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박승학 칼럼/ 일본의 지진 피해와 근원.  


목이 마른 이유는 물이 있기 때문이며 배가 고픈 까닭은 먹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 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영혼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그 대가가 형벌임을 알기에 모든 인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죄를 의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존재와 죄의 보응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태양이 없다 함 같이 스스로의 몰상식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1 일본의 대 지진과 재앙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진도 9의 대 지진으로 일본 동북부 본토가 2.4m 이동하고 지면이 80cm 가량 낮아졌다고 한다. 10m의 해일은 6km 내륙까지 밀려들어와 가옥과 생활터전 모두를 휩쓸어 가 버렸다. 그리고 28,000명의 사망 실종자, 경제적 손실이 25조 엔이라 한다. 최근 일본 국가 부채규모가 눈덩이 같이 불어나고 경제 침체로 국가 부도 위기까지 언급되는 상황에서 이번 지진은 감당키 어려운 재앙이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인들에게는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화산폭발 등은 항상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상화된 재앙으로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공포의 재앙이 일어났으니 이는 방사능 오염 확산이다. 지진 지역 해변에 있던 6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되던 전원이 끊기며 냉각장치가 중지되고 원자로의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인한 공포가 일본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냄새도 색깔도 소리도 없이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방사능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 방사능은 원전 반경 40km 접근 금지지역으로 육지 뿐 아니라 바다까지 이 무형의 공포가 30년 이상 지속 될 것이며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니 이보다 더 무서운 저주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위기 극복에 익숙하고 재난에 침착한 일본인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치명적 저주의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일본에 대한 천벌(天罰), 저들의 죄(罪)를 추억해 보자 

 

 

 



지진 피해가 시작된 후 3, 14일 이시하라 산타로 일본 도교 도지사가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에 천벌이 내린 것”아라고 일갈했다. 그는『일본의 정체성은 아욕(我慾)이다. 이번 쓰나미를 통해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탐욕을 쓸어버려야 한다. 미국의 정체성은 자유이고 프랑스는 자유와 박애, 그리고 평등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정체성이 없고 오로지 물욕과 금전욕이며 이와 같은 아욕에 속박된 일본 징치도 표퓰리즘을 이루고 있다. 이번 쓰나미로 오래 축척된 일본의 마음의 때를 씻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모두 함께 공감해야 할 정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피해를 입은 지역의 당사자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흘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시비를 걸고 달려든다면 당신들은 그럼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단 말인가. 웃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일본인들은 이번 참사를 당하면서 인과응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무슨 죄가 많아서 이와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오는가. 여기서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고 휴머니즘을 회복 할 수가 있다면 이 재난이 얼마나 아름다운 승화의 기회가 될 것인가. 

3 일본인들은 지나간 역사 속의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도 반성도 없다. 

 



세계를 향한 저들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행들을 열거해 보자.

1) 먼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 할 때의 사건을 고증(考證)을 조회하여 언급하겠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범 낭인들의 일원이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시해 사건 후 조선 내무부 고문이 된 자)가 일본 본국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비밀리에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 의하면『일본의 낭인들이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處刃傷).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고 상해를 입은 황후를 20여명이 윤간을 하고 6번 째 부터는 죽은 시신에 시간(屍姦)을 한 후 증거를 없애려고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이를 말리는 조선 궁내 대신들의 팔과 다리를 잘랐다.』라고 보고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인들이 행한 악행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바다가 아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들이다.

 



일제는 1905년부터 조선 불법 강점 41년 동안 “범죄즉결령” (1910년), “조선형사령” (1912년), “치안유지법” (1925년), “신치안유지법” (1928년), “국가총동원법” (1938년), “국민징용령” (1939년), “개정치안유지법” (1941년), “학도병제령” (1943년) 등 수많은 살인 악법들을 연이어 조작 공포하여 수백만 명의 조선 사람들을 검거, 투옥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는 등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조선 사람은 우리 일본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공언한 3대 “조선총독” 데라우찌(후에 일본 총리가 된 자)의 말은 당시 한국인에 대한 포악한 살인 “지령”으로 식민지 살인 통치의 기본 방식이었다.


2) 중국에 대한 만행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로 전쟁 배상금으로 은 1억 3천만냥(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5배) 금액의 몰수해 간 천문학 적인 돈으로 군사 대국으로 발돋움 한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손쉽게 정복하면서 3개월 안에 중국 대륙 전체를 점령하겠다고 큰 소리 쳤으나 상하이 상륙작전에서 장개석 군대에 3개월 이상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1월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을 향해 진격했으나 12월 13일 정복 할 때 까지 입은 상당한 피해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무차별 중국인들을 학살 했다.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 되는 어린이부터 60,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하고 죽였다.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된 기사가 있었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최후까지 100인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했다. 이 한 사건이 일본의 수많은 악행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의 마루타 생체실험 등 언급을 그만두겠다. 

