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1.梁職貢圖..百濟
[본문]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擔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擔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等附之

[번역문]普通二年 그 왕 餘隆(=武寧王)이 使臣을 보내 表를 올리고 이르기를 고구려를
여러 번 破했다고 했다. 治所城(=首都)을 固麻라고 하고, 邑을 일러 擔魯라고 한다.
중국에 郡縣이다. 22擔魯가 있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나누어 가졌다. 백제에 附庸하는
小國은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다


2.北史 列傳 新羅
[원문]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初附庸于百濟,
[번역문]그 왕(=新羅王)은 본래 百濟人이다. 바다로부터 도망하여 新羅로 들어가서 점차 그 나라에
王이 되었다. 처음에는 百濟附庸

했다.



3.舊唐書 列傳 東夷 百濟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

 

百濟國은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東北으로 신라에 이르고,
西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高麗에 이른다.
[해설]越州 지역에는 백제가 진출하여 세운 晉平郡이 있었고,  고구려 지역 근처에는 遼西郡이,

신라는 백제의 附傭國이었고, 는 백제의 擔魯였다.



4.중국 역사서 資治通鑑
孝宗 永和 2年 正月 처음에 扶餘鹿山에 거하였는데, 百濟에게 侵掠당하여 部落이
쇠퇴하여 흩어져서 서쪽 燕나라 근처로 移徙하였다.
[해설]여기의 鹿山은 바로 중국 동북부에 있는 松花江 流域이다. 그런데 그 지역에 있던 夫餘가

百濟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敗退하여 서쪽 燕나라 근처로 移徙한다.


5.魏書 勿吉傳 太和(서기 477∼499년) 초에 또 말 5백 필을 바쳤다. ……
(勿吉國은)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 마을 열 곳을 격파하고
은밀히 百濟와 더불어 水路를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려고 하는데
乙力支를 大國에 사신으로 보내 그것이 옳은지 그 논지를 묻고자 한다.
[해설]勿吉은 중국 동북 지역 고구려 지역에서 더 북쪽에 있는 나라,
그런데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백제는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아니라 대륙에 있는 백제이다.

 

6.通典 百濟傳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王夫餘崇 竟不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夫餘氏君長遂絶

 

城郭(秦長城) 근처의 나머지 무리들은 그 후 차차 인원이 줄고
약해져서 突厥과 靺鞨로 흩어졌으며, 그 王 扶餘 崇도 감히 옛 국토로 돌아갈
수 없었다. 國土가 新羅靺鞨에게 거의 다 沒收되어 扶餘氏의 君長도 드디어 絶滅되었다.

 

[해설]여기의 靺鞨은 震國 즉 후일의 渤海인데, 신라와 더불어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영토 즉 大同江과 元山灣 바로 위 지역에는 백제의 영토가 없었다.

말갈이 沒收한 백제의 영토는 바로 중국 東北部 지역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를 의미한다.


7.중국 역사서 南齊書의 기록
이때 魏虜(=北魏)가 騎兵 數10萬을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그 境界에 들어갔는데,
牟大(百濟 東城王)가 장수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를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魏虜軍을 襲擊하였다. 그리하여  魏虜軍크게 破하였다.



8.晉書 慕溶滉載記 (北朝系 史書)

高句麗, 百濟,宇文,段部의 사람은 모두 兵勢를 옮겼는데, 중국의 義를 사모하여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戶가 10만이나
좁은 都城에 몰려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해설]晉書에 대륙 백제의 기록이 보인다. 이 백제는 前燕의 공격대상 국가들이던
고구려, 宇文部, 段部 함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의 위치를
관련지어 보면, 백제는 前燕과 인접한 만주 지역에 所在한 것이 된다.
다음 기록을 보라. 중국 역사서 宋書의 기록 : 백제는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千餘里 밖에 있었다.



9.중국 역사서 梁書의 기록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려와 함께 遼東의 東쪽에 있었다. 晉國 때에 고려가 遼東을
점령하여 갖자 백제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여 百濟郡을 두었다.


