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일본 고대사 - 길비의 할양
http://blog.naver.com/marich77/40105155789
에서 応神王이 明石浦에서 降伏하여 吉備를 신라에 헌납했다는 것을 알았다.

吉備를 신라에 헌납한 이후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기록이 상당 기간 사라지게 된다.

일본의 고대사를 잘 살펴 보면 일본을 차지하기 위한 백제 신라의 전쟁이나 권력가의 암투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쿠데타나 반란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은 吉備의 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본다.
먼저 吉備의 乱에 이르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日本古代史 -吉備の割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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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 応神王が 明石浦で 降伏して 吉備を新羅に献納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った.

吉備を新羅に献納した以後日本書紀で百済の記録が相当期間消えるようになる.

日本の古代史をよくよく見れば日本を占めるための百済新羅の戦争や権力家の暗闘があちこちに位置づくあることが分かる.
それはクーデターや反乱の形態で現われる.

今日は 吉備の  乱を中心に話を解くナがボンダ.
先に 吉備の  乱に至る歴史的滲んだよく見よう.

日本書紀の記事 (仁徳紀以降)
履中天皇  百済記事なし
反正天皇  百済記事なし
允恭天皇3年 使いを遣わして良き医師(くすし)を新羅に求む 中略 天皇厚く医師に賞して国に帰したまう。
      42年 天皇崩御、新羅王これを聞き憂えて調の船を八十艘、及び種々の楽人八十人を奉る。 中略 モガリの宮に参り集う。
安康天皇   記事なし
雄略天皇2年 百済の池津姫、天皇召さんとするに違いて石川盾にたわけぬ。四肢を枝に張りて焼き殺しつ。

 


反正天皇
淡路宮(不詳、淡路島?)で生まれ、容姿美麗であった。生まれながらにしてきれいな歯並であったので、瑞歯別の名があるという。
父仁徳天皇の崩後、叛乱を起こした同母兄の住吉仲皇子を誅殺した。履中天皇2年(401年)に立太子。同6年(405年)に履中天皇が崩御し、翌年(405年)1月に即位。兄弟継承はここに始まる。

신라가 応神王으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던 淡路島에서 反正天皇이 태어났다고 한다.
新羅が 応神王から降参を受け出した 淡路島で 反正天皇が生まれたと言う.

 

允恭天皇
この天皇は重い病を患っていた為、はじめは即位をかたくなに拒んでいた。
しかし、諸々の臣下達や大后達の強い要請にしぶしぶ即位することとなった。

この時、即位の祝いとして新羅から八十一艘もの船に貢物が届いたがその船に大変薬に詳しい者が乗っていた。
名を金波鎮漢紀武という。
彼の治療により、ほどなく天皇の病気は回復した。
이 천황은 무거운 병을 앓고 있던 때문, 처음은 즉위를 완고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신하들이나 대후들의 강한 요청에 마지못해 즉위 하게 되었다.
이 때, 즉위의 축하로서 신라로부터 81척의 배에 공물이 도착했지만 그 배에 대단히 약을 잘 아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름을 金武라고 한다. 그의 치료에 의해, 머지않아 천황의 병은 회복했다.

 

金波鎮漢紀武은 신라의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漢醫의 시조로 숭상받고 있다.
신라의 왕족이 漢醫였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보다는 일본서기의 역사기록이 은유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부터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允恭이  金波鎮漢紀武의 군사세력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으로 안정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즉, 親신라 정권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允恭天皇의 사망시 80척의 대선단이 동원된 것은 允恭의 사망으로 불안해진 친신라정권의 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자.

金波鎮漢紀武は新羅の王族と知られるある. 日本では 漢医の始祖で崇尚受けるある.
新羅の王族が 漢医だったというの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ことよりは日本書紀の歴史記録が隠喩を楽しむ使ったことから政治的基盤がなかった 允恭が 金波鎮漢紀武の軍事勢力の消したもらって政治的に安定を得たと思うのが妥当だろう.すなわち, 親新羅政権が立ち入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允恭天皇の死亡の時 80艘の大船団が動員されたことは 允恭の死亡で不安になった親新羅政権の勢力を支援するためのことに理解しよう.

