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倭王武는 과연 後日의 斯麻王인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중국 역사서 宋書, 南齊書, 梁書의 倭5王을 일본서기의

천황에 비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단지 가설에 머무를 뿐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倭5王을 일본서기의 천황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역사학자

들의 노력은 高次 방정식보다 더 어려운 紀年 계산으로 인해 오히려 혼잡함만을

더할 뿐이다.   멀지도 않은 5세기 當代의 역사임에도, 5세기 當代의 倭王에 대한

역사 기록이 존재함에도 고대 日本 天皇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역사, 그런 역사를

가지고서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 한국인들에게 믿어달라는 일본인들,

과연 그 일본인들의 뇌의 논리적 구조가 어떠한지 때때로 궁금해진다.

 

그런데 백제의 왕들은 중국의 5세기 역사서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5세기 중국의 백제 관련 기록과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의 기록을 종합하면 當代의 백제왕들의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8세기에 기록되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본서기의 일본천황에 대한 행적이

바로 5세기 중국 역사서와 일본 서기 내의 백제왕들의 행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백제왕이나 왕자의 기록이 8세기 이후에 기록되어 그 기록의

진위를 의심받는 일본천황의 기록과 일치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말하는가? 백제왕들이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왜왕으로서 일본을 통치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참조한 것은 백제 當代의 역사서에 기록된

백제 왕자나 왕족들의 일본 통치에 관한 기록인데 그것을 왜곡하여 실재하지도 않은

일본천황의 기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스스로의 루트를 왜곡했다는 것은 5세기 중국 역사서의 倭王에 관련된

기록과 8세기에 기록된 일본서기의 천황에 대한 기록을 대조해보면 뚜렷이 나타난다.

즉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나타나는 倭5王과 일본서기의 當代의 천황들은 전혀 그 행적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1.蓋鹵王 = 斯麻王의 부친(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百濟新撰에 말하였다. (中略) 武寧王이 섰다. 諱는 斯麻王이다. 이는 昆支王子의 아들

(실은 昆支의 兄의 蓋鹵王의 아들)이다.

 

2.蓋鹵王=   倭王武의 부친 (宋書의 기록)

*倭王武가 478년에 宋나라 天子에게 올린 表文

1)宋書 列傳 夷蠻 東夷 倭國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 일을 이루려는 功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臣은 3年喪을 당하여 軍士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父兄들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

2)일본서기 雄略天皇 20年

百濟記에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년) 겨울 貊(=고구려)의

大軍이 와서 大城(=漢城)을 친 지 7日 7夜에 王城이 함락하여 드디어

尉禮를 잃었다. 國王 및 太后, 王子 등이 다 敵의 손에 죽었다.

 

**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을 통해 백제 蓋鹵王의 아들이

곧 倭王武요,  倭王武는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임을 알게 된다.

즉 雄略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다.

 

3.蓋鹵王 卽位年 (宋書의 기록) = 雄略天皇의 卽位年(일본서기의 기록) 

1)蓋鹵王 卽位年은 457년(宋書 列傳 夷蠻 東夷 百濟)

2)雄略天皇의 卽位年은 457년(일본서기 雄略天皇 元年)

 

4.倭王武의 卽位年(478년)의 다음 年 = 雄略天皇의 死亡年

*雄略天皇의 死亡年은 479년(일본서기 雄略天皇 23年)

5.倭王武의 在位年度와 마지막 在位年

    1)宋書와 梁書를 통해서 보는 倭王武의 在位年度

     502년(梁書에 보이는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 - 478년(宋書에 보이는 倭王武의

      卽位年) = 24년

     2)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추론하는 倭王武의 在位年度 : 23년

         479년(雄略天皇의 死亡年 ) + 23년(雄略天皇의 在位期間) = 502년(일본서기를

         통해 추론한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

       

    *일본서기에서 雄略天皇의 在位期間은 479년부터 과거로 23년 소급

    된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宋書에 의하면 倭王武의 卽位年이 478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는 雄略天皇의 死亡年인 479년에

     雄略天皇의 在位期間 23년을 더한 年 곧 502년이 된다.

