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통신사가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


 에도시대에 일본에 온 조선 통신사의 사행은, 수행원이 수백명, 맞이하는 측의 일본도 준비라든지 접대등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된 일대 이벤트였습니다.
 그 여로는 한성으로부터 에도까지.시간에는 반년간이나 걸린다고 하는 행정이었습니다.그 때문에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도 적지 않고, 당시의 사람들은 매우 고생했던 것이 사 있습니다.
 통신사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습니다만 풍습의 차이인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폐가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또 반대로 통신사가 하는 것이 너무나 너무 엉뚱하고, 접대하는 일본측이 곤혹해 버린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은 그런 통신사의 약간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후쿠오카시에서의 교류 식전에 있어서의 통신사에 분장한 사람들의 퍼레이드
           (2009년 9월 21일)


        조선 통신사, 접대로의 NG


 조선 통신사는 장군의 대가 바뀜이나 세계탄생 등, 주로 경사에 불렸습니다.
 이 때, 조선국과의 절충에 해당되는 것은 쓰시마번입니다만, 통신사환영을 위한 접대비는 전국의 영주가 부담했습니다.그 비용은 어떤 때에는, 백만량에 달해(현재의 금 환산으로 500억엔 정도?) 막대한 지출이었던 것이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번은, 통신사를 맞이하는에 해당되어 관을 신축해, 또 있는 번에서는 통신사가 다니는 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고 한 것도 실시했습니다.통신사와 직접적인 절충에 해당되는 쓰시마번은, 통신사일행의 좋아하는 것을 「한국인 좋아하는 것 각서」에 적어 제번에 배포해, 접대의 연석으로 사용하는 식품 재료를 모으게 했습니다. 이러한 식품 재료는 주로 통신사가 다니는 진로의 길가의 마을들로 모아져 그 준비는 반년 전부터 행해지기도 한다고 하는 생각의들이나름이었습니다.

사진상:통신사를 대접한 요리의 일례하:통신사일행을 그린 그림.선두에 키요미치기를 내걸 수 있고 있다.


 그러나, 그런 통신사의 접대입니다만, 아무리 환영하고 싶기 때문에라고 해도,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뇌물을 건네준다고 하는 것입니다.후년, 규율이 진물러 오면, 역관, 나카시타관을 중심으로 뇌물을 받는 사람도 있던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3사(정사·부사·종사관의 세 명)는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혹은 받았다고 해도, 대마도로부터 부산으로 귀국할 때에 반환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이것은 일본측의 자료 「통항일람」에도 그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겐나 3년(1617년), 통신사가 아직 회답겸쇄환사로 불리고 있었을 무렵.장군에의 배알을 끝내고 역할을 끝낸 사신들에게 막부로부터 선물이 나옵니다.그 내용은, 3사에 은자 1500매, 금박 병풍 15쌍, 통사관에 은자4백매, 수행원에 은자 5백매, 동전 천관….다른 토쿠가와가의 사람들로부터도 백금3백매 등 등…. 어쨌든 굉장한 수의 은이나동, 백금이 나온 것이군요.


 사신의 면면은, 이 선물의 수취를 시작해 거절합니다.뇌물이 되어 버리니까요.그렇지만 막부의 공무원도 받아 주지 않으면 이쪽도 곤란하면 양보하지 않습니다.
 결국, 공무원에 잘라져 무리하게 물건을 건네받아 버린 사신들입니다만, 대마도에 도착하면, 이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가 됩니다.(덧붙여서 통신사들은 다른 영주로부터도 뇌물을 보내집니다만, 이쪽은 단호히라고 끊고 있습니다.)
 부사의 박은 이 돈을 국가에 헌상 해, 일부를 궁전의 수선비 등에 사용하면 어떨까?(와)과 제안합니다.그러나 종사관 리경직은 이 안에 강하게 반대합니다.가라사대「벌써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을 헌상 하고, 국가에 충의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신들은 상담한 결과, 받은 돈을 모두 대마도에 건네주어, 향후의 쇄환(포로의 귀환) 등에 사용하세요, 라고 해 귀국합니다.


후소록9월 첫9일신축(참조)


과연 동방예의지국!


외국인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고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우선시킨다…


부디, 오늘의 정치가에게도 본받아 주셨으면 한 것입니다!


