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 외국의 모범이 된 평화 시위

1919년의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은 그 방법이 비폭력(非暴力) 평화적(平和的) 저항운동(抵抗運動)이라는 데서 도덕적 가치가 높다.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가혹한 수탈과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연 2백만명 이상이 침여한 대규모 시위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된 것이다. 다만 3월말에서 4월에는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 학살이 자행되면서 다소 폭력적인 수단으로 대응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평화사상과 비폭력적인 인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3.1운동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던 손병희(孫秉熙)는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집필을 의뢰받은 최남선(崔南善)에게 세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평화적이며 온건하고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둘째,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함을 강조할 것, 셋째,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으로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라는 지침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이와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마련되었고, 공약 3장에서도 “배타적 감정”의 배격과 “질서의 존중”을 행동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천관우(千寬宇)가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 그 이후의 모든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간다.”고 지적했듯이 3.1운동은 우리 근대 민족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거족적인 구국항쟁(救國抗爭)이 비폭력(非暴力), 평화적(平和的) 방법으로 전개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일찍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3.1운동의 평화적 방법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제1차 사타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反英自主運動),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키고 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비폭력적인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에 대해 일제(日帝)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의 피해 상황은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7948명, 방화된 교회당 47동, 방화된 학교 2동, 방화된 민가 715호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정한경(丁澣景)의 조선사정(朝鮮事情)에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3월까지의 피해 상황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수감자 49811명, 교회 소실 59동, 학교 소실 3동, 민가 소실 724동 등으로 나타난다. 체포는 헌병의 즉결처분에 의해 태형을 받은 사람이 9078명, 약식재판에 의한 태형이 1514명, 징역형 판결이 5156명, 기소 8993명, 공소수리 1838명, 집행유예 282명, 석방된 사람이 7116명이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당시 정보와 교통, 일제(日帝)의 은폐상황에서 밝혀진 것으로 실제는 훨씬 더 많은 희생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2개 사단과 경찰 동원하여 무차별 탄압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시위는 곧 서울 중심지역으로 확대되고, 같은 시각에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의 지역에서도 일제히 전개되었다. 이들 도시가 서울과 같은 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키게 된 것은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연락이 쉬웠기 때문이며, 또 3.1운동을 주도하던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대표들이 대부분 이 지방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2일에 경기도의 개성, 충청도의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4일 옥구에서, 8일은 대구에서, 10일은 광주와 철원에서, 11일은 부산진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등 전국 13도에 골고루 점화되어 3월 21일 제주도 조천(朝天)시위로 파급되어 역사상 최대의 민족 전체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日帝)는 이를 무력(武力)으로 저지하고자 3월 1일 평양에 주둔한 보병 제77연대, 제78연대를 즉시 시위 발생지역으로 파견한 것을 시점으로 완전무장한 2개 사단 병력을 전국에 분산시켜 대량학살과 피검자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무장 헌병과 경찰을 지역별로 투입하여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서울의 일본 헌병들과 기마 경찰은 탑골공원을 나와서 단 한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시위에 나선 시민과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모자 130여명을 체포, 구금했다.

3.1운동의 첫 희생자는 선천에서 발생하였다. 3월 1일 질서있게 시위하는 군중에게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강신혁(姜新赫)이 숨지고 12명이 총상을 입었다. 같은 날 안주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안주에서는 3월 1일 12명이 체포되고, 2일에는 헌병대의 총격으로 수십명이 쓰러지고 그 중 8명은 즉사했다. 강서군 사천에서도 3월 1일 1명이 사살되고 4일에는 7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 중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40여명, 중상자가 20여명에 이르렀다.

맹산에서는 3월 10일 전날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헌병대 파견소로 들어갔을 때 일본군 제77연대의 총격으로 54명이 사살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참변이 있었다. 수안에서는 3월 3일 헌병분대의 일제사격으로 9명이 즉사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밖에 3월 10일 선천에서는 사망자 14명, 영원에서는 사망자 15명, 부상자 38명이 각각 발생하였다. 3.1운동과 관련 일제(日帝)의 대표적인 학살 만행을 몇가지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다.

