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은 세척

이순신(李舜臣)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비하여 우선적으로 군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부하 중에는 조선술(造船術)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나대용(羅大用)이란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오로지 거북선 건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나대용은 1556년에 태어나 26세 때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전인 36세 때에 아우 치용(致用)과 함께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갔다. 거북선[龜船] 건조에 이어 여러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새 전함인 창선, 쾌속선인 해주 등을 창안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에 경기수사(京畿水使)를 역임하다가 161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으며, 이순신은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승리한 후 그 모습과 성능에 대해서 장계를 통해 이렇게 보고했다.

”신(臣)은 일찍이 왜적(倭敵)의 침범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두(龍頭)를 만들어 달고, 그 아 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박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능히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전함이었는지는 상고할 자료가 없으나 거북선은 이미 태종(太宗) 때에 있었던 것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온다. 즉 1413년에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의 모의전투가 임진강에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거북선은 그 뒤 倭寇의 노략질이 뜸해짐에 따라 어느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거북선이 그 전에도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나 나대용이 창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ㅇ 조정의 지시를 받아서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 그가 부임하기 전부터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나 다른 수군 군영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속 상관인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는 미리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 가공할 전함을 독자적으로 건조했다면 틀림없이 선조의 의심을 샀을 것이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의 기록에는 거북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고, 위는 판자로 덮었다. 판 위에는 십자형의 좁은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고, 그 외는 모두 칼날과 송곳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아 그 아 가리가 총구멍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달아 그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양이 대체로 거북이와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송곳과 칼날을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갔다. 적이 배에 올라 덤비려 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면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총을 쏘니, 적선이 바다를 덮고 달려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에 전후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거북선이 완공된 것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불과 이틀 전이었으니 그 절묘한 타이밍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거북선에 관한 자료는 이른바 “통제영귀선도(統制營龜船圖)”와 “전라좌수영귀선도(全羅左水營龜船圖)” 두 가지가 있는데, 이순신이 순국한 지 200년이나 지난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어 자료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아직도 남해안 일대에서는 거북선 인양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거북선의 잔해로 볼 만한 유물은 단 한점도 건져 올리지 못했다.

거북선의 승조 인원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추론할 수 밖에 없는데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거북선은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의 수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덜하지 않은 까닭에...”라고 했고, 또 “한 척의 군선에 충당해야 할 130명의 군사를 보충할 길이 없어...”라고 하여 거북선 한 척에 대체로 125~130명의 장병이 승선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거북선의 특징을 간추려보면 첫번째 돌격선의 기능을 지닌 특수 전함이었고, 두번째 일반 전함보다 훨씬 튼튼하게 만들어진 무적 전투선이었으며, 세번째 우수한 화력을 지닌 공포의 전함이었고, 네번째는 공격뿐 아니라 방어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불침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건조하여 실전에 투입한 거북선의 숫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3척이라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 일본군보다 훨씬 우수했던 화약무기.

그러면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얼마나 되었을가.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거북선 2척, 판옥선 177척, 협선 119척, 여기에 장착한 함포는 1천 8백문, 병력은 총 4만 9천 8백여명으로 나타났다.