 

 

 



3) 진주만 공습과 인류 최초의 원자탄 세례 

1941년 12월 7일 새벽 태평양 하와이 진주만에 접근한 일본 항공모함에서 7시 55분 183대의 폭격기가 진주만에 미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 2,403명의 군인,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진주만 폭격 2년 6개월 후 1944년 6월 16일 미군 B29기의 일본 본토폭격이 시작되었다. 45년 3월 10일에는 B29기 47대가 334회 출격하며 동경 시내에 소이탄을 퍼 붙는 대 폭격이 시작되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인 동경시내는 불바다가 되었고 사망 83,000명, 가옥 26만호 소실, 이재민 100만의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자 45년 8월 2일 히로시마 상공에 모든 시민들은 20키로 밖으로 대피하라는 경고 삐라가 뿌렸고, 8월 6일 아침 구름이 낀 하늘에 B29기에서 ‘리틀 보이’란 이름의 원자폭탄 하나가 투하되었다. 그 결과 히로시마 34만 인구 중, 피폭지역 1,2km 내의 시민 50% 사망, 12월 말까지 나머지 14만 사망, 부상자 37,000명, 그 밖에 방사능에 의한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3일 후 나가사키에 또 한발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한 것이 일본이었다.

 



여기서 원자폭탄 투하로 멸망한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천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4 이와 같이 항복한 일본은 독일 같은 철저한 전범에 대한 단절이 없었다. 
아니 변명하고 부인하고 오히려 미화하고 지속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게 문제이다. 2차 대전의 전법으로 처형된 수괴들의 유패를 자신들의 성역이라 여기는 신사에 모셔 놓고 매년 국가 수상과 각료, 국민들이 거기 가서 분향하고 추모하고 기리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시인도 반성도 역사의식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인 척하며 변명하면서 탐욕적인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지진피해를 입은 일본을 돕자는 한국인들의 따뜻한 온정을 무시하듯 적반하장으로 독도가 자기들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이와 같은 거짓말들을 어린 세대들에게 교과서에 합법화하고 가르치겠다고 하고 있다.

역시 일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야만적 탐심의 근성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시하라 산타로 일본 도교 도지사의 말처럼 일본인들의 내면에 가득찬 더러운 아욕(我慾)의 속물근성은 이번 쓰나미보다 더한 재앙으로도 씻어 낼 수 없는 것 같다. 

일본은 아직도 인과응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일본 열도가 침몰해도 그때가 되어야 변할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와중에도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 괴변을 지껄이는 뻔뻔스런 행위를 보면서 저들과는 공존이나 평화란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여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2011년 4월 3일 박승학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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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悪な日本の悪事と天罰の根源.

縛繩学コラム/ 日本の地震被害と 根源.  


のどが渇いた理由は水があるからでお腹がすいているわけは食べ物を要求するからであり, 死の恐ろしい理由は死後に審判が待っていることを魂は分かっているからだ.

 

そして罪を犯せばその対価が刑罰なのを分かるのにすべての人類は誰が教えてくれなくても自ら罪を意識して恐ろしさを感じるのだ. ここで信義存在と罪の報応に対して喧嘩を売る人がいたら手の平で空を選り分けて太陽がないと言い一緒に自らの沒常識さを現わすのだ. 

 

 



1 日本の台地震と災い 

2011年 3月 11日午後 2時 46分進度 9の台地震で日本東北部本土が 2.4m 移動して地面が 80cm ほど低くなったと言う. 10mの津波は 6km 内陸まで押し寄せて来て家屋と生活基盤皆をさらっていいてしまった. そして 28,000人の死亡失踪者, 経済的損失が 25兆円と言う. 最近日本国家負債規模が雪だるま一緒に増して経済沈滞で国家不渡り危機まで言及される状況で今度地震は手におえにくい災いが間違いなく見える.

日本人たちには地震や津波そして火山爆発などはいつも準備して備える日常化された災いで大きく荒てない. しかし予測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恐怖の災いが起こったからおこる放射能汚染拡散だ. 地震地域浜辺にあった 6機の原子力発電所に供給された電源が切られてクーリングシステムが中止されて原子への爆発と放射能流出による恐怖が日本を越して世界へ拡散している. においも色も音もなしに空気に乗って広がって行く放射能恐怖は想像することができない恐れそのものだ. この放射能は原典半径 40km 接近禁止地域で陸地のみならず海までこの無形の恐怖が 30年以上持続するはずで人間が近付いてはいけないこれよりもっと恐ろしい呪いがどこにあるか. いくら危機克服に慣れて災難に沈着な日本人たちにも耐えにくい致命的呪いの地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 

