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 미국인 선교사의 탄식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학살당한 한국인은 3469명이고, 이를 전후하여 3, 4개월 동안에 걸쳐 살해된 한국인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서 약 5천여명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고,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지켜본 제임스 푸트 선교사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間獐岩洞)에 갔더니 촌인(村人)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倭兵)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했다.” 나도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일본군 병사 17명, 일본 경찰관 2명 및 한국인 경찰관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내다가 죽인 후 처를 불러내어 사자(死者)의 경력을 말라하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을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또 이미 죽여 버린 시체를 촌인을 시켜 한곳에 모아뫃고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버렸다.”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만주 훈춘(琿春)에서 있었던 훈춘사변(琿春事變)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간장암동(間獐岩洞)의 한국인 학살 참변은 일본 측의 기록인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 간도출병사(間島出兵事)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獐岩洞)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사살하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피등(彼等) 선교사는 익(翌) 31일 해지(該地)에 가서 사진기(寫眞機)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 조위금 2백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 건(件)은 학살사건으로서 행여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훈춘사건(琿春事件) 조작

일제(日帝)는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만주 일대에서 점차 활발해진 한국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항일독립군을 토벌할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剿討計劃)”이란 것을 수립했다. 간도지방에는 3.1반일시위운동 후 수많은 한국의 열혈청년들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의지를 안고 찾아들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국내보다는 비교적 항일투쟁(抗日鬪爭)이 쉽고 많은 동포가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신흥강국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어서 연해주에 이송되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를 입수하기가 가능하고, 또 러시아 적(赤), 백(白) 양군의 무기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애국 청년이 이곳으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의 진지가 형성되었다. 당시 조선반도와 만주의 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무력항쟁(武力抗爭)을 전개하고 있었다. 각 독립군들은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 청년들을 맞아들여 병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모금된 국민들의 의연금(義捐金)으로 각종 군사장비와 최신식 총기(銃器) 및 탄약(彈藥)을 구입하여 전투능력을 향상시켰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한국의민단(韓國義民團) 등 여러 독립군 부대는 수시로 조선반도와 만주의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 일본 군대 및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 관공서(官公署)를 습격, 파괴하고 친일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제(日帝) 당국은 중국 정부를 위협하여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번번이 실패하자 일제는 정규군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여 일거에 한국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것이 1920년 10월 일본군이 만주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조작한 훈춘사변(琿春事變)이다.

일제(日帝)는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다. 10월 2일 새벽, 일제에 매수된 장강호(長江好)의 마적단 4백여명은 야포 3문을 앞세우고 훈춘을 공격하였다. 당시 훈춘에는 일본 총영사관 산하의 경찰과 총독부 파견 헌병대 및 함경북도 경찰 등에 소속된 50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마적들은 일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무난히 훈춘성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 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때 마적들에게 중국군 병사 70여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하였고 일본인 9명도 피살되었을뿐만 아니라, 미리 피신하여 빈집이 된 일본 총영사관 건물도 마적들에 의해 소각되었다.

이렇게 훈춘사변을 야기한 일제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주둔군(朝鮮駐屯軍) 제19사단과 제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 만주사파견군과 관동군(關東軍) 등에서 총 5만명의 병력을 차출, 만주일대로 투입하였다. 이 군대는 기림지대(磯林支隊), 목림지대(木林支隊), 동지대(東支隊)로 각각 편성되어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단계는 작전개시일로부터 1개월내에 독립군을 섬멸하고 그 근거지를 박멸하는 것이며, 2단계는 1단계 작전 이후 1개월내에 민간에 잠복할 독립군의 잔여 병력과 비무력독립운동(非武力獨立運動) 관련자를 철저히 색출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를 완전히 제가한다는 전략이었다. 10월 6일부터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은 소탕작전에 실패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한 한국 독립둔은 안전지대로 이미 피신하였거나 피신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1만 병력이 오히려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전사자만 1천여명이 나오는 참패를 당했으며, 그 뒤 독립군들은 소련과 만주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在滿)한국인에 대하여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간도 주민들에게 무차별로 보복