 

6.倭王武가 마지막으로 軍號를 올려받은 年(502년)

  倭王武가 502년에 梁나라 天子로부터 軍號를 (齊나라 建元元年[479년]]에

  齊나라 天子에게서 받은) 鎭東大將軍에서 征東將軍으로 올려받는다.

  그 후로 倭王武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해설]宋書에 기록된 倭王武의 卽位年은 478년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雄略天皇의 歿年은 479년이다. 이것을 보면서 참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雄略天皇의 卽位年을 계산해보니 457년이 되었다. 즉 21년 倭王武보다 과거로

소급되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21년 과거로 소급되어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宋書를 읽으면서 문득 깨닫게 되었다. 雄略天皇의

卽位年 457년은 곧 백제 蓋鹵王의 卽位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倭王武에

대한 梁書의 최후의 기록이 502년인 것을 또한 생각했다. 그래서 雄略天皇의

歿年 479년에 在位期間 23년을 더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502년이 되었다.

502년이 무슨 年인가 살펴보니 앞서 본 대로 倭王武가 梁書에 최후에 기록된

年이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 史書의 기록 대로 502년은 백제 斯麻王이

王으로 卽位한 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게 하여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기록된 紀年을 보니 457년은 백제 蓋鹵王이 즉위한 年이요, 479년은 倭王武가

倭王으로 즉위한지 1년이 지난 년이요, 502년은 倭王武가 梁書에 최후로 기록된

年임과 동시에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登極한 年임을 알 수 있었다. 즉 雄略天皇의

紀年은 蓋鹵王, 倭王武, 斯麻王이라는 세 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나는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이 왜곡된 기록이지만, 일부 기록은

백제 왕자와 관련된 기록이며, 그 기록은 진실된 기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雄略天皇은 곧 倭王武를 투영하여 기록한 것인데,

이 倭王武는 곧 후일의 斯麻王이며,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倭王武의 上表文이다.  倭王武의 上表文에 따르면 倭王武의 부친과

兄이 倭王武가 왕위에 즉위하는 年, 곧 478년보다 3년전에 함께 죽었다고 하였는데,

 475년에 왕과 왕자가 함께 죽은 사람은 백제 蓋鹵王과 그의 왕자들 밖에 없어서

결국 倭王武는 후일의 백제 斯麻王이 되고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은

宋書의 기록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함에도 倭王武를 雄略에 투영시킴에 있어서

年代를 결코 같게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502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502년은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登極한 年이다. 그래서 倭王武를

雄略天皇에 투영시키면서 雄略天皇의 즉위년을 21년이나 과거로 소급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蓋鹵王이 죽은지 3년 후에 倭王武가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蓋鹵王이 雄略天皇에게 백제 왕자 昆支를 보낸 것처럼 기록되었는가 하면,  昆支가  

일본의 雄略天皇에게 가는 도중에 斯麻王이 태어난 것처럼 기록되었고, 蓋鹵王이

雄略天皇에게 백제 여인 池津媛을 보낸 것처럼 기록되는 등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들을 무비판적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으며 이러한 기록은 當代의 백제와 倭에 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를 통해 비교, 검토하여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稻荷山 古墳에서 獲加多支鹵大王 鐵劍이 출토되었는데 이 철검의 獲加多支鹵(Wakatakeru)

라는 銘文에서 幼武라는 漢字語를 추출해내고 그리하여 바로 이 大王이 일본서기의

幼武天皇 곧 雄略天皇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을 보았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雄略天皇이 어려서 무예가 절륜했다거나 그리하여 정복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雄略天皇條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본 스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雄略天皇은

實在한 천황이 아니다. 또 雄略天皇이 어려서 皇位에 즉위했다는 기록도 없다.