당시 원균(元均) 휘하의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에 판옥선 44척, 협선 29척 등 군선 73척에 군사 1만 2천여명,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거북선 2척,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등 군선 41척에 군사 약 7천명, 이억기(李億祺) 휘하의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에 판옥선 25척, 협선 16척 등 군선 41척에 군사 약 8천 8백명이 있었으며, 박홍(朴弘) 휘하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도 경상우수영과 비슷한 군선과 병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 비록 해전을 치르지 않았으나 충청수영(忠淸水營)에도 판옥선 40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에도 수사가 있었으니 판옥선 등 전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에 경상우도수군(慶尙右道水軍)과 경상좌도수군(慶尙左道水軍)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판옥선 4척, 협선 2척만을 남긴 채 스스로 전함을 파괴하고 자멸해버렸으므로 조선 수군의 전력은 가만히 앉은 채 반감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던 것이다.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 건조와 더불어 이순신이 힘을 기울인 것은 해전에서 사용할 각종 화포와 화약의 제조와 비축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해전에서 주병기로 사용하지 않았던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 각종 화포와 거기에 사용할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화전(火箭) 및 철환(鐵丸) 등과 화약 준비에 큰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초기에 아무 준비 없이 우왕좌왕하던 육군이 고작 활과 창으로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敗戰)을 거듭할 때, 당대의 명장으로 알려진 신립(申砬)이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에서 참패를 당하고 못난 임금과 무능한 조정의 대신들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파난할 때, 오직 이순신만이 해상에서 수백 척의 일본 군선을 쳐부수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판옥선과 최강의 돌격선인 거북선으로 무장한 함대의 전력, 뛰어난 성능의 화약과 화포가 그의 탁월한 전략 전술에 따라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화약을 비롯한 화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의 제철 및 화약무기의 수준은 유럽을 앞서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쓰이는 대포라는 것이 철관을 둥글게 말아 쇠테로 감아서 조였고, 포탄도 돌을 깎아서 만든 석탄(石彈)을 발사한 유치한 것인데 비해 조선의 대포틑 철로 주조된 화포였으며, 포탄도 쇳덩어리로 만든 철환(鐵丸)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포는 화약을 잘못 배합하여 포탄이 발사되기 전에 대포가 터져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의 화약무기는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뒤 조선조 세종(世宗) 때에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양산되어 전국의 군사요새에 실전 배치되었다. 1435년에는 1천 650문의 화포를 생산하여 평안도에 9백문, 함경도에 750문을 생산했으며, 1445년에는 조선 전역에 현자총통(玄字銃筒)만도 1만문이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文宗)은 화차(火車) 개발에 힘써 367량의 화차를 한성과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 등 32개 군사 요충지에 배치했다.

천자총통(天字銃筒)이니 지자총통(地字銃筒)이니 하는 것은 오늘의 대포와 같은 것이다. 포신(砲身)은 구리나 청동 도는 무쇠로 주조했으며, 길이는 120cm에서 200cm 정도, 구경은 18cm에서 40cm 정도였고, 무게는 78kg에서 725kg 정도였다.

총통에는 철환을 발사하기도 했으나 주로 초대형 화살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차대전, 피령전(皮翎箭) 등을 발사했다.

대장군전은 길이 36cm, 지름 15cm, 무게 30kg짜리의 목봉으로서 끝에 21cm 정도의 철촉을 달고 몸통에 75cm짜리 쇠깃 3개를 달았다. 이 초대형 화살이 천지를 울리는 우렁찬 포성과 함께 발사되어 적선에 꽂히면 적군은 혼비백산함은 물온 배에 큰 구멍이 둟리거나 격침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장군전과 차대전 등은 구조는 같고 크기만 작은 것이고, 피령전은 화살의 깃이 쇠붙이 대신 가죽으로 된 것이었다.

사거리는 천자통통에 대장군전을 발사하면 약 1km, 철환은 4km에 이르렀고, 지자총통에 장군전을 발사하면 640m, 철환은 200개가 발사되었다. 현자총통에 차대전을 쏘면 역시 640m, 철환은 100개를 발사했으며, 황자총통에 피령전을 쏘면 880m, 철환 40개를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이 이처럼 일찍부터 우세한 화약무기가 있었음에도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조총이라는 개인화기에 재래식 무기인 창과 활, 심지어는 낫, 곡괭이, 괭이, 죽창 등으로 맞서다가 크나큰 낭패를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약 200년 동안 이어진 태평세월에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가 부른 참변이니 이야말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군사적 위협이나 국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권투쟁에만 머리가 터져라 하고 집안싸움을 벌이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국가안보를 위한 예산 배정이 있었을 턱이 없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터질 때까지 그처럼 훌륭한 화약무기가 있었건만 이를 대량생산하고 배치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화약무기의 위력을 잊지 않고 있던 이순신 장군 등에 의해 조선 관군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참으로 앞을 내다볼 줄 알았던 지장(智將)이었다. 그래서 현대에 경제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위대한 최고 경영자라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순신은 장차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전함 건조와 군사 훈련 강화와 더불어 화약 제조와 무기 생산 등에도 침식을 잊다시피 했다.

