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백만 대군으로 남쪽으로는 오,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서 오랫동안 중국을 핍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바로 그런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46권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

중국 수(隋)나라의 두번째 황제였던 양광(楊廣), 그의 시호는 양제(煬帝)였다. 이 양제란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으나 실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수나라가 일으킨 대고구려전(對高句麗戰)은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장기전이었고  규모는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그때까지 이런 전쟁은 없었다. 그렇다면 수황(隋皇) 양제(煬帝)는 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또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양주(兩州). 양주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마을에 양제(煬帝)의 무덤이 있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이었지만,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양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었고, 누군가 무덤 꼭대기에 나무로 쐐기를 박 아놓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제의 무덤은 그동안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만큼 수난을 겪어왔던 것이다.

양주시 향토사학자 “이곳에는 민간전설이 있는데 하늘의 신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무덤은 세부분으로 쪼개졌는데 사람들은 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전설의 내용처럼 양제의 무덤 옆에는 움푹 패인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일까? 그 실마리는 오히려 양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였다. 중국의 3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대운하는 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양제는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년동안 4500만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km에 이른다. 운하의 끝이 닿는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이다. 당시 양제는 휘황찬란한 황선(皇船)을 타고 양자강 하류와 북경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이효충(李效忠) 북경대학교 교수 “운하의 시작은 양제의 아버지인 문제(文帝)로부터 시작된 것지만 양제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운하는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중국의 통일전쟁과 고구려 정벌을 위한 것이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었다.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때도 전국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는 좌군 52만 8천명, 우중문(于仲文)이 지휘하는 우군 52만 8쳔명, 양제가 직접 인솔하는 중군 26만 4천명,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명!! 이들은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육군 1백만은 요하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에는 총 40일이 걸렸고 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km에 이르렀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대의 원정이었다.

양제는 수백만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고 전국을 전시체제로 만들면서까지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588년 수나라는 중원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중원을 통일한 후에 수나라는 주변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화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종속국이 되기를 거부했고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았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서 수나라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수나라가 중원대륙을 통일하는데 동원한 병력은 5십만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그 두배가 넘는 무려 백이십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엄청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986년 경상남도 합천군 성산리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물 일곱개의 거대한 봉분과 천여기가 넘는 소형고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가야지역 수장들의 공동무덤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5세기의 고분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철로 만든 갑주류였다. 군사들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견고한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철제 말 투구, 그리고 말에게 입힌 갑옷 조각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유물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부산 복천동 11호분은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가야 수장의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갑주류와 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철제투구외에도 철제 목 가리개와 그리고 말 엉덩이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였다. 벽화속에 그려진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목가리개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정확이 일치했다. 역시 고구려 군사가 타고 있는 말 투구, 꼬리장식도 유물의 모양과 똑 같았다. 이 유물들은 틀림없이 고구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속의 화살통 장식을 그대로 떼어낸 것처럼 가야의 고분에서 똑같은 무늬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갑주가 한반도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립 박물관장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문(勳積碑文)에 나온 서기 400년 경자년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의 남정(南征)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는냐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충청북도 중원군 입석리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곳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희미한 비문 속에 두나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신라토내 당주, 이것은 신라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렇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진출은 한반도 남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열세명의 부하 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속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 열 세 지역은 지금의 어디일까?

