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근대화를 목표로 한 동아시아 3국의 「갈림길」
http://www.chosunonline.com/news/20090329000004
【신간】백영서, 박·분, 미야지마 히로시저 「동아시아 근대 이행의 3 분기」(창비)
【신간】캔·지나저 「문명 제국으로부터 국민 국가에」(창비)

 「무엇이기 때문에 한국은 멸망해 아편 전쟁 후에 대국의 중국이 몰락했는데 반해, 3국 중(안)에서 가장 지각하고 있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완수해 오늘과 같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는가」
 원로급의 사회학자 김·즐요프 전 고려대 총장은, 자전적 회고록 「장정」으로, 19 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한·중·일이 엇갈리는 운명에 대한 관심이 스스로를 역사학으로 이끌었다고 적었다.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 한국은 완전하게 실패한 나라, 중국은 반실패한 나라, 라고 하는 견해가 오랫동안 당연히 받아 들여져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이러한 서적은, 한·중·일 3국이 개항으로부터 1910년, 11년즈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비교한 「근대의 갈림길」기획(전4권)의 일부다.
 백영서(페크·용소) 연세대교수는 우선, 일본을 우등생, 한국을 열등생이라고 보는 성적표는 타당한가, 라고 의문을 나타냈다.일본은 성공했는데 중국과 한국은 실패했다, 라고 하는 해석은 19 세기의 패러다임(paradigm)에 지나지 않는, 이라고 하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3국이 개항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이 어떻게 달라, 왜 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라고 하는 점에는 여전히 흥미를 돋워진다.
 캔·지나 경북대 교수는, 우선 아편 전쟁과 개항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 중국이 상반되는 대응을 비교했다.일본의 막부 지도부는, 1842년의 아편 전쟁으로 영국이 압도적 군사력을 가지고 청을 넘어뜨려, 그 결과, 청이 영토의 일부를 영국에 할양 했다고 하는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해, 위기 의식을 높였다.막부는 서양의 선박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해, 서양식의 총의 도입이나 증기선의 수입 등, 개혁에 착수했다.조선의 정부도 아편 전쟁에 계속해 관심을 대어 정보를 수집했지만, 영국의 압도적 우위와 청의 패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정보의 자의적 해석과 낙관론 때문에, 위기 의식이 높아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정보를 입수하는 루트가 차이가 났기 때문에, 라고 하는 해석이 유력하다.조선은 제비 행사 경유로 전쟁의 정보를 입수해, 그 제비 행사는, 중화 의식에 근거해 청의 패배를 왜곡(원극)해 전달하는 중국의 관보에 주로 의존했다.그 한편으로 일본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폴의 영문자 신문을 인용한 네델란드의 서적이나, 전투 지역에 가까운 남동 지역의 중국 상인의 보고서를 종합 해,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전투의 실태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고 설명되고 있다.청의 조정이 아편 전쟁으로 영토를 할양 해, 한층 더 관세 자유권을 건네주어 영사 재판권을 설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도, 전쟁의 패배를 심각한 위기와 인식할 수 없었다, 라고 하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강 교수는, 중국이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려는 풍조가 사회 지배층에 없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기술했다.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개혁이라는 비교는, 흥미롭다.중국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한 것에 대해, 일본은 제도적으로 민간투자를 장려하는 모델을 선택했다.중국에서는, 양 츠토무파 관료가 양무계 기업의 이윤 확보를 위해 민간기업의 설립을 허가하려고 하지 않고, 시장을 독점했다.철도에 관해서 말하면, 청은 1876년에 영국의 회사가 부설한 샹하이-오송간의 철도를 운행했지만, 풍수에 맞지 않는등의 이유로 반대, 곧바로 철거했다.일본은 1872년에 도쿄-요코하마간의 철도를 영국의 기술원조를 받으면서 자력으로 부설한 이후, 1900년까지 총연장 7000킬로의 철도를 깔았다.개항 당시 , 중국 경제는 자력으로 근대화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태평천국의 란을 진압한 후의 1870년대부터 상대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던 것에 의해 위기 의식을 약한, 경영의 혁신이나 근대적 기술 의 도입이라고 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고 설명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맨 먼저에 부국 강병을 달성한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자멸해, 열강의 침략으로 만신창이(창의)가 된 중국이 침략국이라고 하는 역사적 부담 없고, 제3 제국은 물론 세계의 지도자의 자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보다 긴 눈으로 근대 100년사를 성찰 해야 한다는, 저자등의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세계 제 13위의 경제대국을 목표로 한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해서도 같이다.조선과 일본의 근대사를 각각 분석한 「근대와 식민의 상극」(김·돈노저),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햄·돈쥬저)도 동시에 출판되었다.
김·기쵸르 기자

【사견】

결국의 곳, 최종적으로 일본을 깍아 내리는 논조에 가지고 가지 않으면

물건이 팔리지 않는 것인지 응···.

정보의 정확함을 확인하는 곳자리, 외교라고 하는지,

국가 운영의 초보의 초보일 것이다에.

중화 인민 공화국이 상임이사국이 되었던 것이다는,

당시의 중화 민국이 유엔 탈퇴했기 때문이었고.(이론 있을 것이다지만 대략으로)

한국이나 중국도, 너덜너덜이 되었음이 분명한 일본으로부터의,

유상·무상의 기술원조·경제 원조를 받은 일은,

이 서평내는 겉(표)기록되지 않은 것 같아.


