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굶주린 일본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조선통신사>
10월 17일 경자
동북풍이 밤에 크게 불어 그로 인해 대포(大浦)에 머물렀다.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선전용으로 잘 꾸며진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오는 일본의 진짜 모습>
12월 21일 계묘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2월 9일 신묘
맑음. 해가 뜰 때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금곡령(金谷嶺)에서 점심을 먹었고 30리를 가서 등지(藤枝)에서 묵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동북으로 이십여 리를 가서 금곡령에 올랐다
...
안과 밖 두 고개에 있는 인가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모두 차와 떡을 팔고 있었다. 긱 집들을 지날 때마다 법번히 분칠하고 연지를 바른 여인들이 왼쪽에는 떡을 들고 오른쪽에는 당고(糖膏)를 들고 앞에서 사람을 맞이하면서 괴롭도록 말을 간절히 하였다. 집집마다 경쟁하는 소리가 서로 들렸다. 여자는 창(娼 창.녀)라고 한다. 다만 그 이는 모두 물들였다.
마을은 좁고 누추하였으나 관소는 빼어났다.(화려했다) 각각의 처소들도 또한 많이 그러하였다. 대개 모두 각 주(州) 태수(太守)가 왕래할 때 쉬는 곳이라고 한다.
<급기야는 에도의 입구에서 거지떼를 만나다>
2월 15일 정유
흐리고 저물녘에 비가 왔다. 아침에 떠나 45리를 가서 신내천(神奈川)에서 점심을 먹었고 또 45리를 가서 품천(品川)에서 묵었다.
...신내천 이후는 무장주에 속한다. 대개 등지(藤枝) 동쪽의 땅은 더럽고 무너진 것이 많았으며 더욱 앞을 못 보면서 구걸하는 사람과 앉은뱅이와 절뚝발이와 곱사등이가 많이 어지럽게 뒤섞여 구걸을 했으니 이는 강호(江戶 에도)에서 구걸하는 무리들이 여기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품(土品)도 또한 박하였다(형편 없었다)
< 비참하게 가난한....일본 어부>
5월 19일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 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아들은 나이가 열두서너 살 가량 되었고한 한 아이는 젖을 먹고 있었다.돛대에다가 오징어 수십마리를 꿰어 걸어 말리고 있었으며 작은 솥과 나무 그릇도 있었으니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해먹기 위함 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칭찬>
그 (일본)문사(文士)들은 한번 우리 자리에 들어오면 참으로 하늘에 올라 용(龍)이 된 듯한 기쁨을 가졌고, 혹시 말 한 마디라도 서로 하게 되면 문득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곁에 있는 사람도 이를 무척 기뻐하였다.
비록 시를 가지고 오기는 해도 본래 자랑하거나 재주를 겨루겠다는 뜻은 없었다. 이것이 아니면 능히 손을 빌려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의 시나 글씨를 구하는 데 잘되고 못된 것을 논하지 않았고, 얻음이 있으면 기뻐하였으며 한번 창수(唱酬 시나 문장을 주고받음)하는데 참여하면 문득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선비가 되고, 혹시 한 마디 칭찬이라도 얻으면 그 평판이나 가치가 여러 세대를 두루 전하여진다.
< 飢えた日本民を 可愛想にここは 朝鮮通信使>
10月 17日庚子
東北風が夜に大きく仏語それによって大砲(大浦)にとどまった.
..........(日本)民たちが苦しくてけち臭いことは多分天下で最高であることでたとえ我がお腹をひく格調を(格卒)で言うと言っても毎日毎日煮ったさつまいも根を二度食べてその後にご飯を食べる人は五分の仕事に過ぎない.またスゾジル何度に木器底に触れることに過ぎないから, たとえ一緒に座って食べる人が (ご飯が)いないと言っても様式一粒も分けてやらない.
