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일진회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입니다.

 

1905년 11월 6일 외교권의 이양을 제창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하여 대중을 향한 매국적 정체를 들어냅니다.

 

1909년 12월 4일 열린 임시총회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아 “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하여 한일 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인 스스로가 합방을 원하고 있다는 형식상의 합법성을 날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이 선언을 격렬히 비판하였고, 중추원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日帝의 비호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국민적인 분노가 확산되는 가운데 탈퇴하는 일진회원들이 속출하였으며,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 등은 일본헌병대에 신변을 보호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일진회는 日帝의 한국 병탄을 위하여 매국적 소임을 다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日帝가 한국을 강점하여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이해 9월 26일 해체되었습니다.

 

 

일진회는 창립 초부터 日帝의 군사기밀비를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 육군성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받은 보조금 등이 주요 활동자금이었습니다.

 

일진회의 규칙에는 고문제도가 없지만, 실제로는 일본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의 배후조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일진회를 세운 창립자 중 한명인 송병준에 대해 알아봅니다.

 

 

 

송병준 [ 宋秉畯 ]

 

출생 - 사망1858년(철종 9) ~ 1925년

성격 // 무신, 관료, 정치가, 친일파

출신지 // 함경남도 장진

본관 // 은진(恩津,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대표관직(경력) // 일진회 총재, 중추원고문, 백작(일본정부),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일본정부)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밀령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도리어 그의 인품에 공명해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通謀)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일본군과 같이 청국까지 종군하였다가 그 해 4월 서울에 돌아온 뒤, 전쟁의 형편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전되는 것을 보고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였다.

 

일본이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서두르자, 이 공사의 노역(勞役)에도 거의 무료로 일진회원들을 내보내어 적지 않은 인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때 송병준은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동원해 고종의 양위를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으며, 어전회의에서도 이를 강요하였다. 그 뒤 이완용과 결탁해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중추원고문을 역임하였다.

 

1909년 2월 순종의 지방순행 때 수행하다 시종무관 어담과 충돌하여, 마침내 내부대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곧이어 일진회 총재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저돌적인 친일주의자의 행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른바 한일연방안(韓日聯邦案)에 관해 직접 유세를 하고 다니면서, 일본수상 가쓰라에게 1억원이면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기겠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여 전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이용구와 함께 이른바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비롯해 「상소문(상주문)」·「상통감서(上統監書)」·「상내각서」 등을 발표하며 반민족적인 매국 망동에 광분하였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일본 정부로부터 매국의 공로로 자작(子爵)을 받고 또한 많은 양의 은사금까지 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이어 1920년에는 백작(伯爵)이 되었다. 1925년 죽은 뒤 일본 천황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 추서되었다.

 

 

—————————————————————————————

 

1억원을 주면 나라를 팔겠다고 하는 정도만으로도

 

일진회와 친일파는 정상이 아니죠.

 

이 사람들은 개화파도 아니고

 

돈이라면 나라도 팔 수 있는 매국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진회의 활약은 이것 말고도 더 어처구니 없는 발언으로

 

꾸준히 국민적 지탄을 받았고

 

한국인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아 일본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며 조선의 내정에 간섭을 할 수 있도록 강압적으로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기 10일 전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발언하였습니다.

 

=>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 당하는데, 국가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

 

 

당시 한국인의 민심을 알고 싶다면 1907년 國債報償運動에 대해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일본이 조선에 빌려준 차관(款),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벌어진 전국적인 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日帝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宋秉畯)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 공작으로 인해 좌절된 운동입니다.

 

 

송병준은 日帝로부터 작위와 훈장과 포상금을 받은 몇 안되는 사람으로 日帝 확장의 공신이자 자랑거리라고 보여지네요.


一進会はどんな団体か?

一進会は露日戦争が真っ最中だった 1904年設立されました.

 

日本が拷問政治だけで韓国政府を干渉することに満足しないで親日的民意(民意)が必要だと思って組織した団体です.

 

1905年 11月 6日外交権の委譲を提唱した, いわゆる <一進会宣言で>を発表して大衆を向けた売国的正体を持ち出します.

 

1909年 12月 4日開かれた臨時総会で日本の運勢を受けて民族の幸福と福祉のために韓日両国は合邦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いわゆる <一進会合邦声明(名前)で>を発表しました.

 

これは韓国人自らが合邦がほしいという形式上の合法性を捏造するためのことでした.

 

 当時 ≪大韓毎日新報(大韓毎日申報)≫はこの宣言を激烈に批判したし, 中枢原義場キムユンシック(金允植) などは宋ビョンジュン・利用区の処刑を政府に建議したが 日帝の美幌志を果たすことができません.

 

 国民的な怒りが拡散する中に脱退する日辰会員たちが続出したし, 利用区とUchidaリョヘイなどは日本憲兵隊に 身近を保護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までに至ったし

 

 一進会は 日帝の韓国併呑のために売国的牛なのを終えたが, 1910年 8月 29日 日帝が韓国を強点して利用価値が消えると理解 9月 26日解体されました.

 

 

一進会は創立超から 日帝の 軍事機密費を受けて活動したし

 

日本陸軍省と痛感伊藤博文(伊藤博文)から受けた補助金などが主要活動資金でした.

 

一進会の規則には顧問制度がないが, 実際では日本軍部で派遣された日本人たちに構成された顧問の背後操作を受けました.

 

 

それでは一進会を立てた創立者の中で一人である 宋ビョンジュンに対して調べます.