이순신 장군은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 각종 화포와 그 화포에 사용할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장편전(長片箭), 피령전(皮翎箭), 화전(火箭), 철환(鐵丸) 등을 꾸준히 만들어 비축했으며, 당연히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화약도 대량으로 생산해 비축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이처럼 장차 벌어질 전쟁을 예측하고 전쟁 준비에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는 동안 무능한 조정의 국방정책은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임금 선조(宣祖)와 사돈간이며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립(申砬)이 “수군을 없애고 육전에만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 일도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바다로 침범하는 왜적(倭敵)을 막는데 있어서는 수군을 따를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군도, 수군도 어느 쪽도 버릴 수는 없습니다.”하고 그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순신은 자신이 최고 지휘관이라고 해서 사령부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입으로만 명령과 지시를 내린 벼슬아치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 장병과 애환을 같이 했으며, 수시로 휘하 진포를 순시하고, 몸소 궁술장(弓術場)에서 무술 연마를 하면서 다가오는 적침(敵侵)에 대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지휘관이요 전략가였다.

이순신은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하여 장병의 모범이 되었다. 자신은 편히 앉아 입으로만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휘하 장졸의 신망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렇게 해서는 유사시 군사들에게 목숨을 바쳐 싸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순신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들의 정신무장부터 새롭게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이 한없는 인내력으로 부하들을 자애롭게만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다른 애정으로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정도를 넘은 일탈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렸다. 이순신은 참으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에 엄격했던 지휘관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이 있던 현재 여수시 오동도를 훈련장으로 만들어 군사들을 조련시켰고, 좌수영의 방비를 위해 곳곳에 분수대를 쌓았으며, 수영 알 바다 밑에는 큰 돌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을 이어 깔아 놓았다. 또한 이순신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반드시 망궐례를 행하고 공무를 보았으며, 공무를 마친 뒤에는 궁사(弓射)를 하여 자신과 휘하 장령들의 무술 단련을 열심히 했다.

이 궁사(弓射)야말로 요즘으로 치면 사격훈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순신은 자신이 장수라고 해서, 공무로 바쁜 고관이라고 해서 결코 궁술(弓術) 연습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기회 있을 때마다 상까지 걸어 궁사(弓射)를 장려했으며 궁사(弓射) 시합이 끝난 뒤에는 장령들과 더불어 술을 나누어 마시고 피로를 풀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순신의 비범하고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이순신은 칼이 아니라 활을 통해 심신을 단령하고, 부하들과 인간적 교유를 했으며, 단결심을 고취했던 것이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不敗の名将李舜臣(李舜臣)」3.秀吉の野慾 (3)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은 세척

이순신(李舜臣)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비하여 우선적으로 군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부하 중에는 조선술(造船術)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나대용(羅大用)이란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오로지 거북선 건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나대용은 1556년에 태어나 26세 때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전인 36세 때에 아우 치용(致用)과 함께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갔다. 거북선[龜船] 건조에 이어 여러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새 전함인 창선, 쾌속선인 해주 등을 창안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에 경기수사(京畿水使)를 역임하다가 161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으며, 이순신은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승리한 후 그 모습과 성능에 대해서 장계를 통해 이렇게 보고했다.

"신(臣)은 일찍이 왜적(倭敵)의 침범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두(龍頭)를 만들어 달고, 그 아 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박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능히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전함이었는지는 상고할 자료가 없으나 거북선은 이미 태종(太宗) 때에 있었던 것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온다. 즉 1413년에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의 모의전투가 임진강에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거북선은 그 뒤 倭寇의 노략질이 뜸해짐에 따라 어느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거북선이 그 전에도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나 나대용이 창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ㅇ 조정의 지시를 받아서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 그가 부임하기 전부터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나 다른 수군 군영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속 상관인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는 미리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 가공할 전함을 독자적으로 건조했다면 틀림없이 선조의 의심을 샀을 것이다.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의 기록에는 거북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고, 위는 판자로 덮었다. 판 위에는 십자형의 좁은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고, 그 외는 모두 칼날과 송곳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아 그 아 가리가 총구멍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달아 그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양이 대체로 거북이와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송곳과 칼날을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갔다. 적이 배에 올라 덤비려 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들면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총을 쏘니, 적선이 바다를 덮고 달려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에 전후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거북선이 완공된 것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불과 이틀 전이었으니 그 절묘한 타이밍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거북선에 관한 자료는 이른바 "통제영귀선도(統制營龜船圖)"와 "전라좌수영귀선도(全羅左水營龜船圖)" 두 가지가 있는데, 이순신이 순국한 지 200년이나 지난 뒤인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어 자료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아직도 남해안 일대에서는 거북선 인양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거북선의 잔해로 볼 만한 유물은 단 한점도 건져 올리지 못했다.

