DNA 感情などヒジリダキ洞窟遺跡に対する全面再調査の必要性が大きくなったとこの新聞は伝えた.

ヒジリダキ洞窟は 1962年日本考古学協会調査団が掘り出したしこちらで出土された旧石器時代後半(約 1万4,000年前)の石器と後頭骨などは日本人の起源を解き明かす貴重な資料で中・高校教科書にのせられた.

一方シンポジウム参席者たちは電気旧石器時代遺物を捏造した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東北(東北) 隅奇聞花宴旧ソ前副理事長が発掘作業に関与した 186個遺跡を皆再調査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意見を集めた.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1/01/22 17:18

`旧石器遺跡論難¥" 日別府台教授自殺

日本別府(別府)大学の香川ミスオ(賀川光夫. 78) 名誉教授が 10日自分が掘り出した旧石器遺物に新石器遺物が含まれたという学界の論難と関連, 首を結んで自殺したと教徒(共同)通信が報道した.

香川教授は去る 1962年大分(大分)現ヒジリダキ(聖獄) 洞窟遺跡の発掘に参加して等しい地層で後期旧石器遺物に推定される人の骨と石器を発見,日本史教科書にも紹介されるなど注目を引いて来た.

彼はしかし去る 99年再発掘過程で発見された人骨が旧石器時代以後の物に推定されたうえに今週超には 60年代出土された石器中主に新石器にかけてイッオッドンゾモン(繩文)時代石器がまじているという主張が申し立てられると不満を表示して来たことと知られた.

香川教授は (60年代出土記録が捏造されたと報道されたのに対して) 命をかけて抗議するという内容の遺書を残したと遺族側は伝えた.

(東京=連合ニュース) コ・スンイル特派員

入力時間 2001/03/10 17:52

日 ¥"旧石器人骨¥" 15世紀の判明

考古学界重ねて恥さらし肉

日本とちぎ現グッズ(葛生)マウルエソヤック 30万年前電気旧石器時代の物で思って来た人骨が詳細な調査結果 15世紀前後の物で明かされたと日本言論たちが 11日報道した.

1950‾51年に発見されて ‘グッズ院である’ウロミョングミョングされて, ‘Akashi(明石) 原因’と一緒に日本の電気旧石器時代原因を代表した人骨が 15世紀前後の物で現われるによって日本考古史学係の信頼性はもっと失墜された.

なおかつ一部高等学校歴史教科書がグッズ村を旧石器時代人骨出土誌で記述していて教科書の修正が不可避になった.

日本では去年 11月宮城(宮城)現価三鷹森(上高森) 遺跡と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の電気旧石器時代石器が一考古学者によって捏造されたことで明かされたのに相次ぎ今年に入って旧石器時代人骨で思って来た大分(大分)現ヒジリダキ(聖嶽) 洞窟の人骨も中世以後の物で判明された事がある.

‘グッズ原因’の人骨は発見であると言う長い間日本人の起源を捜すことに重要な資料で思って来たが動物骨とともに出土されたうえに地層と人骨との関係が不明だという疑問が日本語数年の前から再調査が成り立って来た.

御茶ノ水(お茶の水) 女子大学ヨングティムウィゾサ結果最初に ‘グッズ院である’の人骨で思って来た骨は小さな虎の物で確認されたし一緒に出土された人骨 4点の中で測定可能な 3点の炭素ヨンデツックゾングボブウロブンソックした結果 15世紀前後の物である可能性が大きいことで明かされた.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1/07/11 20:54

日 旧石器遺跡地も捏造

電気旧石器時代遺物を捏造, 大きな波紋を呼んだ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前副所長が発掘に関与した北海道(北海道) ソシンフドザカ(総進不動坂) 遺跡の再調査結果出土された遺物はもちろん遺跡地自らの捏造が現われたと日本言論たちが 4日伝えた.

日本考古学協会調査団が再発掘した結果に違えばフジムだと全部所長が 1998年と 99年中期・前期旧石器遺物を見つけたと発表したソシンフドザカ遺跡は旧石器時代当時人間が居住しにくい湿地だったことで明かされた.

日本はフジムだと全部所長が発掘に関与した旧石器遺跡地に対する全面的な再調査に入っているし今まで再調査が終わった 3個遺跡地は皆捏造されたことで確認された.

東京=黄令息特派員 yshwang@hk.co.kr

入力時間 2001/09/04 21:03

日 旧石器遺跡また捏造

日本東北(東北) 旧石器文化研究所のフジムだとShinichi前副理事長が発掘に関与した宮城県の 2個隅誌遺跡地が捏造された可能性が大きいことで現われた.

日本考古学協会再発掘調査団は去年おびただしい波紋を投げかけたフジムラシの遺跡捏造疑惑に対する検証調査をした結果, 宮城県内刺字と言う遺跡などで出土された石器で鉄片が発見されるなど捏造跡を確認したと明らかにした.

日本学界では日本に電気(前期) 旧石器時代があったのか可否をおいて論難がおこったが, 去る 1981年刺字里期遺跡で 4万余年前に推定される石器が発見されてこんな論難を終熄させた.

/東京=連合

入力時間 2001/09/24 14:07

日 旧石器遺跡捏造 20ヶ所以上

日本旧石器遺物捏造事件の張本人である東北(東北)隅奇聞花宴旧ソの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50) 東北(東北) 旧石器文化研究所前副理事長が自分がその間発掘に関与した遺跡の中 20余所に対する捏造を自認めたと毎日(毎日) 新聞が 29日報道した.

新聞はフジムだとさんが旧石器捏造事件を全面調査して来た日本考古学協会特別調査上にこのように告白したと伝えた. これによって特別ゾサウィは真相糾明のために調査作業にもっと拍車をかける事にした.

トックビョルウィなどによればフジムだとさんが捏造を自認めた遺跡は埼玉(埼玉)現紫根部(秩父)時のオがサカ(小鹿坂) 遺跡など 1999年と 2000年に発掘が成り立った遺跡に集中されている.

特に去る 97年 12月フジムだとさんが世界最高の接合(接合)石器が発掘されたと発表した宮城(宮城)現の遺跡に対しても捏造を自認めたと毎日は付け加えた.

日本考古学協会は去年 11月フジムだとさんの旧石器遺跡捏造事実が毎日新聞の特種で見ても良くて波紋が広がると私は.中期旧石器遺跡に対する特別ゾサウィを構成, フジムだとさんが関与した遺跡に対する検証作業をして来た.

考古学協会は 1948年結成された考古学分野の日本内最大学会で, 会員は 3千600人だ.

(東京=連合ニュース) キム・ヨンス特派員

入力時間 2001/09/29 10:03

日 旧石器遺跡捏造波紋拡散

日本の旧石器遺跡捏造波紋が一波万波で拡がっている. この事件を調査中の日本考古学会は旧石器遺跡を変調した東北(東北) 隅奇聞花宴旧ソのフジムだとShinichi(藤村新一) 前副理事長から, 去年 11月自認めた 2ヶ所外にも, 20余裕的の捏造事実を確認したと言う.

日本の旧石器文化研究全体が疑心受ける境遇に追い込まれた. なおさら歴史教科書歪曲事態で国隣たちから不信あっている日本チォジがドウック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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