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日本文明の開化 - 仏教の伝来

불교전래사은비(佛教伝来謝恩碑 : 1972)
일본 불교는 일본국 흠명조(서기 552년)에 백제 26대 성왕이 전한 데에서 시작된다.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룩하였다. 일본 불교도는 그 은덕(恩德)을 천추(千秋)에 잊을 수 없어 정성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저 한국불교도의 협찬을 얻어서 성왕의 옛 도읍지인 이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日本の仏教は 日本国欽明朝(西暦552)に百済国聖明王により始めて伝来され 爾来発展を重ねて日本文化の精華となった.日本の仏教徒はその恩義を千載に忘れることが出来ない.よってここに感謝の誠を現わすため韓国仏教徒の御好意のもと聖明王の旧都であるこの地に謝恩碑を建立しもって日韓両国民の永遠にわたる親善の証とし延いて世界平和の象徴たらしめたいと念願するものである"

백제 26대 聖明王이 일본에 전한 것을 기념하여 佛教伝来謝恩碑( 1972)를 세웠다고 합니다.
잠시 日本国欽明朝(西暦552)의 내용을 살펴 봅시다.
百済 26台 聖明王が日本に伝えたことを記念して 佛教伝来謝恩碑( 1972)を立てたと言います.
しばらく 日本国欽明朝(西暦552)の出したよく見ましょう.

“(欽明天皇13년)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是法於諸法中,最爲殊勝.難解難入.周公.孔子,尙不能知.此法能生無量無邊福德果報,乃至成辨無上菩提.譬如人懷隨意寶,逐所須用,盡依情,此妙法寶亦復然. 祈願依情.無所乏.且夫遠自天竺,爰泊三韓,依敎奉持,無佛尊敬.由是,百濟王臣明,謹遣陪臣怒唎斯致契,奉傳帝國,流通畿內.果佛所記我法東流.是日, 天皇聞己,歡喜踊躍,詔使者云,朕從昔來,未曾得聞如是微妙之法.
(킨메이 천황13년) 겨울철 10월에 성명왕, 다른 이름은 성왕(聖王)은 서부희씨노리사치계 등을 파견하여, 석가부처님의 금동불상 1구. 불구(佛具) 약간. 불경 몇몇 권을 올려 바쳤다. 별도로 왕에게 여쭙기를 부처님을 널리 예불하는 공덕을 찬양하면서, ‘이 불법(佛法)은 세상 모든 법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깨닫기 어려우며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주공과 공자 조차도 아직 이 법을 터득하지 못한 처지였으나, 이 법은 헤아릴 길 없고 끝간 데 없이 복덕과 과보를 베풀고, 가장 훌륭한 보리(菩提)를 이루게 하며, 이를테면 사람이 수의보주를 품고 무엇이고 간에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멀리 천축(옛날 인도 : 필자 주)으로부터 삼한(마한, 진한, 변한 : 필자 주)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따르며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제왕 신(臣) 명(明)은 삼가 거느리는 시신 노리사치계를 파견하고 제국에 전하여 나라 안에 유통시킴으로써, 부처님이 우리 불법은 동방으로 전하라고 하신 사명을 다하려하는 바입니다’고 말했다. 이날 천황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불교전래의 순간을 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에서 보듯이  獻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종교를 강압하는 장면은 수없이 나와도  獻하는 사례는 이것을 제외하고 또 있을까요?
일본에 어떤 과정을 거쳐 불교가 전래되는지 집중 탐구하여 봅시다.
仏教伝来の瞬間を 献釈迦仏金銅像一躯.幡蓋若干.経論若干巻で見るように 献という表現を使うあります.
世界史を見れば宗教を強圧する場面は数えきれなく出てきても 献する事例はこれを除くまたありましょうか?
日本にどんな過程を経る仏教が伝来されるのか集中探求して見ましょう.

