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후지메(藤目) 유끼 (大阪外國語大 교수)

 


머 리 말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전으로 종결되고, 연합군에 의한 일본점령이 시작된다. 실질적으로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이었다. 중국혁명의 진전과 한국에서의 민중항쟁, 한국전쟁 등, 아시아 지배의 위기를 배경으로, 미국은 재군비와 전후 배상의 경감을 통해서 일본을 조기에 부흥시켜 아시아의 반공 방파제로 기능시키기 위한 대일정책을 취한다. 한국전쟁기의 일본은 미군의 한반도를 향한 출격, 병참, 보급을 지탱하는 전진기지가 된다. 한국전쟁중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보장조약에 따라, 일본은 친미반공의 국제체제에 굳게 결합하게 된다. 1953년 7월의 한국 휴전협정조인에 따라 재일 미군의 인원은 축소되지만, 미군의 기지확대 요구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54년에는 미일 MSA협정이 조인되어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결합이 강화되어 간다.

본 보고에서 다루는 것은, 이와 같은 미일관계의 정치적, 군사적인 틀 속에서 야기된 미군에 의한 본토 일본인 여성의 성적 유린을 둘러싼 문제이다. 연합국총사령부(GHQ)의 일본민주화 5대 지침의 하나였던 「부인참정권 부여에 의한 일본여성의 해방」지침이나, GHQ에 의한 여성단체의 육성 및 활동의 장려, 또 「폐창령(廢娼令)」의 포고 등, 미국에 의한 일본점령은 여성해방을 가져온 것이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점령이 시작된 1945년부터 매춘방지법이 제정되는 1956년까지의 일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체험은 그와 같은 해방군으로서의 미군상(美軍像)이나 「해방된 일본여성」이란 여성사상(女性史像)의 일면성, 혹은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다.

 

(1) 강간범죄 

 

미군에 의한 일본여성 강간사건은 점령 직후부터 빈발한다. 최초의 사건으로 거론되는 것은 2명의 해병대원이 요코스카(橫須賀)의 민가 뒷문으로 침입하여 36세의 주부와 17세의 딸을 권총을 들이대고 강간했다는 사건이다. 미군이 진주한 각 지역에서는 민가의 문을 부수고 침입한다거나, 길거리에서 지프로 납치한다거나, 강변이나 공원에서 덮친다거나 하는 강간·윤간사건이 연속된다. 점령 1개월 동안에 전국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일본정부에서 실시한 최소한의 추정으로 3,500명을 넘고 있다고 한다. 점령초기의 혼란이 진정되어도 미군병사의 성범죄는 끊이지 않아, 오히려 「여자사냥」이라 불리는 집단강간범죄가 늘고 흉포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성윤리의 2중 기준이 여자에게 엄격히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이 피해를 일생의 오명으로 짊어지고 가게 된다. 당시의 일본에서도 성폭력 피해는 주위에서 감추는 것이 다반사이고 피해를 신고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본부 발표의 강간피해자 수가 1946년 30명, 47년 283명, 48년 265명, 49년 312명에 달한다.

GHQ는 점령 초기부터 신문·라디오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통해서 미군병사의 일본여성 성폭력 사건에 대한 보도는 점령목적에 위반한다고 하여 금지하였다. 보도는커녕, 폭행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다. 1946년에는 미군병사 6명과 그들의 여성폭행을 저지하려 했던 까마타빡(蒲田町) 자경단과의 난투를 시초로 한 까마타(蒲田)사건이 발생하자, 미점령군은 이에 대한 징벌로서 동경과 까마타빡 간의 도로를 봉쇄하고 까마타빡 회장과 자경단원은 군사재판에서 각각 종신형에서 20년형을 선고받는다. 1947년 1월에 GHQ는 읍회(町內會)·부락회의 폐지를 명했는데, 이것은 「미군병사의 강도·여자사냥 사건에 대하여 일본이 자경단으로 저항했던 일에 대한 GHQ의 조치」였다고도 이야기된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재일 미군의 증강과 병사들의 심리가 영향을 미쳤는지 범죄건수는 부쩍 많아진다. 사세보(佐世保)·후꾸오까(福岡)·쿠레(吳)·이따미(伊丹)·요코하마(橫浜)·요코스카(橫須賀)·大三澤·치도세(千歲)와 같은 전진기지의 주변에서는 매일같이 피비린내 나는 상해사건이 일어나고 강간사건이 격렬하게 발생하였다. 기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 급사, 간호부 등이 사무가 많다는 이유로 퇴근이 금지되고, 집단적으로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정령해제 후에도 안보조약의 존재 때문에 미군에 의한 범죄는 그치지 않고, 해제된 다음 날부터 반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강간사건은 102건에 달한다.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은 1953년 7월에 조인되지만, 그 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철수해 온 미군의 범죄가 다발하여 54년에는 우지시(宇治市) 오오쿠보(大久保)의 초등학생이 강강당하여 회복불능의 열상을 당하는 사건을 비롯하여 흉악한 강간사건이 번번히 일어나고 있다.


52년 4월 점령해제 이후, 그때까지 공표·고소를 금지당하고 있던 미군병사의 성범죄 사건이 점차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미일안보조약에 바탕을 둔 행정협정에서 미군병사가 일본 국내에서 일으킨 모든 범죄에 대하여 미국측이 전속재판 관할권을 행사하는 권한이 규정되어 있어서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국 송환으로 유야무야되거나, 체포되었으면서도 미 군법정에서 간단히 무죄가 되는 등, 피해자측은 피해를 호소해도 결국에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53년 10월에 이러한 것이 일부 개정되어 공무집행 중이 아닌 범죄에 대한 재판권은 일본측으로 넘어왔지만, 미군측으로부터 수사를 저지당하거나 일본측에서도 검찰 자신이 대미관계에 신경을 써서 기소하려 하지 않는 등, 가해자를 심판하고 죄를 묻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2) 제도화된 매춘


심판할 수 없는 강간사건과 표리일체였던 것이 매춘의 제도화였다.

다른 제국주의군대와 마찬가지로 미군에서도 강간과 함께 압도적인 물질력으로 식민지·점령지의 여자들을 굴복시켜 「매춘」하는 일은 긴 세월의 관행이었다. 「매춘」을 전제로 한 데다가 미군이 중시한 것은 성병에 의한 군대의 전력 저하이며, 그 대책이 여자들에 대한 관리―강제 성병검진의 제도화이다. 해외에 주둔하는 미군의 매춘관리는 1898년의 필리핀점령 직후부터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세계 각지에서 미군은 현지의 매춘시설을 직접·간접으로 관리하고 여자들에게 성병검진을 강제하고 있었다. 일본점령에 이르러서도 미군은 이 관행을 지켰다. 긴 공창제도의 역사를 가지고 전시에는 「위안부」 연행을 국책으로 해 온 일본정부측은 능동적으로, 혹은 이렇다할 저항도 없이 미군의 매춘과 성병예방을 보장했다. 그 양자의 협력에 의하여 미군병사가 성병에 걸릴 염려없이 매춘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의 기초가 점령개시 후 반년 정도 사이에 만들어지게 된다.