거북선의 승조 인원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추론할 수 밖에 없는데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거북선은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의 수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덜하지 않은 까닭에..."라고 했고, 또 "한 척의 군선에 충당해야 할 130명의 군사를 보충할 길이 없어..."라고 하여 거북선 한 척에 대체로 125~130명의 장병이 승선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거북선의 특징을 간추려보면 첫번째 돌격선의 기능을 지닌 특수 전함이었고, 두번째 일반 전함보다 훨씬 튼튼하게 만들어진 무적 전투선이었으며, 세번째 우수한 화력을 지닌 공포의 전함이었고, 네번째는 공격뿐 아니라 방어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불침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건조하여 실전에 투입한 거북선의 숫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3척이라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 일본군보다 훨씬 우수했던 화약무기.

그러면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얼마나 되었을가.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거북선 2척, 판옥선 177척, 협선 119척, 여기에 장착한 함포는 1천 8백문, 병력은 총 4만 9천 8백여명으로 나타났다.

당시 원균(元均) 휘하의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에 판옥선 44척, 협선 29척 등 군선 73척에 군사 1만 2천여명,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거북선 2척,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등 군선 41척에 군사 약 7천명, 이억기(李億祺) 휘하의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에 판옥선 25척, 협선 16척 등 군선 41척에 군사 약 8천 8백명이 있었으며, 박홍(朴弘) 휘하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도 경상우수영과 비슷한 군선과 병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 비록 해전을 치르지 않았으나 충청수영(忠淸水營)에도 판옥선 40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에도 수사가 있었으니 판옥선 등 전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에 경상우도수군(慶尙右道水軍)과 경상좌도수군(慶尙左道水軍)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판옥선 4척, 협선 2척만을 남긴 채 스스로 전함을 파괴하고 자멸해버렸으므로 조선 수군의 전력은 가만히 앉은 채 반감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던 것이다.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 건조와 더불어 이순신이 힘을 기울인 것은 해전에서 사용할 각종 화포와 화약의 제조와 비축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해전에서 주병기로 사용하지 않았던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 각종 화포와 거기에 사용할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화전(火箭) 및 철환(鐵丸) 등과 화약 준비에 큰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초기에 아무 준비 없이 우왕좌왕하던 육군이 고작 활과 창으로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敗戰)을 거듭할 때, 당대의 명장으로 알려진 신립(申砬)이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에서 참패를 당하고 못난 임금과 무능한 조정의 대신들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파난할 때, 오직 이순신만이 해상에서 수백 척의 일본 군선을 쳐부수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판옥선과 최강의 돌격선인 거북선으로 무장한 함대의 전력, 뛰어난 성능의 화약과 화포가 그의 탁월한 전략 전술에 따라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화약을 비롯한 화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의 제철 및 화약무기의 수준은 유럽을 앞서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쓰이는 대포라는 것이 철관을 둥글게 말아 쇠테로 감아서 조였고, 포탄도 돌을 깎아서 만든 석탄(石彈)을 발사한 유치한 것인데 비해 조선의 대포틑 철로 주조된 화포였으며, 포탄도 쇳덩어리로 만든 철환(鐵丸)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포는 화약을 잘못 배합하여 포탄이 발사되기 전에 대포가 터져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의 화약무기는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뒤 조선조 세종(世宗) 때에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양산되어 전국의 군사요새에 실전 배치되었다. 1435년에는 1천 650문의 화포를 생산하여 평안도에 9백문, 함경도에 750문을 생산했으며, 1445년에는 조선 전역에 현자총통(玄字銃筒)만도 1만문이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文宗)은 화차(火車) 개발에 힘써 367량의 화차를 한성과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 등 32개 군사 요충지에 배치했다.

천자총통(天字銃筒)이니 지자총통(地字銃筒)이니 하는 것은 오늘의 대포와 같은 것이다. 포신(砲身)은 구리나 청동 도는 무쇠로 주조했으며, 길이는 120cm에서 200cm 정도, 구경은 18cm에서 40cm 정도였고, 무게는 78kg에서 725kg 정도였다.

총통에는 철환을 발사하기도 했으나 주로 초대형 화살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차대전, 피령전(皮翎箭) 등을 발사했다.