2 日本に対する天罰(天罰), 彼らの罪(罪)を思い出して見よう 

 

 

 



地震被害が始まった後 3, 14日Ishiharaサンタで日本道教道知事が記者懇談会で “日本に天罰が下ったこと”児と一喝した. 彼は『日本のアイデンティティは我欲(我慾)だ. 今度スナミを通じてこのような日本人たちの貪欲を掃いてしまわなければならない. アメリカのアイデンティティは自由でフランスは自由と博愛, そして平等だ. しかし日本はそんなアイデンティティがなくてひたすら物欲と金銭欲でこのような我欲に束縛された日本懲治もピョピュルリズムを成している. 今度スナミに長く縮尺された日本の心の垢を洗い落としてしまう必要がある』と言った.

これが日本人たちがひとしく共感しなければならない正解だと筆者は思う. もちろん被害を被った地域の当事者たちには暖かい慰労と助けが必要なことが間違いない. それでも率直に流れ出る良心の音に喧嘩を売って飛びかかったらあなたたちはそれでは何らの考えや感じがないという話か. 笑わせる人々が本当に多い.

日本人たちは今度惨事にあいながら因果応報を考えて見なければならない. 果して何の罪が多くてこのような想像を超越する災いが来るのか. ここで自分たちの醜い過去を反省してヒューマニズムを回復することができたらこの災難がいくら美しい昇華の機会になろうか. 

3 日本人たちは過ぎ去った歴史の中のやらかした犯罪に対する懺悔も反省もない. 

 



世界に向けた彼らが容赦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悪事たちを列挙して見よう.

1) 先に朝鮮を植民地化するために明成皇后を詩してする時の事件を考証(考証)を問い合わせして言及する. 1895年 10月 8日乙未事変当時明成皇后殺害犯浪人たちの一員だったイシズカエゾ(石塚英蔵 市して事件後朝鮮内務省顧問になった者)が日本本国の法制局長官であるスエマスがネズミ(末松謙澄)に秘密裡に送った長文の報告書によると『日本の浪人たちが王妃(王妃)を引っ張り出しておこう箇所刀で傷つかれて(処刃傷). 王妃を裸にした(裸体) 後局所検事(局部検査)をして傷害を被った皇后を 20人余りが輪姦をして 6番(回)目からは死んだ死体に時間(屍姦)をした後証拠を無くそうと油(油)を注いで消失(焼失)させるなどどうしてもこれを文(筆)で移すことさえオリョブドだ. これを乾かす朝鮮宮内大臣たちの腕と足を切った.』と報告した文書が発見された.

 



日本人たちの行った悪事は空が分かって地が分かって海が分かる人間をあきらめた残酷な反人倫的犯罪たちだ.

 



日帝は 1905年から朝鮮不法強点 41年の間犯罪即決領 (1910年), 朝鮮刑事領 (1912年), 治安維持法 (1925年), 新治安維持法 (1928年), 国家総動員法 (1938年), 国民徴用領 (1939年), 改訂治安維持法 (1941年), 学徒兵制令 (1943年) など幾多の殺人悪法たちをぞくぞく操作公布して数百万名の朝鮮人々を検挙, 投獄して残忍に虐殺するなど半分人倫的犯罪をやらかした. 朝鮮人は私たち日本法律に従うとかそうではなければ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放った 3台朝鮮総督デラウチ(後に日本総理になった者)の言葉は当時朝鮮人に対する暴悪な殺人指令で植民地殺人統治の基本方式だった.


2) 中国に対する蛮行 

 



日本は 1894年日清戦争勝利で戦争賠賞金で銀 1億 3チォンマンニャング(当時日本 1年予算の 4,5倍) 金額の沒収して間天文学的なお金で軍事対局で背伸びする. 1937年 7月日本軍は北京ティエンジンなど手軽く征腹しながら 3ヶ月の内に中国大陸全体を占領すると大口をたたいたが上海上陸作戦で張介石軍隊に 3ヶ月以上古典を兔れることができずに莫大な被害を被った.

 

 

11月やっと上海を占領して南京を向けて進撃したが 12月 13日征腹するまで口は相当な被害に対する怒りと敵がい心で無差別中国人たちを虐殺した. 南京に残っていた市民たちと兵士ら次から次へ連れて行ってソングウェグァック外や揚子江河口で機関銃に無差別虐殺した. 少なくは数十人で多くは万名余もなる単位で, 中国軍虜と民間人男たちは日本軍の銃剣術訓練用になるとか首を切る試合生けにえになったりした.

 

ここに少なくない中国人たちは弾を惜しもうとする日本軍によって買ったままで埋めて生き埋めあうとか刀に乱切りされた. 第2次世界大戦以後南京大虐殺に参加したどの日本軍のおこるのが発見されたが, 日記内容では退屈だった中中国人を殺すことで退屈さをなぐさめる.と買ったままで埋めてしまうとか薪の火で乗せて殺して棒でぶっ殺したりした.と書かれていた.