윤내현 단국대학 교수의 고증을 통해 열세지역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벽화에 기록된 열세지역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윤내현 교수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화북지역 중심부까지 깊숙히 진출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5호16국시대라고 그러는데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해가지고 왕조를 세웠다가 망하고 단명한 왕조들이 자주 바뀌는 그런 시기였거든요.아주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충분히 고구려가 중원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높이 7m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 이 비석을 통해 우리는 당시 고구려인들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비문에서 태왕(太王)이라는 단어는 모든 제왕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황제(皇帝)와 비슷한 칭호이다. 또 이 비석에는 주변국과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대외정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광개토호태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태왕의 업적은 황천(皇天)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쳤다.”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한 금동판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있는 기록이 있다. “천손(天孫)” 즉, 고구려인들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太王), 사해(四海), 천손(天孫)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고, 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는 서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한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중국 요서(遼四)지방의 조양(早穰)시는 인구8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1300년전 이곳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선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 말해주고 있다. 당(唐)나라는 당시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표시로 80m 높이의 거대한 탑을 세웠다. 요(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은 82m 높이의 탑을 세웠다. 요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아시아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新唐書)는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柳城)에 고려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유성에서 고구려는 북방민족에게 농산물이나 철을 수출하고 말과 가죽류를 수입했다. 중국과는 말, 황금 ,화살등을 수출하고 비단 장신구등을 수입했다. 중개 무역권도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고고원에서 발견되었다. 돌궐족이 세운 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의 사신들은 널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하고 있었다. 외교는 무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800필의 말을 남송(南宋)으로 수출한다. 당시 고구려는 황해의 해상권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명철 동국대학 교수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국이었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제력은 자체에서 생산하는 생산물도 있겠지만 북방과 남방에 있는 물건들을 서로 교역하는 중개무역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박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강국이 될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 이것이 바로 수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의 또다른 이유였던 것이다.

김용만 박사는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을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성격으로 규정한다. 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쌓았던 중국의 만리장성은 수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오랫동안 버려진 채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양제는 이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 이 공사에 동원된 장정만도 1백만명에 이른다. 양제로서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07년 양제는 소차(逍車), 전호피차(戰鎬彼車), 포행차(砲行車), 당차(撞車), 운제(雲梯) 등의 신병기(新兵器)를 고안하게 한다.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성(等州城)은 당시 중국의 주요 무역항이자 수군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위해 10만 수군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등주성 지역이다. 출정에 앞서 등주성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전쟁준비가 이루어졌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는 해군의 공격이 필수적이어서 양제는 엄청난 수량의 군선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를 이곳 산동으로 집결시켜서 맨처음 500척 이상의 큰 선박을 건조하였다.”

이렇게 만반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수나라 군사들은 의기양양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는 이에 앞서 598년 영양태왕(瑛陽太王)이 친히 말갈족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선제공격, 수나라의 전력을 탐색한다. 이것이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작전이었고, 전쟁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 요령성 등탑현에는 옛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이 있다. 1천3백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건만 지금도 백암성은 장엄한 옛 모습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가장 큰 무기는 다름아닌 바로 성(城)이었다. 수나라가 가공할만한 무기를 만든 것도 모두 고구려의 튼튼한 성벽을 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남아 있는 백암성 성벽은 높이가 높은 성벽 410m, 원래의 높이는 15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 내부는 반구릉지대로 한쪽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m 높이까지 이른 절벽이었다. 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 성벽 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의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m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적군이 성벽을 오르면 고구려 군사들은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이렇게 세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현재 백암성의 성문은 무너지고 없는 상태지만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 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고구려인들의 무기는 또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견고한 성들이 줄지어서 고구려의 제1차 방어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비사성에서 용담산성에 이르는 성벽이 바로 천리장성이다. 이번에는 고구려 해양방어의 요새였던 비사성을 찾아 보았다. 비사성의 현재 위치는 중국 요령성 금현에 우뚝 솟은 대흑산이었다. 산정상을 휘두른 길다란 성벽,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비사성이었다. 지금은 대흑산성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고구려인들이 세운  이 비사성에는 청일전쟁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해군기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비사성은 천년의 세월 뒤에도 여전히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한 것이다. 최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요동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는 비사성. 1300년전,고구려인들은 바로 이곳에서 저 멀리 바다로 진격해 오는 수나라 수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 동안 무려 네번의 전쟁을 치뤘다. 그런데 1차전과 3,4차전에서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측과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하고 퇴각했다. 중국의 역사서는 그 이유를 자연 재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 고구려와 수나라가 일대 접전을 벌인 것은 2차전 뿐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살수대첩은 이 전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은 과연 어덯게 전개되었을까?