 

允恭天皇は 中国の歴史書『宋書』・『梁書』に記される倭の五王中の倭王済に比定されている。
451年 宋 元嘉28  済 宋朝・文帝から「使持節都督・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を加号される。安東将軍はもとのまま。(『宋書』倭国伝)


允恭天皇이 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로 봉해진 것은 신라가 일본을 차지한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允恭天皇が 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で封ざれたことは新羅が日本を占めたことを考えて見れば当たり前なのだ.

 

다음으로 吉備가 고대의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아보자.
次に 吉備が古代の日本で占める比重を調べよう.

 

 吉備王国
 岡山県には、日本全国の古墳の大きさランキング第4位の造山古墳(つくりやまこふん)という前方後円墳がある。
また、造山古墳の周辺には、全国9位の作山古墳(さくやまこふん)や、岡山3位の両宮山古墳(りょうぐうざんこふん)など、数多くの古墳がある。それらの古墳がある場所は、かつて吉備王国(きびおうこく)が栄えた地域なんだよ。
ちなみに、全国1位は仁徳天皇陵とされる大仙陵古墳(だいせんりょうこふん)で、全長は約486メートル。2位が応神天皇陵とされる誉田御廟山古墳(ごんだごびょうやまこふん)で、全長約420メートル。3位は履中天皇陵とされる石津丘古墳(いしづおかこふん)で、全長約360メートル。そして4位の造山古墳は約358メートルとされている。
오카야마현에는, 일본 전국의 고분의 크기 랭킹 제 4위의 造山古墳이라고 하는 전방후원분이 있다.
또, 造山古墳의 주변에는, 전국 9위의作山古墳이나, 岡山 3위의 両宮山古墳등, 수많은 고분이 있다.그러한 고분이 있는 장소는, 일찌기 길비왕국이 번창한 지역이다.덧붙여서, 전국 1위는 닌토쿠 천황릉으로 여겨지는 大仙陵古墳으로, 전체 길이는 약 486미터.2위가 응신천황능으로 여겨지는 誉田御廟山古墳으로, 전체 길이 약 420미터.3위는 履中天皇 능으로 여겨지는 石津丘古墳으로, 전체 길이 약 360미터.그리고 4위의 造山古墳은 약 358미터로 되어 있다.

 

大和朝廷の勢力が最も強かったとされる時期の仁徳陵、応神陵が大きいのは当然としても、履中陵と造山古墳の差は僅か2メートルしかない。
つまり、造山古墳の大きさを見ただけでも、5世紀の吉備王国がいかに大きな勢力をもっていたかがわかると思う。 驚くのは、大きさだけではない。実は造山古墳は、仁徳陵、応神陵、履中陵の3つよりも古い時代の古墳の可能性が高いことが、最近の研究によりわかってきたんだよ。これが事実ならば、造山古墳が築造された時点で、吉備王国は大和朝廷をしのぎ、日本列島で最大の古墳をつくっていたことになる。 吉備王国が大和朝廷を陵駕するほどの勢力をもっていた地方国家だったのは間違いない。では、何故それだけの勢力を誇っていたのか?理由は色々あるが、俺が最大の理由として挙げるのは、鉄だ。吉備王国は全国有数鉄の産地であり、豊富な鉄資源を経済基盤として次第にその勢力を拡大していったと考えられるんだよ。
 야마토 조정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고 여겨지는 시기의 인덕능, 응신능이 큰 것은 당연시 해도, 履中陵과 造山古墳의 차이는 불과 2미터 밖에 없다.
즉, 造山古墳의 크기를 봐도, 5 세기의 길비왕국이 얼마나 큰 세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안다고 생각한다. 놀라는 것은, 크기 만이 아니다.실은 造山古墳은, 인덕능, 응신능, 履中능의 3개보다 낡은 시대의 고분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 최근의 연구에 의해 알려졌다.이것이 사실이라면, 履中이 축조 된 시점에서, 길비왕국은 야마토 조정을 넘어서, 일본 열도에서 최대의 고분을 만들고 있던 것이  된다. 길비왕국이 야마토 조정을 능가 할 정도의 세력을 갖고 있던 지방 국가(이었)였던 것은 틀림없다.그럼, 왜 그 만큼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는지?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내가 최대의 이유로서 드는 것은, 철이다.길비왕국은 전국 유수철의 산지이며, 풍부한 철자원을 경제 기반으로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고 생각할 수 있어.