 

 

 

宋ビョンジュン [ 宋秉〓 ]

 

生まれ - 死亡1858年(哲宗 9) ‾ 1925年

性格 // 武臣, 官僚, 政治家, 親日派

出身地 // 咸鏡南道じゃン・ジン

本館 // 恩津(恩津, 今の忠清南道論山)

 

代表官職(経歴) // 一進会総裁, 中枢院顧問, 伯爵(日本政府), ゾングサムウィフンイルドングウックイルドングスザング(日本政府)

 

1884年甲申の変後日本に亡命中のキム・オッキュン(金玉均)を暗殺しなさいというミルリョングを受けて日本に渡ったが返って彼の人柄に共鳴して同志になった. 1886年帰国後キム・オッキュンと通謀(通謀)一疑いに投獄された.

 

日本軍と一緒に清国まで従軍してからその年 4月ソウルに戻って来た後, 戦争の都合が日本に有利に先に進むことを見て日本軍を背景で政治活動をはかった.

 

日本が京義線鉄道敷設工事を急ぐと, この工事の労役(労役)にもほとんど無料で日辰会員たちを出して少なくない人名がけがをするとか死んだ.

 

この時宋ビョンジュンは利用区とともに一進会を動員して高宗の譲位を先頭に立って指揮したし, 御前会議でもこれを強要した. その後李完用と結託して農商勉強代わり・内部代わり・中枢院顧問を歴任した.

 

1909年 2月従順の地方巡行の時遂行して侍従武官漁エ繧ニ衝突して, 遂に内部代わりで退いた.

 

しかしまもなく一進会総裁になった. その後また日本に渡って猪突的な親日主義者の行為を遺憾無く発揮した.

 

いわゆる韓日連邦の中(韓日連邦案)に関して直接遊説をして通いながら, 日本受賞がスラに 1億ウォンなら我が国を日本に売ってしまうと憚りなく言って全国民の指弾を受けた.

 

彼は利用区とともにいわゆる 「一進会合邦声明(名前)で」を含めて 「上書(サングズムン)」・「上通感で(上統監書)」・「サングネガックで」 などを発表して反民足跡な売国盲動に狂奔こんにちはだった.

我が国を強制に併呑した日本政府から売国の功労で自作(子爵)を受けてまた多い量の恩賜金まで受けた.

 

朝鮮総督府中枢院顧問に引き続き 1920年には伯爵(伯爵)になった. 1925年死んだ後日本天皇からゾングサムウィフンイルドングウックイルドングスザング(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が追書された.

 

 

----------------------------------------------------------

 

1億ウォンをくれると国を売ると言う位だけでも

 

一進会と親日派は正常ではないよ.

 

が人々は開化派でもなくて

 

お金なら 私でも売ることができる売国奴だと言うのです.

 

 

一進会の活躍はこれではなくてもっと出たらめな発言で

 

倦まず弛まず国民的指弾を受けたし

 

朝鮮人たちから身近の脅威を 受けて 日本軍の保護を受けました.

 

 

日本が朝鮮の外交権を剥奪して保護国で作って朝鮮の内政に干渉が できるように強圧的に締結した乙巳條約(乙巳條約)を結ぶこと 10日前には

 

韓国の外交権を日本に委任することで 国家独立を維持することができるし 福を享受することができる.と発言しました.

 

=> 外交権を日本に縛打にあうのに, 国家が独立を維持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論理

 

 

当時朝鮮人の民心が分かりたければ 1907年 国債報償運動に対して調べるのを勧めます.

 

日本が朝鮮に貸してくれた 次官(款), 1300万ウォンを 返すために起った全国的な運動で

 

国債保償運動が全国的に拡散すると 日帝はこの運動を極力弾圧禁止したし,

 

宋ビョンジュン(宋秉〓) などが指揮した売国団体である 一進会の攻撃と統監府で国債補償期成会の幹事の梁起鐸を補償金横領という濡れ衣を着せて拘束するなど邪魔工作によって挫折された運動です.

 

 

宋ビョンジュンは 日帝から作為と勲章と褒賞金を受けた数少ない 人で 日帝 拡張の 功臣と同時に自慢の種だと見えますね.



TOTAL: 959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5597 Kpop 韓가수 2ne1 미국, itune차트 2위. WarCriminal_Jap 2011-07-30 1875 0
5596 노예. WarCriminal_Jap 2011-07-30 970 0
5595 실제 타케시마 WarCriminal_Jap 2011-09-06 1845 0
5594 한자 표기가 소멸? 朔000 2011-07-30 1508 0
5593 한국의 숨기고 싶은 너무 비참한 역사....... eastsea11 2011-07-30 1404 0
5592 미국·하와이와 일본·한국의 병합 비....... eastsea11 2011-07-29 1399 0
5591 대만 영화 「세젝크바레」―베네치아....... cosbystudio2 2011-07-29 1179 0
5590 안녕하세요, 일본에서 우메보시는 언....... krisunaa1 2011-07-28 1353 0
5589 ▲국 모는 무엇? しゃおこーbe 2011-07-28 1935 0
5588 한국의 돌짐승(1) scarecrow0913 2011-07-27 1334 0
5587 일진회는 어떤 단체인가? gimel87 2011-07-27 1486 0
5586 열도의 다양한 취향 ( ′-`) y sarutrainer 2011-07-26 1361 0
5585 한국적 불고기 동영상 朔000 2011-07-26 1327 0
5584 강제 병합과 울부짖는 조선인은 보고 ....... 2011-07-25 1331 0
5583 한국인에 (듣)묻고 싶은 shimesaba 2011-07-25 2392 0
5582 왜구 전통 문화 WarCriminal_Jap 2011-07-24 1190 0
5581 한일역사공동위원회 합의내용 gimel87 2011-07-24 1984 0
5580 민비에 대해 조사해 본 sumatera 2011-07-24 2120 0
5579 명성황후 시해 日낭인 후손들 ‘110년....... gimel87 2011-07-23 1386 0
5578 조선의 경복궁으로 눈을 정화 gimel87 2011-07-23 129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