한국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치욕적인 연패(連敗)를 당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학살작전(韓人虐殺作戰)에 나섰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총과 창으로 살해하였으며,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하여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1920년 말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학살이 반복되었고, 그 후에도 잔류부대가 다음해 3월까지 학살과 强姦을 계속하였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간장암동(間獐岩洞) 주민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해 10월 30일 쓰즈모토 대위가 인솔한 일본군의 토벌대원 77명이 용정촌(龍井村)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국인 기독교 신자 마을인 간장암동을 포위했다. 이들 일본군은 마을 주민을 교회당에 집결시킨 후 40대 이상의 남자 28명을 포박지어 꿇어앉힌 다음 아직 타작하지 않은 조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워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일본군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모두 칼로 베어 몰살시켰다. 일본군이 돌아간 뒤 가족들은 시체를 장사지냈다. 그리고 5~6일 후에 그 일본 군인들이 다시 마을을 습격하여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헤친 후 시체를 한데 모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은 위협에 못이겨 언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조짚단을 시체 위에 쌓아놓고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버렸다. 이렇게 이중으로 학살 당한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연길현(延吉縣) 의란구(衣蘭溝) 남동(南洞)마을에서의 학살도 이에 못지않았다. 이 마을은 이씨(李氏) 성의 30여호가 사는 동족촌(同族村)이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이씨 성이 아니라고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을 몰살시켰다. 대부분 총을 쏘아 죽이거나 총탄이 아깝다면서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어느 4형제는 함께 밧줄에 묶인 채 불타는 가옥에 던져지기도 했다. 또 수십명의 일본군은 12월 6일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연길현 구수아(九水阿) 신흥동으로 끌고 가 독립군의 은신처를 대라고 심문하였는데, 얼굴 가죽을 몽땅 칼로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육괴(肉塊)로 만들기도 했다. 연길현 팔도구(八道溝)에서는 어린 아이 4명을 모두 칼로 자살(刺殺)했고, 같은 현 약수동(藥水洞)에서는 피살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부녀자를 체포하면 으레 强姦

한 후 살해하는가 하면 2, 3세 되는 어린이를 창끝에 꿰어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우치다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2명은 같은 해 10월 20일 명동촌(明東村)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明東學敎)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는 역연(歷然) 불령단(不逞團) 양성의 원천으로서 교장 김약연(金躍淵) 및 마진이 두목이고 최근까지 반일운동(反日運動) 근거지였으므로 근저(根底)는 전복, 화(禍)를 끊는다.”라는 구실로 이 학교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이어 명동교회와 교사들의 가옥도 불태웠다.

일본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북간도 지방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봉천성(奉天省) 관내의 서간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중일합동수색(中日合同搜索)”이란 명목하에 우에다 중대와 사카모토 중대에 의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 만행이 저질러졌다. 분만 아니라 관동군 소속의 쓰기야 보병대대와 기병연대에 의하여 북간도 학살과 같은 만행이 자행되었다.

일제의 학살극은 만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그해 4월부터 일제의 포조군(浦潮軍)과 조선주둔군에서 파견된 오소리(烏蘇里) 파견대가 한국인을 참살하였다. 일본군은 4월 4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라스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적군(赤軍)과 충돌하여 그들을 무장해제하고, “불령선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신한촌(新韓村)을 비롯한 한국인 마을을 분탕질하고 반일 민족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총살했다. 이때 일본군은 한국인 학교는 물론 한국인 신문사, 교회 등에 방화하고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된 천도교 지도자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70여명의 한국인을 총살했다. 훈춘사변을 취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장덕준(張德俊)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도 이때 살해되었다.