 

雄略天皇は19代・允恭天皇の息子で、20代・安康天皇の弟にあたる。
本来ならば皇太子だった木梨軽皇子が允恭天皇の次の天皇になるはずだった。ところが、木梨軽皇子が同母妹の軽大娘皇女を犯したため群臣が心服しなくなり、弟の穴穂皇子の評価が高まった。木梨軽皇子は穴穂皇子を殺そうとしたんだけど殺害計画は失敗し、木梨軽皇子は自殺、その結果、穴穂皇子が即位して安康天皇になる。 安康天皇が即位した後、大王家同士による皇位継承争いが発生する。これが、まるでヤクザの抗争のような殺し合いの連続だったんだよ。まず安康天皇が、仁徳天皇の息子・大日下王(おうくさかおう)を殺害。万世一系を主張する『日本書紀』によれば、允恭天皇は仁徳天皇の息子となっているから、安康天皇にとって仁徳は祖父にあたる。しかし、実際は仁徳と允恭に血縁関係はなく、それぞれが当時の有力大王家だった。
유랴크 천황은 19대・允恭天皇의 아들로, 20대・安康天皇의 남동생에 해당한다.
본래라면 황태자였던 木梨軽皇子가 允恭天皇의 다음의 천황이 될 예정이었다.그런데 , 木梨軽皇子가 여동생인 軽大娘皇女를 범했기 때문에 군신이 따르지 않게 되어, 남동생인 穴穂皇子의 평가가 높아졌다.木梨軽皇子는 穴穂皇子를 죽이려고 했지만 살해 계획은 실패해, 木梨軽皇子는 자살, 그 결과, 穴穂皇子가 즉위 해 安康天皇이 된다. 安康天皇이 즉위 한 후, 대왕가끼리에 의한 황위계승 분쟁이 발생한다.이것이, 마치 야쿠자의 항쟁과 같은 살인의 연속이었다.우선 安康天皇이, 仁徳天皇의 아들・大日下王을 살해.만세일계를 주장하는「일본 서기」에 의하면, 允恭天皇은 仁徳天皇의 아들이 되고 있기 때문에, 安康天皇에게 있어서 인덕은 조부에 해당한다.그러나, 실제는 인덕과 윤공은 혈연 관계가 없고, 각각이 당시의 유력 대왕가였다.

 

安康天皇にしてみれば、大日下王は対抗勢力の中でも最も邪魔な存在であり、皇位を守るために殺害したわけだ。
 殺された大日下王には目弱王(まよわおう)という息子がいた。父親を殺害された恨みから、目弱王は安康天皇を殺してしまった。目弱王の行動に怒り狂ったのは、安康天皇の弟・大長谷皇子(おおはつせのみこ)だ。兄の復讐に燃えた大長谷皇子は、目弱王を攻撃し、最後は自殺に追い込んでしまう。 普通なら、これで殺し合いは終わるんだろうけど、大長谷皇子は、ついでに他の対抗勢力も排除してしまおうと思いつくんだよ。その標的になったのが、皇位継承候補の有力者で履中天皇の息子・市辺忍歯王(いちのべのおしばおう)だ。それも市辺忍歯王を狩にさそい、何も知らずに狩をしていた市辺忍歯王を襲って八つ裂きにし、その場に埋めてしまう非常に残忍な手口を使っているんだよ。目弱王、市辺忍歯王という対抗勢力を打ち崩した大長谷皇子は、その後即位して雄略天皇となったわけだ。
安康天皇의 입장에서 보면, 大日下王은 대항 세력 중(안)에서도 가장 방해인 존재이며, 황위를 지키기 위해서 살해한 것이다.
 살해당한 大日下王에게는 目弱王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부친이 살해된 원한으로부터, 目弱王은 安康天皇을 죽여 버렸다.目弱王의 행동에 광분한 것은, 安康天皇의 남동생・大長谷皇子다.형(오빠)의 복수에 불탄 오나가타니 황태자는, 目弱王을 공격해, 최후는 자살에 몰아넣어 버린다. 보통이라면, 이것으로 살인은 끝나겠지하지만, 大長谷皇子는, 하는 김에 다른 대항 세력도 배제해 버리려고 생각했다.그 표적으로 된 것이, 황위계승 후보의 유력자로 履中天皇의 아들・市辺忍歯王이다.그것도 市辺忍歯王을 수에 유혹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수를 하고 있던 市辺忍歯王을 덮쳐 여덟 찢어로 해, 그 자리에 묻어 버리는 매우 잔인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어.目弱王, 市辺忍歯王이라고 하는 대항 세력을 쳐부순 大長谷皇子는, 그 후 즉위 해 유랴크 천황이 된 것이다.

