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1858년 일본에서는 천황의 칙허 없이 서양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를 격렬히 비난하는 존왕양이론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츠마번은 막부의 개혁을 주장하며 막부를 지원하고자 했다. 1862년 사츠마번 일행은 조정의 칙사를 수행하여 에도(江戶)에 가서 막부의 개혁을 이루게 하는 임무를 완수한 후, 교토(京都)로 돌아가는 도중 나마무기 촌(현 요코하마)에 이르렀을 때 영국상인 일행(남자 3명, 여자 1명)을 만나게 된다. 영국상인 일행은 다이묘 행렬시 지켜야할 법도를 모르고 말에 탄 채 그대로 통과하고자 했다. 이때 분노한 사츠마번 무사가 영국인 일행을 칼로 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나마무기 사건이다.

이에 격노한 영국 측은 막부에 대해서 공식사과서와 배상금을, 사츠마번에 대해서는 범인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하여 막부는 이에 응했지만 사츠마번은 잘못은 영국상인들에게 있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 측은 사츠마번에 큐퍼 제독이 이끄는 함대 7척을 파견하여 그 위세로 사츠마번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사츠마번에서는 영국 함대가 1863년 6월 28일 카고시마 만에 나타나자 각 포대에 인원을 배치하고 식량·탄약 등을 보급하는 등 총동원을 꾀했다.

가고시마 만 중앙에는 사쿠라 섬이 위치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사츠마번 중심도시(城下町)가 있어 포대는 이 양 연안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사츠마번은 10개의 포대에 83문의 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6, 8, 12, 18, 24, 36, 80 파운드의 포와 150파운드의 유탄포 등 다양한 포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사정거리가 1km정도인 구식포이었다(단 시가지 연안포대와 사쿠라섬 포대 사이는 4km 정도였다). 이외 사츠마번은 외국으로부터 구입한 3척의 기선도 있었다. 한편 영국 측은 7척의 군함에 101문의 포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중 22문은 사정거리 4km에 달하는 최신식의 암스트롱포였다.

처음에는 서간을 통한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성과가 없자 영국측은 7월 2일 사쿠라섬에 정박중이던 사츠마번 기선 3척을 나포하여 교섭을 위한 담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사츠마번의 지휘관 오쿠보 도시미치는 각 포대에 일제 사격을 명령하게 되었다. 전투경과를 보면 악천후 속에서 사츠마번의 선제공격으로 함대 두척에 경미한 피해를 본 영국 측은 전열을 가다듬고 날씨가 회복됨에 따라 집성관 공장과 포대를 공격했다. 이 포격전 중 사츠마번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영국함대의 기함을 집중 공격하여 함장을 포함한 63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츠마번의 자랑스런 전과였다. 이에 비해 사츠마번에서는 7월 2일 하루 만에 나포된 기선 3척이 불타버리고 포대 8할이 파괴되었으며, 집성관과 시가지 1할이 불타버렸다. 7월 3일에도 양측간의 포 공격이 있은 뒤 7월 4일이 되자 영국함대는 선체 수리, 석탄·탄약·식량의 보급을 위해 가고시마만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가고시마만에서의 전투는 끝이 난다. 영국함대가 철수한 지 4개월 후인 11월 양측은 강화를 맺어 사츠마번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범인색출을 약속하게 된다.

 

영국에게 대파된것도 모자라 배상금에 범인색출

일본판 아편전쟁을 보는듯함 당시 사츠마 병력 8000명(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조선군은 700명정도) 

 

일본이 우습게 보는 신미양요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남북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중령)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サツマ・イギリス戦争[薩英戦争] 実体

1858年日本では天皇の勅許なしに西洋列強と通商條約を結んだ幕府を激烈に責める尊王壌夷論が激化されていた. これに対してサツマボンは幕府の改革を主張して幕府を支援しようとした. 1862年サツマボン仲間は調整の勅使を遂行して江戸(江戸)に行って幕府の改革を成すようにする任務を果した後, 京都(京都)に帰る途中生麦村(現横浜)に至った時イギリス上である仲間(男 3人, 女 1人)に会う. イギリス上である仲間は大名行列の時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法道が分からなくて馬に乗ったままそのままパスしようとした. この時怒ったサツマボン無事がイギリス人連中を刀で攻撃して死傷者の発生する事件が起こった. これが生麦事件だ.