● 북간도에서 살해된 수만 3600여명

1920년말에 발생한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한국인 참변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일본군은 자료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한국인을 살상한 후 대부분 불에 태웠으며 건물조차도 방화하여 완전히 소실시켜 버렸다. 그러나 훈춘사변 후 북간도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상황을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0월과 11월의 통계만 보더라도 피살된 수가 3664명이며 민가 3520동, 학교 59동, 교회당 19개소, 곡물 5만 9천 970섬이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측의 비밀 자료에 의해서도 그들의 만행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군 “불령선인 토벌대”의 주력인 제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 간도출병사(間島出兵事)에 따르면 피살 494명, 체포 707명, 민가 531동, 학교 25동이 소각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당한 참변은 일제(日帝)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국제여론이나 지역의 특성 등을 감안하여 마적과 손잡고 수많은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살해하고 재물을 분탕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마적의 무리가 변방을 중심으로 들끓었다.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을 때면 특히 심했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방에는 각종 성향의 마적떼가 할거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재물을 탐하는 “순수한” 마적도 있지만 배일(排日)적 성격의 마적단과 일제에 매수되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부일(附日) 마적도 많았다. 물론 한국인들을 동정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마적단도 없지 않았다. 중국 의용군 대장 마점산(馬占山)은 원해 마적 출신으로 녹림(綠林)에 있을 때부터 한국 독립군과 협력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독립군에게 친일 마적단의 존재는 보통 버거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적이 중국이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제의 앞잡이로서 정보와 살육과 재산 탈취를 예사로 하기에 방치할 수도 없었다. 친일 마적 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사람은 장강호(長江好)로 대규모적인 마적단을 이끌고 있었다. 산악지대와 오지 벽지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던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어놓거나 막대한 금품이나 신식 무기를 대여해 주면서 이들을 이용하였다. 장강호는 1920년 5월 2일 무송현에서 흥업단(興業團)에 소속된 김성규, 오제동, 송계원 등을 유인하여 임강현 육도구에서 한족회(韓族會) 회원 7명과 함께 학살하는 등 숱한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었다. 장강호는 조선총독부 관료에게 매수되어 독가스까지 지원받으면서 한국 민족학교인 정몽학교 교사와 학생을 집단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간벽지의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수많은 한국인을 학살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 장군도 1924년 7월 흥경현 이도구(二道溝)에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부하 유경열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친일 마적이 자행한 독립군과 한국인 주민의 피해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산간벽지에서, 주로 심야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중에서 “천락각서(天樂覺書)”라 하여 일본군이 기록해 둔 극비문서를 광복 후 연합군 사령부가 압수하여 미국 워싱턴 내셔널 아케이브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여 그나마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락각서”는 나카노라는 마적이 저지른 악행을 소상히 기록한 자료이다. 나카노는 1920년 조선총독부의 위탁을 받고 장훈에 일동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마적 두목이 되어 장강호와 찬교를 맺고 온갖 나쁜짓을 하였다. 나카노는 장강호와 협력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정(大正) 8년 11월 내가 만주 장춘(長春)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는 사람을 통하여 중국, 조선의 국경 밖에 있는 불령선인 토벌에 마적을 이용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므로, 나는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길림성 봉강현(鳳岡縣)에 있는 장강호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였더니 이를 그는 승낙하고 협의하고 싶다는 뜻을 회답하였다.”

이렇게 총독부 밀정과 만주의 마적 두목이 한 통속이 되어 총독부의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 독립군과 양민에 대한 학살에 혈안이 되었다. 이들의 행적 몇가지를 살펴보자.

“1920년 10월 하순 부하들을 총소집하여 1400명 중에서 가장 정예 500명을 선발하고 잔여 부하는 대기시켜 놓고 나와 장강호는 선발대를 직접 지휘하여 불령선인을 토벌하기 위해 몽강현 청강곤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대개 불령선인의 광복단은 봉천성 안도현 우두산에 있었다. 이곳은 40여호의 한국인과 3호의 만주 토민으로 이루어진 부락으로서 이 부락에 있는 한국인은 모두 광복단원이었으며, 광복단 모임도 종종 여기서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호를 소각하고 광복간 연변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및 부원 3명 아울러 구장(區長), 부구장, 광복단 병졸 등 10여명을 독가스로 죽였다.