538年(552年説もある),百済の聖明王の使いで訪れた使者が欽明天皇に金銅の釈迦如来像や経典,仏具などを献上したことが仏教伝来の始まり。天皇は礼拝すべきかを臣下たちに問うと,大陸の優れた文化である仏教を受け入れるべきと蘇我稲目が答えたのに対して,物部尾輿や中臣鎌子らは外国の神を受け入れれば,日本古来の「神(国つ神)」が怒るという理由から,仏教に反対し,徹底的に排除するべきと言った。そこで天皇は試しに拝んでみるようにとこれらを蘇我稲目に授けた。稲目は小墾田の自宅に安置し,向原(むくはら)の家を浄めて寺とした。この時より向原の家は日本最初の寺となった。国内で疫病が流行った時,尾輿はその原因が仏教のせいだと批判した。そのため,570年に稲目が死去すると,天皇の許可を得て稲目の寺を焼き払った。家は焼けても仏像は燃えなかったため,仕方なくこれを難波の堀江に投げ込んだ。しかし,疫病はなくならず天災も続いた。後に推古天皇はここ向原の地を宮とした。小墾田の宮に移った後は豊浦寺(とゆらじ)となった。
538 년(552년설도 있다), (쿠다라)백제의 성명왕의 사절로 방문한 사자가 欽明天皇에게 금동의 석가 여래상이나 경전, 불구등을 헌상 했던 것이 불교 전래의 시작.천황은 예배해야할 것인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 대륙의 뛰어난 문화인 불교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蘇我稲目가 대답한 것에 대하고, 物部尾輿나 中臣鎌子등은 외국의 신을 받아 들이면, 일본 고래의 신이 화낸다고 하는 이유로, 불교에 반대해, 철저하게 배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거기서 천황은 시험삼아 믿어 보도록 이것들을  蘇我稲目에게 하사했다. 蘇我稲目은 小墾田의 자택에 안치해, 向原의 집을 깨끗이하고 절로 했다.이 때부터 向原의 집은 일본 최초의 절이 되었다. 국내에서 역병이 유행했을 때, 尾輿는 그 원인이 불교의 탓이라고 비판했다.그 때문에, 570년에 稲目이 사망하면, 천황의 허가를 얻어 稲目의 절을 다 태웠다.집은 타도 불상은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나니와의 堀江에 던졌다.그러나, 역병은 없어지지 않고 천재지변도 계속 되었다. 후에 스이코천황은 여기 向原의 땅을 궁으로 했다.小墾田의 궁으로 옮긴 다음은 豊浦寺이 되었다.

聖明王이 불교를 믿을 것을 명령하자 일본의 신을 신봉하던 세력(신라계 세력)들이 일제히 반발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흔히 역병은 역사에서 내란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推古天皇이 向原의 땅에 궁을 옮긴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聖明王が仏教を信じることが言い付けると日本の神を信奉した勢力(新羅係勢力)たちが一斉に反撥する姿が見えます. よく疫病は歴史で內亂を隠すために使われる表現です. ところで 推古天皇が 向原の地に宮を移したことは何の理由がありましょうか?

推古天皇
用明元年夏5月(586年)、敏達天皇の殯宮に穴穂部皇子が侵入し、皇后は寵臣三輪逆に助けられたが、逆の方は殺されるはめとなった。
その後、用明天皇が2年ほど皇位に在ったが、用明2年4月乙巳朔癸丑(旧暦4月9日『古事記』では4月15日)(587 年)に病没後、穴穂部皇子を推す物部守屋と崇峻天皇を支持する蘇我馬子が戦い、蘇我氏の勝利に終わった。そこで皇太后(額田部皇女)が詔を下して泊瀬部皇子(崇峻天皇)に即位を命じたという。しかし、5年後の祟峻5年11月癸卯朔乙巳(旧暦11月3日)(592年)には崇峻天皇が馬子の指図によって暗殺されてしまい、翌月である12月壬申朔己卯(旧暦12月8日)に、先々代の皇后であった額田部皇女が、馬子に請われて、豊浦宮において即位した。時に彼女は 39歳で、史上初の女帝となった(ただし、神功皇后と飯豊皇女を歴代から除外した場合)。
用明元年 여름 5월(586년), 敏達天皇의 빈궁에 穴穂部皇子가 침입해, 황후는寵臣三輪逆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은 살해당하는 지경되었다.
그 후, 用明天皇이 2년 정도 황위에 있었지만, 用明 2년 4월 을미삭계축(음력 4월 9일「고사기」에서는 4월 15일)(587년)에 병사후, 혈수부 황태자를 추종하는 物部守屋와 崇峻天皇를 지지하는 蘇我馬子가 싸워, 蘇我씨 승리에 끝났다.거기서 황태후(額田部皇女)가 조를 내려 泊瀬部皇子(崇峻天皇)에게 즉위를 명했다고 한다.그러나, 5년 후 祟峻슌5년 11월계묘삭을미(음력 11월 3일)(592년)에는 崇峻天皇가 馬子의 지시에 의해서 암살되어 버려, 다음달인 12월임신삭기묘(음력 12월 8일)에, 先代의 황후인 額田部皇女가, 馬子에 청해지고, 豊浦宮에서 즉위 했다.당시 그녀는 39세에, 사상최초의 여제가 되었다(다만, 神功皇后와 飯豊皇女를 역대부터 제외했을 경우).