ここに激怒したイギリス側は幕府に対して公式誤り書と賠賞金を, サツマボンに対しては犯人処罰と賠賞金を要求して幕府はここに応じたがサツマボンは過ちはイギリス商人たちにあると言って応じなかった. するとイギリス側はサツマボンにキュポ提督が導く艦隊 7尺を派遣してその威勢でサツマボンを屈服させようとした. サツマボンではイギリス艦隊が 1863年 6月 28日鹿児島ぶりに現われると各砲台に人員を配置して食糧・弾薬などを普及するなど総掛かりをはかった.

鹿島ではない中央にはサクラ島が位していてその向こう側にはサツマボン中心都市(城下町)があって砲台はこの羊沿岸に集中配置されていた. サツマボンは 10個の砲台に 83お問い合わせ砲を配置していた. 6, 8, 12, 18, 24, 36, 80 パウンドの砲と 150パウンドのユタンポなど多様な砲たちを取り揃えていたが射程距離が 1km程度であるグシックポだった(甘い現価だ沿岸砲台とサクラ島砲台の間は 4km 程度だった). 以外サツマボンは外国から購入した 3尺の機先もあった. 一方イギリス側は 7尺の軍艦に 101お問い合わせ砲を取り揃えていたがこの中 22門は射程距離 4kmに達する最新式のアームストロング砲だった.

初めには書簡を通じる交渉が進行されたが成果がないで英国側は 7月 2日サクラ島に停泊中だったサツマボン機先 3尺を捕えて交渉のための担保にしようとした. しかしサツマボンの指揮官OkuboToshimitsuは各砲台に日製射撃を言い付けるようになった. 戦闘頃とを見れば悪天候の中でサツマボンの先制攻撃で艦隊ドチォックに軽微な被害を受けたイギリス側は戦列を整えて天気が回復するによって集成官工場と砲台を攻撃した. この砲撃戦の中でサツマボンは射程距離に入って来たイギリス艦隊の期することを集中攻撃して艦長を含んだ 63人の死傷者を出すようにした. しかしこれだけがサツマボンの誇らしい前科だった. これに比べて サツマボンでは 7月 2日一日ぶりに拿捕された機先 3尺が燃えてしまって砲台 8割が破壊されたし, 集成官と町竝み 1割が燃えてしまった. 7月 3日にも両側間の砲攻撃がある後 7月 4日になるとイギリス艦隊は船体修理, 石炭・弾薬・食糧の普及のために鹿島だけで撤収した. こういうわけで鹿島だけでの戦闘は終りが飛ぶ. イギリス艦隊が撤収してから 4ヶ月後人 11月両側は強化を結んで サツマボンは賠賞金を支払って犯人索出を約束するようになる.

 

イギリスに大破されたことも足りなくて賠賞金に犯人索出

日本版阿片戦争を見るよう当時サツマ兵力 8000人(辛未の役当時江華島朝鮮軍は 700名程度) 

 

日本がおこがましく見る辛未の役

 

¥"朝鮮軍は勇ましかった. 彼らは降参みたいなことはてんから分からなかった. 武器を失った者等は石と土を投げつけた. 借りる費用決定的に不利になると生き残った朝鮮軍 1百余人は砲台丘を降りて漢江の水に投資信託自殺したし一部は自ら首を突いて自決した.¥" (エルボトがステル)
¥"南北戦争時にもそんなに短い時間にそのように多い飽和と弾が零れ落ちた事はなかった.¥" (ブレーク中佐)
¥"が戦闘は東洋でアメリカ海軍の威信を損傷させて外交の失策を暴露した最高の事件だ¥" (米国務長官ポス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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