미군은 일본에 진주한 각 부대가 동경에 도착하면 곧바로 동경 내의 사창지역을 시찰하고 그 가운데 4개소에 미군의 성병예방을 위한 세정소독소를 설치했으며, 여기에서 이로부터 일개월 정도 사이에 매주 7천에서 만회의 처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GHQ는 9월 하순, 동경도 위생국에 대하여 동경도 내의 사창가에 대한 설명과 여성의 알선을 요구하는 한편, 점령군 병사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동경도의 책임 하에 여성의 검진을 엄격하게 실시하도록 명령하여, 그 결과 1개월 후에는 매춘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는 여성에 대한 강제검진을 합법화하는 성병예방 규칙이 제정된다. 드디어는 이것이 11월에는 전국화해 간 것이다. 한편, 일본정부는 항복하여 불과 3일째인 8월 18일, 점령군용으로 성적 위안시설을 준비하여 그 영업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며 빠르고 충실한 설비를 도모하도록 전국에 지시, 이어서 유곽과 기생집, 요정, 카페, 또 산업전사위안소의 업자들에게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을 결성시켜 1억엔의 예산을 투입 관계관청을 동원하였다. 최초로 개점한 RAA의 위안소에서는 일본군의 병참사령부에서 고안했던 종군위안소 규칙을 전부 참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점령 2, 3개월 사이에 매춘전문점이나 캬바레, 댄스홀, 맥주홀 등 점령군에게 여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전국 각지에서 지방청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전후 처리의 국가적 시설의 일단으로서 진주군 위안의 대업에 참가하는 신일본여성의 솔선협력을 구함」이라 하여 숙소·피복·식량지급을 약속하는 RAA의 공고에 패전직후 아사상태에 있던 많은 여성이 모여들어, 최성기에는 7만명, 이듬해 봄의 폐쇄시에는 5만 5천명의 여성이 일하고 있었다. 미군은 이와 같이 일본측으로부터 제공받은 성적 「위안」을 향유하면서, 댄서나 맥주홀 종업원까지 포함하여 실제로 미군병사와 관계를 갖든 갖지 않든 간에 RAA의 여자들에게 강제적인 성병검진을 시켰다.

그래도 매춘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던 미군병사들 사이에 성병은 당연히 만연하여 맹위를 떨친다. 46년 1월에 GHQ의 폐창령이 나오고, 3월에는 RAA소속의 위안시설에 장병의 출입을 금하는 금지령이 나온 배경에는 이와 같은 성병의 위협이 있었다. GHQ는 폐창령에 의하여 수세기에 걸친 일본의 노예제도를 일소하고, 몸을 파는 고해에 빠진 일본여성의 구원자인 것 같은 이미지를 세계에 유포해 왔다. 그러나 폐창령에 따라 창기단속 규칙 등은 폐기되었지만, 말뜻 그대로의 의미로서 공창제도, 즉 공권력에 의한 관리매춘제도의 폐기를 GHQ도 추구했던 것은 아니고, 일본정부에도 그러한 생각은 없었다. 머지않아 구 기생집이 접대소, 구 창기가 접객부, 유곽이 특수음식점가·아카센(赤線) 등으로 호칭은 바뀌었지만, 전쟁 전부터 있었던 공창제도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집창(集娼)·매춘부로부터의 세금징수·성병검진의 강제는 계속되었다. 공창제도는 철폐는커녕 전후에는 미군용의 새로운 공창지구 마저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 진상이다.


(3) GHQ 폐창령의 허실


여성의 해방자·몸을 파는 여성의 구제자라는 유포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GHQ에 의하여 일본여성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조직적 성폭력 피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리꼬미(Round Up)」라 불리웠던 일제검거에 의한 강제 성병검진, 강제치료의 피해이다. 검진이란 말은 위생적인 일, 혹은 본인을 위한 일이 실시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집창지구의 여자들에게 실시된 성병검진의 실태는 그것 자체가 잔인한 성폭력이었다. 미군과 그 지시를 받은 일본정부·지방청은 미군병사를 성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집창지구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그 폭력을 가두로까지 확대하였다. 거리에서 여성을 다짜고짜 납치하여 강제적인 검진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폭력을 합법화한 것이 앞서 언급한 성병 예방법이다. 최초의 「가리꼬미」는 폐창령의 4일 뒤인 1월 28일에 동경에서 실시되어 그 후 전국에서 거듭 실행되었다. 3월의 RAA폐쇄는 수많은 여자들의 일거리를 빼앗았지만, 그 대부분이 노상 매춘(街娼) 이외에 따로 살 길을 마련할 수 없었다. 각지에 노상 매춘이 급증하고 더우기 성병이 만연하여, 8월의 전국적인 「가리꼬미」에서는 대략 만 5천명이 체포되었다. 「가리꼬미」는 49년 9월까지 미 헌병의 지휘로 이루어지고, 그 이후는 일본측이 일체를 인수하였다. 미 헌병이나 일본관헌이 거리에서 매춘을 한다고 의심하는 것만으로 저항도 못하고 폭력적인 연행이 자행되었다. 우연히 일제검거 구역안을 통행하던 중에 이유불문하고 트럭에 밀어 넣던가, 미군병사와 동숙하고 있는데 적발되어 나체로 연행되는 등, 인권유린도 지나치게 심한 난폭한 검거가 당연지사처럼 행해졌다. 검진하는 자리에서 다수의 일반 장병이 「성병교육」이라 사칭하여 세워놓고 구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부나 여학생, 근로여성들이 「매춘부」로 의심받아 검진을 강제당하는 이른 바 미스 캐치(miss catch)도 드물지 않았다. 강제검진의 충격과 치욕은 자살자가 나올 정도로 심각하였다. 당시의 매춘부 중에는 미스 캐치된 체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강제검진에서 받은 타격은 피해여성으로 하여금 자포자기토록 만들어 「신세를 망치는」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미군은 길거리 매춘부와 노는 일이나 집창지역에서의 매춘을 막지도 않았고, 미군기지 주변에는 새로운 공창지구까지도 생겨나게 하였다. 후생성이 발표한 1952년의 미군병사 상대의 노상 매춘은 7∼8만명 이상이었다. 미군병사는 그들이 「돈으로 사는」 일본인 여성을 「노란색 변기(Yellow Stool)」라 불렀다고 한다. 전국 각지의 미군기지 주변에서 팡팡하우스(가창이 영업하는 집: 역자주), 캬바레, 빠, 기프트 숍, 호텔 등의 시설이 즐비한 집창지역이 생겨나, 여자들은 성병검진이 의무화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일본은 미군의 성적 「위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미군은 나라(奈良), 요코스카(橫須賀), 꼬쿠라(小倉) 등에 한국전선에서 돌아온 휴가병사들에게 휴양과 위안을 시키는 시설로서 RR센터(Rest & Recreation)를 개설한다. 나라시의 센터는 53년 5월에 설치되었는데, 미군병사들이 막대한 유흥비를 쓴다고 하여 주변에는 순식간에 원색으로 장식된 영어표기가 되어있는 매춘가가 탄생하여, 미군병사 상대의 여성이 3,000명에 이르렀다. 노동성 부인소년국의 조사에서는, 54년도 전국 미군기지 주변에 집창지역은 139지역, 여성은 2만 5556명으로 파악되어 있다. 근거지를 갖지 않은 노상 매춘이나 도회지의 뒷골목 등 기지 이외의 장소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을 포함하면, 그 수는 몇 배로 많아진다. 여성은 성적 「위안」을 위해 이용당하면서, 미군병사를 「유혹」하고 「성병을 옮기는」 대상으로 질책당하고 관리되었으며, 관리밖에 있는 매춘은 범죄시되었다. 미군과 일본정부의 협동으로 「매춘」이 이와 같이 제도화된 것은, 일본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모욕적인 태도의 장려이며, 강간을 막기보다는 격심하게 유발시키는 토양을 만들었다. 1954년 11월에 일어난 가나가와(神奈川)현 사가미하라(相模原)기지의 소녀집단윤간 사건의 전말은 하나의 전형일 것이다. 사건의 고소를 접수한 미군장교는, 가해자인 미군병사가 피해자를 범하기 전에 「쵸코렛과 1달러의 군표를 주었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라 매춘이다. 오히려 소녀들을 단속하지 않으며 안된다」고 큰소리를 쳐서 미군병사의 죄는 묻지 않게 했던 것이다. 또 앞에서 서술한 「가리꼬미(일제단속)」의 피해도 마찬가지로, 치도세(千歲)나 센다이(仙台)의 기지에서는 매춘부의 3할, 이따미(伊丹)에서는 4할, 타치카와(立川)에서는 5할 이상이 미군병사에게 강간당한 일이 「전락」의 원인이라는 조사가 있을 정도로 강간이 매춘을 조장하였음도 간과할 수는 없다.

