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창미닫이와 두껍닫이

 

마지막에 조선시대, 창에 미닫이는 사용되고 있었는지, 라고 하는 점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창의 크기 형상은 건물의 건축 규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또 미닫이문은 작고 가볍다.

이것은방과 방을 잇는미닫이에 비해, 적용 조건이 낮은 것을 의미한다.

 

다만, 창은 외계와 접하는 (곳)중에 있으니까, 풍우, 사진의 영향을 받아 풍화의 정도도 크다.이것들은 큰 마찰을 일으키는 조건이다.

목제의 창의 미닫이(유리문에서도 미닫이문에서도 상관없지만)의 방에서 산 인간이면, 비로 젖어 차분해진 창의 문을 혼신의 힘으로 여닫기 한 체험을 가질 것이다.

 

마찰의 문제가 경감되는 것은 전혀 없다.

 

이하의 사진은 조선시대의 미닫이의 실물 혹은 그것이 그려진 그림으로서 제시된 것이다.(후세의 개조의 가능성을 지적시켜 준 것도 있다.)

 

재게, 우측의 창에 주목

 

 

운강 고 택

 

 

이 그림의 우단이 미닫이가 아닌지, 라는 것

 

첫번째의 사진에서는 미닫이는 우측의 창가에 있지만, 최초로 보았을 때에, 「과연 이것은 정말로 미닫이일까」라고 헤매었다.사진 찍임새(사진의)의 탓인지도 모르지만, □이나 문창살이 매우 가늘고, 미닫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한 손으로 갑자기 들어 올려 겨드랑이에 이동시키는, 일종의 보드와 같은 것일까하고 생각한 것이다.

 

두 개의 사진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것은,

  ① 미닫이가 되어 있는 것은 안쪽의 문만으로 외측은 종래대로 여닫이 문이다.

   도랑은 한 개로, 당겨 달라로 되어 있지 않다(도랑이 2 개로 당겨 차이가 되어 있으면, 양사이드의 두껍닫이의 필요는 없다).

   도랑은 창틀하 대들보 위를 달리고 있지 않고, 안쪽에 어긋나 있다

   미닫이문은 경량에 보인다

   두껍닫이가 있다

  (사실-H)

 

이러한 일로부터, 후의 시대로의 개조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지만, 건축 당초부터 있었는지를 일단 둔다고 하여, 이러한 구성이 된 의미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기술의 계는 그 기술의 범위 중(안)에서 진화해, 세련 되는 경향이 있지만, 미닫이라고 하는 완전히 다른 계를 동거시킬 필요가 있었는가.

 

여닫이 문이라면 여닫이 문만으로 구성한 창이나 도어.미닫이라면 미닫이만 쪽이 깨끗이 하고 있다.

 

 

 

환기성과 채광성이 좋음을 요구하면, 창의 총면적은 큰 것이 바람직하지만, 조선의 가옥의 창은 여닫이 문으로서 문한 장 근처의 면적이 꽤 크다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개폐시의 뎁트 스페이스의 문제가 발생해, 그 때문에(위해) 미닫이를 도입했다고 하는 견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혹은 그 외의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단지, 그렇다면, 외측의 문도 미닫이로 하는 편이 통일감이 있을 것이다.( 후의, 현대 한옥이 그렇듯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개조의 범위가 커져 구조재에까지 미치는 것, 그리고 중량이 있어, 강한 환경 내성, 높은(마찰 저항에 대한다) 강도가 요구되는, 외측의 문을 미닫이로 하는 기술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니까 스스로가 손이 미치는 범위에서 미닫이를 이용한다, 라고 하는 것이면, 이러한 형태가 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단지, 그것으로 도랑은 창틀하 대들보 위나 벽의 안쪽에 놓여지지 않고, 실의 안쪽에는 봐 나오게 되었다.

 

건축시에 미닫이를 채용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면, 하 대들보 위에 2 개의 도랑을 새겨, 미닫이는 한쪽 편에 그만둘 수 있고, 개폐하는이라고 하는, 통상의 방식을 왜 뽑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며, 후의 시대로의 개조를 시사하는 것이다.(건물의 완성 후에 올바르게 2 개의 도랑을 새기는 것은 어렵다).