대장군전은 길이 36cm, 지름 15cm, 무게 30kg짜리의 목봉으로서 끝에 21cm 정도의 철촉을 달고 몸통에 75cm짜리 쇠깃 3개를 달았다. 이 초대형 화살이 천지를 울리는 우렁찬 포성과 함께 발사되어 적선에 꽂히면 적군은 혼비백산함은 물온 배에 큰 구멍이 둟리거나 격침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장군전과 차대전 등은 구조는 같고 크기만 작은 것이고, 피령전은 화살의 깃이 쇠붙이 대신 가죽으로 된 것이었다.

사거리는 천자통통에 대장군전을 발사하면 약 1km, 철환은 4km에 이르렀고, 지자총통에 장군전을 발사하면 640m, 철환은 200개가 발사되었다. 현자총통에 차대전을 쏘면 역시 640m, 철환은 100개를 발사했으며, 황자총통에 피령전을 쏘면 880m, 철환 40개를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이 이처럼 일찍부터 우세한 화약무기가 있었음에도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조총이라는 개인화기에 재래식 무기인 창과 활, 심지어는 낫, 곡괭이, 괭이, 죽창 등으로 맞서다가 크나큰 낭패를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약 200년 동안 이어진 태평세월에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가 부른 참변이니 이야말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군사적 위협이나 국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권투쟁에만 머리가 터져라 하고 집안싸움을 벌이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국가안보를 위한 예산 배정이 있었을 턱이 없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터질 때까지 그처럼 훌륭한 화약무기가 있었건만 이를 대량생산하고 배치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화약무기의 위력을 잊지 않고 있던 이순신 장군 등에 의해 조선 관군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참으로 앞을 내다볼 줄 알았던 지장(智將)이었다. 그래서 현대에 경제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위대한 최고 경영자라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순신은 장차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전함 건조와 군사 훈련 강화와 더불어 화약 제조와 무기 생산 등에도 침식을 잊다시피 했다.

이순신 장군은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 각종 화포와 그 화포에 사용할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장편전(長片箭), 피령전(皮翎箭), 화전(火箭), 철환(鐵丸) 등을 꾸준히 만들어 비축했으며, 당연히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화약도 대량으로 생산해 비축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이처럼 장차 벌어질 전쟁을 예측하고 전쟁 준비에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는 동안 무능한 조정의 국방정책은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임금 선조(宣祖)와 사돈간이며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립(申砬)이 "수군을 없애고 육전에만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 일도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바다로 침범하는 왜적(倭敵)을 막는데 있어서는 수군을 따를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군도, 수군도 어느 쪽도 버릴 수는 없습니다."하고 그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순신은 자신이 최고 지휘관이라고 해서 사령부에 앉아 이래라 저래라 입으로만 명령과 지시를 내린 벼슬아치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 장병과 애환을 같이 했으며, 수시로 휘하 진포를 순시하고, 몸소 궁술장(弓術場)에서 무술 연마를 하면서 다가오는 적침(敵侵)에 대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지휘관이요 전략가였다.

이순신은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하여 장병의 모범이 되었다. 자신은 편히 앉아 입으로만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휘하 장졸의 신망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렇게 해서는 유사시 군사들에게 목숨을 바쳐 싸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순신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들의 정신무장부터 새롭게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이 한없는 인내력으로 부하들을 자애롭게만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다른 애정으로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정도를 넘은 일탈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렸다. 이순신은 참으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에 엄격했던 지휘관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이 있던 현재 여수시 오동도를 훈련장으로 만들어 군사들을 조련시켰고, 좌수영의 방비를 위해 곳곳에 분수대를 쌓았으며, 수영 알 바다 밑에는 큰 돌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을 이어 깔아 놓았다. 또한 이순신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반드시 망궐례를 행하고 공무를 보았으며, 공무를 마친 뒤에는 궁사(弓射)를 하여 자신과 휘하 장령들의 무술 단련을 열심히 했다.

이 궁사(弓射)야말로 요즘으로 치면 사격훈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순신은 자신이 장수라고 해서, 공무로 바쁜 고관이라고 해서 결코 궁술(弓術) 연습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기회 있을 때마다 상까지 걸어 궁사(弓射)를 장려했으며 궁사(弓射) 시합이 끝난 뒤에는 장령들과 더불어 술을 나누어 마시고 피로를 풀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순신의 비범하고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이순신은 칼이 아니라 활을 통해 심신을 단령하고, 부하들과 인간적 교유를 했으며, 단결심을 고취했던 것이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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