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혼인한 뒤에 무과시험을 준비

이순신은 혼인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무과를 보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이순신이 학문에서 깊은 경지에 들어섰고, 글재주까지 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관(武官)이 되려고 하자 처음에는 부모님과 형님들이 반대를 했을 것이다. 이는 조선이 문치주의(文治主義), 우문멸무(優文蔑武) 사회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가 문과에 응시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어려운 무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장인 방진(方震)과 부인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장인 방진은 변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무인(武人)이었다. 또한 화적패가 덮칠 정도로 재산이 많았으니 나이 20세가 넘도록 과거도 보지 않고 백수로 지내는 사위 이순신에게 차라리 무과를 보라고 권유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그러한 방진의 딸답게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담대했던 부인도 이순신에게 그러한 조언을 했을 지도 모른다.

효성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던 이순신은 장인과 부인의 권유에 따라 무과를 보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자신의 포부를 간곡히 말씀드려 마침내 두 분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성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두 형의 이해도 얻었을 것이다.

당시에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고 병법서만 달달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사서 기마술(騎馬術)도 익혀야 했고 활과 창검(槍劍)을 마련해 무술도 연마해야만 했으므로 돈이 꽤나 들었다. 어저면 그 비용을 처가에서 마련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이순신이 비록 혼인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가 무엇으로 아내를 벌어 먹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가세가 곤궁하여 서울에서 더는 살 수가 없으므로 부인과 세 아들을 거느리고 처가로 낙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부친도 처가살이를 하러 시골로 내려갔는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맏아들도 아닌 셋째아들이 무과시헌을 볼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순신이 혼인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무과시험 준비를 한 데에는 처가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받은 바가 컸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순신은 무관이 되기 위해 마당히 익혀야만 할 병법서 무경칠서(武經七書) 즉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를 비롯하여 사마법(司馬法), 육도(六韜), 삼략(三略), 울료자(蔚燎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을 열심히 읽고 무술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낙마(落馬)로 안타깝게 낙방하다.

이순신의 맏아들 회(獪)가 태어난 것은 23세 때였으며, 다시 4년 뒤에는 둘째아들 울(蔚)이 태어나 식구는 네명으로 늘어났다. 둘째 울의 이름은 뒷날 이순신이 열(悅)이라고 바꾸어준다.

그의 나이도 이미 27세가 되었다. 그러나 입신을 못 했으니 이는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세조(世祖)대의 남이(南怡)가 불과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0세에 여진족을 토벌하고 겨우 26세에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 것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도 있고, 또 하늘은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내려 보내주는 법이 아닌가.

당시에는 무과에 급제해야만 장교가 되고 나아가 군사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문과는 사당에서 시작하여 향교(鄕校)나 서원(書院) 등에서 글공부를 하고 또 이름난 학자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익히는 것으로 준비할 수 있었지만 무과는 무술을 연마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고 모시고 가르침을 청할만한 스승도 없었다. 무과를 과거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 과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과에 응시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홀로 병서를 읽고 무술을 연마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이순신, 이미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한 가정의 가장인 그도 집 근처에 자신만의 연병장을 만들어 놓고서 그러한 과정을 홀로 밟았던 것이다.

명종(明宗)이 죽고 선조(宣祖)가 그 뒤를 이은 것은 이순신이 무과 급제를 목표로 아산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병서를 공부하던 무렵인 1567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선조는 1552년에 중종(中宗)의 일곱번째 서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뒤에 연(鉛)으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선조는 이순신보다 일곱 살 아래다.

그는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애 책봉되었다가 명종이 후사가 없어 후계자로 지목하였고, 1567년 6월에 명종이 재위 22년만에 죽자 7월 1일에 왕위를 이었다.

선조는 즉위 당시 16세 소년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대비(仁順大妃) 심씨가 수렴첨정을 했다. 그러나 곧 선조가 영리한 것을 본 인순대비가 그 이듬해에 전권을 넘겨주어 친정(親政)에 나섰다.

선조는 퇴계(退溪) 이황(李愰)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만큼 처음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성리학을 신봉했기에 외척을 멀리하고 사림을 대거 등용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새 바람이 일어났지만 부작용도 뒤따랐다. 사람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망국적 붕당정치가 비롯되었던 것이다.

선조(宣祖)는 조선왕조 사상 처음으로 직계가 아닌 방게로서 왕위를 이은 임금이었다. 전에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또는 세조(世祖)와 성종(成宗)의 경우처럼 적장자가 아니명서도 왕위에 오른 적은 있었지만 선조처럼 왕비나 후궁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 낳은 아들로 민가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적통이 아닌 방계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였는지 선조는 시기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고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모질고 도랭도 좁아서 재위 기간 내내 신하들을 의심하여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비록 폭군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걸핏하면 신하들을 내치는 바람에 국정 운영이 안정될 수가 없었다.