 

(4) 구조적으로 생겨난 매춘부


패전으로부터 1년 정도의 사이에는, 일본사회에 매춘부가 만연했던 시기이다. 앞에서 말한 노동성의 조사에서는 54년 전국의 집창지역 1775군데, 여성 12만 4289명이라 한다. 55년∼56년에는 노상 매춘이나 숨어서 하는 매춘부를 포함하여, 1955년 전후의 매춘부는 총수 50만∼60만명이라 얘기되고 있다. 그 막대한 매춘부의 존재도 또한 전후 10년의 미일관계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패전 직후의 수년간은 기아의 시대였다. 정부의 대기업에 대한 막대한 전시보상, 군의 물자은닉·부정방출이 행해지는 한편으로, 식량이나 생활물자의 결핍, 폭발적인 인플레, 실업자의 격증에 의하여 민중생활은 미증유의 위기에 빠졌다. 전쟁에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사람을 잃은 가족, 일본에 생활기반을 갖지 않은 귀환자와 전재자(戰災者)의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1943년에 GHQ가 경제안정 9원칙으로 일본정부에 지시한 내용은, 일본을 미국에 안성맞춤인 안정된 자본주의국가로 재건시키기 위한 것이며, 국민을 희생으로 하는 것이었다. 49년의 Dodge Plan 아래 인플레는 수습이 되었지만 대량의 해고, 기업도산,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인하여 수많은 노동자가 실업을 하고, 농가의 생활은 피폐했다. 사람들의 살기 위한 싸움은 필사적이었다. 몸을 파는 것 이외에 살아 남을 방도를 갖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곤경을 이용하여 점령군「위안」시설을 만들고, 폐쇄되면 가두로 내쫓아 가창이 된 여성을 미군과 협동하여 범죄자 취급을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기에 미군의 강간범죄가 격심하게 발생하여 미군전용의 공창지역마저 새롭게 생겨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지만, 이 미군기지 주변의 매춘은 미군이 기지나 연습장의 건설·확장을 위하여 행한 농지나 어장의 수탈이 직접적인 원인을 만들고 있다. 생업을 빼앗기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저임금에도 달갑게 미군시설에서 일하고, 연습장에 숨어들어가 목숨을 걸고 탄피를 줍거나,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거나, 미군상대의 여성에게 방을 빌려주거나 하여 겨우 수입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희생이 되었던 지역에서는 피차별부락이 적지 않다. 한국전쟁 뒤에도 일본정부가 MSA를 받아들여 체제를 위해 디플레정잭을 강행했기 때문에 국민생활은 극도로 압박당하였다. 군사비를 늘이기 위하여 긴축예산이 짜여져 각 산업에 걸친 대규모의 합리화로 노동자들이 대량해고되었다. 이 디플레정책에 타격을 받아 탄광의 폐산에서 쫓겨난 가족을 비롯하여, 실업자 가족으로부터 많은 여성이 매춘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상과 같이 전후 미국의 대일본 점령정책과 미일안보체제의 시동이 직접간접으로 여성을 매춘으로 떨어뜨리는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와 같이 몸을 파는 일 이외에 살아갈 방도가 없는 여자들을 계속 만들면서, 미군과 일본의 협동으로 매춘이 제도화되고 폐창령의 미명에 반하여 새로운 집창지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패전 후 10년간의 매춘부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미망인이나 귀환자, 원폭을 비롯한 공습의 피해자였다. 일본제국주의가 불러일으킨 전쟁의 결과 생존기반을 빼앗긴 그 여성들은 전후에는 미국제국주의의 지배와 일본정부의 친미정책이 만들어 낸 구조적인 폭력 아래 몸을 파는 생활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전시 중에는 일본군「위안부」로 이용되고, 패전 후의 일본에서는 미군「위안부」로 이용되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 여성들의 체험은 이 시대의 제국주의가 여자에게 행사했던 폭력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피해자에 대한 일본사회의 의식