● 시신 찾으러 온 부인, 딸까지 무참히 학살

평안남도 맹산에서는 3월 6일경부터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3월 10일 보병 제77연대로부터 10명의 군인을 파견하여 천주교도를 중심으로 1백명 가량의 한국인 집회를 탄압하였다. 민중들을 보통학교 문앞에 모아 해산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지도자 4명을 검거하고 한국인을 헌병대 파견소에 계획적으로 유인하여 잡아가둔 후 불과 3분만에 53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시켰다.

3일 시위 군중 2, 3백명이 황해도의 수안 헌병대파견소를 들러 조선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당신들은 이 땅을 떠나라고 소리쳤다. 헌병들은 물론 조선이 독립을 획득했다면 먼저 서울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고, 군중은 이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2시간 후 또 다른 군중이 들이닥쳐 같은 요구를 했는데 이번에는 헌병들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몇 사람은 부상을 당해 감옥에 갇혔다. 나중에 한 노인이 한국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항의했는데 언병은 그를 사살했다. 노인의 처가 와서 시체를 보고 주저앉아 슬피 울었다. 조선의 관습에 따른 행동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이들의 딸이 찾아왔으나 이번에도 처참히 난도질을 당하였다. 이날 시위 도중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을 받아 사망자가 9명, 부상자가 18명이었다.

김일(金溢)의 조선참변기(朝鮮慘變記)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3일 월요일, 상가는 경찰로부터 폐점을 강요당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길로 몰려들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 나팔을 불자 군중은 이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조선 국기를 흔들었다. 시내 곳곳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 날에는 일본인 소방수가 막대 끝에 쇠고기가 달린 소방기구를 들고 나타났지만 심한 피해는 없었다. 3월 4일 오후 12시 30분경, 한국인은 다시 크게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함성을 들은 일본인 소방대가 곤봉을 들고 군중에게 난입하였다. 몇 명은 곡괭이 자루를 들고 또 몇 명은 긴 소화용 소방기구를 들었으며, 철봉과 각목을 든 자도 있었다. 그들은 군중 가운데로 달려들며 몽둥이 등으로 시위대의 머리를 내리치고 여기저기 소방기구를 휘둘러 눈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으며 뺨에 피를 흘리는 채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 피로 내를 이룬 처참한 광경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에서는 3월 3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130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사천 헌병대는 사격을 가해 1명을 죽이고 8명을 체포하였다. 다음 날에 약 3천명의 민중이 대동군 원장시장에 모여 40명의 결사대를 선두로 헌병대를 향해 시위행진을 강행하였는데, 일본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43명을 사살하고 20여명을 중상을 입혔으며 입원 가료중 사망한 사람도 20여명에 달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일본군의 야만적인 만행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독립운동은 1일부터 월말에 이르기까지 격렬히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야만스럽고 포악하게 창으로 찌르고 칼을 휘두르며 마치 풀베듯 하였다. 사망자가 3750여명이며 옥에서 죽은 사람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체포되어 감금된 자는 수십만으로 추산되는데 속속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한국인에 대한 참혹한 행위는 도저히 글로 나타낼 수 없을 정도이다. 수원사건과 같은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대구에서 약 10리 떨어진 한 부락에서 어느 부인이 헌병의 칼에 음부를 난자당해 참살되었다는 소식은 비통하다 못해 모욕의 극치라고 하겠다.”

3월 19일 경상북도 영덕에서 상등병 이하 3명의 일본군에 의해 4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으며, 20일 경남 군북에서 특무조장 이하 16명의 일본군에 의해 21명이 사살당하고 18명이 부상했으며, 21일 경남 초계에서 1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했으며, 단성에서 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경상도 각지에서는 학살이 자행되었다. 밀양에서는 말발굽 모양을 한 산골짜기 마을에서 일본군이 입구의 큰길을 막고 난사하여 통행하던 노약자, 부녀자 150여명이 학살당하였다. 또 합천에서도 3월 18일 강양면에서 일본 경관의 발포로 3명이 즉사하였고, 여러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3월 22일에는 상백, 백산, 가회 삼가면에서 일본 군사들이 발포, 난사하여 사상자가 길에 널리고 바람결에 피비린내가 나서 마치 피비가 내린 광경이 처참했었다. 23일에도 일본궁 병사 23명이 각처에 횡행하여 오가는 사람을 죽여 피살자 42명, 중상자 1백여명이 나왔다. 또 같은날 초계면에서 유림, 학생 8천여명이 시위를 벌이자 일본군이 사격하여 피살자 5명, 중상자 수십명을 냈다. 또 같은날 안동에서도 1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하였다. 혐경북도 화대동에서도 3월 15~16일에 일본군 기병, 부사관 약 40여명이 발포하여 3명이 즉사,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평안북도 철산지방에서는 일본군 병사가 칼로 한국인 소년의 두개골을 가르는 장면과 임산부의 복부에 칼날을 찔러넣어 난자하는 광경이 목격되었다고 보고되었다. 3월 30일 정주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피살자 28명 부상자 99명, 삭주에서는 피살자 7명, 부상자 12명, 이천에서는 사상자 24명이 나왔다. 경기도 봉일천에서도 헌병의 발포로 39명이 사망하였다.

