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자금성에 대한 다큐를 보고
그것 뿐만이 아니고.. 광화문 앞의 큰 대로는 원래 관청거리로 여기에 이,호,예,병,형,공조가 있던 것을 합치면 규모는 더 거대해진다,, 그리고 경복궁 주변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는데 지금은 콘크리트로 다 덮여 버렸다.. 교보문고 뒤편, 미국대사관 뒤편의 골목 아래는 지금도 개천이 흐르고 있어
아 경복궁 담장 안으로 건물 없도 없이 헐려서 휑한걸 . . 교활한 새끼들 . .
3. 2009년 단기 복원 후 모습
북악산과 경복궁 (멀리 보이는 건물)
서지는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었다.
서지는《한경지략(漢京識略)》에 “연꽃이 무성하여 여름철에 성안의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여기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연못가에는 천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이해중(李海重)이라는 사람의 별장이었다가 경기감영의 중영(中營)으로 사용되었다. 천연정 옆에는 고려시대 어느 임금이 비를 피했다는 멋진 반송정(盤松亭)이 있었다고 한다.
경북궁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서울의 모습은]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서울에는]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 명나라 사신 동월의 조선부(1488년) , 1488년(성종 19)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본국에 돌아가 조선 풍토(風土)를 묘사한 책 -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 선교사 , 루이스 프로이스 -
5월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시황의 궁궐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고니시 휘하 장수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中 -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 봉황, 공작,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조선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라도 집에 책이 있고 학문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 이는 선진국으로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져 겸연쩍게 만든다
-<뚜르드 몽드> (1866)
조선에는 종이,인삼,금과 은, 각종 유약과 향료 등 귀한 물자와 3피트 높이의 조랑말 등 진기한 동물들이 풍부하다.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창덕궁
홍화문과
경북궁 근정전 |
일제 민족말살 경북궁을 해체하고 조선총독부 건축중 죽일놈들 유서 깊은 민족의 궁궐을 절단내고 이러고 있단다
일본 씨x놈들
본래 경복궁의 그림입니다
경희궁은 일제의 조선궁궐 훼손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비운의 궁궐’이다. 원래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1616년(광해군 8년) 건립 당시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렀으나,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은 경사진 야산 지형과 조화를 이룬 구조로 건축적, 예술적으로도 뛰어났다. 숙종 때 편찬한 ‘궁궐지’를 보면,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의 침략 뒤 경성중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해체됐다. 이는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창덕궁을 비원으로, 덕수궁을 미술관으로 격하!!!!
정전인 숭정전은 1908년 경성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일본 절 ‘조계사’로 팔렸고, 현재는 동국대의 ‘정각원’이라는 불당으로 남아 있다.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북문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뒤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다.
현재 아주 일부의 모습만 남아있는 경복궁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실제 경복궁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합니다 |
성군 고종황제에 대한 쓰라린 연민의 눈물만 .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언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을 가리킴)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을 뜻함)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박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요.
나ㅡ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깊은 곳에 갇힌 몸이 되어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조정구에게 조칙을 나리우심)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28일
ナショナルジオグレピックチャンネルで資金性に対するドキュメンタリーを報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