 

 

 

 

すなわち, 日本軍たちは軍人虜たちや民間人たち選り分けるまでもなく無差別的に残忍に虐殺をした.

このような残忍な ¥"人間狩り¥"が極まりながら女性を盛怒里ヶにすることに止めないで強姦後血なまぐさく殺害した. その対象は 10歳もまだできない子供から 60,70代老婆までその対象を選り分けなかった. また日本軍は修道女と尼を含んで南京に見える女性たちを見せ次第に陵辱して殺した.

 



南京大虐殺時期の 1937年 11月 30日付け ‘大阪毎日新聞’(大阪毎日新聞)と 12月 13日付け ‘東京ニッチニッチ新聞’(東京日日新聞)に日本軍無カイ都市あき(向井敏明) いわゆるとNodaスヨシ(野田毅) いわゆるが日本刀(日本刀)で誰が先に 100人を惨殺(斬殺)させるかどうかを競ったという事実の報道された記事がいた.

終戦後無カイ, Noda二人のいわゆるは一緒に南京で軍事裁判を受けたが最後まで 100人民間人虐殺をした事がないと外国人特派員が勝手に想像して記事を作り上げたと主張したし, 他の人は日本に帰った時妻を驚くようにしてくれようと嘘をついたことだと主張するなど最後まで嘘に一貫した. この恨み事件が日本の幾多の悪事を代弁すると見られる. その以外のマルタ生体実験など言及をやめる. 

 

 

 



3) 真珠湾空襲と人類最初の原子爆弾洗礼 

1941年 12月 7日夜明け太平洋ハワイ晋州ぶりに近付いた日本空母で 7時 55分 183代の爆撃機が真珠ぶりに米海軍基地と空軍基地を不意打ち攻撃した. この攻撃で 12尺の米海軍艦船が沈んだし, 188台の飛行機, 2,403人の軍人, 68人の民間人死亡者が出た.

 

 



真珠湾爆撃 2年 6ヶ月後 1944年 6月 16日米軍 B29機の日本本土爆撃が始まった. 45年 3月 10日には B29期 47台が 334回出撃して東京市内に焼夷弾を汲んで付く台爆撃が始まった. 木造建物が大部分である東京市内は不海がになったし死亡 83,000人, 家屋 26万戸消失, 罹災民 100万の被害を被ってからも降伏しないで 45年 8月 2日広島上空にすべての市民たちは 20キロの外で待避しなさいという警告ビラが振り撤いたし, 8月 6日朝雲が立ち込めた空に B29期で ‘リットルボーイ’と言う(のは)名前のアトミックボム一つが投下された. その結果広島 34万人口中, 被爆地域 1,2km 内の市民 50% 死亡, 12月末まで残り 14万死亡, 負傷者 37,000人, その他に放射能による被害は言葉で終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して 3日後長崎にまた一歩投下されながら無条件降伏したのが日本だった.

 



ここでアトミックボム投下で滅亡した日本は反人倫的犯罪に対する天罰的性格を持っていると評価しても度が外れた表現ではない. 


4 このように降伏した日本はドイツみたいな徹底的な戦犯に対する断絶がなかった. 
いや言い訳と否認してむしろ美化して長続こうとする意図が見えるのが問題だ. 2次大戦の戦法に処刑された首魁たちのユペを自分たちの聖域とここはジェントルマンに仕えておいて毎年国家受賞と閣僚, 国民がそっちへ行って焚香して追慕して称えているということを見れば分かる.

日本人たちは反人倫的犯罪に対する詩人も反省も歴史意識もなさそうだ. むしろ自分たちが被害者であるふりをしながら弁解しながら貪欲的な本性を現わしている.

 



最近震害を被った日本を助けようという韓国人たちの暖かい温情を無視するように居直り反駁で独島が自分たち領土で韓国が不法的に強点しているという主張をしてこのような嘘たちを幼い世代たちに教科書に合法化して教えると言っている.

やはり日本人たちは仕方ない野蛮的宴心の根性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言う気がする. Ishiharaサンタで日本道教道知事の言葉のように日本人たちの内面にいっぱいになった汚い我欲(我慾)の俗物根性は今度スナミより加えた災いでも洗い出すことができないようだ. 

日本はまだ因果応報を悟ることができない. もしかしたら日本列島が沈んでもあの時になると変わるのか分からない.

が渦中にも独島が自分たち領土だと怪変をしゃべる図図しい行為を見ながら彼らとは共存や平和と言う(のは)単語が全然似合わないようでやや苦い心を隠すことができない.



 
2011年 4月 3日縛繩学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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