국정이 원칙보다는 국왕의 감정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게 되자 자연히 신하들도 바른말을 하기보다는 임금의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뒷날 이순신이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인 1572년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하였다. 그 해에 나라에 경사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는 과거(科擧)인 별시(別試)가 한성 훈련원에서 열렸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무과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 등 3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 시험인 별시, 즉 별과 시험이 있었다. 또 시험 과목은 무예과 강서(講書) 두 가지였다. 무예는 크게 서서 하는 활쏘기와 말을 타고 보는 두 가지 시험이 있었다. 활쏘기는 나무로 된 화살을 쏘는 목전(木箭), 잛은 화살을 쏘는 편전(片箭), 쇠로 만든 전투용 화살을 쏘는 철전(鐵箭)이 있었고, 말타기는 말을 달리며 과녁을 맞추는 기사(騎射), 말을 달리며 장창(長槍)을 던져 목표물을 맞추는 기창(騎槍), 말을 타고 채를 휘둘러 나무공을 쳐서 점수를 내는 격구(擊毬)가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뒤에는 조총의 중요성이 고려되어 무과시험에 총격술(銃擊術)이 추가되었는데, 의문스러운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칼이 빠졌다는 점이다. 도검술(刀劍術)을 중요시하지 않은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이처럼 도검술을 무시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통적으로 긴 칼로 싸우는 데에 능했던 일본군, 특히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과 단병접전(短兵接戰)을 벌였을 때에 조선 관군이 큰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한편, 강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무경칠서(武經七書), 기타 병서 가운데 한 가지를 택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추가되기도 했다.


1572년에 이순신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무과시험을 보았는데, 불운하게도 말을 타고 달리는 시험에서 그가 타고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거꾸러지는 바람에 낙마하고 말았다. 말을 잘 타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낙마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순신은 운수 사납게도 낙마하면서 그만 왼쪽 다리벼가 부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이순신은 겨우 일어서서 가까운 곳에 있는 버드나무 밑으로 다가가더니 그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부상당한 다리를 감싼 다음 다시 말에 올러 끝까지 달려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침착하고 용감하며 기민한 태도에 감동했지만 시험에는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

아산 집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낙망하지 않고 다리를 치료하자 다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무술을 익히고 밤늦도록 병서를 읽으며 다음 무과시험에 대비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不敗の名将李舜臣(李舜臣)」2.険難な官職生活 (1)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혼인한 뒤에 무과시험을 준비

이순신은 혼인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무과를 보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이순신이 학문에서 깊은 경지에 들어섰고, 글재주까지 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관(武官)이 되려고 하자 처음에는 부모님과 형님들이 반대를 했을 것이다. 이는 조선이 문치주의(文治主義), 우문멸무(優文蔑武) 사회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가 문과에 응시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어려운 무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장인 방진(方震)과 부인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장인 방진은 변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무인(武人)이었다. 또한 화적패가 덮칠 정도로 재산이 많았으니 나이 20세가 넘도록 과거도 보지 않고 백수로 지내는 사위 이순신에게 차라리 무과를 보라고 권유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그러한 방진의 딸답게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담대했던 부인도 이순신에게 그러한 조언을 했을 지도 모른다.

효성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던 이순신은 장인과 부인의 권유에 따라 무과를 보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자신의 포부를 간곡히 말씀드려 마침내 두 분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성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두 형의 이해도 얻었을 것이다.

당시에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고 병법서만 달달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사서 기마술(騎馬術)도 익혀야 했고 활과 창검(槍劍)을 마련해 무술도 연마해야만 했으므로 돈이 꽤나 들었다. 어저면 그 비용을 처가에서 마련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이순신이 비록 혼인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가 무엇으로 아내를 벌어 먹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가세가 곤궁하여 서울에서 더는 살 수가 없으므로 부인과 세 아들을 거느리고 처가로 낙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부친도 처가살이를 하러 시골로 내려갔는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맏아들도 아닌 셋째아들이 무과시헌을 볼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순신이 혼인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무과시험 준비를 한 데에는 처가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받은 바가 컸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순신은 무관이 되기 위해 마당히 익혀야만 할 병법서 무경칠서(武經七書) 즉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를 비롯하여 사마법(司馬法), 육도(六韜), 삼략(三略), 울료자(蔚燎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을 열심히 읽고 무술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낙마(落馬)로 안타깝게 낙방하다.

이순신의 맏아들 회(獪)가 태어난 것은 23세 때였으며, 다시 4년 뒤에는 둘째아들 울(蔚)이 태어나 식구는 네명으로 늘어났다. 둘째 울의 이름은 뒷날 이순신이 열(悅)이라고 바꾸어준다.