 

吉備の反乱

前津屋の反乱
    463年(雄略7年)、宮廷に仕えていた吉備の豪族吉備弓削部虚空(きびのゆげべのおおぞら)が、所用で故郷の吉備に帰った。ところが、雄略天皇に反感を抱く吉備下道臣前津屋(きびのしもつみちのおみさきつや)が、虚空を宮廷に帰そうとしなかった。そこで雄略天皇は、使者を差し向けて、なんとか虚空を連れ戻した。虚空は、この時に次のような報告をした。前津屋は少女を天皇に、大女を自分に見たてて相撲をさせました。少女が勝つと、怒って少女を殺してしまいました。この話を聞いた雄略天皇は、前津屋が謀反を企んでいると悟り、ただちに兵を派遣して前津屋とその一族70人を殺してしまった。
463년(웅략 7년), 궁정을 시중들고 있던 길비의 호족 吉備弓削部虚空이, 용무가 있어 고향의 吉備로 돌아갔다.
그런데 , 유랴크 천황에게 반감을 안은 吉備下道臣前津屋가, 虚空을 궁정에 돌려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그래서 유랴크 천황은, 사자를 보내고, 어떻게든 허공을 데리고 돌아왔다.虚空은, 이 때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前津屋은 소녀를 천황으로, 큰여자를 자신으로 보이게하여 스모를 시켰습니다.소녀가 이기자, 화를 내고 소녀를 죽여 버렸습니다.」이 이야기를 들은 유랴크 천황은, 前津屋가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고 깨달아, 즉시 군사를 파견해 前津屋와 그 일족 70명을 죽여 버렸다.

 

田狭の反乱
   吉備上道臣田狭(きびのかみつみちのおみたさ)は宮廷で、自分の妻である稚媛(わかひめ)がいかに美しく魅力的かを自慢した。それを耳にした雄略天皇は、田狭を朝鮮半島の任那に役人として派遣し、田狭の留守中に稚媛を奪ってしまう。雄略天皇が自分の妻を奪ったことを任那で知った田狭は怒り、雄略天皇と対立していた新羅に援軍を求めて日本に攻め込もうとした。これに対して雄略天皇は、田狭の息子・弟君(おときみ)と吉備海部直赤尾(きびのあまのあたいあかお)を派遣し、逆に新羅を討つよう命じる。朝鮮半島に渡って父・田狭と会った弟君は、田狭を討つどころか逆に父に取り込まれ、謀反を起こす計画を企ててしまう。これを知った吉備海部直赤尾と弟君の妻・樟姫(しょうひめ)は、弟君を殺害して日本に帰国した。
吉備上道臣田狭은 궁정에서, 자신의 아내인 치원이 얼마나 아름답게 매력적인지를 자랑했다.그것을 들은 유랴크 천황은, 전협을 한반도의 임라에 공무원으로서 파견해, 전협의 부재중에 치원을 빼앗아 버린다.유랴크 천황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것을 임라에서 안 전협은 화내, 유랴크 천황과 대립하고 있던 신라에 원군을 요구하고 일본에 쳐들어가려고 했다.이것에 대해서 유랴크 천황은, 전협의 아들・弟君과吉備海部直赤尾를 파견해, 반대로 신라를 토벌하도록 명한다.한반도에 건너 부・전협과 만난 제군은, 전협을 토벌하기는 커녕 반대로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지고 모반을 일으킬 계획을 기획해 버린다. 이것을 안 弟君(おときみ)と吉備海部直赤尾와 제군의 처・장희는, 제군을 살해해 일본에 귀국했다.