(雄略天皇條에는 雄略天皇이 태어난 年도 나오지 아니하고 또 몇 歲에 皇位에

즉위했는가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서기는 바로 그 雄略天皇條에서

斯麻王에 대한 記思를 통해 斯麻王이 태어난 年, 王位에 즉위한 年을 착실하게

알려주어 그가 몇 歲에 왕위에 즉위했는지를 알려준다.  바로 이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그만큼 백제 斯麻王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  일본 천황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그 탄생설화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斯麻王이 461년에

태어났으니 倭王武로서 倭王에 즉위한 때 나이가 17세이다.  과연 幼武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宋書에 기록된 倭王武의 上表文을 보면 日本 列島의 毛人, 衆夷 등을 정복했다는

記事가 있다. 이런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幼武天皇이란 다름 아닌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는 5세기경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일본서기의 천황에 대한 기록을

매우 흥미를 느낀 부분이 있다. 天皇(=雄略天皇), 列天皇에 대한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幼武天皇(雄略天皇)과 武列天皇條에는 백제 斯麻王에 대한 記事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일본천황, 곧 淸寧,顯宗,仁賢 天皇에 대한 기록에는 斯麻王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이 천황들, 幼武天皇(雄略天皇)과 武列天皇 사이에

있는 천황들은 허구의 천황이라고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일까?

위 스레에서 나는 倭王武가 곧 후일의 백제 斯麻王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므로

결국 獲加多支鹵大王 鐵劍에 기록된 武(Takeru)라는 글자에서 우리는 일본서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투영만 된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보는 것이다. 斯麻王의 死後

諡號가 武寧王이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7.백제 斯麻王의 卽位年은 502년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 이 年(502년)에, 백제의 末多王(東城王)이

     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國人이 제거하고

     島王(=斯麻王)을 세웠다. 이를 武寧王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3년(501년) : (武列天皇이)  3년 冬 10월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山Ma(薯預=i + Mo)를 캐게 하였다.

      [해설]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가 502년이니 일본서기의 武列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斯麻王이다.  武列天皇이 사람의 생손톱을 뽑는다는

      것은 곧 군사력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여기의 Ma나 Mo는

      末多王 곧 東城王을 의미하는 바 결국 斯麻王은 王位에 오르기 前 

     군사력을 이용하지 않고 白加에게 刺客을  보내게 하여 東城王을

      刺殺하였던 것이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3년(501년) : 11월에 백제의 意多郞(Odara=小擔魯=小王

      =侯王)이 죽었다. 高田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해설]여기의 Odara는 곧 백제의 小王(=侯王)을 의미하며, 백제의 侯王이

     죽었다는 것은 일본을 다스리던 백제의 侯王이 더 이상 倭國을 다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倭王武가 倭王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倭 列島에서 백제로 건너가서 百濟王으로 登極하여 斯麻王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국사기를 보면 501년 11월에

    東城王이 白加가 보낸 刺客에 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12월에 이르러

     결국 죽었으며 倭王武 곧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즉위했던 것이다.

   

 

8.백제 斯麻王이 軍號를 올려받음(521년)

    *梁書 列傳 諸夷 東夷 百濟

    [원문}立子牟太.齊永明中,除太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

    天監元年,進太號征東將軍.(中略)普通二年,王餘隆始復遣使奉表,

    稱「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

   其年,高祖詔曰:「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遠脩貢職,誠款到,朕有嘉焉.宜率舊章,

   授茲榮命.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번역문]아들 牟太(東城王)가 즉위하였다. 齊나라의 永明中에

    牟太(東城王)를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을 除授하였다.

    天監元年(502년)에 牟太(東城王)의 軍號를 征東將軍으로 올려주었다.