【たぶん】東アジアの分岐路【書評?】

近代化を目指した東アジア3国の「分かれ道」
http://www.chosunonline.com/news/20090329000004
【新刊】白永瑞、パク・フン、宮島博史著『東アジア近代移行の3分岐』(創批)
【新刊】カン・ジナ著『文明帝国から国民国家へ』(創批)

 「何ゆえに韓国は滅び、アヘン戦争後に大国の中国が没落したのに反し、3国の中で最も遅れていた日本が明治維新を成し遂げ、今日のような強い国になれたのか」
 元老級の社会学者キム・ジュンヨプ元高麗大総長は、自伝的回顧録『長征』で、19世紀後半における韓・中・日のすれ違う運命に対する関心が自らを歴史学に導いたと記した。日本は近代化に成功した国、韓国は完全に失敗した国、中国は半分失敗した国、という見方が長い間当然のように受け入れられてきた、というのは事実だ。これらの書籍は、韓・中・日3国が開港から1910年、11年ごろに至るまで、いかにして互いに異なる道を歩むことになったのかを比較した「近代の分かれ道」企画(全4巻)の一部だ。
 白永瑞(ペク・ヨンソ¥)延世大教授はまず、日本を優等生、韓国を劣等生と見る成績表¥は妥当なのか、と疑問を呈した。日本は成功したのに中国と韓国は失敗した、という解釈は19世紀のパラダイムに過ぎない、というわけだ。だがこうした問題提起にもかかわらず、韓・中・日3国が開港と近代化を推進する過程がどう異なり、なぜ相異なる結果をもたらしたのか、という点には依然として興味をそそられる。
 カン・ジナ慶北大教授は、まずアヘン戦争と開港をめぐる日本と韓国、中国の相反する対応を比較した。日本の幕府指導部は、1842年のアヘン戦争でイギリスが圧倒的軍事力をもって清を倒し、その結果、清が領土の一部をイギリスに割譲したという情報を正確に入手し、危機意識を高めた。幕府は西洋の船舶に対する敵対政策を撤回し、西洋式の銃の導入や蒸気船の輸入など、改革に着手した。朝鮮の政府もアヘン戦争に引き続き関心を寄せ、情報を収集したが、イギリスの圧倒的優位と清の敗戦という事実を正確に伝えられなかった。情報の恣意的解釈と楽観論のため、危機意識が高まらなかったというわけだ。
 こうした違いの原因は、情報を入手するルートが異なっていたから、という解釈が有力だ。朝鮮は燕行使経由で戦争の情報を入手し、その燕行使は、中華意識に基づき清の敗北を歪曲(わいきょく)して伝達する中国の官報に主に依存した。その一方で日本は、当時イギリスの植民地だったシンガポールの英字新聞を引用したオランダの書籍や、戦闘地域に近い南東地域の中国商人の報告書を総合し、事態を把握したため、戦闘の実態をより正確に知ることができたと説明されている。清の朝廷がアヘン戦争で領土を割譲し、さらに関税自主権を渡し領事裁判権を設定する不平等条約を締結しても、戦争の敗北を深刻な危機と認識できなかった、という点も指摘されている。カン教授は、中国が情報を入手しなかったというよりは、情報を収集し分析しようという風潮が社会支配層になかったと見なければならない、と記述した。
 中国の洋務運動と日本の明治維新以降の近代化改革との比較は、興味深い。中国が国家主導の産業化を推し進めたのに対し、日本は制度的に民間投資を奨励するモデルを選んだ。中国では、洋務派官僚が洋務系企業の利潤確保のため民間企業の設立を許可しようとせず、市場を独占した。鉄道に関して言えば、清は1876年にイギリスの会社が敷設した上海−呉松間の鉄道を運行したが、風水に合わないなどの理由で反対、すぐに撤去した。日本は1872年に東京−横浜間の鉄道をイギリスの技術援助を受けつつ自力で敷設して以降、1900年までに総延長7000キロの鉄道を敷いた。開港当時、中国経済は自力で近代化できる条件を備えていたが、太平天国の乱を鎮圧した後の1870年代から相対的安定を保っていたことにより危機意識を弱め、経営の革新や近代的技術の導入といった新しい突破口を見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説明されている。
 東アジアで真っ先に富国強兵を達成した日本が侵略戦争で自滅し、列強の侵略で満身創痍(そうい)となった中国が侵略国という歴史的負担なく、第3諸国はもちろん世界の指導者の座を見下ろしていることを考えると、より長い目で近代100年史を省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著者らの問題提起は妥当だ。世界第13位の経済大国を目指した大韓民国の成就についても同様だ。朝鮮と日本の近代史をそれぞれ分析した『近代と植民の相克』(キム・ドンノ著)、『天皇制近代国家の誕生』(ハム・ドンジュ著)も同時に出版された。
キム・ギチョル記者

【私見】

結局の所、最終的に日本を貶める論調にもっていかないと、

モノが売れないのかねえ・・・。

情報の正確さを確認する所なんざ、外交というか、

国家運営の初歩の初歩だろうに。

中華人民共和国が常任理事国になったのだって、

当時の中華民国が国連脱退したからだったし。(異論あるだろうけど大筋でね)

韓国も中国も、ボロボロになったはずの日本からの、

有償・無償の技術援助・経済援助を受けた事は、

この書評内じゃ表¥記されてないんだよな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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