미군에 의한 일본여성에의 성적 폭력이나 매춘의 범람에 대하여 일본사회는 어떠한 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점령 직후의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는 모두 한결같았다고 한다. 「양가집 자녀」「일반 부녀자」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위안부」「특수부인」이 필요하다는 일본 공창제도를 뒷받침해온 오랜 존창론(存娼論)은 일본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패전 후의 미군주둔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둔군의 폭행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의식에는 RAA시설의 설립으로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또 「가리꼬미(일제단속)」도 커다란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었다. 전쟁 전부터 「패창운동」에 긴 경력을 갖는 여성단체나 여성운동가는 매춘을 성도덕이 결여된 여자의 「추업(醜業)」이며 일본에 대한 모욕이라 간주하여, GHQ와 일본정부에 매춘부 단속을 적극적으로 요망하였다. 이 사람들은 46년에서 47년에 걸쳐 「상습 매음부」에 대한 경찰 등록, 피등록자의 거주지역 제한, 「매음」으로 의심되는 지역에 대한 관헌의 수시 임검, 「윤락여성」의 강제수용·강제검진·강제치료, 그것들을 위한 새로운 법률의 제정 등을 공식적으로 제안한다. 이러한 가운데에, 두 사람의 여성노동자가 가리꼬미의 피해를 받은 사건을 계기로 「여성을 지키는 모임」이 발족한 일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성실한 근로부인」이 미스 캐치(miss catch)당한 원성과 항의가 이루어졌지만, 미군병사에게 몸을 파는 여성과의 연대가 언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점령해제 이후, 본토의 각지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일어났는데, 미군병사의 일본여성에 대한 성적 유린·매춘업의 범람은 이들 反기지 운동이 고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매춘의 범람이 어린이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요코스카 타마랑절」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기로 들고 일어나, 52년 5월에는 일교조(日本敎職員組合), 아동문학자협회, 婦民클럽 등 10단체를 중심으로 「일본 어린이를 지키는 모임」이 만들어져, 전국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관서지방의 기지반대 운동은 오오사카, 나라, 고베 사이를 RR센터를 이전·확장하는 미군에의 저항에서 일거에 확대하여, 근로자·농민·혁신정당·청년·학생·모든 여성단체·풀뿌리 평화단체·조선민전(朝鮮民戰) 등 다수의 단체가 지역을 초월하여 단결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반기지 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여자가 매춘에 빠지는 일을 구조적 폭력의 결과로 생각하는 시점이 남보다 앞서 있었고, 같은 여자로서 미군의 성폭력 피해자에 동정을 갖는 여성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를 받은 당사자가 전면에 나오거나, 피해자의 구제나 존엄회복이 추구되었던 적은 흔히 없었다. 군사기지 반대의 결의에 「노동자는 생활권을 내세우고, 농민은 경작지를, 어민은 어장을, 부인은 가정과 여자의 순결을, 어머니는 어린이를 지키기 위하여, 청년과 학생은 일본의 문화와 학문의 자유를 요구하여, 이 민족의 고뇌의 근원인 군사기지 철수의 투쟁에 일어서고 있다」고 표현된 것처럼, 여성의 문제로서 전면에 내걸린 대의는 「가정」과 「순결」이었으며, 강조되었던 것은 어린이를 지키는 「어머니」의 입장이었다. 사회에 뿌리를 내린 규범이 거기에는 반영되고 있었다. 여자의 가치가 처녀성과 모성으로 정해지고 그 상실이 여자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체험·신체의 파멸이 된다는 규범 하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일이나 혼혈의 사생아를 낳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또 반기지 운동 가운데에 일본정부의 대미정책을 비판할 의도로 「일본정부는 팡팡·미군기지는 사생아」라는 비유가 행해졌던 바와 같이, 미군병사에게 몸을 파는 여성이나 태어난 아이는 「있어서는 안될 일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팡팡」인 여성과 그 「사생아」인 어린이들의 구제는 구체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기지에 반대하는 주민의식에서는 오히려 지역의 풍기를 들추어 내고, 어린이의 혼을 더럽히는 일로서 매춘부가 증오받는 경향이 있었다. 남자의 매춘은 자연스런 일로 허용되면서, 매춘부에 대해서는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존재로 질타하는 의식은 주민을 포함하여 반기지 운동의 주요 인사 중에도 존재했다. 굴절된 민족감정 때문인지 동포여성을 「돈으로 사는」 미군병사보다도 그 미군병사에게 「팔리고 있는」 동포여성을 혐오하는 의식이 있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6) 어둠에 가려진 피해자


미군기지의 범죄성을 가장 잘 알고 미군병사에 의한 여성의 유린에 가장 분노를 표명해온 운동 중에서도 성폭력 피해자가 소외되기 십상이었던 와중에서 매춘문제의 「해결」에 주도권을 발휘했던 것은 앞에서 말한 「폐창운동」의 흐름을 조직한 여성단체나 운동가, 그리고 1947년에 실현시킨 여성참정권에 의하여 국회에 보내진 여성의원들이었다. 그러나 그 「해결」의 내용이란 매춘의 금지·처벌을 요점으로 하는 법률의 제정이었다. 그녀들이 견인차가 되어 법률제정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고 국민적 규모로 확대되어 1956년의 매춘방지법으로 귀결된다. 패전 후 10년간의 매춘문제에 대한 일본사회의 대응이 이 법률, 즉 매춘을 비합법으로 하고 매춘부를 처벌함으로써 문제를 결착시키려고 하는 동법의 제정이었다.

매춘부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확실하게 조직적으로 저항한 것은 공창이기도 한 아카센(赤線)종업원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 중에 전쟁미망인이나 어린이를 혼자서 부양하고 있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전쟁이나 실업으로 생활이 궁핍하여 자살이 강도보다는 낫다하여 매춘을 하고 있다는 극한적인 생각, 일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금지·처벌법이 제정되면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고, 지하범죄의 세계에 폭력단이나 관헌에 학대당할 뿐이라는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었다. 또 집창제도를 국책으로 삼아온 정부의 책임을 묻고, 국책기업 해체에 따른 종업원에 대한 국가보상으로 생활보장이나 갱생자금을 정부에 요구했었다. 참으로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그녀들의 호소를 자각이 없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실하게 상대해 주지 않았다. 반기지 운동의 추진력이 되어 왔던 혁신정당이나 대중단체들도 성도덕이나 처벌의 강조에 주저하여 매춘부에게 다소의 동정이나 이해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고 하나, 압도적인 다수가 매춘금지·처벌법의 제정운동에 합류했었다. 이렇게 하여 매춘방지법은 제정되고, 일본 공창제도의 긴 역사는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고 관리·이용해온 쪽이 아니라, 매춘을 하고 있는 여성 쪽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녀들은 일본의 국가와 사회에서 버려진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자의 치명적인 오점으로 보는 성도덕, 미군에 의한 피해자의 공표·고소에 대한 금압, 「전락」한 피해 여성을 이용하면서 병원균(病原菌)·범죄자로 취급한 미일 권력자의 협동, 피해자측에 죄와 벌을 전가함으로써 공창제도에 종지부를 찍은 매춘방지법의 제정,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이 시대 성폭력 피해자의 체험을 피해자 쪽에서 말하고 고발하는 일을 터부시하고 피해자의 존엄회복을 불가능하게 해 왔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침묵」해 온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압력이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결과이다. 또한 1956년 이후의 매춘의 지하화, 고도경제성장, 본토 미군기지의 축소와 오키나와로의 기지집중과 같은 일본의 걸음걸이 속에서 패전 후 10년에 걸친 본토 일본여성의 성폭력 피해자는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다. 그녀들의 체험은 그렇게 역사의 그늘에 파묻혀 왔던 것이다.