    普通 2년, 王 餘隆이 비로소 다시 使臣을 보내 上表하여 이르기를

    “여러 번 고구려를 파하고 이제야 비로소 같이 通交한다”고 하였는데,

    백제는 다시 强國이 되었다.  그 年(521년)에 高祖가 고하여 이르기를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 餘隆은 海外에서 藩邦을 지키고,

   멀리서 貢職을 닦아 이에 誠意를 보이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舊法에 따라서 이에 榮命을 주는 바,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百濟王이 可하다.”

  

[해설]梁나라 天子는 天監元年(502년)에 牟大 곧 東城王의 軍號를

   征東將軍으로 올려주었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은 왕인 餘隆 곧   

   斯麻王은 前王의 軍號인 征東將軍을 물려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斯麻王은 梁나라 天子에게서 以前에 받은 적이 전혀

 없는 軍號인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職을 받은 후,

 곧바로 그보다 2등급이나 더 上位級인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받는다.

왜 斯麻王에게 이전에 東城王이 받았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주지

않았을까? 왜 梁나라 天子는 斯麻王에게 이런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일까?

  바로 이것은 征東將軍의 軍號를 받은 것에 대하여 百濟王과 倭王 사이에

  어떤 외교적 분쟁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보면 그 외교적

분쟁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더구나 東城王은 蓋鹵王의 直系 가

아닌 方系로서 蓋鹵王의 直系인 斯麻王보다 王位를 繼承하는데 있어서

먼 위치에 있었다. 그러함에도 東城王이 百濟王으로 登極했다.

이는 斯麻王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倭王武

곧 斯麻王은 宋나라 天子에게 東城王이 아닌 자신이 百濟王의 자리에

오를 자임을 호소하는 表文을 올렸던 것이고 바로 이것이 上表文에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아버지와 兄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라는

글귀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날 東城王과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의 백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외교적 분쟁으로 인해 東城王에게 주었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후에 다시

倭王武에게 주어야 했던  梁나라 天子는 그 외교적 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미 東城王에게 주었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東城王의 뒤를

이어 백제왕이 된 斯麻王에게는 당연히 계승해야 할 軍號로써 인정하지 않고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斯麻王에게 주면서

榮命인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마땅히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한다.

다른 나라 王들에게 중국 천자가 조서를 내려 軍號를 줄 때   ”舊法”이라는 

단어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과연  ”舊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유독 斯麻王에게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줄 때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하였을까? 舊法에 따라준다면, 당연히

梁나라 天子가 斯麻王이 東城王의 軍號를 계승하여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都督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斯麻王에게 주는 梁나라 天子가 아닌가?

 그럼에도 어떻게 “舊法” 云云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여기의

”舊法” 云云한 것은 아주 치밀한 외교적 修辭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梁나라 天子가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한 것은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征東將軍의 軍號 外部的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內部的으로는 그 軍號를 인정하여 그것에 相應하는 軍號를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한번 梁나라 天子에게서 받은 斯麻王의 軍號의 이상한 점을 살펴보자 .

 1. 斯麻王은 東城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東城王이 梁나라의

    天子로부터 받은 軍號인 征東將軍의 軍號를 승계하여야 한다.  

 2. 그러함에도 斯麻王은 征東將軍의 軍號를 承繼하지 못하고 梁나라 天子로부터

    臨時職으로 鎭東大將軍의 軍號를 받는다.

 3. 그리고서 梁나라 天子는 斯麻王에게 다른 나라의 王에게 언급한 적이 없는

  “舊法에 따라서 榮命을 준다”는 말을 한다.

 4. 마침내 梁나라 천자는 鎭東大將軍보다 2등급이나 上位級인 寧東大將軍을

    斯麻王에게 除授한다.