10.通典 東夷 百濟條
晉時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晉나라 때에 高句麗가 遼東을 침략하여 갖자, 백제 역시 遼西, 晉平 2郡를 占據하여 가졌다.

오늘날의 柳城, 北平 사이에 있다.





11.중국 역사서 通典
처음에 百家가 바다를 건넜기에 그로 인해 百濟라고 일컬었다. 晉世에 고려가
遼東을 침략하여 갖자, 百濟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였다.




12.삼국사기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强兵 百萬으로써 南으로는 吳越을 侵害하고 北으로는
燕,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13.중국 역사서 南史 列傳 夷貊 東夷 百濟
都城이 있는 곳을 일컬어 固麻라고 한다. 邑을 일러 擔魯[Damuro]라고 한다.
중국의 말로 郡縣과 같다. 그 國土에는 22擔魯[Damuro]가 있다.
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分割하여 雄據한다



14.일본서기 神代 上 第4段 “大八洲生成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淡路[Damuro]洲를 胞로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로 淡路[Awaji]洲라 하였다
[해설]일본이 淡路(Damuro 즉 백제의 지방관제인 Damuro)를 胞로하여
生成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Awaji로 訓讀한 것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 古事記, 일본서기에서 邪馬臺國倭奴國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의 祖上神들은 자신들이 강림하는 곳에 그들이 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祖國,

즉  신라, 徐伐, 加羅, 韓國, 淡路(百濟의 地方官制)의 國名을 붙인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의 祖上들은 일본 열도에 상륙하여 곳곳에 한반도에 있는 祖國인

三國의 分國을 세운 것이다.



15.梁書 列傳 諸夷 東夷 新羅
[원문]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

[번역문]그 나라(=新羅)는 百濟 東南 五千餘里에 있다. 그 땅의 동쪽은 大海와
가까우며, 南과 北은 句麗, 百濟와 接하고 있다.
[해설]백제의 東南쪽 5千餘里에 新羅가 있으니, 이것은 바로 백제가 遼西地域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되고,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서쪽 경계에 신라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史實이니, 신라의 남쪽이 백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은
당시에 이미 加羅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新羅 西北 5千餘里에 있는 것은 大陸백제, 남쪽을 新羅와 접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백제이다.


16.일본서기 : 古代 일본천황百濟人임을 증명
1)천황의 거처: 百濟宮 舒明天皇 12,13년
2)國刹: 百濟大寺 舒明 11년 皇極天皇 元年
3)棺安置所: 舒明천황의 棺安置所를 百濟大殯이라 함 舒明 13년
4)일본 지배계층이 사는 마을
百濟大井 敏達天皇 元年
石川 百濟村 敏達 12년
下百濟 河川村 敏達 12년
5)河川: 百濟川, 지금의 曾我江이다.
6)船: 百濟船 白雉 元年
7)客館: 百濟客館 皇極천황 2년
8)音樂: 百濟樂 天武 12년

17.七支刀의 銘文

*앞면* 泰(和)四年{五혹은四}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 {出} 百兵 宣供供候王 0000作 - 泰和 4年 五月(혹은 4月)
十六日 丙午正陽에 百鍊鋼鐵로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候王에게 보내준다.
0000가 제작한 것이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 {後} 世 - 先世以來로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 奇生聖音이 倭王 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後世에 길이 傳하여 보일지어다.

[해설]백제 王世子가 候王인 倭王에게 七支刀를 下賜하고 있다.
倭王이 백제의 候王이라고 4세기경의 유물 七支刀에 銘文으로 쓰여져 있다.
또 그런 글이 쓰여진 유물을 보물로 倭國이 간직하고 있다. 倭王이 바로 백제
王世子의 이 명령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傳示後世”—-> 後世에 전하여 보여라.
이것을 보면 백제 왕세자들이 식민지 倭를 통치하는 총독인 것을 알 수 있다.
後世에 傳하여 보여라.——-> 백제 王世子가 侯王인 倭王에게 막중한 義務를 付與하고 있다.