 

 

맺으면서


본 보고는 같은 시기 동아시아의 인민항쟁에 대하여 원인이며 배후에서의 위협자이며 직접의 탄압자이기도 했던 미군이 일본에서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무시되기 쉬운 성폭력이란 측면에서 문제시하였다. 미국은 폭력의 행사와 구 제도의 온존·이용에 의하여 대일본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을 새로운 억압 아래에 두었다. 냉전 하의 일본여성의 체험은 같은 시기 동아시아 민중의 체험과 연결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체험은 제2차 세계대전 하의 일본군에게 성노예화되었던 아시아 여성들의 체험에 연속되고 현재의 在아시아 미군에 의한 여성 피해의 체험으로 연속되고 있다. 그러나 패전 후의 일본여성의 체험은 역사의 그늘에 방치되고 전체적인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러 현재의 일본에서는 이것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국가보상 무용론의 구실로 삼고, 미군과 일본정부에 이용되고 희생된 일본여성을 아시아의 여성들을 멸시하기 위하여 다시 이용하고자 하는 악질적인 논의마저 횡행하고 있다. 오명을 뒤집어쓴 성폭력 피해자 쪽에서야말로 여성들이 겪은 체험의 진상이 규명됨으로써 봉인되고 수탈당해 온 여성의 역사를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帝国主義と性暴行

フジメ(藤目) ユキ (大阪外国語大 教授)

 


端書き

 


1945年 8月, 第2次世界大戦は日本の敗戦に終決されて, 連合軍による日本占領が始まる. 実質的にアメリカによる単独占領だった. 中国革命の進展と韓国での民衆抗争, 朝鮮戦争など, アジア支配の危機を背景で, アメリカは再軍備と前後賠償の軽減を通じて日本を早期に復興させてアジアの反共防波堤で機能させるための対日政策を取る. 韓国戦からすきの日本は米軍の韓半島に向けた出撃, 丙站, 普及を支える前進基地になる. 朝鮮戦争中の 1951年, 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條約と日米安保保障条約によって, 日本は親米反共の国際体制に固く結合するようになる. 1953年 7月の韓国休戦協定調印によって在日米軍の人員は縮まるが, 米軍の基地拡大要求は以後にも続いて, 54年には日米 MSA協定が調印されてアメリカと日本の軍事的結合が強化されて行く.

本報告で扱うことは, このような日米関係の政治的, 軍事的なフレームの中で惹起された米軍による本土日本人女性の性的染躪を取り囲んだ問題だ. 連合国総司令部(GHQ)の日本民主化 5台指針の一つだった 「奥さん参政権付与による日本女性の解放」指針や, GHQによる女性団体の育成及び活動の奨励, また 「肺脹領(廃娼令)」の包告など, アメリカによる日本占領は女性解放を持って来たことだというイメージが一般的だ. しかし占領が始まった 1945年から売春防止法が制定される 1956年までの日本人女性の性暴行被害に対する体験はそのような解放軍としての米軍上(美軍像)や 「解放された日本女性」と言う(のは)女性思想(女性史像)の一面性, あるいは虚構性を明らかにするのだ.

 

(1) 強姦犯罪 

 

米軍による日本女性強姦事件は占領直後から頻発する. 最初の事件に挙論されることは 2人の海兵隊員が横須賀(横須賀)の民家裏門で侵入して 36歳の主婦と 17歳の娘をピストルを突き付けて強姦したという事件だ. 米軍が進駐した各地域では民家の門を壊して侵入するとか, 路頭からジープで拉致するとか, 川辺や公園で襲うとかする強姦・輪姦事件が連続される. 占領 1ヶ月の間に全国でレイプされた女性は日本政府で実施した最小限の推定で 3,500人を越えていると言う. 占領初期の混乱が鎮まっても米軍兵士の性犯罪は絶えなくて, むしろ 「女狩り」と呼ばれる集団強姦犯罪が増えて胸幅化する具合に至る. 性倫理の 2中基準が女に厳格に 「情調」を要求する社会で性暴行被害者はこの被害を一生の汚名で担って行くようになる. 当時の日本でも性暴行被害は周りで隠すのが茶飯事で被害を届ける事は珍しい事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警察本部発表の強姦被害者数が 1946年 30人, 47年 283人, 48年 265人, 49年 312人に達する.

GHQは占領初期から新聞・ラジオに対する厳格な検閲を通じて米軍兵士の日本女性性暴行事件に対する報道は占領目的に違反すると言って禁止した. 報道どころか, 暴行に対する抵抗自体が認められなかった. 1946年には米軍兵士 6人と彼らの女性暴行を沮止しようと思ったカマタパック(蒲田町) 自警団との乱闘を始めにしたカマタ(蒲田)事件が発生すると, 美点領君はこれに対する懲罰として東京とカマタパックの間の道路を封鎖してカマタパック会長と自警団員は軍事裁判でそれぞれ終身刑で 20年型を宣告受ける. 1947年 1月に GHQはウブフェ(町内会)・部落回の廃止を命じたが, これは 「米軍兵士の強盗・女狩り事件に対して日本が自警団で抵抗した事に対する GHQの措置」であったとも話される.

朝鮮戦争が始まると, 在日米軍の増強と兵士らの心理が影響を及ぼしたのか犯罪件数はうんと多くなる. 社勢補(佐世保)・フクオカ(福岡)・クレ(呉)・イタミ(伊丹)・横浜(横浜)・横須賀(横須賀)・大三沢・チドセ(千歳)のような前進基地の周辺では毎日ピビリンネ私は傷害事件が起こって強姦事件が激しく発生した. 基地で働くタイピスト, 急死, 看護婦などが事務屋多いという理由で退勤が禁止されて, 集団的に暴行される事もあった. 精霊解除後にも安保條約の存在のため米軍による犯罪は止まないで, 解除された翌日から半年の間に公式的に記録された強姦事件は 102件に達する. 朝鮮戦争の休戦協定は 1953年 7月に調印されるが, その後韓半島で日本に撤収して来た米軍の犯罪が束して 54年には牛脂の時(宇治市) Ookubo(大久保)の小学生が姜講堂して回復不能の裂傷にあう事件を含めて凶悪な強姦事件がいつも起こっている.


52年 4月占領解除以後, あの時まで公表・告訴を禁止されていた米軍兵士の性犯罪事件が徐徐に明かさ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日米安保条約に土台を置いた行政協政で米軍兵士が日本国内で起こしたすべての犯罪に対して米国側が専属裁判管轄権を行使する権限が規定されていて犯人が知っていながらも本国送還に有耶無耶されるとか, 逮捕したけれども米軍法廷で簡単に無罪になるなど, 被害者側は被害を訴えても結局には諦めるしかなかった. 53年 10月にこのようなのが一部改定されて公務執行の中ではない犯罪に対する裁判権は日本側で越えて来たが, 米軍側から捜査を阻止されるとか日本側でも検察自分が対米関係に気を使って起訴しようと思わないなど, 加害者を審判して罪を問う事はすごく難しい事だった.

 

2) 制度化された売春


審判することができない強姦事件と表裏一体だったことが売春の制度化だった.

他の帝国注意軍隊と同じく米軍でも強姦とともに圧倒的な物質力で植民地・占領地の女達を屈服させて 「売春」する仕事は長い歳月の慣行だった. 「売春」を前提にするうえ米軍が重視したことは性病による軍隊の全力低下であり, その対策が女達に対する管理―強制性病検診の制度化だ. 海外に駐屯する米軍の売春管理は 1898年のフィリピン占領直後から始まる. 第2次世界大戦の中にも世界各地で米軍は現地の売春施設を直接・間接で管理して女達に性病検診を強制していた. 日本占領に至っても米軍はこの慣行を守った. 長い公娼制度の歴史を持って展示には 「慰安婦」 連行を国策でして来た日本政府側は能動的に, あるいはこれといった抵抗もなしに米軍の売春と性病予防を保障した. その養子の協力によって米軍兵士が性病にかかる心配なしに売春ができるようにする制度の基礎が占領開始後半年位の間に作られるようになる.