 

 


斯麻王は 百済と 倭の 大王だった 2

倭王武는 과연 後日의 斯麻王인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중국 역사서 宋書, 南齊書, 梁書의 倭5王을 일본서기의

천황에 비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단지 가설에 머무를 뿐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倭5王을 일본서기의 천황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역사학자

들의 노력은 高次 방정식보다 더 어려운 紀年 계산으로 인해 오히려 혼잡함만을

더할 뿐이다.   멀지도 않은 5세기 當代의 역사임에도, 5세기 當代의 倭王에 대한

역사 기록이 존재함에도 고대 日本 天皇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역사, 그런 역사를

가지고서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 한국인들에게 믿어달라는 일본인들,

과연 그 일본인들의 뇌의 논리적 구조가 어떠한지 때때로 궁금해진다.

 

그런데 백제의 왕들은 중국의 5세기 역사서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5세기 중국의 백제 관련 기록과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의 기록을 종합하면 當代의 백제왕들의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8세기에 기록되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본서기의 일본천황에 대한 행적이

바로 5세기 중국 역사서와 일본 서기 내의 백제왕들의 행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백제왕이나 왕자의 기록이 8세기 이후에 기록되어 그 기록의

진위를 의심받는 일본천황의 기록과 일치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말하는가? 백제왕들이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왜왕으로서 왜국을 통치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참조한 것은 백제 當代의 역사서에 기록된

백제 왕자나 왕족들의 왜국 통치에 관한 기록인데 그것을 왜곡하여 실재하지도 않은

일본천황의 기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스스로의 루트를 왜곡했다는 것은 5세기 중국 역사서의 倭王에 관련된

기록과 8세기에 기록된 일본서기의 천황에 대한 기록을 대조해보면 뚜렷이 나타난다.

즉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나타나는 倭5王과 일본서기의 當代의 천황들은 전혀 그 행적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1.蓋鹵王 = 斯麻王의 부친(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百濟新撰에 말하였다. (中略) 武寧王이 섰다. 諱는 斯麻王이다. 이는 昆支王子의 아들

(실은 昆支의 兄의 蓋鹵王의 아들)이다.

 

2.蓋鹵王=   倭王武의 부친 (宋書의 기록)

*倭王武가 478년에 宋나라 天子에게 올린 表文

1)宋書 列傳 夷蠻 東夷 倭國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 일을 이루려는 功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臣은 3年喪을 당하여 軍士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父兄들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

2)일본서기 雄略天皇 20年

百濟記에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년) 겨울 貊(=고구려)의

大軍이 와서 大城(=漢城)을 친 지 7日 7夜에 王城이 함락하여 드디어

尉禮를 잃었다. 國王 및 太后, 王子 등이 다 敵의 손에 죽었다.

 

**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을 통해 백제 蓋鹵王의 아들이

곧 倭王武요,  倭王武는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임을 알게 된다.

즉 雄略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백제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다.

 

3.蓋鹵王 卽位年 (宋書의 기록) = 雄略天皇의 卽位年(일본서기의 기록) 

1)蓋鹵王 卽位年은 457년(宋書 列傳 夷蠻 東夷 百濟)

2)雄略天皇의 卽位年은 457년(일본서기 雄略天皇 元年)

 

4.倭王武의 卽位年(478년)의 다음 年 = 雄略天皇의 死亡年

*雄略天皇의 死亡年은 479년(일본서기 雄略天皇 23年)

5.倭王武의 在位年度와 마지막 在位年

    1)宋書와 梁書를 통해서 보는 倭王武의 在位年度

     502년(梁書에 보이는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 - 478년(宋書에 보이는 倭王武의

      卽位年) = 24년

     2)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추론하는 倭王武의 在位年度 : 23년

         479년(雄略天皇의 死亡年 ) + 23년(雄略天皇의 在位期間) = 502년(일본서기를

         통해 추론한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

       

    *일본서기에서 雄略天皇의 在位期間은 479년부터 과거로 23년 소급

    된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宋書에 의하면 倭王武의 卽位年이 478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는 雄略天皇의 死亡年인 479년에

     雄略天皇의 在位期間 23년을 더한 年 곧 502년이 된다.

