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어떤 모순점을 안고 있기에, 교과서를 수정해야 하는 것인가?

첫째, 임나일본부의 이름의 모순부터 생각해 보자. 일본은 7세기 이전에는 국호가 없었다. 단지 일본으로 불렸을 뿐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 말에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을 한다. 따라서 4세기 말에 한반도에 세워졌다는 통치기관에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된 7세기 말 이후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4세기 초에 성립한 야마토 정권이 과연 고작 수 십 년 후인 369년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까지 지배하는 능력이 됐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왜는 아직 제철 기술도 없어서 가야에서 철광을 수입하여 철제 투구와 철제 무기를 만드는 실정이었고 4세기까지는 말도 탈 줄 몰랐다. 5세기부터 겨우 말을 사육하여 타게 됐다. 이러한 왜가 어떻게 말을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며, 철제 무기를 다량 소유하고 있는 가야를 정복할 수 있을까?

셋째, 고구려는 과연 야마토 정권의 굳센 저항에 부딪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복할 수 없었을까? 당시 왜는 백제의 요청에 의해 출병한 원군이었을 뿐이다. 주력 부대는 어디까지나 백제군이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의하면, 왜군은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의해 괴멸당하며, 패퇴일색이었다. 대표적인 기록이 광개토대왕의 경자년 전투에 대한 다음의 비문이다.

(영락)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일본인는 위축되어 궤멸됐다…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는 똑같이 광개토대왕의 신묘년 기사를 해석과 함께 소개하여 광개토대왕의 군대와 싸운 군대가 임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야마토정권의 군대인 것처럼 서술했다. 그러나 단지 “왜”로만 표현되어 있는 군대가 과연 야마토 정권이 보낸 군대인가 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또한 신묘년 조를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있는 데도, 여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비문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제시하고 있다.

넷째, 임나일본부가 만약 가야를 200여 년간 통치했다면, 가야 땅에서도 왜와 관련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일례로 낙랑이 수백 년간 지배했던 평안도 지역에서는 중국 한나라 지배계층의 사치품들이 많이 발굴됐다. 그러나 가야 땅에서 나오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가야가 자체적으로 발전해 나간 가야적인 유물들만 출토되고 있다.

다섯째, 가야는 예로부터 철의 왕국이었다. 지금도 가야 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유물은 철로 된 투구, 갑옷, 철제검, 철정이라는 철덩어리들이다. 특히 환두대도와 함께 철제 갑옷과 철제미늘쇠(돌출된 부분으로 달리는 적의 기병을 끌어 떨어트리는 무기)가 발굴되는 것은 가야가 군사적으로도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1920년대부터 일본 학자들에 의해 부인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학자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로, 그는 임나일본부를 기록하고 있는『일본서기』가 얼마나 설화적 이야기로 가득찬 사서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인 고증을 통해 입증했다. 그 후로부터 최근까지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기관이 아니라, 왜 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한 외교적인 성격을 띤 사절단, 혹은 왜인들을 초빙한 가야 여러 나라들의 외교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대표적인 연구주자는 북한의 김일성대 총장을 역임한 김석형과 언론인 출신의 사학자인 천관우를 빼놓을 수 없다. 김석형은 일본 측이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로 주장하는 칠지도에 대한 해석을 백제가 왜에 하사한 것으로 뒤집음으로써 한국 사학계의 반격을 선도했고, 천관우는 임나 기록의 주체를”왜”가 아닌”백제”로 해석하여, 왜 계통의 용병을 거느린 백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북부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을 내놓아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문제가 되는 광개토왕비의 신묘년 기사를 일본 군부가 석회를 발라 위조했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그 후 이 주장에 대해 한중일 역사학계가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치면서 논란의 열기는 현재까지 식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 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허구적인 학설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에도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으며, 여러 가지 정황과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도 임나일본부설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계기로 양국 정상간 합의에 따라 2002년 출범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8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합동심포지엄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상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任那日本府説がファンタジーである理由

それなら任那日本府説の問題点は何だろう? どんな矛盾店を抱いているから, 教科書を修正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か?

第一, 任那日本府の名前の矛盾から考えて見よう. 日本は 7世紀以前には国号がなかった. ただ倭国と呼ばれただけだ. ¥"日本¥"という国号は 7世紀末に初めて四書に登場をする. したがって 4世紀末に韓半島に立てられたという統治機関に ¥"日本¥"という言葉が入って行くことはできない. これは誰かによって日本という国号が使われた 7世紀末以後に任那日本府という機関名前を作り出したことだと見られる.