米軍は日本に進駐した各部隊が東京に到着すれば直ちに東京内の私娼地域を視察してその中 4ヶ所に米軍の性病予防のための洗浄消毒所を設置したし, ここで今後イルゲワル位の間に毎週 7千で取り返しの処置が成り立つようになる. GHQは 9月下旬, 東京都衛生国に対してあこがれも内衣売春町に対する説明と女性の斡旋を要求する一方, 占領軍兵士が性病にかからないように東京都の責任の下に女性の検診を厳格に実施するように言い付けて, その結果 1ヶ月後には売春をしているという疑惑がある女性に対する強制検診を合法化する性病予防規則が制定される. いよいよはこれが 11月には全国化して間のだ. 一方, 日本政府は降伏してわずか 3日目である 8月 18日, 占領軍用で成績慰安施設を準備してその営業を積極的に指導して早くて充実な設備をはかるように全国に指示, 引き継いで遊郭と芸者集, ニンフ, カフェー, また産業戦死慰安所の業者たちに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を結成させて 1億円の予算を投入関係官庁を動員こんにちはだった. 最初に開店した RAAの慰安所では日本軍の丙站司令部で考案した従軍慰安所規則を全部参考したと言う. そして占領 2, 3ヶ月の間に売春専門店やキャバレー, ダンスホール, ビヤホールなど占領軍に女性のサービスを提供する施設が全国各地で地方庁の後援で作られた. 「前後処理の国家的施設の一応として進駐軍慰安の大業に参加する新日本女性の率先協力を求め」といって宿所・被服・食糧支給を約束する RAAの公告に敗戦直後餓死状態にあった多くの女性が集まって来て, 最盛期には 7万名, 翌年春の閉鎖の時には 5万 5千名の女性が仕事していた. 米軍はこのように日本側から提供受けた成績 「慰安」を享受しながら, ダンサーやビヤホール従業員まで含んで実際に米軍兵士と関係を持っても持たなくても間に RAAの女達に強制的な性病検診をさせた.

それでも売春を日常的にしていた米軍兵士たちの間に性病は当然はびこって猛威をふるう. 46年 1月に GHQの肺脹領が出て, 3月には RAA所属の慰安施設に将兵の出入りを禁ずる禁止令が出た背景にはこのような性病の脅威があった. GHQは肺脹領によって水勢期にわたった日本の奴隷制道を一笑して, 身を売る告解に抜けた日本女性の救援者のようなイメージを世界に流布して来た. しかし肺脹領によって娼妓取り締まり規則などは廃棄されたが, 語意そのままの意味として公娼制も, すなわち公権力による管理売春制度の廃棄を GHQも追い求めたのではなくて, 日本政府にもそういう考えはなかった. やがて句芸者集が接待所, 句娼妓が接客部, 遊郭が特殊食べ物漸加・アカセン(赤線) などで呼称は変わったが, 戦争の前からあった公娼制度の中核と言えるジブチァング(集娼)・売春婦からの税金取り立て・性病検診の強制は続いた. 公娼制度は撤廃どころか前後には米軍用の新しい公娼誌で全部作られていたことが真相だ.


(3) GHQ 肺脹領の虚実


女性の解放者・身を売る女性の救済者という流布したイメージとは反対に, GHQによって日本女性は前に経験した事がない組織的性暴行被害に直面するようになった. 「がリコミ(Round Up)」だと呼ばれた一斉検挙による強制性病検診, 強制治療の被害だ. 検診と言う言葉は衛生的なこと, あるいは本人のための事が実施されるような錯覚を催すのがおちだ. しかしその時までジブチァングジグの女達に実施された性病検診の実態はそれ自体が残忍な性暴行だった. 米軍とその指示を受けた日本政府・地方庁は米軍兵士を性病から守るためにはジブチァングジグだけでは不足だと言って, その暴力を街頭にまで拡大した. 通りで女性をいきなり拉致して強制的な検診を実施するようになったのだ. この暴力を合法化したことが先立って言及した性病予防法だ. 最初の 「がリコミ」は肺脹領の 4日後の 1月 28日に東京で実施されてその後全国で重ねて実行された. 3月の RAA閉鎖は幾多の女達の仕事を奪ったが, その大部分が路上売春(街娼) 以外に別に住む道を用意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各地に路上売春が急増してなおさら性病がはびこって, 8月の全国的な 「がリコミ」ではおおよそ満 5千名が逮捕した. 「がリコミ」は 49年 9月まで米憲兵の指揮で成り立って, その後は日本側が一体を引き受けた. 米憲兵や日本官憲が距離(通り)で売春をすると疑うことだけで抵抗もできなくて暴力的な連行が恣行された. 偶然に一斉検挙区域の中を通行した中に理由問わずトラックに押し入れるか, 米軍兵士と相宿しているのに摘発されて羅体に連行されるなど, 人権染躪もすぎるほどひどい荒っぽい検挙が当然之事のように行われた. 検診する席で多数の一般将兵が 「性病教育」と騙って立てておいて見物する場合もあった. 主婦や女学生, 勤労女性たちが 「売春婦」で疑心受けて検診を強制されるのぼったところミスキャッチ(miss catch)も珍しくなかった. 強制検診の衝撃と恥辱は自殺者が出るほどに深刻だった. 当時の売春婦の中にはミスキャッチされた体験のある人が少なくない. 強制検診で受けた打撃は被害女性にとって自暴自棄させて 「身を持ちくずす」きっかけになったりしたのだ.