 

6.倭王武가 마지막으로 軍號를 올려받은 年(502년)

  倭王武가 502년에 梁나라 天子로부터 軍號를 (齊나라 建元元年[479년]]에

  齊나라 天子에게서 받은) 鎭東大將軍에서 征東將軍으로 올려받는다.

  그 후로 倭王武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해설]宋書에 기록된 倭王武의 卽位年은 478년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雄略天皇의 歿年은 479년이다. 이것을 보면서 참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雄略天皇의 卽位年을 계산해보니 457년이 되었다. 즉 21년 倭王武보다 과거로

소급되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21년 과거로 소급되어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宋書를 읽으면서 문득 깨닫게 되었다. 雄略天皇의

卽位年 457년은 곧 백제 蓋鹵王의 卽位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倭王武에

대한 梁書의 최후의 기록이 502년인 것을 또한 생각했다. 그래서 雄略天皇의

歿年 479년에 在位期間 23년을 더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502년이 되었다.

502년이 무슨 年인가 살펴보니 앞서 본 대로 倭王武가 梁書에 최후에 기록된

年이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 史書의 기록 대로 502년은 백제 斯麻王이

王으로 卽位한 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게 하여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기록된 紀年을 보니 457년은 백제 蓋鹵王이 즉위한 年이요, 479년은 倭王武가

倭王으로 즉위한지 1년이 지난 년이요, 502년은 倭王武가 梁書에 최후로 기록된

年임과 동시에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登極한 年임을 알 수 있었다. 즉 雄略天皇의

紀年은 蓋鹵王, 倭王武, 斯麻王이라는 세 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나는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이 왜곡된 기록이지만, 일부 기록은

백제 왕자와 관련된 기록이며, 그 기록은 진실된 기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雄略天皇은 곧 倭王武를 투영하여 기록한 것인데,

이 倭王武는 곧 후일의 斯麻王이며,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倭王武의 上表文이다.  倭王武의 上表文에 따르면 倭王武의 부친과

兄이 倭王武가 왕위에 즉위하는 年, 곧 478년보다 3년전에 함께 죽었다고 하였는데,

 475년에 왕과 왕자가 함께 죽은 사람은 백제 蓋鹵王과 그의 왕자들 밖에 없어서

결국 倭王武는 후일의 백제 斯麻王이 되고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은

宋書의 기록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함에도 倭王武를 雄略에 투영시킴에 있어서

年代를 결코 같게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502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502년은 倭王武 곧 백제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登極한 年이다. 그래서 倭王武를

雄略天皇에 투영시키면서 雄略天皇의 즉위년을 21년이나 과거로 소급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蓋鹵王이 죽은지 3년 후에 倭王武가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蓋鹵王이 雄略天皇에게 백제 왕자 昆支를 보낸 것처럼 기록되었는가 하면,  昆支가  

일본의 雄略天皇에게 가는 도중에 斯麻王이 태어난 것처럼 기록되었고, 蓋鹵王이

雄略天皇에게 백제 여인 池津媛을 보낸 것처럼 기록되는 등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雄略天皇에 대한 기록들을 무비판적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으며 이러한 기록은 當代의 백제와 倭에 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

일본서기 내의 백제 관련 史書를 통해 비교, 검토하여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稻荷山 古墳에서 獲加多支鹵大王 鐵劍이 출토되었는데 이 철검의 獲加多支鹵(Wakatakeru)

라는 銘文에서 幼武라는 漢字語를 추출해내고 그리하여 바로 이 大王이 일본서기의

幼武天皇 곧 雄略天皇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을 보았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雄略天皇이 어려서 무예가 절륜했다거나 그리하여 정복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雄略天皇條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본 스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雄略天皇은

實在한 천황이 아니다. 또 雄略天皇이 어려서 皇位에 즉위했다는 기록도 없다.