11월 5일 아침 전부대가 장강호 및 증야천락(增夜天樂)의 지휘 밑에 안도현성으로 향하였다. 6일 미명에 공격을 개시하여 정오에 이르러 점령했으므로 중국 관병은 모두 현성(縣城)에서 퇴각하였다.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우리 측은 전사자 5명, 중경상자 14명이었으나 중국 관병은 사상자 수가 50여명에 달하였다. 4일간 머물면서 불령선인을 소탕하였다. 광복단 외교부의 병졸 27~28명을 죽이고 증거서류를 압수하여 혜산진 경찰서에 교부하였다. 일본 관헌의 지시에 의하여 21도구(道溝)를 습격하도록 행군하는 도중 22도구 및 23도구에 산재한 불령선인의 가옥 수채를 불지르고 10여명을 총살과 교살로 죽였다. 우리 부대가 그곳을 토벌하여 모두 소탕하고 나니 당시 대안(對岸)에서 우리 부대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관헌 수명이 무장한 채 강을 건너와 독가스를 사용한 현장이며 가옥을 소각한 형적 및 한국인의 상황 등을 임립(林立)하였다.”

1920년 말의 일본군에 의한 서,북간도 한국인사회의 참변은 국내의 학살에 못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제(日帝)로부터 이토록 심한 참변을 당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만주의 마적단에게까지 학살과 약탈을 당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서,북간도 한국인사회의 참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세계 민중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으리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倭敵)처럼 흉악하고 포악한 자는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직이 있던 일이겠는가?”


출처; 사람과 지식 版 “日帝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해설; 김삼웅(金三雄) 친일 반민족행위 문제 연구소 소장.

{이상}


1920‾1921年日本軍の間島朝鮮民間人虐殺蛮行.

● 미국인 선교사의 탄식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학살당한 한국인은 3469명이고, 이를 전후하여 3, 4개월 동안에 걸쳐 살해된 한국인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서 약 5천여명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고,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지켜본 제임스 푸트 선교사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間獐岩洞)에 갔더니 촌인(村人)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倭兵)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했다." 나도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일본군 병사 17명, 일본 경찰관 2명 및 조선인 경찰관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내다가 죽인 후 처를 불러내어 사자(死者)의 경력을 말라하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을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또 이미 죽여 버린 시체를 촌인을 시켜 한곳에 모아뫃고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버렸다."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만주 훈춘(琿春)에서 있었던 훈춘사변(琿春事變)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간장암동(間獐岩洞)의 한국인 학살 참변은 일본 측의 기록인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 간도출병사(間島出兵事)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獐岩洞)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사살하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피등(彼等) 선교사는 익(翌) 31일 해지(該地)에 가서 사진기(寫眞機)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 조위금 2백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 건(件)은 학살사건으로서 행여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훈춘사건(琿春事件) 조작

일제(日帝)는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만주 일대에서 점차 활발해진 한국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항일독립군을 토벌할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剿討計劃)"이란 것을 수립했다. 간도지방에는 3.1반일시위운동 후 수많은 한국의 열혈청년들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의지를 안고 찾아들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국내보다는 비교적 항일투쟁(抗日鬪爭)이 쉽고 많은 동포가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신흥강국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어서 연해주에 이송되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를 입수하기가 가능하고, 또 러시아 적(赤), 백(白) 양군의 무기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애국 청년이 이곳으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의 진지가 형성되었다. 당시 조선반도와 만주의 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무력항쟁(武力抗爭)을 전개하고 있었다. 각 독립군들은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 청년들을 맞아들여 병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모금된 국민들의 의연금(義捐金)으로 각종 군사장비와 최신식 총기(銃器) 및 탄약(彈藥)을 구입하여 전투능력을 향상시켰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한국의민단(韓國義民團) 등 여러 독립군 부대는 수시로 조선반도와 만주의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 일본 군대 및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 관공서(官公署)를 습격, 파괴하고 친일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제(日帝) 당국은 중국 정부를 위협하여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번번이 실패하자 일제는 정규군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여 일거에 한국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것이 1920년 10월 일본군이 만주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조작한 훈춘사변(琿春事變)이다.