그의 나이도 이미 27세가 되었다. 그러나 입신을 못 했으니 이는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세조(世祖)대의 남이(南怡)가 불과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0세에 여진족을 토벌하고 겨우 26세에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 것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도 있고, 또 하늘은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내려 보내주는 법이 아닌가.

당시에는 무과에 급제해야만 장교가 되고 나아가 군사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문과는 사당에서 시작하여 향교(鄕校)나 서원(書院) 등에서 글공부를 하고 또 이름난 학자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익히는 것으로 준비할 수 있었지만 무과는 무술을 연마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고 모시고 가르침을 청할만한 스승도 없었다. 무과를 과거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 과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과에 응시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홀로 병서를 읽고 무술을 연마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이순신, 이미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한 가정의 가장인 그도 집 근처에 자신만의 연병장을 만들어 놓고서 그러한 과정을 홀로 밟았던 것이다.

명종(明宗)이 죽고 선조(宣祖)가 그 뒤를 이은 것은 이순신이 무과 급제를 목표로 아산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병서를 공부하던 무렵인 1567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선조는 1552년에 중종(中宗)의 일곱번째 서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뒤에 연(鉛)으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선조는 이순신보다 일곱 살 아래다.

그는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애 책봉되었다가 명종이 후사가 없어 후계자로 지목하였고, 1567년 6월에 명종이 재위 22년만에 죽자 7월 1일에 왕위를 이었다.

선조는 즉위 당시 16세 소년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대비(仁順大妃) 심씨가 수렴첨정을 했다. 그러나 곧 선조가 영리한 것을 본 인순대비가 그 이듬해에 전권을 넘겨주어 친정(親政)에 나섰다.

선조는 퇴계(退溪) 이황(李愰)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만큼 처음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성리학을 신봉했기에 외척을 멀리하고 사림을 대거 등용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새 바람이 일어났지만 부작용도 뒤따랐다. 사람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망국적 붕당정치가 비롯되었던 것이다.

선조(宣祖)는 조선왕조 사상 처음으로 직계가 아닌 방게로서 왕위를 이은 임금이었다. 전에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또는 세조(世祖)와 성종(成宗)의 경우처럼 적장자가 아니명서도 왕위에 오른 적은 있었지만 선조처럼 왕비나 후궁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 낳은 아들로 민가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적통이 아닌 방계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였는지 선조는 시기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고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모질고 도랭도 좁아서 재위 기간 내내 신하들을 의심하여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비록 폭군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걸핏하면 신하들을 내치는 바람에 국정 운영이 안정될 수가 없었다.

국정이 원칙보다는 국왕의 감정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게 되자 자연히 신하들도 바른말을 하기보다는 임금의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뒷날 이순신이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인 1572년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하였다. 그 해에 나라에 경사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는 과거(科擧)인 별시(別試)가 한성 훈련원에서 열렸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무과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 등 3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 시험인 별시, 즉 별과 시험이 있었다. 또 시험 과목은 무예과 강서(講書) 두 가지였다. 무예는 크게 서서 하는 활쏘기와 말을 타고 보는 두 가지 시험이 있었다. 활쏘기는 나무로 된 화살을 쏘는 목전(木箭), 잛은 화살을 쏘는 편전(片箭), 쇠로 만든 전투용 화살을 쏘는 철전(鐵箭)이 있었고, 말타기는 말을 달리며 과녁을 맞추는 기사(騎射), 말을 달리며 장창(長槍)을 던져 목표물을 맞추는 기창(騎槍), 말을 타고 채를 휘둘러 나무공을 쳐서 점수를 내는 격구(擊毬)가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뒤에는 조총의 중요성이 고려되어 무과시험에 총격술(銃擊術)이 추가되었는데, 의문스러운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칼이 빠졌다는 점이다. 도검술(刀劍術)을 중요시하지 않은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이처럼 도검술을 무시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통적으로 긴 칼로 싸우는 데에 능했던 일본군, 특히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과 단병접전(短兵接戰)을 벌였을 때에 조선 관군이 큰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한편, 강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무경칠서(武經七書), 기타 병서 가운데 한 가지를 택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추가되기도 했다.


1572년에 이순신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무과시험을 보았는데, 불운하게도 말을 타고 달리는 시험에서 그가 타고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거꾸러지는 바람에 낙마하고 말았다. 말을 잘 타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낙마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순신은 운수 사납게도 낙마하면서 그만 왼쪽 다리벼가 부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이순신은 겨우 일어서서 가까운 곳에 있는 버드나무 밑으로 다가가더니 그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부상당한 다리를 감싼 다음 다시 말에 올러 끝까지 달려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침착하고 용감하며 기민한 태도에 감동했지만 시험에는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

아산 집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낙망하지 않고 다리를 치료하자 다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무술을 익히고 밤늦도록 병서를 읽으며 다음 무과시험에 대비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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