수나라의 백만대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僚東城)으로 전격했다. 요동성은 태자하를 해자로 삼은 평지성이었다. 성벽의 높이는 20m, 수나라 군사들은 도저히 이 성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당시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성안에 5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해 놓고 수나라 군사들의 발목을 3개월째 잡고 있었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양제는 별동대 30만 병력을 구성해서 바다로 진격하는 수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게 해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한다. 수나라의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진격하게 된 것이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네.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감이 어떠한가!”

고구려의 대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격파하기 위해 유인작전을 펼쳤다. 고구려 군사들은 미리 살수(薩水)의 강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 군사들이 건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작전에 말려든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수나라 군사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고구려 군사들은 미리 쌓아둔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 군대의 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고립된 수나라 군대의 선두와 후미에 기습공격을 펼쳤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뒤쫓아 요하까지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사들은 겨우 2천~3천여명 정도였다. 고구려의 대승(大勝)이었다.

수서(隨書)는 수나라의 패전(敗戰)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오천명.그러나 돌아온 군사는 오직 2천 7백명뿐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수나라에서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했다고 전한다.

”長 侵天半 輪刀耀日光 上山吃獐鹿 下山吃牛羊 忽聞官軍至 提刀向前蕩 譬如遼東死 斬頭何所傷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칼과 전차는 햇빛에 번쩍이네. 산 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창검으로 고구려를 친다하네.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온 몸이 찔리고 머리가 잘릴 것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양제는 612년 우문술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 그해 중원대륙에는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 부자가 건국한 당나라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섰다. 전쟁이 끝난 지 5년후, 당(唐)은 고구려(高句麗)에 한 장의 국서를 보낸다.

”우리나라와 귀국은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삼국사기)”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한 중국은 이렇듯 먼저 화해를 요청해 왔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16년 동안 네차례에 걸쳐 진행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과 문명을 지니고 있었던 군사강국이었고, 또한 경제대국이었다. 이러한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원 왕조의 천하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오히려 중국의 영토, 문화, 경제력까지 심각한 위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 생존이 걸린 절박함으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통일왕조가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도전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발견한 고구려의 참모습이다.


東アジアの文明大田(文明大戦) 旅愁戦争(麗隨戦争), そして撒水大勝(薩水大捷)!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백만 대군으로 남쪽으로는 오,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서 오랫동안 중국을 핍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바로 그런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46권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

중국 수(隋)나라의 두번째 황제였던 양광(楊廣), 그의 시호는 양제(煬帝)였다. 이 양제란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으나 실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수나라가 일으킨 대고구려전(對高句麗戰)은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장기전이었고  규모는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그때까지 이런 전쟁은 없었다. 그렇다면 수황(隋皇) 양제(煬帝)는 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또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양주(兩州). 양주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마을에 양제(煬帝)의 무덤이 있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이었지만,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양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었고, 누군가 무덤 꼭대기에 나무로 쐐기를 박 아놓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제의 무덤은 그동안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만큼 수난을 겪어왔던 것이다.

양주시 향토사학자 "이곳에는 민간전설이 있는데 하늘의 신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무덤은 세부분으로 쪼개졌는데 사람들은 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전설의 내용처럼 양제의 무덤 옆에는 움푹 패인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일까? 그 실마리는 오히려 양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였다. 중국의 3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대운하는 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양제는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년동안 4500만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km에 이른다. 운하의 끝이 닿는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이다. 당시 양제는 휘황찬란한 황선(皇船)을 타고 양자강 하류와 북경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이효충(李效忠) 북경대학교 교수 "운하의 시작은 양제의 아버지인 문제(文帝)로부터 시작된 것지만 양제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운하는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중국의 통일전쟁과 고구려 정벌을 위한 것이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었다.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때도 전국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는 좌군 52만 8천명, 우중문(于仲文)이 지휘하는 우군 52만 8쳔명, 양제가 직접 인솔하는 중군 26만 4천명,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명!! 이들은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육군 1백만은 요하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에는 총 40일이 걸렸고 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km에 이르렀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대의 원정이었다.