\(*′∇`*)/



     쓰시마번, 조선 통신사에게 부탁을 한다


 방금전은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인 것을 엿보게 해 주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으므로, 이번은 조금 곤란한 통신사의 이야기를 합시다.
 조선 통신사도 회수를 거듭해 오면, 서서히 이완 해, 오만한 모습을 보여 오게 됩니다.말등으로부터 수행의 일본인이 머리를 부딪친다, 모처럼 준비한 접연을 무시해 통과하는, 영주 저택에 말을 탄 채로 들어가려고 하는, 등 등….
 이러한 통신사의 난폭하게 제일 골머리를 썩는 것은 쓰시마번의 사람들이었습니다.그들은 조선과의 절충을 혼자서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전면에 처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1682년 6월, 장군강길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통신사를 위로하는 연석 중(안)에서, 쓰시마번주는 5카조의 요망이 쓰여진 족자를 통신사에 보냈습니다.
 사실은 5카조는 커녕, 더 요망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도, 통신사측의 기록에서는 마지막에 「번거로운 많이 고로 발초한 기록에서 대강을 쓴다.」(은)는 써 있기 때문에, 통신사측이 우자싶게 느껴 스스로 깎아 버렸다 같네요.
 그러면 대마도의 요망한 5카조란 어떤 것이었는가? 홍우재의 동사록에 내용이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읽어 보기로 합시다.
상:수행의 일본인을 오오기에서 치는 통신사하:대마도시의 해안


동사록6월 29일(참조)


쓰시마번으로부터의 5카조의 부탁(의역)
그 1 가라사대,
일행의 상관 이하, 모름지기 정숙하게 해 신중하게 해 주세요.다음 일은 멈추어 주세요. 사나워져 줄에 마셔, 취해 진물러 문이나 기둥을 새기고, 석이나 서병을 나누거나 침을 당이나 벽으로 하거나 계단에서 소변을 하거나 말을 달리게 해 죽어 이르게 하거나 제리의 거래로 높게 앉고, 교만해 보거나 운운….

그 2 가라사대,
우리의 영내에 들어갔을 때, 암거래를 어렵게 단속해 주어 감사합니다.

그 3 가라사대,
떠나는 무신기서의 사이(1668~1669해의 일), 우리 나라의 치쿠젠주의 호민들이 귀국과 통하고 밀무역을 해 책형이 된 사건을 동도(에도)에서 (들)물으면 있는 그대로에 대답해 주세요.

그 4 가라사대,
두 명의 장로를 접대할 때는, 고 나무 제도를 지켜 주세요.

그 5 가라사대,
문장을 쓸 때에는, 휘어를 이용하지 말아 주세요..

…이 후에 「이고죠, 번(원않고들 ) 있어 많이 고로 발초한 기록에서 대강(대개)을 쓴다」라고 있다.



가나사시 남동사일록 8월 6일
 그러면 통신사들은, 족자에 쓰여진 고조를 받아 들이고 태도를 바로잡았는지요?


 아니오,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마도의 안내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출항하려고 해 섬주를 곤란하게 하거나 다시 또라고 없음이 준비된 곳에서 접대도 받지 않고 통과하거나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동행한 가나사시남의 동사일록에 거와 8월6일.쿄토에서 말을 달리게 해 모두 이것도 일본인을 쳐 매도하는 등 난폭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 쓰여져 있습니다.

  


자신이 나쁜 곳이 지적되면, 더 나쁜 것을 하려고 한다.



부디, 오늘의 누군가씨들도 반성 해 주기를 바라네요.


┐(′-`;)┌

   


通信使のいい話とわるい話

  通信使のいい話とわるい話

 江戸時代に日本にやって来た朝鮮通信使の使行は、随行員が数百人、迎える側の日本も準備とか接待とかで多くの人が動員された一大イベントでした。
 その旅路は漢城から江戸まで。時には半年間もかかるという行程でした。そのためトラブルが起こることも少なくなく、当時の人々は非常に苦労したことが覗えます。
 通信使は行く先々で歓迎を受けましたが風習の違いか、彼らにとっては迷惑なこともありました。また逆に通信使のすることがあまりに突飛すぎて、接待する日本側が困惑してしまうということもありました。
 今回はそんな通信使のちょっとしたエピソードをお話します。
写真は福岡市での交流式典における通信使に扮した人たちのパレード
           (2009年9月21日)

        朝鮮通信使、接待でのNG

 朝鮮通信使は将軍の代替わりや世継誕生など、主に慶事に呼ばれました。
 この時、朝鮮国との折衝に当たるのは対馬藩ですが、通信使歓迎のための接待費は全国の大名が負担しました。その費用はある時は、百万両にも及び(現在の金換算で500億円ぐらい?)莫大な支出であったことが窺えます。
 ある藩は、通信使を迎えるに当たって館を新築し、またある藩では通信使の通う道を大々的に整備すると言ったことも行いました。通信使と直接の折衝に当たる対馬藩は、通信使一行の好物を「朝鮮人好物覚書」に記して諸藩に配布し、接待の宴席で使う食材を集めさせました。 これらの食材は主に通信使が通う進路の沿道の村々で集められ、その準備は半年前から行われることもあるという念の入りようでした。

