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일본의 제철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울분을 토하는 일본인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의 망상에 의존하지 말고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여 논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일본인들은 16세기에 火繩銃(鉄砲)를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제철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일본이 어떻게 그것을 만들었을까요?
다음을 살펴 봅시다.
日本の製鉄についてご紹介していますが鬱憤を吐く日本人が増えてきました。自分の妄想に依存せず、具体的な資料を提示して議論できるように頑張ってください。
日本人たちは16世紀に火繩銃(鉄炮)を作ったと自慢しているが、製鉄技術が発達してできなかった日本がどのようにそれを作ったのでしょうか。
次のように見てみましょう。

 

直接法から出発した小アジアの原始製鉄は、その後原料や燃料の変化を伴って国や地域に独特な製鉄基盤を築いていった。何故技術の落差を生じたのかという社会学・人文学的な背景の考察が余り行われていない。鉄は国家の基盤を支えるものである。その技術の定着は気候風土、埋蔵資源、関連技術の熟成度、民族の知的レベル、そして社会背景・国家的要請(特に国防や戦争)等の要素が総合されたものである。

日本のたたら製鉄は渡来技術と想定されながら、大陸や朝鮮半島の先進技術から何故か後退して遅くに出発したようである。鉄器の渡来から製鉄の開始までに長い時間差がある。鉄器、鉄素材の交易が盛んに行われながら、その間、製練、精練技術の伝播がなかったとすれば大きな謎である。又、徳川の鎖国政策で海外技術が遮断され、製鉄技術の永い停滞が続いた。それにしても、効率の悪いたたら製鉄から間接製鉄に転換しなかった理由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その理由の解明は重要である。戦国時代の火縄銃の和鋼鍛造を単純に賞賛している学者もいる。生産性やコスト※を欠落させた単なる賞賛は趣味の世界である。

明の鄭瞬功は「日本の鉄は脆くて鉄砲の材料にはならない。鉄砲の材料はシャムや福建からの輸入に多くを頼っている」(日本一鑑)と述べている。鉄砲や刀剣需要の拡大に、「たたら」は生産性でも対応出来なかった。その為に支那鉄や南蛮鉄の輸入が始まった。たたら製鉄は刀の為だけに在ったものではない。寧ろ刀剣で使用される割合は農・工具、生活用品に比べて遙かに低いものである。砂鉄原料の「たたら銑」は大砲の鋳造には全く不適であった。脆くて流動性が無く、たたらの銑で作った大砲はことごとく破裂して使いものとはならなかった。マンガン(Mn)の固溶が少ない為である。

国防と近代兵器の整備は外圧に屈しない為の喫緊(きっきん)の課題だった。戦国時代は兎も角も、鉄砲や大砲を「鍛造」で大量に造る事は生産性からして論外である。幕末、西洋の科学知識を学んでいた南部藩の大島高任(たかとう)は「砂鉄原料のたたら銑鉄は脆弱で使えない。どうしても磁鉄鉱から製練した銑鉄でなければ鋳鉄砲は出来ない」と反射炉の建設を推進した。使用目的によって鋼材の評価は一転する。鉄の生産量を確保するにも、効率の悪いたたら製鉄は不向きであり、大島高任は高炉製練法を強硬に主張した。

佐賀藩、水戸藩、薩摩藩などは蘭学を学んだ技術者を集め、この西洋の製鉄法を積極的に導入し、漸く大砲の製造に成功した。我が国が近代製鉄の端緒についたのは安政(1854~)の直前からだった。

 

Fig. 1

直接法으로부터 출발한 소아시아의 原始 제철은, 그 후 原料나燃料의 변화를 수반해 나라나 지역에 독특한 제철 기반을 쌓아 올려 갔다. 왜 기술의 낙차를 발생 시켰는지 라고 하는 사회학·인문 학문적인 배경의 고찰이 남아 행해지지 않았다.鐵은 국가의 기반을 지지하는 것이다.그 기술의 정착은 기후 풍토, 埋葬資源, 관련 기술의 숙성도, 민족의 지적 레벨, 그리고 사회 배경·국가적 요청(특히 국방이나 전쟁) 등의 요소가 종합 된 것이다.일본등 제철은 도래 기술과 상정되면서, 대륙이나 한반도의 선진 기술로부터 왜일까 후퇴해 늦게 출발한 것 같다. 철기의 도래로부터 제철의 개시까지 긴 시간차이가 있다.철기, 鐵素材의 교역이 활발히 행해지면서, 그 사이, 제련, 정련기술의 전파가 없었다고 하면 큰 수수께끼이다.또, 토쿠가와의 쇄국 정책으로 해외 기술이 차단되어 제철 기술의 영원한 정체가 계속 되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효율이 나쁜 (たたら製鉄)제철로부터 간접 제철로 전환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던 것일까.그 이유의 해명은 중요하다. 전국시대의 화승총의 일본 재래 기술로 만든 鐵 단조를 단순하게 칭찬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생산성이나 코스트를 결핍 시킨 단순한 칭찬은 취미의 세계이다. 明의鄭瞬功은 「일본의 鐵은 脆해서 총의 재료는 되지 않는다.총의 재료는 샴(シャム)이나 福建으로부터의 수입에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다」(日本一鑑) 이라고 말하고 있다.총이나 도검 수요의 확대에, 鑪(たたら)은 생산성으로도 대응 할 수 없었다.그 때문에 시나철이나 서양식 정련된 쇠의 수입이 시작되었다. 鑪(たたら)제철은 칼이기 때문에인 만큼 있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도검으로 사용되는 비율은 농·공구, 생활 용품에 비해 아득하게 낮은 것이다. 砂鉄原料의「たたら銑」은 대포의 주조에는 완전히 不適했다.脆해서 유동성이 없고, 「たたら銑」으로 만든 대포는 죄다 파열해 사용 가능한 것이 없었다.
 
