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百兵
宣供供侯王○○○○作/
先世以來夫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화4년 369년 X 월 16일 병오 정양 백번 담금질한 칼로 칠지도를
만들다. xx 백병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한 칼이다
선세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구시 (百濟王世子 奇;KUSI)
께서 낳은 (生)은 왕자 ( 聖音)인 까닭에 ( 故) 왜왕을 삼는다는 뜻 (旨)으로
만들었다. 전하여 후세에 보이거라
이제 탈도 많고 말도 많은 七支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문헌상으로 중국인들이 倭人이라고 하는 표현대신
백제왕이 다스린 열도의 신라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그 실체와 이후에 백제의 고구려 정벌에 손을 끊고 오히려 가야에
붙게 되는 이 세력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윤곽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AD 4세기말에 백제 왕세자의 아들이라서 왜왕이 된다. 라고 기록된 금석문이 발견이 되는 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 당연히 나와야 하는 유물이 나온”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올바른 해석을 놔두고 일본의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근거도 없는 동진 택배 가설을 세운다거나 하면서 칼에 이미
선세 이래 이런 칼 없었다, 라고 적혀 있는데도 엄한 중국에서 七支刀
비슷한 것이 없나 찾으러 다니면서 한반도 七支刀는 있는지 조차 모른다거나 혹은 백제 하사설 헌상설 대등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이리 끼워 맞추고 저리 끼워 맞추고 하는 학문인지 정치인지 애매모호한
스탠스를 취하면서 정작 정답인 백제 본국에서 열도에 백제 侯王 파견하면서 보낸 임명장 이라고 하는 것은 외면한다거나..
이런 것은 참 곤란하지 않은가 합니다
한국쪽에서 傳示後世는 어떻게 봐도 下行文이라고 주장하니까 갑자기
근거도 없이 동진 택배설 주장하면서 칼에 이미 先世 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중국에 혹시 비슷한 것 없나 찾으러 돌아다니면서 일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경주에서 출토되는 칼의 본체에 6개의 小刀를 어긋나게 부착시킨 칼은 존재조차 모른다거나.. 참 거시기 합니다
어쨋든
순수하게 이론적으로만 일단 칼의 연대부터 접근해 봅니다.
칼의 연대가 지워져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 칼의 연대를 추정해 봅니다
1. 흠정만주원류고에는 (欽定滿洲源流考) 백제의 기록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 여러 侯王을 세워 그 공훈에 보답하였다. 宋齊 시기부터
그러했다.
其國 内 衆建 侯王 以酬勲懿 自宋齊時已然則
칼에는 侯王에게 주는 칼이라 기록되어 있고 칼을 만든 사람들이 백제인이라고 하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칼의 명문은 宋齊 즉 중국 남조시대 이후의 기록이라고 봐야 합니다
2. 七支刀와 동일한 성격의 칼이 한국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부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황남 대총 고분의 축조 연대가 AD 5세기 초엽으로 추정되므로 고분의 주인은 4세기 말에 이 칼을 착용했을 것입니다.
1.2에 따라서 七支刀 제작 연대는 4세기 末로 추정이 되는데 이 시기에 백제는 어떤 방식으로 연호를 기록했나 살펴 봅니다.
北史에 보면 백제는 宋의 원가력(元嘉歷)을 채용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는 역시 중국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중국 연호 채용에 대해서 저자세 외교나 이런 것을 연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백제는 북방 기마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서 남쪽으로 후퇴한 漢族을 대신해서 중국 북쪽 대륙에 진출하여 중국 북방 기마 민족으로부터 漢族의 정부를 보호하는 형태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작위인 眞東 대장군 등을 받은 것은 종속의 의미라기 보다는 백제가 영유한 중국 영토에 대해서 원래의 영토 소유주였던 漢族에게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요식행위였다고 보여집니다.
고대에 있어서 책력의 사용은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중국 쪽에서 정확한 책력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어쨋든
백제가 宋의 원가력을 채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칠지도의 泰 X 로 기록된 연호는 중국 연호의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중국 남조의 東晉 연호에 太和가 있어 太 와 泰는 소리와 뜻이 비슷하므로 太和라고 기록된 것이 원래의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것이 어째서 泰 x 로 변형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본서기를 읽어 가면서 따로 또 설명드리겠습니다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鉄七支刀○○百兵
宣供供侯王○○○○作/
先世以来夫有此刀百済王世○奇生聖音故為倭王旨造伝示後世.”
胎化4年 369年 X 月 16日丙午静養百回焼きを入れた刀で漆紙島を
作る. xx 白兵適切にフワングに与えるに値する刀だ
先世以来でこんな刀がなかったが百済皇太子仇視 (百済王世子 奇;KUSI)
が生んだ (生)は王子 ( 聖音)であるわけに ( 故) 倭王をするという意味 (旨)で
作った. 伝えて後世に見えなさい
もうたたりも多くて言葉も多くの 七支刀 話をします.
私たちは文献上に中国人たちが 倭人と言う表現代わり
百済王が治めた列島の新羅だと言う表現を使っただけ
その実体と以後に百済の高句麗征伐に手を切ってむしろ伽揶に
付くようになるこの勢力の数奇な運命に対しても大略的な輪郭を取りました
そうだったら AD 4世紀末に百済皇太子の息子なので倭王になる. と記録された金石文が発見になることは謎ではなく当然出なければならない遺物がナオング以上も以下でもないと言うことが分かるようになります
しかし正しい解釈を差し置いて日本の宗教を保護するため
根拠もないトンジン宅配仮説を立てるとかしながら刀にもう
先世であると言うこんな刀なかった, と書かれているにも厳しい中国で 七支刀
似ているのがないが捜しに通いながら韓半島 七支刀はあるのかさえ分からないとか あるいは百済下賜説献上説対等説その時その時状況によって
こちらに挟んで合わせてあちらに挟んで合わせてする学問なのか政治なのかあやふやな
スタンスを取りながらいざ正解である百済本国で列島に百済 侯王 派遣しながら送った辞令と言うことはそっぽを向くとか..
このようなことは本当に困らないかと言います
韓国側で 伝示後世はどんなに見ても 下行文だと主張するから急に
根拠もなしにトンジン宅配説主張しながら刀にもう 先世 以来にこういった刀がなかった.と記録されているにも中国にもし似ていることないが捜しに歩き回りながら日本で 1時間距離にある競走で出土される刀の本体に 6個の 小刀を行き違うように付着させた刀は存在さえ分からないとか.. 本当にかけるします
どうであれ
純粋に理論的だけで一応刀の連帯から近付いて見ます.
刀の連帯が消されているので次のような方式にこの刀の連帯を推正して見ます
1. 欽定満洲源流高には (欽定満洲源流考) 百済の記録をこんなに
少ないです.
国の中に多くの 侯王を立ててその手柄に報いた. 宋斉 時期から
そうだった.
其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