 

여하튼, 안쪽의 미닫이용의 도랑은 창의 2배의 길이로 좌우에 퍼지는, 추가된 하 범위 위를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창의 좌우에 두껍닫이(case)를 마련하는 것에 연결되었다.그렇지만 두껍닫이는 과연 정말로 필요한 것인 것일까?

 

두껍닫이는, 개구부를 크게 하고, 채광 성능을 향상한다고 하는 방향성과는 역행하는 인상을 내린다.

이 존재를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괴롭다.예를 들어, “미닫이문의 파손을 막는다”, “미닫이문의 낙하를 막는다”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외관상의 이유가 가장 타당할지도 모른다.밖으로부터 봐 문2매의 사이즈의 창이, 안쪽으로부터 보면 옆에 2배의 사이즈로 보인다, 라고 하는, 불일치, 불돌합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외관상은 수습이 붙을지도 모르지만, 기능 구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여닫이 문의 기구와 미닫이의 기구라고 하는 다른 것의 혼재에, 두껍닫이라고 하는 요소가 붙여 더해지면, 혼잡하고 있다고 하는 인상은 면할 수 없다.

 

여하튼, 사진의 예가, 반도가 일본의 미닫이 문화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전이었는지 다음에 있었는가는 본질적인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미닫이의 문화가, 강도를 갖춘“공업제품“으로서 벅찬 마찰에 대항하려고 하는에 대해서, 사진의 예는 보다 가볍게 하는 것으로, 마찰과의 싸움을 회피하려고 했다고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봐 이와 같은, 강도가 작은 미닫이와 여닫이 문의 절충 양식의(두껍닫이포함의) 창을 계속해 이용 슬슬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까?

혹은 현재의 주택에서, 이러한 창이 요구되고 있을 것이다인가?

 

발상을 바꾸면,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까.

 「이러한 조작으로 충분한 실용성을 얻을 수 있다면, 같은 것이, 세계의 저마루식 주택이며 접한 것으로서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닐까?」

 

대답은 모두 부정적인 물건이 될 것이다.

 

엄격한 통일 규격과 큰 시장과 전문직인과 전용의 도구를 가지지 않는 반도에서 행해진 시행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결론

 

조선은 저마루 문화권에 속하고, 벽의 대체가 되는 넓은 지면의 미닫이에의 필요성은 작고, 자연 환경도 불리했다.그 때문에, 규격을 확립해, 전문직인과 전용 도구의 문화의 두께 가지고 마찰에 대항한다고 하는 미닫이의 문화는 태어나지 않았다.

 

 한시기, 미닫이창적인 형상·기구를 이중의 여닫이 문창의 안쪽의 문의 대체로서 도입하는 시도는 있었지만, 20 세기가 되어 본격적인 일본의 미닫이 문화의 파급과 함께, 그 시도는 종료했다.

 

 


朝鮮に引き戸建具の文化はあったのか--(4/4)

窓障子と戸袋

 

最後に朝鮮時代、窓に引き戸は使われていたのか、という点に関して考えてみたい。

窓の大きさ形状は建物の建築規格に対して、ある程度自由である。また障子戸は小さく軽い。

このことは部屋と部屋をつなぐ引き戸に比べて、適用条件が低いことを意味する。

 

ただし、窓は外界と接するところであるから、風雨、砂塵の影響を受け、風化の度合いも大きい。これらは大きな摩擦を引き起こす条件である。

木製の窓の引き戸(ガラス戸でも障子戸でもかまわないが)の部屋で暮らした人間であれば、雨で濡れ渋くなった窓の戸を渾身の力で開け閉めした体験を持つはずである。

 

摩擦の問題が軽減されるわけでは全くない。

 

以下の写真は朝鮮時代の引き戸の実物あるいはそれが描かれた絵として提示されたものである。(後世の改造の可能性を指摘させてもらったものもある。)

 

再掲、右側の窓に注目

 

 

雲岡故宅

 

 

この絵の右端が引き戸ではないか、とのこと

 

一番目の写真では引き戸は右側の窓側にあるのだが、最初に見たときに、「果たしてこれは本当に引き戸であろうか」と迷った。写真写りのせいかもしれないが、框や桟がとても細く、引き戸というよりも、片手でひょいと持ち上げて脇に移動させる、一種のボードのようなものかと思ったものである。

 