양제는 수백만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고 전국을 전시체제로 만들면서까지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588년 수나라는 중원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중원을 통일한 후에 수나라는 주변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화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종속국이 되기를 거부했고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았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서 수나라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수나라가 중원대륙을 통일하는데 동원한 병력은 5십만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그 두배가 넘는 무려 백이십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위해서 수나라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엄청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986년 경상남도 합천군 성산리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물 일곱개의 거대한 봉분과 천여기가 넘는 소형고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가야지역 수장들의 공동무덤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5세기의 고분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철로 만든 갑주류였다. 군사들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견고한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철제 말 투구, 그리고 말에게 입힌 갑옷 조각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유물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부산 복천동 11호분은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가야 수장의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갑주류와 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철제투구외에도 철제 목 가리개와 그리고 말 엉덩이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였다. 벽화속에 그려진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목가리개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정확이 일치했다. 역시 고구려 군사가 타고 있는 말 투구, 꼬리장식도 유물의 모양과 똑 같았다. 이 유물들은 틀림없이 고구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속의 화살통 장식을 그대로 떼어낸 것처럼 가야의 고분에서 똑같은 무늬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갑주가 한반도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립 박물관장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문(勳積碑文)에 나온 서기 400년 경자년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의 남정(南征)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는냐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충청북도 중원군 입석리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곳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희미한 비문 속에 두나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신라토내 당주, 이것은 신라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렇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진출은 한반도 남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열세명의 부하 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속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 열 세 지역은 지금의 어디일까?

윤내현 단국대학 교수의 고증을 통해 열세지역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벽화에 기록된 열세지역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윤내현 교수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화북지역 중심부까지 깊숙히 진출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5호16국시대라고 그러는데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해가지고 왕조를 세웠다가 망하고 단명한 왕조들이 자주 바뀌는 그런 시기였거든요.아주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충분히 고구려가 중원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높이 7m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 이 비석을 통해 우리는 당시 고구려인들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비문에서 태왕(太王)이라는 단어는 모든 제왕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황제(皇帝)와 비슷한 칭호이다. 또 이 비석에는 주변국과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대외정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광개토호태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태왕의 업적은 황천(皇天)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쳤다."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한 금동판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있는 기록이 있다. "천손(天孫)" 즉, 고구려인들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太王), 사해(四海), 천손(天孫)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고, 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는 서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한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중국 요서(遼四)지방의 조양(早穰)시는 인구8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1300년전 이곳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선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 말해주고 있다. 당(唐)나라는 당시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표시로 80m 높이의 거대한 탑을 세웠다. 요(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은 82m 높이의 탑을 세웠다. 요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아시아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新唐書)는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柳城)에 고려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유성에서 고구려는 북방민족에게 농산물이나 철을 수출하고 말과 가죽류를 수입했다. 중국과는 말, 황금 ,화살등을 수출하고 비단 장신구등을 수입했다. 중개 무역권도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고고원에서 발견되었다. 돌궐족이 세운 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고구려의 사신들은 널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하고 있었다. 외교는 무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800필의 말을 남송(南宋)으로 수출한다. 당시 고구려는 황해의 해상권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명철 동국대학 교수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국이었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제력은 자체에서 생산하는 생산물도 있겠지만 북방과 남방에 있는 물건들을 서로 교역하는 중개무역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박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강국이 될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 이것이 바로 수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의 또다른 이유였던 것이다.

김용만 박사는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을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성격으로 규정한다. 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쌓았던 중국의 만리장성은 수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오랫동안 버려진 채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양제는 이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 이 공사에 동원된 장정만도 1백만명에 이른다. 양제로서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07년 양제는 소차(逍車), 전호피차(戰鎬彼車), 포행차(砲行車), 당차(撞車), 운제(雲梯) 등의 신병기(新兵器)를 고안하게 한다.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성(等州城)은 당시 중국의 주요 무역항이자 수군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위해 10만 수군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등주성 지역이다. 출정에 앞서 등주성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전쟁준비가 이루어졌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는 해군의 공격이 필수적이어서 양제는 엄청난 수량의 군선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를 이곳 산동으로 집결시켜서 맨처음 500척 이상의 큰 선박을 건조하였다."

