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교ㆍ월정교는 『삼국사기(三國史記)』경덕왕조(景德王條)에 ‘十九年(760년)…二月…宮南蚊川之上起春陽月淨二橋 궁의 남쪽 문천상에 春陽,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서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春阳橋,月净橋は『三国史記(三国史记)』景徳王朝(景德王条)に”十九年(760年)...二月宮南蚊川之上起春陽月淨二橋 宮の南 蚊川の上に 春陽,月淨 2つの橋を置いた。”という記録で伝えるの橋として判断されている。
제38대 원성왕(元聖王 785~799 재위기간 14년)
十四年春三月(십사년춘삼월) : 14년 봄 3월,
宮南樓橋災(궁남루교재) :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이 기록을 통해서 月淨橋는 樓橋 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第38代元聖王 (785〜799在位期間14年)
十四年春三月:14年の春3月、
宮南樓橋災:宮の南の樓橋に火災がした。
この記録を通って月淨橋は樓橋型という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
교지(橋址)로 본 이 다리는 4개의 교각(橋脚)을 12m60cm씩 간격으로 세우고 두번에 걸쳐 만들어진 교각(橋脚)이었다. 다리의 총 길이는 63m가 되고 다리 폭은 14m 내외가 되었다. 第3號 第4, 교각(橋脚)에서 볼수있는 최초의 다리는 8개의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네개씩 모아 세운 교각이였으며 교각(橋脚)과 교각(橋脚) 사이에는 나무를 걸어서 두꺼운 판자를 깔았거나 판석을 깔았을 것이다. 교각(橋脚)과 교각(橋脚)과의 12m60cm의 간격은 석재로 보를 걸기에는 너무 긴 거리다.
橋址で見たこの橋は、4つの橋脚を12m60cmずつの間隔で設置し、二度にもわたって作られた橋脚だった。足の長さは63mになり、橋の幅は14m前後となった。第3号第4、橋脚に見ることができる、初めての橋は8本の石柱や木柱を4つずつ集めて建てた橋脚のであり橋脚と橋脚の間には、木の厚い板を引いたり、板石を敷いたのである。橋脚と橋脚との12m60cmの間隔は、石材に天板を設置することにあまりにも長い。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60호이다. 5세기 초에 대동강에 설치된 나무다리로, 대성구역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암동을 이어주던 나무다리 유적이다.
다리 가운데 부분은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을 통해 보면 귀틀 모양으로 짠 듬직한 지지기둥 위에 세로 보와 가로 보를 견고하게 맞물린 지지보를 놓은 다음 깔판을 깔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교각에는 못이나 꺽쇠 같은 쇠붙이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다리의 규모는 전체길이 375m·너비 9m이며, 길이 8~10m·너비 0.38m·두께 0.26m인 굵은 나무 각재를 사용하였다.
오래되고 규모가 크기로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나무다리이다. 커다란 나무부재를 견고하게 조립한 솜씨를 볼 때 고구려 사람들의 목조건축기술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다리의 골조와 함께 기와 및 질그릇이 발견되었다. 대동강 건너 다리 북쪽에는 고구려 유적인 대성산성과 안학궁, 청암리성, 고방산성이 있고 대동강 건너 남쪽에는 고구려 시조 무덤인 동명왕릉과 정릉사가 있다. 따라서 이 다리의 역할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北韓の国宝文化遺物第160號である。 5世紀前半の大同江に設置された木橋として、大城區域の淸湖洞 と寺洞區域 の休岩洞を 続いてくれた木橋の遺跡である。
橋の中央部分は既になくなってしまった。しかし、残りの部分を調べてみると上がり框の形で組んだの強い支持の柱の上に縦梁横梁を強固にかみ合う支持梁を配置し、パレットを敷いて手すりを設置した。桟橋には、釘やけいれんなどの鉄を一つも使かなかった。橋のサイズは、全長375m ·幅9m、長さ8〜10m ·幅0.38m厚さ0.26mの太い木の角材を使用している。
古く、規模が大きさは、世界的に珍しい木橋である。大きな木の部材を強固にまとめた技量を見たときに、高句麗の人々の木造建築技術の高いレベルを知ることができる。
この場所で橋の枠組みと一緒に瓦や土器が発見された。大同江渡り橋の北側には高句麗の遺跡である大城山城,安鶴宮、淸岩里城、高坊山城があり、大同江の南側には、高句麗の始祖の墓に明王陵と定陵寺である。そのため、この橋の役割を十分に推測して見ることができる。
春陽校・月決め校は 『三国史記(三国史記)』景徳王組(景徳王條)に ‘十九年(760年)…二月…宮南蚊川之上起春陽月浄二橋 弓衣南側文天祥に 春陽,月浄 二つの足を掛けた.’という記録から伝える橋梁と判断されている.
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