も米軍は路頭売春婦と遊ぶ事やジブチァングジヨックでの売春を阻まなかったし, 米軍基地周辺には新しい公娼地球までもできるようにした. 厚生省が発表した 1952年の米軍兵士相手の路上売春は 7〜8万名以上だった. 米軍兵士は彼らが 「お金で暮す」 日本人女性を 「黄色い便器(Yellow Stool)」だと呼んだと言う. 全国各地の米軍基地周辺でパンパンハウス(歌唱が営業する家: 訳者株), キャバレー, パ, ギフトショップ, ホテルなどの施設の整然と並ぶジブチァングジヨックができて, 女達は性病検診が義務化された. 朝鮮戦争時期には, 日本は米軍の成績 「慰安」基地になったりした. 米軍は奈良(奈良), 横須賀(横須賀), コクだと(小倉) などに韓国電線から帰って来たお休み兵士たちに休養と慰安をさせる施設として RRセンター(Rest & Recreation)を開設する. 奈良市のセンターは 53年 5月に設置されたが, 米軍兵士たちが莫大な遊興費を使うと言って周辺にはあっという間に原色で飾られた英語表記になっている売春家家誕生して, 米軍兵士相手の女性が 3,000人にのぼった. 労動省奥さん少年国の調査では, 54年度全国米軍基地周辺にジブチァングジヨックは 139地域, 女性は 2万 5556人に把握されている. 足だまりを持たない路上売春や都会の裏通りなど基地以外の場所で米軍を相手にする女性を含めば, その数は何倍で多くなる. 女性は性的 「慰安」のために利用されながら, 米軍兵士を 「誘惑」と 「性病を移す」 対象に叱責されて管理されたし, 管理しかある売春はボムジェシドエオッダ. 米軍と日本政府の協同で 「売春」がこのように制度化されたことは, 日本女性に対する性暴行と侮辱的な態度の奨励であり, 強姦を阻むよりは激甚に誘発させる土壌を作った. 1954年 11月に起きた神奈川(神奈川)現相模原(相模原)基地の少女集団輪姦事件の顛末は一つの典型であるでしょう. 事件の告訴を受け付けた米軍将校は, 加害者である米軍兵士が被害者を犯す前に 「チョコレートと 1ドルの軍票を与えた」 から 「強姦ではなく売春だ. むしろ少女たちを取り締まらないしだめだ」と大きい声を吐いて米軍兵士の罪は問わないようにしたのだ. また前で敍述した 「がリコミ(一斉取締り)」の避けても同じく, チドセ(千歳)や仙台(仙台)の基地では売春婦の 3割, イタミ(伊丹)では 4割, タチカと(立川)では 5割以上が米軍兵士にレイプされた事が 「転落」の原因という調査があるほどに強姦が売春を助長したことも見逃すことはできない.

 

(4) 構造的にできた売春婦


敗戦から 1年位の間には, 日本社会に売春婦がはびこった時期だ. 前で言った労動省の調査では 54年全国のジブチァングジヨック 1775箇所, 女性 12万 4289人と言う. 55年〜56年には路上売春や隠れてする売春婦を含んで, 1955年前後の売春婦は総数 50万〜60万名だから話されている. その莫大な売春婦の存在もまた前後 10年の日米関係と関連がないのではない.

敗戦直後の数年間はキアの時代だった. 政府の大企業に対する莫大な戦時補償, 軍医物資隠匿・不正放出が行われる一方で, 食糧や生活物資の欠乏, 爆発的なインフレ, 失業者の激増によって民衆生活は未曽有の危機に落ち込んだ. 戦争で家の生計を責任負った人を失った家族, 日本に生活基盤を持たない引揚者と転載者(戦災者)の生活はさんたんなのだった. 1943年に GHQが経済安定 9原則で日本政府に指示した内容は, 日本をアメリカにうてっつけな安定した資本主義国家で再建させるためのことであり, 国民を犠牲にするのだった. 49年の Dodge Plan の下インフレは収拾になったが大量の解雇, 企業倒産, 農産物価格の暴落によって幾多の労動者が失業をして, 農家の生活は疲弊した. 人々の生きるためのけんかは必死的だった. 身を売ること以外に生き残る方途を持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幾多の女性たちの困境を利用して占領軍「慰安」施設を作って, 閉鎖されれば街頭で追い出して歌唱になった女性を米軍と協動して犯罪者取り扱いをしたのだ.

韓国戦からすきに米軍の強姦犯罪が激甚に発生して米軍専用の公娼地域さえ新しくできたことは前で言ったとおりだが, この米軍基地周辺の売春は米軍が基地や練習場の建設・拡張のために行った農地や漁場の収奪が直接的な原因を作っている. 生業を奪われて他に選択の余地がない多くの人々が低賃金にも有り難く米軍施設で働いて, 練習場にスムオドルオが命をかけて弾皮を拾うとか, 米軍を相手に身を売るとか, 米軍相手の女性に部屋を貸してくれるとかしてやっと収入を得るようになった. このように犠牲になった地域では互い別部落が少なくない. 朝鮮戦争後にも日本政府が MSAを受け入れて体制のためにデ−プルレゾングゼックを強行したから国民生活は極度に圧迫当たりこんにちはだった. 軍事費を伸ばすために緊縮予算が編まれて各産業にかけた大規模の合理化で労動者たちが大量解雇された. このデフレ政策に打撃を受けて炭鉱の廃山で追い出された家族を含めて, 失業者家族から多くの女性が売春市場に流れて行った.


以上と一緒に前後アメリカの大日本占領政策と日米安保体制の始動が直接間接で女性を売春で落とす圧力で作用して来た. 彼と一緒に身を売る事以外に生きて行く方途がない女達をずっと作りながら, 米軍と日本の協同で売春が制度化されて肺脹領の未明に比べて新しいジブチァングジグが作られたのだ. 敗戦後 10年間の売春婦の中に少なくない人々が戦争未亡人や引揚者, 原爆を含めた空襲の被害者だった. 日本帝国注意が催した戦争の結果生存基盤を奪われたその女性たちは前後にはアメリカ帝国注意の支配と日本政府の親米政策が作り上げた構造的な暴力の下身を売る生活で落ちこんだのだ. 展示の中には日本軍「慰安婦」に利用されて, 敗戦後の日本では米軍「慰安婦」に利用された人々もいる. その女性たちの体験はこの時代の帝国主義が女に行使した暴力を集中的に表現していると言えるでしょう.


(5) 被害者に対する日本社会の意識


米軍による日本女性への性的暴力や売春の氾濫に対して日本社会はどんな意識を行われていただろうか?

占領直後の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に対する人々の反対は皆一様だったと言う. 「良家集お子さん」「一般婦女子」の貞操を守るためには 「慰安婦」「特捜部である」が必要だという日本公娼制度を裏付けて来た長年のゾンチァングでは(存娼論)は日本社会に深く根付いていたし, 敗戦後の米軍駐屯の時にも人々の心に席を取っていた. 駐屯軍の暴行を恐れた人々の意識には RAA施設の設立に安心する心もあったと言う. また 「がリコミ(一斉取締り)」も大きな反対にぶつかったことがなかった. 戦争前から 「ペチァングウンドング」に長い経歴を持つ女性団体や女性活動家は売春を性道徳が欠けた女の 「醜業(醜業)」であり日本に対する侮辱だから見做して, GHQと日本政府に売春婦取り締まりを積極的に妖忘だった. この人々は 46年から 47年にわたって 「常習売淫婦」に対する警察登録, ピドングロックザの居住地域制限, 「売淫」に疑心される地域に対する官憲の随時臨検, 「売春女性」の強制収用・強制検診・強制治療, それらのための新しい法律の制定などを公式的に提案する. このような中に, 二人の女性労動者ががリコミの被害を受けた事件をきっかけで 「女性を守る集まり」の発足した事は注目するに値する. しかしそこでも 「まじめな勤労部である」がミスキャッチ(miss catch)当ぎり怨声と抗議が成り立ったが, 米軍兵士に身を売る女性との連帯が言及されなかったと言う.