치열한 권력 다툼 끝에 先代의 황후인 額田部皇女가 推古天皇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런데 推古天皇의 등극에는 일본 불교역사에 가장 빛을 내는 聖徳太子의 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熾烈な権力争いあげく 先代の皇后である 額田部皇女が 推古天皇で上がりました. ところで 推古天皇の登極には日本仏教歴史に一番光を出す 聖徳太子の力が絶対的でした.

聖徳太子
戦後、馬子は泊瀬部皇子を皇位につけた(崇峻天皇)。しかし政治の実権は馬子が持ち、これに不満な崇峻天皇は馬子と対立した。崇峻天皇5 年(592年)、馬子は東漢駒(やまとのあやのこま)に崇峻天皇を暗殺させた。その後、馬子は豊御食炊屋姫を擁立して皇位につけた(推古天皇)。天皇家史上初の女帝である。厩戸皇子は皇太子[2]となり、推古天皇元年(593年)4月10日に、摂政となり、馬子と共に天皇を補佐した。同年、厩戸皇子は物部氏との戦いの際の誓願を守り、摂津国難波に四天王寺を建立した。推古天皇2年(594年)、仏教興隆の詔を発した。
전후, 蘇我馬子는 泊瀬部皇子를 황위에 붙였다(崇峻天皇).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馬子가 가져, 이것에 불만인 崇峻天皇는 馬子와 대립했다.崇峻天皇5년(592년), 馬子는 東漢駒에 崇峻天皇를 암살시켰다.그 후, 馬子는 豊御食炊屋姫를 옹립 하고 황위에 붙였다(推古天皇).천황가 사상최초의 여제이다.厩戸皇子(聖徳太子)는 황태자가 되어, 스이코천황 원년(593년) 4월 10일에, 섭정이 되어, 마부와 함께 천황을 보좌한다.동년, 厩戸皇子는 모노노베씨와의 싸움때의 서원을 지켜, 摂津国難波에 시텐노우지를 건립했다.스이코천황 2년(594년), 불교 융성의 조를 발했다.

太子가 天皇의 섭정이 되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만 감춰진 이유가 있겠지요.
고대 일본의 유력 호족들은 조상의 명복을 비는 씨족의 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가씨 씨족의 절이 바로 일본 최고(最古)의 아스카사(飛鳥寺)입니다.
太子が 天皇の攝政になったということは誰がドルオも変に感じられますがガムツォジン理由がありますね.
古代日本の有力豪族たちは先祖の冥福を祈る氏族の寺を持つあったがこの蘇我さん氏族のお寺がすぐ日本最古の飛鳥寺です.

 특히 이 절의 기둥을 세우는 날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1백여 명이 모두 백제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를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부상략기(扶桑略記)』에 보입니다.
「扶桑略記」に奇妙な記述があると。
「593年 飛鳥寺木塔の心柱を立てる儀式があり 蘇我馬子が100人以上の人を従えてやってきたが 全員百済の服を着用していて 観衆はそれを見て喜んだ。」
聖明王이 불교를 믿을 것을 명령한 552년 이후 41년이 흘러서 마침내 백제 세력이 천하를 평정하고 불교국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기뻐한 백제 威德王은 일본에 불교를 보급한 聖明王을 추존하도록 救世觀音을 만들어 보냅니다.
聖明王が仏教を信じることが言い付けた 552年以後 41年が経つ遂に百済勢力が天下を平定する仏教国を立てました. これを喜んだ百済 威徳王は日本に仏教を普及した 聖明王を追尊するように 救世観音を作る送ります.

호 류지(法隆寺)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 : 1394~1427)』의 기록에 위덕왕은 아버지(성왕)를 그리며 이 구세관음상을 만들었으며 성명왕이 서거한 뒤 다시 태어난 분이 바로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라고 합니다. 이 전생에 관한 내용의 사실성보다도 聖徳太子 태자를 성명왕(성왕)의 후신으로 일반적인 생각이 퍼져 있음이 고려할만합니다. 즉 쇼토쿠 태자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인데 이 분이 전생에 바로 성왕이었다는 말입니다.
法隆寺の古文書である 『聖誉抄 : 1394~1427)』の記録に威徳王はお父さん(聖明王)を描いてこの救世観音像を作ったし聖明王が逝去した後生まれ変わった方がすぐ日本の聖徳太子と言います. この前世に関する内容のリアリティーよりも 聖徳太子を聖明王の後身で一般的な考えが広がるあることが考慮するに値します. すなわち聖徳太子は観世音菩薩の化身に認識されるあり日本で一番尊敬される上である中一人なのにこの方が前世にすぐ聖明王だったというね.
聖譽抄 : 故威德王 戀慕父王 狀所造顯之尊像 卽救世觀音像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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