倭王 = 侯王 <백제 王世子 < 百濟王



18.南齊書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數十萬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沙法名·?首流·解禮昆·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19.南齊書 백제— 東城王의 國書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北魏)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20.南齊書 百濟—東城王의 國書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沙法]名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沙法名을 假行征虜將軍 邁羅王으로, ?首流를 假行安國將軍 ?中王으로,
解禮昆을 假行武威將軍 弗中侯로 삼고, 木干那는 과거에 軍功이 있는 데다 또 城門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行廣威將軍 面中侯로 삼았습니다. ...” 라고 하였다.

[해설] 백제의 侯王制度를 南齊의 天子에게 보낸 東城王의 國書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侯王은 七支刀에 나오는 “백제 王世子에게서 七支刀를 받고 義務를 부여받는”

侯王인 倭王을 확인시켜준다.



21.南齊書 百濟— 東城王의 國書


”寧朔將軍 面中王 姐瑾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假行冠軍將軍
都將軍都漢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八中侯 餘古는 젊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假行寧朔將軍 阿錯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餘歷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文武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假行龍驤將軍 邁盧王이라 하였으며, 廣武將軍
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國政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假行建威將軍 弗斯侯라 하였습니다.”



24.晉書의 기록 : 分遣使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薛羅·休忍等 諸國?不從

 [해설]薛字가 붙는 지명이 薛國·薛縣(?州市東南), 薛邑(陽谷縣東北), 薛郡(曲阜市) 등 山東省에 많다.



25.『資治通鑑』「齊紀」世祖 永明 6년(488)條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北魏가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百濟에게 敗하였다 .



25.南齊書 백제—- 東城王의 國書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冒涉波險,

尋其至効,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里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 (萬)執志周密, . 屢致勤効, 今假行廣武將軍·淸河太守 詔可, 竝賜軍號,除太守.

   牟大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

“臣이 파견한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 長史 臣 高達과 行建威將軍朝鮮太守 兼 司馬 臣 楊茂와 行宣威將軍 兼 參軍 臣 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泰始 연간에는 나란히 宋朝에 사신으로 갔었고,지금은 臣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지면 벼슬이 올라야 마땅하므로 선례에 따라 각자 假行職을 내렸습니다. 天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萬里 밖까지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몸소 天子의 뜰을 밟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옵건대,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官爵을 除授하여 주십시오. 達은 邊境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고 公務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이제 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라 하였고, 茂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 같으며 公務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라 하였으며, 邁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여러 번 勤務의 성과를 나타내었으므로 이제 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詔書를 내림과 더불어 將軍의 號를 賜하고 太守의 관직을 除授하였다


 [해설]南齊 武帝 永明 8년(AD 490) 牟大(東城王)가 上表한 글에 5名의 有功臣下에게 廣陽太守,
 朝鮮太守, 帶方太守, 廣陵太守, 淸河太守의 직책을 주었다고 하였으며
, 또한 明帝 建武2년
 (AD 495)에 ‘又遣使上表’한 글에 「臣이 보낸 樂浪太守 兼長史 臣 慕遺, … 城陽太守兼司馬
 臣 王茂 …」라는 記事가 있다.『魏書』「地形志」와 『中國歷史地名大辭典』에서 上記

 太守의 任地를 찾아보면 ① 朝鮮 ② 帶方 ③ 樂浪은 『通典』의 ‘柳城北平之間’ 즉 지금의

 大凌河·小凌河~?河 사이에 있었고, ④ 廣陽은 ‘北魏置. 治所在燕東縣’(河北省 承德市 隆化縣)라고

 하였고, 領縣이 廣興, 燕樂, 方城의 3縣이 있는데 지금의 北京市 密雲縣 일대에 있다고 하였다.

 ⑤ 淸河는 지금의 河北省 邢台市 淸河縣(山東省과의 接境地域) 또는 山東省 臨淸市 東北이며,

 ⑥ 城陽은 山東省 ?縣 또는 ?津市 東北, ⑦ 廣陵은 지금의 江蘇省 揚州市 서북 蜀岡上 / 江蘇省

 淮陽市 西南 甘羅城/ 江蘇省 寶應縣 東北 射陽鎭 등이므로 江蘇省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5세기말에서 6세기 중엽까지(後述 北齊書 參照) 大陸百濟의 점유지는 지금의 遼河의

 西域·河北省의 渤海 北域·渤海灣의 西域·山東省·江蘇省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6.南齊書 百濟

詔可, 竝賜軍號. 詔可竝賜軍號除太守
이를 허락한다는 詔書를 내림과 더불어 將軍의 號를 賜하고 太守의 관직을 除授하였다.