일제(日帝)는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다. 10월 2일 새벽, 일제에 매수된 장강호(長江好)의 마적단 4백여명은 야포 3문을 앞세우고 훈춘을 공격하였다. 당시 훈춘에는 일본 총영사관 산하의 경찰과 총독부 파견 헌병대 및 함경북도 경찰 등에 소속된 50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마적들은 일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무난히 훈춘성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 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때 마적들에게 중국군 병사 70여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하였고 일본인 9명도 피살되었을뿐만 아니라, 미리 피신하여 빈집이 된 일본 총영사관 건물도 마적들에 의해 소각되었다.

이렇게 훈춘사변을 야기한 일제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주둔군(朝鮮駐屯軍) 제19사단과 제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 만주사파견군과 관동군(關東軍) 등에서 총 5만명의 병력을 차출, 만주일대로 투입하였다. 이 군대는 기림지대(磯林支隊), 목림지대(木林支隊), 동지대(東支隊)로 각각 편성되어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단계는 작전개시일로부터 1개월내에 독립군을 섬멸하고 그 근거지를 박멸하는 것이며, 2단계는 1단계 작전 이후 1개월내에 민간에 잠복할 독립군의 잔여 병력과 비무력독립운동(非武力獨立運動) 관련자를 철저히 색출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를 완전히 제가한다는 전략이었다. 10월 6일부터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은 소탕작전에 실패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한 한국 독립둔은 안전지대로 이미 피신하였거나 피신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1만 병력이 오히려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전사자만 1천여명이 나오는 참패를 당했으며, 그 뒤 독립군들은 소련과 만주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在滿)한국인에 대하여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간도 주민들에게 무차별로 보복

한국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치욕적인 연패(連敗)를 당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학살작전(韓人虐殺作戰)에 나섰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총과 창으로 살해하였으며,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하여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1920년 말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학살이 반복되었고, 그 후에도 잔류부대가 다음해 3월까지 학살과 强姦을 계속하였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간장암동(間獐岩洞) 주민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해 10월 30일 쓰즈모토 대위가 인솔한 일본군의 토벌대원 77명이 용정촌(龍井村)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국인 기독교 신자 마을인 간장암동을 포위했다. 이들 일본군은 마을 주민을 교회당에 집결시킨 후 40대 이상의 남자 28명을 포박지어 꿇어앉힌 다음 아직 타작하지 않은 조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워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일본군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모두 칼로 베어 몰살시켰다. 일본군이 돌아간 뒤 가족들은 시체를 장사지냈다. 그리고 5~6일 후에 그 일본 군인들이 다시 마을을 습격하여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헤친 후 시체를 한데 모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은 위협에 못이겨 언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조짚단을 시체 위에 쌓아놓고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버렸다. 이렇게 이중으로 학살 당한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연길현(延吉縣) 의란구(衣蘭溝) 남동(南洞)마을에서의 학살도 이에 못지않았다. 이 마을은 이씨(李氏) 성의 30여호가 사는 동족촌(同族村)이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이씨 성이 아니라고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을 몰살시켰다. 대부분 총을 쏘아 죽이거나 총탄이 아깝다면서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어느 4형제는 함께 밧줄에 묶인 채 불타는 가옥에 던져지기도 했다. 또 수십명의 일본군은 12월 6일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연길현 구수아(九水阿) 신흥동으로 끌고 가 독립군의 은신처를 대라고 심문하였는데, 얼굴 가죽을 몽땅 칼로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육괴(肉塊)로 만들기도 했다. 연길현 팔도구(八道溝)에서는 어린 아이 4명을 모두 칼로 자살(刺殺)했고, 같은 현 약수동(藥水洞)에서는 피살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부녀자를 체포하면 으레 强姦한 후 살해하는가 하면 2, 3세 되는 어린이를 창끝에 꿰어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우치다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2명은 같은 해 10월 20일 명동촌(明東村)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明東學敎)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는 역연(歷然) 불령단(不逞團) 양성의 원천으로서 교장 김약연(金躍淵) 및 마진이 두목이고 최근까지 반일운동(反日運動) 근거지였으므로 근저(根底)는 전복, 화(禍)를 끊는다."라는 구실로 이 학교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이어 명동교회와 교사들의 가옥도 불태웠다.