写真上:通信使をもてなした料理の一例 下:通信使一行を描いた絵。先頭に清道旗が掲げられている。

 しかし、そんな通信使の接待ですが、いくら歓迎したいからといっても、絶対にしてはいけないことがありました。
 それは賄賂を渡すということです。後年、規律がただれてくると、訳官、中下官を中心に賄賂を受け取る者もいたようですが、少なくとも三使(正使・副使・従事官の三人)は受け取らなかったようです。
 あるいは受け取ったとしても、対馬から釜山に帰国する際に返却していたようです。(これは日本側の資料「通航一覧」にもそ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元和3年(1617年)、通信使がまだ回答兼刷還使と呼ばれていた頃。将軍への拝謁を終え、役目を終えた使臣たちに将軍家から引き出物が出されます。その内容は、三使に銀子千五百枚、金屏風十五双、通事官に銀子四百枚、随員に銀子五百枚、銅銭一千貫…。他の徳川家の人々からも白金三百枚などなど…。 とにかく凄い数の銀や銅、白金が出されたわけですね。

 使臣の面々は、この引き出物の受取を始め断ります。賄賂になっちゃいますからね。ですが幕府の役人も受け取ってもらわないと、こちらも困ると譲りません。
 結局、役人に押し切られ、無理矢理品物を渡されてしまった使臣たちですが、対馬に到着すると、この引き出物をどうすべきか問題となります。(ちなみに通信使たちは他の大名からも賄賂を送られますが、こちらはきっぱりと断ってます。)
 副使の朴はこの金を国家に献上し、一部を宮殿の修繕費などに使ってはどうか?と提案します。しかし従事官の李景稷はこの案に強く反対します。曰く「すでに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ものを献上して、国家に忠義を尽くしたと言えるでしょうか?」
 使臣たちは相談した結果、受け取ったお金を全て対馬に渡し、今後の刷還(捕虜の帰還)などに使いなさい、と言って帰国します。

扶桑録 九月初九日辛丑(参照)

さすが東方礼儀之国!

外国人からお金を貰わず政治家としての立場を優先させる…

是非、今日の政治家にも見習っていただきたいものです!

\(*´∇`*)/


     対馬藩、朝鮮通信使にお願いをする

 先ほどは朝鮮が東方礼儀之国であることを窺わせてくれるエピソードをお話ししましたので、今度はちょっと困った通信使の話をしましょう。
 朝鮮通信使も回数を重ねてくると、徐々に弛緩し、傲慢な姿を見せてくるようになります。馬上から随行の日本人の頭を打つ、せっかく用意した接宴を無視して通り過ぎる、大名の屋敷に馬に乗ったまま入ろうとする、などなど…。
 こうした通信使の横暴に一番頭を悩ませるのは対馬藩の人々でした。彼らは朝鮮との折衝を一手に受けていたため、問題があると矢面に立たされる立場でした。

 そんな1682年6月、将軍綱吉の襲職を祝うためにやって来た通信使を労う宴席の中で、対馬藩主は五カ条の要望が書かれた掛け軸を通信使に送りました。
 本当は五カ条どころか、もっと要望は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 …というのも、通信使側の記録では終わりに「煩い多く故に抄録にて大旨を書く。」なんて書いてあるんで、通信使側がウザったく感じて自ら削っちゃったみたいなんですね。
 それでは対馬の要望した五カ条とはどんなものだったのか? 洪禹載の東槎録に内容が書かれていますので読んでみることにしましょう。
上:随行の日本人を扇で打つ通信使 下:対馬市の海岸

東槎録 六月二十九日(参照)

対馬藩からの五カ条のお願い(意訳)
その一曰く、
一行の上官以下、すべからく静粛にして謹み深くして下さい。次のことは止めて下さい。 たけなわに飲み、酔いただれ、戸や柱を刻んで、席や書屏を割ったり、唾を堂や壁にしたり、階段で小便をしたり、馬を走らせて死に至らしめたり、諸吏の去来で高く座って、驕り見たり云々…。

その二曰く、
我々の領内に入った時、闇取引を厳しく取り締まっていただき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その三曰く、
去る戊申己酉の間(1668~1669年のこと)、我が国の筑前州の豪民たちが貴国と通じて密貿易をして磔刑になった事件を東都(江戸)で聞かれたらありのままに答えて下さい。

その四曰く、
二人の長老を接待する時は、古き制度を守って下さい。

その五曰く、
文章を書く時には、諱語を用いないで下さい。。

…この後に「此の五條、煩(わずら)い多く故に抄録にて大旨(おおむね)を書く」とある。


金指南 東槎日録 8月6日
 それでは通信使たちは、掛け軸に書かれた五条を受け入れ、態度を正したのでしょうか?


 いいえ、そうな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どころか対馬の案内に従わず、勝手に出港しようとして島主を困らせたり、またもてなしが用意された所で接待も受けず通り過ぎたりすることがありました。
 同行した金指南の東槎日録に拠ると、八月六日。京都で馬を走らせ、どれもこれも日本人を打って罵るなど横暴なことをしている有様が書かれています。

  

自分の悪い所を指摘されると、余計悪いことをしようとする。


是非、今日の誰かさんたちも反省してもらいたいですね。

┐(´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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