 

星川王子の変
『日本書紀』によると、雄略天皇は死の直前、大伴室屋(おおとものむろや)と東漢直掬(やまとのあやのあたいつか)に対して、「星川王子は悪心を抱いている。自分の亡き後は、皇太子の白髪王子に治めさせよ」といった遺言を残したという。雄略天皇の妃となった稚媛は2人の子供を生んだんだけど、そのうちの1人が星川王子(ほしかわおうじ)だ。
白髪王子(しらがおうじ)は、雄略天皇と韓媛(からひめ)のあいだに生まれた子供で、生まれたときから白髪だったという。
この白髪王子が後の清寧天皇である。
 雄略天皇がそうした遺言を残したのは、稚媛と星川王子が謀反する可能性があると感じていたからで、その心配は彼の死後に現実のものとなった。
何としてでも星川王子を天皇の位につかせたかった稚媛は、いきなりとんでもない行動に出たんだよ。
大和朝廷には三蔵(みつのくら)という財庫があった。
三蔵は、神宝を蔵する斎蔵(いみくら)、皇室の財物を蔵する内蔵(うちつくら)、政府の財物を蔵する大蔵(おおくら)の三つの蔵の総称なんだけど、稚媛は星川王子をそそのかして大蔵を奪わせたんだよ。
大蔵の中にある財物は大和朝廷にとって重要なものばかりだったから、これを奪うとは謀反以外の何者でもないよな。
この謀反には、稚媛と吉備田狭とのあいだに生まれた子供たちも兵をひきいて加わっている。
 大伴室屋と東漢直掬は雄略天皇の遺言を守るために大軍を率いて大蔵を包囲させた。
そして、出入り口をふさいで外から火を放ち、星川王子らをすべて焼き殺してしまったんだよ。
 一方、吉備王国でも星川王子がクーデターを起こしたという知らせを受け、四十隻もの軍船を率い瀬戸内海を進んで大和へ攻め上ろうとしていた。
しかし、大阪湾でクーデターの失敗を知り、吉備へ引き返している。
大和朝廷はこの時の行動を責め立て、吉備王国の山林を没収し、大和朝廷の直轄地としてしまった。
「일본 서기」에 의하면, 유랴크 천황은 죽기 직전, 大伴室屋와 東漢直掬에 대해서, 「호시카와 왕자는 악의를 안고 있다.자신의 사후는, 황태자인 白髪王子에 통치를 맞겨」(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랴크 천황의 왕비가 된 치원은 2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의 1명이 호시카와 왕자(밖에 원지난날)다. 白髪王子는, 유랴크 천황과 한원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태어났을 때로부터 백발이었다고 한다. 이 白髪王子가 후의 清寧天皇이다.
 유랴크 천황이 그러한 유언을 남긴 것은, 치원과 호시카와 왕자가 모반 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 걱정은 그의 사후에 현실의 것이 되었다.뭐라고 해서라도 호시카와 왕자를 천황의 자리에 앉게 하고 싶었던 치원은, 갑자기 터무니 없는 행동을 취했다.
야마토 조정에는 三蔵이라고 하는 재고가 있었다.
三蔵는, 神宝를 소장하는 斎蔵, 황실의 재물을 소장하는 内蔵, 정부의 재물을 소장하는 大蔵의 세 개의 창고의 총칭이지만, 치원은 호시카와 왕자를 부추기고 大蔵를 빼앗게 했다.大蔵 안에 있는 재물은 야마토 조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모반알 수 밖에 없다. 이 모반에는, 치원과 吉備田狭과의 사이로 태어난 아이들도 군사를 끌어 있어 더해지고 있다.  大伴室屋와 東漢直掬은 유랴크 천황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 대군을 인솔해 大蔵를 포위시켰다.그리고, 출입구를 막고 밖으로부터 불을 질러, 호시카와 왕자등을 모두 구워 죽여 버렸다.
 한편, 길비왕국에서도 星川王子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 통지를 받아 40척의 군선을 인솔해 세토나이카이를 진행하고 大和에 쳐올라가려 하고 있었다.그러나, 大阪湾에서 쿠데타의 실패를 알고, 길비로 되돌리고 있다.야마토 조정은 이 때의 행동을 몰아세워 길비왕국의 산림을 몰수해, 야마토 조정의 직할지로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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