27.중국 역사서 宋書의 기록

백제는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千餘里 밖에 있었다.
그후 高麗가 遼東을 침략하여 점령하니, 백제는 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다.

28. 劉鈞仁의<中國歷史地名大辭典> : 晉平은 縣 이름인데, 晉나라가 설치하여 廣州 蔚林郡에
소속시켰고, 南宋과 南濟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廣西 境界에 있었다.

 


 

 
中國 廣西省 長族 自治區의 省都 南寧市 와 百濟鄕 사이를 오가는 버스
 

29.宋書南朝 齊나라 武帝 때인 488년에 편찬된 것이고, 南齊書梁나라 때 편찬된 것이고,
梁書唐나라 太宗 때인 636년 頃에 편찬된 책이며, 晉書는 唐나라 태종 때 편찬된 책이고,
魏書는 北齊 때인 554년 경 편찬되었고, 周書는 唐나라 太宗 2년, 北史는 唐 태종 때 편찬되었다.
결국 北朝系 史書로 백제 당시의 史書는 魏書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後代의 것이다.
그런데 宋書나, 南齊書는 바로 百濟 당시의 史書이다. 어느 것이 더 史料的 價値가 있겠는가?
대륙 백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 唐나라 太宗 때에 편찬된 晉書인가,
대륙 백제에 대한 기록이 있는 梁, 齊 때 편찬된 宋書나 南齊書인가? 南朝系, 北朝系 史書
중 어느 것이 史料的 價値가 더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보기 바란다.


 


百済の 真面目が分かるか?

1.梁職貢圖..百濟
[본문]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擔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擔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等附之

[번역문]普通二年 그 왕 餘隆(=武寧王)이 使臣을 보내 表를 올리고 이르기를 고구려를
여러 번 破했다고 했다. 治所城(=首都)을 固麻라고 하고, 邑을 일러 擔魯라고 한다.
중국에 郡縣이다. 22擔魯가 있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나누어 가졌다. 백제에 附庸하는
小國은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다


2.北史 列傳 新羅
[원문]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初附庸于百濟,
[번역문]그 왕(=新羅王)은 본래 百濟人이다. 바다로부터 도망하여 新羅로 들어가서 점차 그 나라에
王이 되었다. 처음에는 百濟附庸했다.



3.舊唐書 列傳 東夷 百濟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

 

百濟國은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東北으로 신라에 이르고,
西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高麗에 이른다.
[해설]越州 지역에는 백제가 진출하여 세운 晉平郡이 있었고,  고구려 지역 근처에는 遼西郡이,

신라는 백제의 附傭國이었고, 는 백제의 擔魯였다.



4.중국 역사서 資治通鑑
孝宗 永和 2年 正月 처음에 扶餘鹿山에 거하였는데, 百濟에게 侵掠당하여 部落이
쇠퇴하여 흩어져서 서쪽 燕나라 근처로 移徙하였다.
[해설]여기의 鹿山은 바로 중국 동북부에 있는 松花江 流域이다. 그런데 그 지역에 있던 夫餘가

百濟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敗退하여 서쪽 燕나라 근처로 移徙한다.


5.魏書 勿吉傳 太和(서기 477∼499년) 초에 또 말 5백 필을 바쳤다. ……
(勿吉國은)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 마을 열 곳을 격파하고
은밀히 百濟와 더불어 水路를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려고 하는데
乙力支를 大國에 사신으로 보내 그것이 옳은지 그 논지를 묻고자 한다.
[해설]勿吉은 중국 동북 지역 고구려 지역에서 더 북쪽에 있는 나라,
그런데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백제는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아니라 대륙에 있는 백제이다.