● 교회에 몰아넣고 불질러

3월 31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정주 읍민이 시위운동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일본 관헌이 탐지하였다. 그들은 기선을 제압하고 기독교 몫 이하 여려 적원을 포박하여 구타와 탄압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민심이 격앙되어 당일 모였던 군중 2만 5천명이 일본군의 총구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부르짖었다. 이때 시위운동에 참가한 군중 가운데 50여명, 곁에서 방관하던 70여명이 학살되었다.

4월 1일 병천 장날, 수천명이 집회를 연 후 시위를 벌이다 해산할 즈음 천안에서 온 철도경비대가 사격을 가하여 피살자 20명, 부상자 1백여명이 나왔다. 4월 15일 오후 일본군의 한 장교가 지휘하는 부대가 수원군 남쪽 제암리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훈시할게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 및 천도교도 30여명을 교회로 소집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창과 문을 굳게 잠근 후 교회당 안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한 부인이 자기가 안고 있던 어린아이를 창밖으로 내던지며 “나는 죽더라도 이 아이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일본군은 아이의 몸을 무자비하게 불질러 버렸다. 홍모씨가 부상을 입고 창밖으로 뛰어나오려 하자 일본군 병사들은 그를 사살하였다. 강모씨의 처는 이불로 몸을 감추고 담장 아래 숨었는데 일본군 병사가 칼로 난자하고 이불을 불태웠다. 또 홍모부인이 와 불을 끄려고 하자 이를 사살하고 갓난아기 2명까지 죽여 버렸다. 또 젊은 여인 한사람은 자기 남편을 구하려다가 사살당했다. 이렇게 교회당 안에서 학살된 자는 22명, 교회 뜰에서 죽은 자는 6명이었는데, 일본군은 이들의 시체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일본군은 또 제멋대로 제암리의 민가 31호를 방화하였는데 불은 8개면 15개 촌락의 317호로 번져 사망자가 39명에 달하였다. 또 인근 촌락에서는 연일 총격, 소각, 구타가 가해져 사망자가 1천여명에 이르렀다.

● 국제적 규탄을 받은 혹독한 성고문(性拷問)

3.1운동 때에 일제(日帝)는 조선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고문을 일삼았지만 특히 여자들에 대해서는 성도착적인 잔학성까지 보였다. 1919년 7월 17일 미국 상원의회에 매코믹(Mecomick)에 의해 제출된 장로교회의 보고서는 미국기독교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서 일제(日帝)의 만행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몇 대목을 인용해보자.

”평양에서 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야만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조사내용에 의하면, 교회 안마당에 8명이 묶인 상태에서 구타를 당했고 어떤 남자는 벌거벗겨진 채 군인들이 불을 붙인 성냥으로 그의 음경(陰莖)을 지지자 군인들에게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근처 숲 속에서는 실오라기 한올도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의 여자 3명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고 있었다.

3월 4일 신학교로 들어가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신학교 학생들을 군인과 경찰관들이 헌병대로 끌고갔는데, 그곳에서 “치욕스런 수모”를 당한 15명의 여자들 중에서 21세된 한 여자가 미국인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절할 때까지 고문당하곤 했는데, 월경(月經) 때라 한사코 옷을 벗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한 젊은 여인의 속옷을 강제로 벗기고는 훨씬 더 심하게 구타했으나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습니다.”

한 여학생은 3월에 경찰에 채포되어 있는 동안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얘기하고 있다.