일본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북간도 지방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봉천성(奉天省) 관내의 서간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중일합동수색(中日合同搜索)"이란 명목하에 우에다 중대와 사카모토 중대에 의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 만행이 저질러졌다. 분만 아니라 관동군 소속의 쓰기야 보병대대와 기병연대에 의하여 북간도 학살과 같은 만행이 자행되었다.

일제의 학살극은 만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그해 4월부터 일제의 포조군(浦潮軍)과 조선주둔군에서 파견된 오소리(烏蘇里) 파견대가 한국인을 참살하였다. 일본군은 4월 4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라스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적군(赤軍)과 충돌하여 그들을 무장해제하고, "불령선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신한촌(新韓村)을 비롯한 한국인 마을을 분탕질하고 반일 민족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총살했다. 이때 일본군은 한국인 학교는 물론 한국인 신문사, 교회 등에 방화하고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된 천도교 지도자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70여명의 한국인을 총살했다. 훈춘사변을 취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장덕준(張德俊)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도 이때 살해되었다.

● 북간도에서 살해된 수만 3600여명

1920년말에 발생한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한국인 참변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일본군은 자료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한국인을 살상한 후 대부분 불에 태웠으며 건물조차도 방화하여 완전히 소실시켜 버렸다. 그러나 훈춘사변 후 북간도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상황을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0월과 11월의 통계만 보더라도 피살된 수가 3664명이며 민가 3520동, 학교 59동, 교회당 19개소, 곡물 5만 9천 970섬이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측의 비밀 자료에 의해서도 그들의 만행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군 "불령선인 토벌대"의 주력인 제19사단 사령부의 보고서 간도출병사(間島出兵事)에 따르면 피살 494명, 체포 707명, 민가 531동, 학교 25동이 소각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당한 참변은 일제(日帝)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국제여론이나 지역의 특성 등을 감안하여 마적과 손잡고 수많은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살해하고 재물을 분탕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마적의 무리가 변방을 중심으로 들끓었다.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을 때면 특히 심했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방에는 각종 성향의 마적떼가 할거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재물을 탐하는 "순수한" 마적도 있지만 배일(排日)적 성격의 마적단과 일제에 매수되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부일(附日) 마적도 많았다. 물론 한국인들을 동정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마적단도 없지 않았다. 중국 의용군 대장 마점산(馬占山)은 원해 마적 출신으로 녹림(綠林)에 있을 때부터 한국 독립군과 협력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독립군에게 친일 마적단의 존재는 보통 버거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적이 중국이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제의 앞잡이로서 정보와 살육과 재산 탈취를 예사로 하기에 방치할 수도 없었다. 친일 마적 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사람은 장강호(長江好)로 대규모적인 마적단을 이끌고 있었다. 산악지대와 오지 벽지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던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어놓거나 막대한 금품이나 신식 무기를 대여해 주면서 이들을 이용하였다. 장강호는 1920년 5월 2일 무송현에서 흥업단(興業團)에 소속된 김성규, 오제동, 송계원 등을 유인하여 임강현 육도구에서 한족회(韓族會) 회원 7명과 함께 학살하는 등 숱한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었다. 장강호는 조선총독부 관료에게 매수되어 독가스까지 지원받으면서 한국 민족학교인 정몽학교 교사와 학생을 집단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간벽지의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수많은 한국인을 학살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 장군도 1924년 7월 흥경현 이도구(二道溝)에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부하 유경열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친일 마적이 자행한 독립군과 한국인 주민의 피해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산간벽지에서, 주로 심야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중에서 "천락각서(天樂覺書)"라 하여 일본군이 기록해 둔 극비문서를 광복 후 연합군 사령부가 압수하여 미국 워싱턴 내셔널 아케이브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여 그나마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락각서"는 나카노라는 마적이 저지른 악행을 소상히 기록한 자료이다. 나카노는 1920년 조선총독부의 위탁을 받고 장훈에 일동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마적 두목이 되어 장강호와 찬교를 맺고 온갖 나쁜짓을 하였다. 나카노는 장강호와 협력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정(大正) 8년 11월 내가 만주 장춘(長春)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는 사람을 통하여 중국, 조선의 국경 밖에 있는 불령선인 토벌에 마적을 이용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므로, 나는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길림성 봉강현(鳳岡縣)에 있는 장강호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였더니 이를 그는 승낙하고 협의하고 싶다는 뜻을 회답하였다."