 

6.通典 百濟傳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王夫餘崇 竟不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夫餘氏君長遂絶

 

城郭(秦長城) 근처의 나머지 무리들은 그 후 차차 인원이 줄고
약해져서 突厥과 靺鞨로 흩어졌으며, 그 王 扶餘 崇도 감히 옛 국토로 돌아갈
수 없었다. 國土가 新羅靺鞨에게 거의 다 沒收되어 扶餘氏의 君長도 드디어 絶滅되었다.

 

[해설]여기의 靺鞨은 震國 즉 후일의 渤海인데, 신라와 더불어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영토 즉 大同江과 元山灣 바로 위 지역에는 백제의 영토가 없었다.

말갈이 沒收한 백제의 영토는 바로 중국 東北部 지역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를 의미한다.


7.중국 역사서 南齊書의 기록
이때 魏虜(=北魏)가 騎兵 數10萬을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그 境界에 들어갔는데,
牟大(百濟 東城王)가 장수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를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魏虜軍을 襲擊하였다. 그리하여  魏虜軍크게 破하였다.



8.晉書 慕溶滉載記 (北朝系 史書)

高句麗, 百濟,宇文,段部의 사람은 모두 兵勢를 옮겼는데, 중국의 義를 사모하여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戶가 10만이나
좁은 都城에 몰려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해설]晉書에 대륙 백제의 기록이 보인다. 이 백제는 前燕의 공격대상 국가들이던
고구려, 宇文部, 段部 함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의 위치를
관련지어 보면, 백제는 前燕과 인접한 만주 지역에 所在한 것이 된다.
다음 기록을 보라. 중국 역사서 宋書의 기록 : 백제는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千餘里 밖에 있었다.



9.중국 역사서 梁書의 기록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려와 함께 遼東의 東쪽에 있었다. 晉國 때에 고려가 遼東을
점령하여 갖자 백제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여 百濟郡을 두었다.


10.通典 東夷 百濟條
晉時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晉나라 때에 高句麗가 遼東을 침략하여 갖자, 백제 역시 遼西, 晉平 2郡를 占據하여 가졌다.

오늘날의 柳城, 北平 사이에 있다.





11.중국 역사서 通典
처음에 百家가 바다를 건넜기에 그로 인해 百濟라고 일컬었다. 晉世에 고려가
遼東을 침략하여 갖자, 百濟 역시 遼西,晉平 2郡을 차지하였다.




12.삼국사기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强兵 百萬으로써 南으로는 吳越을 侵害하고 北으로는
燕,齊,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13.중국 역사서 南史 列傳 夷貊 東夷 百濟
都城이 있는 곳을 일컬어 固麻라고 한다. 邑을 일러 擔魯[Damuro]라고 한다.
중국의 말로 郡縣과 같다. 그 國土에는 22擔魯[Damuro]가 있다.
다 子弟,宗族이 그것을 分割하여 雄據한다



14.일본서기 神代 上 第4段 "大八洲生成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淡路[Damuro]洲를 胞로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로 淡路[Awaji]洲라 하였다
[해설]일본이 淡路(Damuro 즉 백제의 지방관제인 Damuro)를 胞로하여
生成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Awaji로 訓讀한 것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 古事記, 일본서기에서 邪馬臺國倭奴國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의 祖上神들은 자신들이 강림하는 곳에 그들이 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祖國,

즉  신라, 徐伐, 加羅, 韓國, 淡路(百濟의 地方官制)의 國名을 붙인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의 祖上들은 일본 열도에 상륙하여 곳곳에 한반도에 있는 祖國인

三國의 分國을 세운 것이다.



15.梁書 列傳 諸夷 東夷 新羅
[원문]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

[번역문]그 나라(=新羅)는 百濟 東南 五千餘里에 있다. 그 땅의 동쪽은 大海와
가까우며, 南과 北은 句麗, 百濟와 接하고 있다.
[해설]백제의 東南쪽 5千餘里에 新羅가 있으니, 이것은 바로 백제가 遼西地域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되고,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서쪽 경계에 신라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史實이니, 신라의 남쪽이 백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은
당시에 이미 加羅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新羅 西北 5千餘里에 있는 것은 大陸백제, 남쪽을 新羅와 접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백제이다.