珪素(シリコン)의 固溶이 적기 때문에이다.국방과 근대 병기의 정비는 외압에 굴하지 않기 때문에의 긴요(긴요)의 과제였다.  전국시대는 차치하고도, 총이나 대포를 「단조」로 대량으로 만드는 일은 생산성부터 논외이다. 에도막부 말기, 서양의 과학지식을 배우고 있던 남부번의 오오시마 다카토(이기자)는 「사철 원료등 무쇠는 취약하고 사용할 수 없다.아무래도 자철광으로부터 제련한 무쇠가 아니면 주철포는 할 수 없다」라고 반사로의 건설을 추진했다.사용 목적에 의해서 강재의 평가는 일전한다. 철의 생산량을 확보하기에도, 효율의 악등 제철은 적합하지 않고, 오오시마 다카토는 용광로 제련법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사가번, 미토번, 사츠마 번 등은 난학을 배운 기술자를 모아 이 서양의 제철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점구대포의 제조에 성공했다. 일본의 근대 제철의 단서에 붙은 것은 안정(1854)의 직전부터였다.

Fig. 2

일본인들은 한국으로 부터의 기술을 전래 받은 것이 부끄러워 반드시 중국을 개입시킨다.
곡옥이 전래된 루트를 눈여겨 보자. Fig. 1과 2를 비교하자.
그 루트는 고대 한국인의 일본 정벌 루트와 같다.
또한 모든 한국 문명의 전파 경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日本人たちは韓国からの技術が伝来されたのが恥ずかしく、必ず中国を介入させる。
ゴクオクイ伝来したルートをよく見てみよう。Fig。 1と2を比較しよう。
そのルートは、古代韓国人の日本征伐のルートと同じ。
また、韓国の文明の伝播経路を示すものでもある。


일본인 특별교육 - 製鉄3

일본의 제철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울분을 토하는 일본인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의 망상에 의존하지 말고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여 논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일본인들은 16세기에 火繩銃(鉄砲)를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제철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일본이 어떻게 그것을 만들었을까요?
다음을 살펴 봅시다.
日本の製鉄についてご紹介していますが鬱憤を吐く日本人が増えてきました。自分の妄想に依存せず、具体的な資料を提示して議論できるように頑張ってください。
日本人たちは16世紀に火繩銃(鉄炮)を作ったと自慢しているが、製鉄技術が発達してできなかった日本がどのようにそれを作ったのでしょうか。
次のように見てみましょう。

 

直接法から出発した小アジアの原始製鉄は、その後原料や燃料の変化を伴って国や地域に独特な製鉄基盤を築いていった。何故技術の落差を生じたのかという社会学・人文学的な背景の考察が余り行われていない。鉄は国家の基盤を支えるものである。その技術の定着は気候風土、埋蔵資源、関連技術の熟成度、民族の知的レベル、そして社会背景・国家的要請(特に国防や戦争)等の要素が総合されたものである。

日本のたたら製鉄は渡来技術と想定されながら、大陸や朝鮮半島の先進技術から何故か後退して遅くに出発したようである。鉄器の渡来から製鉄の開始までに長い時間差がある。鉄器、鉄素材の交易が盛んに行われながら、その間、製練、精練技術の伝播がなかったとすれば大きな謎である。又、徳川の鎖国政策で海外技術が遮断され、製鉄技術の永い停滞が続いた。それにしても、効率の悪いたたら製鉄から間接製鉄に転換しなかった理由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その理由の解明は重要である。戦国時代の火縄銃の和鋼鍛造を単純に賞賛している学者もいる。生産性やコスト※を欠落させた単なる賞賛は趣味の世界である。

明の鄭瞬功は「日本の鉄は脆くて鉄砲の材料にはならない。鉄砲の材料はシャムや福建からの輸入に多くを頼っている」(日本一鑑)と述べている。鉄砲や刀剣需要の拡大に、「たたら」は生産性でも対応出来なかった。その為に支那鉄や南蛮鉄の輸入が始まった。たたら製鉄は刀の為だけに在ったものではない。寧ろ刀剣で使用される割合は農・工具、生活用品に比べて遙かに低いものである。砂鉄原料の「たたら銑」は大砲の鋳造には全く不適であった。脆くて流動性が無く、たたらの銑で作った大砲はことごとく破裂して使いものとはならなかった。マンガン(Mn)の固溶が少ない為である。