이렇게 만반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수나라 군사들은 의기양양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는 이에 앞서 598년 영양태왕(瑛陽太王)이 친히 말갈족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선제공격, 수나라의 전력을 탐색한다. 이것이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작전이었고, 전쟁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 요령성 등탑현에는 옛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이 있다. 1천3백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건만 지금도 백암성은 장엄한 옛 모습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가장 큰 무기는 다름아닌 바로 성(城)이었다. 수나라가 가공할만한 무기를 만든 것도 모두 고구려의 튼튼한 성벽을 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남아 있는 백암성 성벽은 높이가 높은 성벽 410m, 원래의 높이는 15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 내부는 반구릉지대로 한쪽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m 높이까지 이른 절벽이었다. 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 성벽 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의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m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적군이 성벽을 오르면 고구려 군사들은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이렇게 세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현재 백암성의 성문은 무너지고 없는 상태지만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 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고구려인들의 무기는 또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견고한 성들이 줄지어서 고구려의 제1차 방어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비사성에서 용담산성에 이르는 성벽이 바로 천리장성이다. 이번에는 고구려 해양방어의 요새였던 비사성을 찾아 보았다. 비사성의 현재 위치는 중국 요령성 금현에 우뚝 솟은 대흑산이었다. 산정상을 휘두른 길다란 성벽,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비사성이었다. 지금은 대흑산성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고구려인들이 세운  이 비사성에는 청일전쟁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해군기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비사성은 천년의 세월 뒤에도 여전히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한 것이다. 최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요동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는 비사성. 1300년전,고구려인들은 바로 이곳에서 저 멀리 바다로 진격해 오는 수나라 수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16년 동안 무려 네번의 전쟁을 치뤘다. 그런데 1차전과 3,4차전에서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측과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하고 퇴각했다. 중국의 역사서는 그 이유를 자연 재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 고구려와 수나라가 일대 접전을 벌인 것은 2차전 뿐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살수대첩은 이 전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은 과연 어덯게 전개되었을까?

수나라의 백만대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僚東城)으로 전격했다. 요동성은 태자하를 해자로 삼은 평지성이었다. 성벽의 높이는 20m, 수나라 군사들은 도저히 이 성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당시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성안에 5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해 놓고 수나라 군사들의 발목을 3개월째 잡고 있었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양제는 별동대 30만 병력을 구성해서 바다로 진격하는 수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게 해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한다. 수나라의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진격하게 된 것이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네.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감이 어떠한가!"

고구려의 대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격파하기 위해 유인작전을 펼쳤다. 고구려 군사들은 미리 살수(薩水)의 강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 군사들이 건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작전에 말려든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수나라 군사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고구려 군사들은 미리 쌓아둔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 군대의 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고립된 수나라 군대의 선두와 후미에 기습공격을 펼쳤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뒤쫓아 요하까지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사들은 겨우 2천~3천여명 정도였다. 고구려의 대승(大勝)이었다.

수서(隨書)는 수나라의 패전(敗戰)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을 건너간 군사는 모두 30만 오천명.그러나 돌아온 군사는 오직 2천 7백명뿐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수나라에서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했다고 전한다.

"長 侵天半 輪刀耀日光 上山吃獐鹿 下山吃牛羊 忽聞官軍至 提刀向前蕩 譬如遼東死 斬頭何所傷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칼과 전차는 햇빛에 번쩍이네. 산 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문득 들으니 관군이 왔다는데 창검으로 고구려를 친다하네. 허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온 몸이 찔리고 머리가 잘릴 것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양제는 612년 우문술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 그해 중원대륙에는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 부자가 건국한 당나라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섰다. 전쟁이 끝난 지 5년후, 당(唐)은 고구려(高句麗)에 한 장의 국서를 보낸다.

"우리나라와 귀국은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삼국사기)"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한 중국은 이렇듯 먼저 화해를 요청해 왔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16년 동안 네차례에 걸쳐 진행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과 문명을 지니고 있었던 군사강국이었고, 또한 경제대국이었다. 이러한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원 왕조의 천하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오히려 중국의 영토, 문화, 경제력까지 심각한 위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 생존이 걸린 절박함으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통일왕조가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도전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발견한 고구려의 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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