 

占領解除以後, 本土の各地で米軍基地反対運動が起きたが, 米軍兵士の日本女性に対する成績染躪・売春業の氾濫はこれら 反基地運動の高揚されるきっかけになったりする. 売春の氾濫が子供たちに狂う悪影響を気づかう人々は 「横須賀タマラングゾル」に対する反対運動をきっかけで立ち上がって, 52年 5月にはイルギョゾ(日本教職員組合), 児童文学者協会, 婦民クラブなど 10団体を中心に 「日本子供を守る集まり」が作られて, 全国的な活動を開始する. 関西地方の基地反対運動は大阪, 奈良, 神戸の間を RRセンターを以前・確張する米軍への抵抗で一挙に拡大して, 勤労者・農民・革新政党・青年・学生・すべての女性団体・草根平和団体・朝鮮民戦(朝鮮民戦) など多数の団体が地域を超越して団結して運動を展開した. このような反基地運動に関与した人々の中には女が売春に抜ける事を構造的暴力の結果だと思う時点が人より先に進んでいたし, 同じ女として米軍の性暴行被害者に同情を持つ女性も少なくなかったはずだ.

そうだが, 性暴行被害を受けた当事者が全面に出るとか, 被害者の救済や尊厳回復が追求された時はよくなかった. 軍事基地反対の決意に 「労動者は生活圏を立てて, 農民は耕作地を, 漁民は漁場を, 奥さんは家政科女の純潔を, お母さんは子供を守るために, 青年と学生は日本の文化と学問の自由を要求して, この民族の苦悩の根源である軍事基地撤収の闘いに立ち上がっている」と表現されたように, 女性の問題として全面に掛かった大義は 「家庭」と 「純潔」であったし, 強調されたことは子供を守る 「お母さん」の立場(入場)だった. 社会に根付いた規範がそこには反映されていた. 女の価値が処女性と母性で決まってその喪失が女には一番嫌悪な体験・身体の破滅になるという規範のもとでは性暴行被害にあった事や混血の私生児を生む事は 「あってはいけない事」だった. また反基地運動の中に日本政府の対米政策を批判する意図で 「日本政府はパンパン・米軍基地は私生児」という比喩が行われたところのように, 米軍兵士に身を売る女性や生まれた子供は 「いてはいけない事の象徴」だった. 実際で 「パンパン」である女性と彼 「私生児」である子供たちの救済は具体的な問題だと思っていなかった. 基地に反対する住民意識ではむしろ地域の風紀を暴き出して, 子供の魂を汚す事として売春婦が憎悪受けるきらいがあった. 男の売春は自然な事に許容されながら, 売春婦に対しては男を誘惑して堕落させる存在で叱咤する意識は住民を含んで反基地運動の主要人事の中にも存在した. 屈折された民族感情のためか同胞女性を 「お金で暮す」 米軍兵士よりもその米軍兵士に 「売れている」 同胞女性を嫌悪する意識があったことも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


(6) 闇に選り分けられた被害者


米軍基地の犯罪性を一番よく分かって米軍兵士による女性の染躪に一番怒りを表明して来た運動の中でも性暴行被害者が疏外されるのがおちだったところで売春問題の 「解決」に主導権を発揮したことは前で言った 「肺脹運動」の流れを組織した女性団体や活動家, そして 1947年に実現させた婦人参政権によって国会に送った女性議員たちだった. しかし彼 「解決」の内容と言う(のは)売春の禁止・処罰を要点にする法律の制定だった. 彼女たちが牽引車になって法律制定運動は次第に拡散して国民的規模で拡がって 1956年の売春防止法に帰結される. 敗戦後 10年間の売春問題に対する日本社会の対応がこの法律, すなわち売春を非合法にして売春婦を処罰することで問題を決着させようと思う同法の制定だった.

売春婦たちの間ではこれに対してはっきりと組織的に抵抗したことは公娼でもあったアカセン(赤線)従業員たちだった. 彼女たちは寝たところで中に戦争未亡人や子供を一人で扶養している者がいくら多いか, 戦争や失業で生活が貧しくて自殺が強盗よりは治ったと言って売春をしているという極限的な考え, 働くことができる場所がないから禁止・処罰法が制定されれば 「実業」者になって路頭を迷って, 地下犯罪の世界に暴力団や官憲に虐待されるだけだという貧しい事情を訴えた. また家創製島を国策にして来た政府の責任を問って, 国策企業解体による従業員に対する国家補償で生活保障や更生資金を政府に要求した. まことに正当な要求だった. しかし日本社会は彼女たちの訴えを自覚がなくて反社会的なことで見做してまじめに相対してくれなかった. 反基地運動の推進力になって来た革新政党や大衆団体たちも性道徳や処罰の強調にためらって売春婦に多少の同情や理解を見せる人もいると一つ, 圧倒的な多数が売春禁止・処罰法の制定運動に合流した. このようにして売春防止法は制定されて, 日本公娼制度の長い歴史は女性に売春をさせて管理・利用して来た方ではなく, 売春をしている女性の方に責任を擦りつけながら終熄された. 彼女たちは日本の国家と社会で捨てられた国民になったのだ.

 

性暴行被害者という事実を女の致命的な汚点で見る性道徳, 米軍による被害者の公表・告訴に対する禁圧, 「転落」一被害女性を利用しながら病源菌(病原菌)・犯罪者に扱った日米権力者の協同, 被害者側に罪と着を擦りつけることで公娼制度に終止符を取った売春防止法の制定, それを妥当なことと思う社会の態度など, すべてのものがこの時代性暴行被害者の体験を被害者の方で言って告発する事をタブーの時して被害者の尊厳回復を不可能にさせて来た. 被害者たちが自分の体験に対して今日まで 「沈黙」して来たことはこのような政治的・社会的圧力が彼女たちの口をつぐむようにした結果だ. また 1956年以後の売春の地下化, 高度経済成長, 本土米軍基地の縮小と沖繩への基地集中のような日本の足つきの中で敗戦後 10年にわたった本土日本女性の性暴行被害者は人々に忘れて来た. 彼女たちの体験はそのように歴史の陰に埋めて来たのだ.

 

 

結びながら


見習ってからは同じ時期東アジアの人民抗争に対して原因で背後での脅威者で直接の弾圧者でもあった米軍が日本でどんな存在だったのかを, 無視されやすい性暴行と言う(のは)側面で問題視した. アメリカは暴力の行事と句制度の温存・利用によって大日本帝国の支配から 「解放」になった人々を新しい抑圧の下に残した. 冷戦下の日本女性の体験は同じ時期東アジア民衆の体験と繋がれるのだ. なおかつその体験は第2次世界大戦下の日本軍に性奴隷化されたアジア女性たちの体験に連続されて現在の 在アジア米軍による女性被害の体験に連続されている. しかし敗戦後の日本女性の体験は歴史の陰に放置されて全体的な真相糾明にならないまま今日に至って現在の日本ではこれを日本軍「慰安婦」に対する国家補償無用論の言い立てで三考, 米軍と日本政府に利用されて犠牲された日本女性をアジアの女性たちを見下すためにまた利用しようとする悪質的な論議さえ横行している. 汚名を被った性暴行被害者チォックエソこそ女性たちが経験した体験の真相が糾明されることで封印されて収奪されて来た女性の歴史を取り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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