(私たち)六倍に焼けているなぜの船頭たちははいよって私たちが食べ物を食べさせるのに, 皆大きい筒を持って来て必ず食べ物をたくさんくれと言う.(私たち)ギョックグンドルが彼らの食べ物を貪ることをあざ笑って叱責をしてもまた恥が分からなかった. 民たちはますます栄えるのに(数字は多くなるのに)生きて行く都合がこのようにひどく苦しいから, もし彼らの船を作る能力が私たちのヨルベになったら私たち未来に近づく懸念がまた少なくなかろう気が引ける.
<宣伝用でよく構えられた朝鮮通信使の道で少しさえ脱すれば出る日本の本当に姿>
12月 21日聖卯
村は優に百号ほどなるのに皆わらぶきだったし暮すことが貧しかったし皆ぼろぼろだったしくしけずりもしなかったし洗わなかった. 女達は出る人が一人もいなかったから衣服がきれいではなくて他人に会うか恥ずかしがるからだと言う.君をに覆った 3階位の家たちがあったが皆ジェントルマン(神舍)と承嗣(僧舍)と言う.
2月 9日神妙
清い. 日が庭 時出発して 40里に行って金穀領(金谷嶺)でお昼を食べたし 30里に行って等地(藤枝)から泊った. この日は 70里に行った.
..東北で二十で里に行って金穀領に上がった
...
眼科外二つの頭にある人家たちはお互いに見合わせているし皆お茶と餠を売っていた. ギック家たちを通る度にボブボンヒおしろいをつけて紅を塗った女人たちが左側には餠を持って右側には当故(糖膏)を持って前で人を迎えながらつらいようにものを切に言った. 家ごとに競争する音がお互いに聞こえた. 女は窓(娼 窓.女)と言う. ただそのこれは皆染めた.
村は狭くてむさくるしかったがグァンソはずば抜けた.(派手だった) それぞれの家所たちもまたたくさんそうだった. たいてい皆各州(州) 太守(太守)が往き来する時休む所だと言う.
<とうとう江戸の入口でゴジテに会う>
2月 15日精油
曇って暮れ方に雨が降った. 朝に去って 45里に行って新内部推薦(神奈川)でお昼を食べたしまた 45里に行ってプムチォン(品川)から泊った.
...新内部推薦以後は武将株に属する. たいてい等地(藤枝) 東の地は汚くて崩れたのが多かったしもっと前が見られないのに物乞いする人といざりとゾルトックバルとせむしがたくさん乱れているように入りまじてもの乞いをしたからこれは強豪(江戸 江戸)で物乞いする輩らがここに出たのではないかと言う気がした.
土品(土品)もまた薄情だった(むちゃくちゃだった)
< 惨めに貧しい....日本漁夫>
5月 19日
考功司の下に泊まった時小さな梨に木取っ手がある丸い魚網を積んだ漁夫がその妻といっしょに船をかき混ぜてイカを捕っていた.
漁夫は一者ほどなる麻布で陰部を覆ったし彼の妻も一者ほどなる麻布でスカート幅を作って先後を選り分けたから, 男女が全身を薄赤く出していた.
息子は年がヨルドソノ肉ほどドエオッゴした一子供は濡れる食べていた.帆柱にイカ数十匹を通してかけて乾かしていたし小さな釜と木器もあったから朝夕方で食べ物をこしらえて食べるためであった
<日本人に対する褒め言葉>
彼 (日本)文士(文士)たちは一度我が席に入って来ればまことに空に上がって竜(竜)になったような喜びを持ったし, もし一言でもお互いにするようになればふと喜ぶ光を顔に現わしたしそばにいる人もこれをすごく喜んだ.
たとえ時を持って来ることはしても本来誇るとか才を競うという意味はなかった. これではなければ充分に手を借りてお互いに見られないからだった. 彼らが我が国の人の詩や字を求めるのによくできてならないことを論じなかったし, 得ることがあれば喜んだし一度蒼水(唱酬 市や文章を取り交わし)するのに参加すればふと世の中に名前の知られる士になって, もし一言褒め言葉でも得ればその評判や価値が多くの世代をあまねく伝えら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