16.일본서기 : 古代 일본천황百濟人임을 증명
1)천황의 거처: 百濟宮 舒明天皇 12,13년
2)國刹: 百濟大寺 舒明 11년 皇極天皇 元年
3)棺安置所: 舒明천황의 棺安置所를 百濟大殯이라 함 舒明 13년
4)일본 지배계층이 사는 마을
百濟大井 敏達天皇 元年
石川 百濟村 敏達 12년
下百濟 河川村 敏達 12년
5)河川: 百濟川, 지금의 曾我江이다.
6)船: 百濟船 白雉 元年
7)客館: 百濟客館 皇極천황 2년
8)音樂: 百濟樂 天武 12년

17.七支刀의 銘文

*앞면* 泰(和)四年{五혹은四}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 {出} 百兵 宣供供候王 0000作 - 泰和 4年 五月(혹은 4月)
十六日 丙午正陽에 百鍊鋼鐵로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候王에게 보내준다.
0000가 제작한 것이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 {後} 世 - 先世以來로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 奇生聖音이 倭王 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後世에 길이 傳하여 보일지어다.

[해설]백제 王世子가 候王인 倭王에게 七支刀를 下賜하고 있다.
倭王이 백제의 候王이라고 4세기경의 유물 七支刀에 銘文으로 쓰여져 있다.
또 그런 글이 쓰여진 유물을 보물로 倭國이 간직하고 있다. 倭王이 바로 백제
王世子의 이 명령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傳示後世" ---> 後世에 전하여 보여라.
이것을 보면 백제 왕세자들이 식민지 倭를 통치하는 총독인 것을 알 수 있다.
後世에 傳하여 보여라. -----> 백제 王世子가 侯王인 倭王에게 막중한 義務를 付與하고 있다.

倭王 = 侯王 <백제 王世子 < 百濟王



18.南齊書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數十萬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沙法名·?首流·解禮昆·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19.南齊書 백제 -- 東城王의 國書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北魏)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20.南齊書 百濟 --東城王의 國書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沙法]名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沙法名을 假行征虜將軍 邁羅王으로, ?首流를 假行安國將軍 ?中王으로,
解禮昆을 假行武威將軍 弗中侯로 삼고, 木干那는 과거에 軍功이 있는 데다 또 城門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行廣威將軍 面中侯로 삼았습니다. ..." 라고 하였다.

[해설] 백제의 侯王制度를 南齊의 天子에게 보낸 東城王의 國書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侯王은 七支刀에 나오는 "백제 王世子에게서 七支刀를 받고 義務를 부여받는"

侯王인 倭王을 확인시켜준다.



21.南齊書 百濟 -- 東城王의 國書


"寧朔將軍 面中王 姐瑾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假行冠軍將軍
都將軍都漢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八中侯 餘古는 젊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假行寧朔將軍 阿錯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餘歷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文武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假行龍驤將軍 邁盧王이라 하였으며, 廣武將軍
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國政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假行建威將軍 弗斯侯라 하였습니다.”



24.晉書의 기록 : 分遣使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薛羅·休忍等 諸國?不從

 [해설]薛字가 붙는 지명이 薛國·薛縣(?州市東南), 薛邑(陽谷縣東北), 薛郡(曲阜市) 등 山東省에 많다.



25.『資治通鑑』「齊紀」世祖 永明 6년(488)條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北魏가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百濟에게 敗하였다 .



25.南齊書 백제 --- 東城王의 國書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冒涉波險,

尋其至効,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里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 (萬)執志周密, . 屢致勤効, 今假行廣武將軍·淸河太守 詔可, 竝賜軍號,除太守.