(雄略天皇條에는 雄略天皇이 태어난 年도 나오지 아니하고 또 몇 歲에 皇位에

즉위했는가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서기는 바로 그 雄略天皇條에서

斯麻王에 대한 記思를 통해 斯麻王이 태어난 年, 王位에 즉위한 年을 착실하게

알려주어 그가 몇 歲에 왕위에 즉위했는지를 알려준다.  바로 이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그만큼 백제 斯麻王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  일본 천황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그 탄생설화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斯麻王이 461년에

태어났으니 倭王武로서 倭王에 즉위한 때 나이가 17세이다.  과연 幼武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宋書에 기록된 倭王武의 上表文을 보면 日本 列島의 毛人, 衆夷 등을 정복했다는

記事가 있다. 이런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幼武天皇이란 다름 아닌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는 5세기경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투영하여 기록한 일본서기의 천황에 대한 기록을

매우 흥미를 느낀 부분이 있다. 天皇(=雄略天皇), 列天皇에 대한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幼武天皇(雄略天皇)과 武列天皇條에는 백제 斯麻王에 대한 記事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일본천황, 곧 淸寧,顯宗,仁賢 天皇에 대한 기록에는 斯麻王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이 천황들, 幼武天皇(雄略天皇)과 武列天皇 사이에

있는 천황들은 허구의 천황이라고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일까?

위 스레에서 나는 倭王武가 곧 후일의 백제 斯麻王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므로

결국 獲加多支鹵大王 鐵劍에 기록된 武(Takeru)라는 글자에서 우리는 일본서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투영만 된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을 보는 것이다. 斯麻王의 死後

諡號가 武寧王이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7.백제 斯麻王의 卽位年은 502년

   *일본서기 武列天皇 4년 : 이 年(502년)에, 백제의 末多王(東城王)이

     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國人이 제거하고

     島王(=斯麻王)을 세웠다. 이를 武寧王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3년(501년) : (武列天皇이)  3년 冬 10월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山Ma(薯預=i + Mo)를 캐게 하였다.

      [해설]倭王武의 마지막 在位年度가 502년이니 일본서기의 武列天皇은

      倭王武 곧 後日의 斯麻王이다.  武列天皇이 사람의 생손톱을 뽑는다는

      것은 곧 군사력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여기의 Ma나 Mo는

      末多王 곧 東城王을 의미하는 바 결국 斯麻王은 王位에 오르기 前 

     군사력을 이용하지 않고 白加에게 刺客을  보내게 하여 東城王을

      刺殺하였던 것이다.

    *일본서기 武列天皇 3년(501년) : 11월에 백제의 意多郞(Odara=小擔魯=小王

      =侯王)이 죽었다. 高田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해설]여기의 Odara는 곧 백제의 小王(=侯王)을 의미하며, 백제의 侯王이

     죽었다는 것은 왜국을 다스리던 백제의 侯王이 더 이상 倭國을 다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倭王武가 倭王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倭 列島에서 백제로 건너가서 百濟王으로 登極하여 斯麻王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국사기를 보면 501년 11월에

    東城王이 白加가 보낸 刺客에 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12월에 이르러

     결국 죽었으며 倭王武 곧 斯麻王이 백제왕으로 즉위했던 것이다.

   

 

8.백제 斯麻王이 軍號를 올려받음(521년)

    *梁書 列傳 諸夷 東夷 百濟

    [원문}立子牟太.齊永明中,除太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

    天監元年,進太號征東將軍.(中略)普通二年,王餘隆始復遣使奉表,

    稱「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

   其年,高祖詔曰:「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遠脩貢職,誠款到,朕有嘉焉.宜率舊章,

   授茲榮命.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번역문]아들 牟太(東城王)가 즉위하였다. 齊나라의 永明中에

    牟太(東城王)를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을 除授하였다.

    天監元年(502년)에 牟太(東城王)의 軍號를 征東將軍으로 올려주었다.