이렇게 총독부 밀정과 만주의 마적 두목이 한 통속이 되어 총독부의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 독립군과 양민에 대한 학살에 혈안이 되었다. 이들의 행적 몇가지를 살펴보자.

"1920년 10월 하순 부하들을 총소집하여 1400명 중에서 가장 정예 500명을 선발하고 잔여 부하는 대기시켜 놓고 나와 장강호는 선발대를 직접 지휘하여 불령선인을 토벌하기 위해 몽강현 청강곤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대개 불령선인의 광복단은 봉천성 안도현 우두산에 있었다. 이곳은 40여호의 조선인과 3호의 만주 토민으로 이루어진 부락으로서 이 부락에 있는 조선인은 모두 광복단원이었으며, 광복단 모임도 종종 여기서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호를 소각하고 광복간 연변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및 부원 3명 아울러 구장(區長), 부구장, 광복단 병졸 등 10여명을 독가스로 죽였다.

11월 5일 아침 전부대가 장강호 및 증야천락(增夜天樂)의 지휘 밑에 안도현성으로 향하였다. 6일 미명에 공격을 개시하여 정오에 이르러 점령했으므로 중국 관병은 모두 현성(縣城)에서 퇴각하였다.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우리 측은 전사자 5명, 중경상자 14명이었으나 중국 관병은 사상자 수가 50여명에 달하였다. 4일간 머물면서 불령선인을 소탕하였다. 광복단 외교부의 병졸 27~28명을 죽이고 증거서류를 압수하여 혜산진 경찰서에 교부하였다. 일본 관헌의 지시에 의하여 21도구(道溝)를 습격하도록 행군하는 도중 22도구 및 23도구에 산재한 불령선인의 가옥 수채를 불지르고 10여명을 총살과 교살로 죽였다. 우리 부대가 그곳을 토벌하여 모두 소탕하고 나니 당시 대안(對岸)에서 우리 부대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관헌 수명이 무장한 채 강을 건너와 독가스를 사용한 현장이며 가옥을 소각한 형적 및 조선인의 상황 등을 임립(林立)하였다."

1920년 말의 일본군에 의한 서,북간도 한국인사회의 참변은 국내의 학살에 못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제(日帝)로부터 이토록 심한 참변을 당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만주의 마적단에게까지 학살과 약탈을 당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서,북간도 한국인사회의 참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세계 민중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으리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倭敵)처럼 흉악하고 포악한 자는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직이 있던 일이겠는가?"


출처; 사람과 지식 版 "日帝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해설; 김삼웅(金三雄) 친일 반민족행위 문제 연구소 소장.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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