第二, 4世紀初に成り立った大和政権が果してわずか数十年後の 369年海を渡って韓半島南部まで支配する能力がドエッウルカを考えて見られる. 当時なぜはまだ製鉄技術もなくて伽揶で鉄鉱を輸入して鉄製かぶとと鉄製武器を作る実情だったし 4世紀までは馬も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5世紀からやっと言葉を飼育して乗るようになった. このようななぜがどんなに言葉を自由自在で乗って通って, 鉄製武器を多量所有している伽揶を征腹することができるか?

第三, 高句麗は果して大和政権の屈強な抵抗にぶつかって韓半島南部地域を征腹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だろうか? 当時なぜは百済の要請によって出兵した援軍だっただけだ. 主力部隊はあくまでも百済軍だった. そして広開土大王の碑文によれば, 倭軍は広開土大王の軍隊によって壊滅されて, 敗退一色だった. 代表的な記録が広開土大王の庚子年戦闘に対する次の碑文だ.

(ヤングラック)10年庚子に歩兵と騎兵 5のみを送って, 新羅を救援するようにした.(…)官軍が早いで外敵が退くので, 後を急に追撃してイムナがラの終発性に至った. 性がすなわち帰順して従うので, 巡斡病を置いて守るようにした, 新羅の座り込みを攻略したら倭寇は萎縮して潰滅された…

フソシャとジユシャ教科書はまったく同じく広開土大王の神妙年記事を解釈とともに紹介して広開土大王の軍隊と争った軍隊が任那を基盤としている大和政権の軍隊であることのように敍述した. しかし団地 ¥"なぜ¥"にだけ表現されている軍隊が果して大和政権が送った軍隊かと言うことは確かではない. また神妙年締める取り囲んで多くの主張があることに, ここに対する言及は全然なしに碑文の内容を恣意的に解釈して提示している.

第四, 任那日本府がもし伽揶を 200余年間統治したら, 伽揶地でもなぜと係わった遺物が溢れ出なければならない. 一例でナクランが数百年間支配した平安道地域では中国漢支配階層の奢侈品たちがたくさん発掘された. しかし伽揶地から出ることは長期間にかけて伽揶が自主的に発展して行った伽揶的な遺物たちだけ出土されている.

五番目, 伽揶は昔から鉄衣王国だった. 今も行くと地から溢れ出ている遺物は鉄路になったかぶと, よろい, チォルゼゴム, 鉄挺というチォルドングオリドルだ. 特にファンドデドとともに鉄製よろいとチォルゼミヌルスェッ(突き出された部分で走る時の騎兵をひいてトルオトリは武器)が発掘されることは伽揶が軍事的でも強い国だったということを反証するのだ.

任那日本府説はもう 1920年代から日本学者たちによって奥さんされ始めた. その代表的学者が使ってソキチ(津田左右吉)で, 彼は任那日本府を記録している『日本書紀』がいくら説話的話でいっぱいになった四書かと言うことを論理的な考証を通じて立証した. その後から最近まで日本学者たちは任那日本府の性格を支配機関ではなく, どうして王権が韓半島の先進文明を積極収容するために任那に派遣した外交的な性格を帯びた使節団, あるいは倭人たちを招いた伽揶多くの国々の外交機関で認識している.

韓国史学係で任那日本府と係わった代表的な研究与えようという北朝鮮の金日成大総長を歴任した金錫亨と報道人出身の史学者であるチォングァンウを漏らすことができない. 金錫亨は日本側が任那日本府説の決定的証拠で主張する漆紙島に対する解釈を百済が倭に下賜したことで覆すことで韓国史学係の反撃を善導したし, チォングァンウは任那記録の主体を¥"なぜ¥"ではない¥"百済¥"で解釈して, どうして系統の用兵を従えた百済が 369年から 562年まで北部伽揶地域を支配したという学説を出して学界に新鮮な衝撃を与えた. 在日史学者李進ヒは問題になる広開土王碑の神妙年記事を日本軍部が石灰を塗って偽造したという主張を出したし, その後この主張に対して韓中日歴史学界がそれぞれ異なる主張を広げながら論難の熱気は現在まで冷えていない.

一言で韓国史学係では任那日本府説は到底認めることができない虚構的な学説で考えられている. 三国史記はもちろん三国有史にも全然挙論されていないし, さまざまな情況と考古学籍証拠で見る時も任那日本府説は認めら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だ.

2001年日本の歴史教科書歪曲事態をきっかけで両国首脳間合意によって 2002年出帆した韓日歴史共同研究委員会は 2008年 12月東京で開かれた合同シンポジウムで, 任那日本府説は事実上歴史的事実ではないという結論に到逹した事実を公式的に発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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