    普通 2년, 王 餘隆이 비로소 다시 使臣을 보내 上表하여 이르기를

    "여러 번 고구려를 파하고 이제야 비로소 같이 通交한다"고 하였는데,

    백제는 다시 强國이 되었다.  그 年(521년)에 高祖가 고하여 이르기를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 餘隆은 海外에서 藩邦을 지키고,

   멀리서 貢職을 닦아 이에 誠意를 보이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舊法에 따라서 이에 榮命을 주는 바,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百濟王이 可하다."

  

[해설]梁나라 天子는 天監元年(502년)에 牟大 곧 東城王의 軍號를

   征東將軍으로 올려주었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은 왕인 餘隆 곧   

   斯麻王은 前王의 軍號인 征東將軍을 물려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斯麻王은 梁나라 天子에게서 以前에 받은 적이 전혀

 없는 軍號인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職을 받은 후,

 곧바로 그보다 2등급이나 더 上位級인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받는다.

왜 斯麻王에게 이전에 東城王이 받았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주지

않았을까? 왜 梁나라 天子는 斯麻王에게 이런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일까?

  바로 이것은 征東將軍의 軍號를 받은 것에 대하여 百濟王과 倭王 사이에

  어떤 외교적 분쟁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보면 그 외교적

분쟁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더구나 東城王은 蓋鹵王의 直系 가

아닌 方系로서 蓋鹵王의 直系인 斯麻王보다 王位를 繼承하는데 있어서

먼 위치에 있었다. 그러함에도 東城王이 百濟王으로 登極했다.

이는 斯麻王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倭王武

곧 斯麻王은 宋나라 天子에게 東城王이 아닌 자신이 百濟王의 자리에

오를 자임을 호소하는 表文을 올렸던 것이고 바로 이것이 上表文에

"갑자기 아버지와 兄을 잃어...아버지와 兄의 뜻을 펴고자 합니다"라는

글귀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날 東城王과 倭王武 곧 후일의 斯麻王의 백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외교적 분쟁으로 인해 東城王에게 주었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후에 다시

倭王武에게 주어야 했던  梁나라 天子는 그 외교적 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미 東城王에게 주었던 征東將軍의 軍號를 東城王의 뒤를

이어 백제왕이 된 斯麻王에게는 당연히 계승해야 할 軍號로써 인정하지 않고

 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斯麻王에게 주면서

榮命인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마땅히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한다.

다른 나라 王들에게 중국 천자가 조서를 내려 軍號를 줄 때   "舊法"이라는 

단어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과연  "舊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유독 斯麻王에게 寧東大將軍의

軍號를 줄 때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하였을까? 舊法에 따라준다면, 당연히

梁나라 天子가 斯麻王이 東城王의 軍號를 계승하여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都督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이라는 臨時의 軍號를 斯麻王에게 주는 梁나라 天子가 아닌가?

 그럼에도 어떻게 "舊法" 云云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여기의

"舊法" 云云한 것은 아주 치밀한 외교적 修辭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梁나라 天子가 "舊法에 따라서 준다"고 한 것은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征東將軍의 軍號 外部的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內部的으로는 그 軍號를 인정하여 그것에 相應하는 軍號를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한번 梁나라 天子에게서 받은 斯麻王의 軍號의 이상한 점을 살펴보자 .

 1. 斯麻王은 東城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東城王이 梁나라의

    天子로부터 받은 軍號인 征東將軍의 軍號를 승계하여야 한다.  

 2. 그러함에도 斯麻王은 征東將軍의 軍號를 承繼하지 못하고 梁나라 天子로부터

    臨時職으로 鎭東大將軍의 軍號를 받는다.

 3. 그리고서 梁나라 天子는 斯麻王에게 다른 나라의 王에게 언급한 적이 없는

  "舊法에 따라서 榮命을 준다"는 말을 한다.

 4. 마침내 梁나라 천자는 鎭東大將軍보다 2등급이나 上位級인 寧東大將軍을

    斯麻王에게 除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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