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沆 [1567년~1618년 ]
전라남도 靈光 출생
1588년 進士기 되고 .1593년 別詩文科 丙科에 급제
1596년 校書館 박사 전적을 거치고 工曺 形曺 佐郞에 역임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북도 南原에서 군량미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하자 고향 靈光으로 돌아가서 의병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해로를 따라 南行하다 일본軍에게 잡히고 포로가 되었다
가족과 친척들과 함께 일본軍의 포로가 되어 9日 동안 굶으며 끌려가던 도중 아이들은 病으로
죽고 친척들 중에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그는 1598년 학식이 높은 승려와 교류하며 유학을 가르쳤다
그때 만난 승려 중에 슌舜은 승려를 그만 두고 유학자가 되었으며 그가 일본의 성리학의 선구자
후지와라 세이카 [藤原惺窩 ]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불교 승려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학자 姜沆의 가르침을 전수 받고 정식으로 유학 공부를 하게 된다
그의 사상은 에도 막부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 성리학 [ 性理學 ]의 독자적 체계를 완성했다
강항 [姜沆은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의 고위 관료이며 유학의 대가였다
그에게 性理學을 전수 받은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性理學의 창시자로
메이지 유신을 거치는 일본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 [林羅山 ]은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승려의 자격으로
성리학 .性理學 학자로서 등용 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전의 정권에서 승려만 文官으로
기용했던 기존의 사례를 형식적으로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본의 불교는 백성의 호적을 관리하는 官僧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지만
사상의 주도권은 性理學에 내어 주게 된 것이다
조선의 性理學은 고려시대 安珦이 중국 元에 가서 朱子全書를 필사하고 돌아와 朱子學을
연구하기 시작 하면서 이루어졌다
고려가 불교를 사상과 이념으로 고려 사회를 개혁하는데 지속적으로 추진하는데 실패했고
이것은 불교의 쇠퇴기를 가져왔고 그 쇠퇴기를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성리학이다
조선에서의 性理學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 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
깊게 사색해 形而上學的 실천 철학 여러분야에서 새로운 유학 사상을 수립했다
관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끼쳤고
후세에 實學사상으로 발전시켰다
實學 사상은 性理學의 학문적 이론에서 한층 더 나아가서 정치 경제적 현실 문제와 과학 기술
역사 문학 풍습과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서
당시 조선의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조선의 性理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독자적 체계를 완성했는데
조선과 다른 것은
조선은 孝를 근본으로 하는 사상과 인간 심성의 구조 인간의 자세를 깊이 사색하는 학문 이라면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의 忠을 孝 보다 더 위로 보는 국가의 충성과 왕권강화를 위해
性理學을 정치이념으로 이용 하였고 이것은 근대 일본을 한층 더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슨 사상이든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보수와 개혁 하려는 진보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었고
그런 충돌은 사회를 발전 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姜〓 [1567年‾1618年 ]
全羅南道 霊光 生まれ
1588年 進士期になって .1593年 別詩文科 丙科に及第
1596年 校書館 博士戦績を経って 工〓 形〓 佐郎に 歴任 になった
1597年壬辰の乱当時全羅北道 南原で軍糧米普及に力をつくした
南原が落ちると故郷 霊光に帰って義兵で活動をした
李舜臣旗下に入るために海路に沿って 南行して日本軍につかまって虜になった
家族と親戚らとともに日本軍の虜になって 9日 間 飢えながら引かれて行った途中子供達は 病で
死んで親戚らの中にも 死亡者が続出した
日本大阪に到着した彼は 1598年学識が高い僧侶と交流して留学を 教えた
あの時会った僧侶の中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