”어떤 작은 방 안에 감금되고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당했는가 생각해낼 수 있었습니다. 4~5명의 경찰이 나를 마구 치고 대리고 사정없이 짓눌렀으며, 방 한구석에 처박았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여자 35명과 남자 40명 등 총 75명이 한 방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에드워드 스윙이란 미국인은 일본인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이 사실을 4월 18일 미국 정부에 폭로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진정서에는 “일본인들의 무단통치가 계속되고 있고, 아주 야만적이고 잔인한 탄압 속에서 한국인은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의 무단통치는 악랄했으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일본 지휘관과 군인들은 마치 무법천지(無法天地)에서 날뛰듯이 아주 야만적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특히 이 진정서는 일본인들의 조선 여성에 대한 만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찰과 운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체포해서 잔인하게 구타하고 있습니다. 열세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와 부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조차도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 뿐만 아니라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스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조국의 평화로운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경 데일리 뉴스”는 1919년 4월 15일자에서 일제(日帝)의 조선 여성에 대한 야만성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하여 구속된 여성들의 심문은 참으로 부끄럽고 모욕적인 일이다. 일본인에게는 다른 이성(異性)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겨지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것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을 가진다. 일본인은 이것을 잘 알아서 한국 여성을 질문대에 세워 욕보이기 전에 듣기가 거북하겠지만, 여성들을 완전히 전라(全裸) 상태로 만든다. 그들은 여성들을 취조실로 데려간 후에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감방에서 헌병들이 강제로 행한다. 여성들은 그들의 감방에서부터 구내를 가로질러 걸어가야만 하며, 가는 동안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면 보고 즐긴다. 때로는 일본 여성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

또 감옥에서 세수를 할 때마다 여성들은 얇은 기모노를 벗어 나신(裸身)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세수를 한다고 한다. 이들을 보는 사람들은 물론 남자들이다. 이 심문의 정점은 심하리만치 가해지는 창피한 고통이다. 미혼 소녀들과 기독교 여인들은 집에서 정결하게 살아오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예의 범절을 지키며 살아왔으나, 그들은 이들을 아랑곳없이 함부로 대했다. 길에서 한국을 위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역겨울 정도로 나쁜 여자를 뜻하는 말로 여성들을 불렀다.

몇몇 여성들은 유방(乳房)과 음부(陰部)를 손으로 가리자, 가리지 못하도록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한 기독교 여인은 팔이 어깨에서 빠지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몇몇 소녀들에게는 심문하는 중에 엎드려 네 발로 기어서 걸어 돌아다니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거울 위를 걸어다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벗은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극악한 사람들은 여성들의 배를 걷어차거나 아주 거칠게 다루었다. 마치 암소의 젖을 짜듯이 가슴을 쥐어짜기도 하고,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묘사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다. 우리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행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그와 같이 깊은 데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만, 그와 유사한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에서는 벌건 대낮에도 집에 있는 여성들이 안전하지 못하다 한다. 그들은 낮에는 야산에 숨고 밤에만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에 대한 진실이 누구로부터 흘러나오면 매우 소심하도록 민감하게 반응하여 문제를 삼으므로,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한 내용을 직접 읽고 알 수 있게 하면 좋으리라 본다. 위의 내용은 직접 당한 여성들의 진술임을 서약하며, 필요하다면 출판하여도 좋다. 다른 외국 선교사들도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여성들을 어떻게 심문한 것에 대한 믿을만한 이야기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위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한 두 가지의 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명화된 국제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3.1운동에 가담한 조선 여성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만행은 당시 국제적인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경찰의 여러가지 고문형태 가운데 여성에게는 강제 愛撫, 强姦 등 죽음보다 싫은 치욕적인 성고문(性拷問)이 자행되었다. 일본 헌병들과 경찰은 처녀이건 유부녀이건 일단 여자를 붙잡아오면 옷을 모두 벗겨 나신(裸身)으로 만든 후에 고문을 시작하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즐겨 사용한 고문 기구의 하나로 우신봉(牛腎棒)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으로 매질을 하거나 물에 불려서 여성의 음부(陰部)에 집어넣는 등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의 고문을 자행했다. 이후에도 우신봉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고문도구로 오래 사용되었다.

출처; 사람과 지식 版 “日帝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해설; 김삼웅(金三雄) 친일 반민족행위 문제 연구소 소장.

{계속}


1919年 3.1反日デモ運動(三一反日示威運動)と日帝(日帝)の苛酷な弾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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