二つの写真において指摘できることは、

  ① 引き戸になっているのは内側の戸のみで外側は従来通り開き戸である。

   溝は一本で、引き違いになっていない(溝が二本で引き違いになっていれば、両サイドの戸袋の必要はない)。

   溝は窓枠の下梁の上を走っていず、内側にずれている

   障子戸は軽量にみえる

   戸袋がある

  (事実―H)

 

これらのことから、後の時代での改造の可能性を指摘できるのだが、建築当初からあったかどうかをひとまずおくとして、このような構成になった意味を考える。

 

一般に技術の系はその技術の範囲の中で進化し、洗練される傾向があるが、引き戸という全く別の系を同居させる必要があったのか。

 

開き戸なら開き戸のみで構成した窓やドア。引き戸なら引き戸のみのほうがスッキリしている。

 

 

 

通気性と採光性のよさを求めると、窓の総面積は大きい方が望ましいが、朝鮮の家屋の窓は開き戸として、扉一枚あたりの面積がかなり大きいと思える。

 

そのため開閉時のデットスペースの問題が発生し、そのために引き戸を導入したという見方が出来るかもしれない。(あるいはその他の理由があるかもしれないが)。

ただ、そうであれば、外側の戸も引き戸にしたほうが統一感があるであろう。(後の、現代韓屋がそうであるように)

 

そうしなかった理由は改造の範囲が大きくなり構造材にまで及ぶこと、そして重量があり、強い環境耐性、高い(摩擦抵抗に対する)強度が求められる、外側の戸を引き戸にする技術が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

 

だから自分たちの手の届く範囲で引き戸を利用する、ということであれば、このような形態になったことは理解できる。

 

ただ、そのことで溝は窓枠の下梁の上や壁の内側に置かれず、室の内側にはみ出ることになった。

 

建築時に引き戸を採用することが決まっていたなら、下梁の上に二本の溝を刻み、引き戸は片側によせて、開閉するという、通常の方式をなぜ採らなかったかは疑問であって、後の時代での改造を示唆するものである。(建物の完成後に正しく二本の溝を刻むのは難しい)。

 

ともあれ、内側の引き戸用の溝は窓の二倍の長さで左右に広がる、追加された下枠の上を走ることとなった。

 

そしてこのことが、窓の左右に戸袋(case)を設けることにつながった。しかしながら戸袋は果たして本当に必要なものなのであろうか?

 

戸袋は、開口部を大きくして、採光性能を向上するという方向性とは逆行する印象をあたえる。

この存在をどう解釈すべきか悩ましい。たとえば、“障子戸の破損を防ぐ”、“障子戸の落下を防ぐ”などがあり得るかもしれない。 

しかしそれよりは、外観上の理由の方がもっとも妥当するかもしれない。外から見て扉二枚のサイズの窓が、内側から見れば横に二倍のサイズに見える、という、不一致、不突合の印象を逃れるため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

 

外観上は収まりがつくのかもしれないが、機能構成という点では開き戸の機構と引き戸の機構という異なるものの混在に、戸袋という要素がつけ加わると、混雑しているという印象は免れない。

 

ともあれ、写真の例が、半島が日本の引き戸文化と本格的に接触する前であったか後であったかは本質的な問題とはならないだろう。

 

 

日本の引き戸の文化が、強度を備えた“工業製品“として、手ごわい摩擦に対抗しようとするに対して、写真の例はより軽くすることで、摩擦との戦いを回避しようとしたという点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長期的にみてこの様な、強度が小さい引き戸と開き戸の折衷様式の(戸袋つきの)窓を継続して利用するする人々がいたのであろうか?

あるいは現在の住宅で、このような窓が要求されているであろうか?

 

発想を変えると、次のような常識的な疑問が浮かばないだろうか。

 「このような造作で十分な実用性が得られるのなら、同様のものが、世界の低床式住宅でありふれたものとして使われてき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答えはいずれも否定的なものとなるだろう。

 

厳格な統一規格と大きな市場と、専門職人と専用の道具を持たない半島で行われた試行であると言う他はない

 

結論

 

朝鮮は低床文化圏に属して、壁の代替となる大判の引き戸への必要性は小さく、自然環境も不利であった。そのため、規格を確立し、専門職人と専用道具の文化の厚みもって摩擦に対抗するという引き戸の文化は生まれなかった。

 

 一時期、障子窓的な形状・機構を二重の開き戸窓の内側の戸の代替として取り入れる試みはあったが、20世紀になって本格的な日本の引き戸文化の波及とともに、その試みは終了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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