   牟大가 또 다시 표문을 올려,

“臣이 파견한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 長史 臣 高達과 行建威將軍朝鮮太守 兼 司馬 臣 楊茂와 行宣威將軍 兼 參軍 臣 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습니다. 지난 泰始 연간에는 나란히 宋朝에 사신으로 갔었고,지금은 臣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지면 벼슬이 올라야 마땅하므로 선례에 따라 각자 假行職을 내렸습니다. 天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萬里 밖까지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몸소 天子의 뜰을 밟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옵건대,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官爵을 除授하여 주십시오. 達은 邊境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하고 公務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이제 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라 하였고, 茂는 마음과 행동이 맑고 한결 같으며 公務를 항상 놓지 않았으므로 이제 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라 하였으며, 邁는 생각이 찬찬하고 빈틈이 없어서 여러 번 勤務의 성과를 나타내었으므로 이제 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詔書를 내림과 더불어 將軍의 號를 賜하고 太守의 관직을 除授하였다


 [해설]南齊 武帝 永明 8년(AD 490) 牟大(東城王)가 上表한 글에 5名의 有功臣下에게 廣陽太守,
 朝鮮太守, 帶方太守, 廣陵太守, 淸河太守의 직책을 주었다고 하였으며
, 또한 明帝 建武2년
 (AD 495)에 ‘又遣使上表’한 글에 「臣이 보낸 樂浪太守 兼長史 臣 慕遺, … 城陽太守兼司馬
 臣 王茂 …」라는 記事가 있다.『魏書』「地形志」와 『中國歷史地名大辭典』에서 上記

 太守의 任地를 찾아보면 ① 朝鮮 ② 帶方 ③ 樂浪은 『通典』의 ‘柳城北平之間’ 즉 지금의

 大凌河·小凌河~?河 사이에 있었고, ④ 廣陽은 ‘北魏置. 治所在燕東縣’(河北省 承德市 隆化縣)라고

 하였고, 領縣이 廣興, 燕樂, 方城의 3縣이 있는데 지금의 北京市 密雲縣 일대에 있다고 하였다.

 ⑤ 淸河는 지금의 河北省 邢台市 淸河縣(山東省과의 接境地域) 또는 山東省 臨淸市 東北이며,

 ⑥ 城陽은 山東省 ?縣 또는 ?津市 東北, ⑦ 廣陵은 지금의 江蘇省 揚州市 서북 蜀岡上 / 江蘇省

 淮陽市 西南 甘羅城/ 江蘇省 寶應縣 東北 射陽鎭 등이므로 江蘇省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5세기말에서 6세기 중엽까지(後述 北齊書 參照) 大陸百濟의 점유지는 지금의 遼河의

 西域·河北省의 渤海 北域·渤海灣의 西域·山東省·江蘇省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6.南齊書 百濟

詔可, 竝賜軍號. 詔可竝賜軍號除太守
이를 허락한다는 詔書를 내림과 더불어 將軍의 號를 賜하고 太守의 관직을 除授하였다.



27.중국 역사서 宋書의 기록

백제는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千餘里 밖에 있었다.
그후 高麗가 遼東을 침략하여 점령하니, 백제는 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다.

28. 劉鈞仁의<中國歷史地名大辭典> : 晉平은 縣 이름인데, 晉나라가 설치하여 廣州 蔚林郡에
소속시켰고, 南宋과 南濟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廣西 境界에 있었다.

 


 

 
中國 廣西省 長族 自治區의 省都 南寧市 와 百濟鄕 사이를 오가는 버스
 

29.宋書南朝 齊나라 武帝 때인 488년에 편찬된 것이고, 南齊書梁나라 때 편찬된 것이고,
梁書唐나라 太宗 때인 636년 頃에 편찬된 책이며, 晉書는 唐나라 태종 때 편찬된 책이고,
魏書는 北齊 때인 554년 경 편찬되었고, 周書는 唐나라 太宗 2년, 北史는 唐 태종 때 편찬되었다.
결국 北朝系 史書로 백제 당시의 史書는 魏書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後代의 것이다.
그런데 宋書나, 南齊書는 바로 百濟 당시의 史書이다. 어느 것이 더 史料的 價値가 있겠는가?
대륙 백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 唐나라 太宗 때에 편찬된 晉書인가,
대륙 백제에 대한 기록이 있는 梁, 齊 때 편찬된 宋書나 南齊書인가? 南朝系, 北朝系 史書
중 어느 것이 史料的 價値가 더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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