国防と近代兵器の整備は外圧に屈しない為の喫緊(きっきん)の課題だった。戦国時代は兎も角も、鉄砲や大砲を「鍛造」で大量に造る事は生産性からして論外である。幕末、西洋の科学知識を学んでいた南部藩の大島高任(たかとう)は「砂鉄原料のたたら銑鉄は脆弱で使えない。どうしても磁鉄鉱から製練した銑鉄でなければ鋳鉄砲は出来ない」と反射炉の建設を推進した。使用目的によって鋼材の評価は一転する。鉄の生産量を確保するにも、効率の悪いたたら製鉄は不向きであり、大島高任は高炉製練法を強硬に主張した。

佐賀藩、水戸藩、薩摩藩などは蘭学を学んだ技術者を集め、この西洋の製鉄法を積極的に導入し、漸く大砲の製造に成功した。我が国が近代製鉄の端緒についたのは安政(1854~)の直前からだった。

 

Fig. 1

直接法으로부터 출발한 소아시아의 原始 제철은, 그 후 原料나燃料의 변화를 수반해 나라나 지역에 독특한 제철 기반을 쌓아 올려 갔다. 왜 기술의 낙차를 발생 시켰는지 라고 하는 사회학·인문 학문적인 배경의 고찰이 남아 행해지지 않았다.鐵은 국가의 기반을 지지하는 것이다.그 기술의 정착은 기후 풍토, 埋葬資源, 관련 기술의 숙성도, 민족의 지적 레벨, 그리고 사회 배경·국가적 요청(특히 국방이나 전쟁) 등의 요소가 종합 된 것이다.일본등 제철은 도래 기술과 상정되면서, 대륙이나 한반도의 선진 기술로부터 왜일까 후퇴해 늦게 출발한 것 같다. 철기의 도래로부터 제철의 개시까지 긴 시간차이가 있다.철기, 鐵素材의 교역이 활발히 행해지면서, 그 사이, 제련, 정련기술의 전파가 없었다고 하면 큰 수수께끼이다.또, 토쿠가와의 쇄국 정책으로 해외 기술이 차단되어 제철 기술의 영원한 정체가 계속 되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효율이 나쁜 (たたら製鉄)제철로부터 간접 제철로 전환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던 것일까.그 이유의 해명은 중요하다. 전국시대의 화승총의 일본 재래 기술로 만든 鐵 단조를 단순하게 칭찬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생산성이나 코스트를 결핍 시킨 단순한 칭찬은 취미의 세계이다. 明의鄭瞬功은 「일본의 鐵은 脆해서 총의 재료는 되지 않는다.총의 재료는 샴(シャム)이나 福建으로부터의 수입에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다」(日本一鑑) 이라고 말하고 있다.총이나 도검 수요의 확대에, 鑪(たたら)은 생산성으로도 대응 할 수 없었다.그 때문에 시나철이나 서양식 정련된 쇠의 수입이 시작되었다. 鑪(たたら)제철은 칼이기 때문에인 만큼 있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도검으로 사용되는 비율은 농·공구, 생활 용품에 비해 아득하게 낮은 것이다. 砂鉄原料의「たたら銑」은 대포의 주조에는 완전히 不適했다.脆해서 유동성이 없고, 「たたら銑」으로 만든 대포는 죄다 파열해 사용 가능한 것이 없었다.
 
珪素(シリコン)의 固溶이 적기 때문에이다.국방과 근대 병기의 정비는 외압에 굴하지 않기 때문에의 긴요(긴요)의 과제였다.  전국시대는 차치하고도, 총이나 대포를 「단조」로 대량으로 만드는 일은 생산성부터 논외이다. 에도막부 말기, 서양의 과학지식을 배우고 있던 남부번의 오오시마 다카토(이기자)는 「사철 원료등 무쇠는 취약하고 사용할 수 없다.아무래도 자철광으로부터 제련한 무쇠가 아니면 주철포는 할 수 없다」라고 반사로의 건설을 추진했다.사용 목적에 의해서 강재의 평가는 일전한다. 철의 생산량을 확보하기에도, 효율의 악등 제철은 적합하지 않고, 오오시마 다카토는 용광로 제련법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사가번, 미토번, 사츠마 번 등은 난학을 배운 기술자를 모아 이 서양의 제철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점구대포의 제조에 성공했다. 일본의 근대 제철의 단서에 붙은 것은 안정(1854)의 직전부터였다.

Fig. 2

일본인들은 한국으로 부터의 기술을 전래 받은 것이 부끄러워 반드시 중국을 개입시킨다.
곡옥이 전래된 루트를 눈여겨 보자. Fig. 1과 2를 비교하자.
그 루트는 고대 한국인의 일본 정벌 루트와 같다.
또한 모든 한국 문명의 전파 경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日本人たちは韓国からの技術が伝来されたのが恥ずかしく、必ず中国を介入させる。
ゴクオクイ伝来したルートをよく見てみよう。Fig。 1と2を比較しよう。
そのルートは、古代韓国人の日本征伐のルートと同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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