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4.독립군의 재정비(再整備)와 항일전(抗日戰)

 

● 통의부(統義府) 결성과 분열


 

1920년 독립군(獨立軍)의 계속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및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의 대승전(大勝戰)은 한국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일대 쾌거였으나 그 뒤를 이은 일본군의 만주침입(滿州侵入)과 잔인한 보복행위, 독립군의 시베리아 이동, 그리고 시베리아에서의 적군(赤軍)의 배신행위로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등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가은 역경은 독립군 지도자들을 크게 각성시켜 이전의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항일전(抗日戰)이 크게 역효과를 가져왔음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독립군 세력의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즉 1921년 장백현(長白縣)과 무송현(撫松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흥업단(興業團)·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의 4개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결성되고 김호(金虎)가 단장, 이은향(李殷鄕)이 부단장, 윤병용(尹秉庸)이 총무로 각각 취임하였다. 1922년에는 서간도(西間島)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한교회(韓僑會)·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단체가 결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 후 이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개방하여 8개 단체를 영입하고 1922년 8월에 남만(南滿) 독립군 통합기관으로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발족시켰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의 민사(民事)·군정(軍政)을 시행하는 기관으로 발족하였는데 1923년 12월에는 이를 개편하여 군사방면에 주력할 것을 결정하고 동부(同府) 소속 독립군으로서 통의부 의용군(統義府義勇軍)을 편성하였다.

 

통의부 의용군의 주요 지휘관을 살펴보면 사령관에 김창환(金昌煥), 부관에 김창동(金昌動), 대대장에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정(崔碩渟), 제3중대장에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에 이진산(李震山), 제5중대장에 김오봉(金嗚鳳), 독립소대장에 김우근(金宇根), 유격중대장에 김창룡(金昌龍)·문학빈(文學彬) 등이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대한통의부 결성에 참여한 각 독립군 부대를 통합·편성한 것이었다. 조직은 1개 대대(大隊) 산하에 5개 중대(中隊)와 독립중대인 유격대(遊擊隊) 및 헌병대(憲兵隊)의 7개 중대로 편제된 단일 지휘체계였으며, 각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의용군은 대한통의부의 통치권을 수호하는 한편, 한국인사회와 국내를 무대로 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친일파 응징 및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기습공격 등을 수행하였다.

 

의용군의 계급은 장사(將士), 정사(正士), 부사(副士), 참사(參士)의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지휘관인 중대장과 소대장의 복장은 중국군 장교의 복장과 비슷한 다갈색의 군복을 착용하였다. 군모(軍帽)의 휘장(揮帳)은 대한제국 시기의 태극기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은 은과 구리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외의 의용군 복장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으나, 통의부의 관할지역이었던 압록강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복장을 조사한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쥐색 무명 군복에 중국 군대식 금장(襟章)과 편장(扁章)을 부착하고 중국 군대식 군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군복은 한국인사회 부녀자들이 제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통의부는 의용군의 편제와 계급 및 복장 등을 제정함에 있어 당시 남만주 일원을 무대로 할거하던 중국 동북지역 군벌 군대의 예를 원용·참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의용군의 무장은 일반적으로 중국 군대식이었는데, 주된 무기로는 러시아식 보병총(步兵銃), 일본군 38식 보병총, 브로우닝 권총(拳銃), 일본제 26식 권총 등이 개인화기(個人火器)로 충당되었을뿐 아니라 폭탄도 소유·사용하고 있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효과적인 임무수행을 위하여 중대별로 각기 관할 구역과 특수 임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중대별 관할구역은 제1중대가 집안현(輯安縣)·통화현(通化縣) 일대, 제2중대가 환인현(桓仁縣)·관전현(寬甸縣) 일대, 제3중대가 환인현 북전구(北甸溝) 일대, 제4중대가 집안현·유하현(柳河縣) 일대, 제5중대가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汪淸門) 일대였다.

 

각 중대에는 정규 무장병력 외에 초모원(招募員) 등으로 불리는 예비인원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의용군의 일본군 습격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위한 정세조사 및 지형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5중대의 경우, 중대장을 보좌하는 내무·외무비서가 있었고, 기본편제인 3개 소대 외에도 예비소대장·참사·부사·중국 측 교섭원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참사와 부사는 의용군 운영을 위한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따로 중국 측 교섭원을 둔 것은 통의부 및 의용군의 활동에 있어서 일제(日帝)의 직접적인 탄압과 공격에 못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제약으로 가로놓여 있던 중국 동북군벌과의 대외교섭을 경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복벽(復辟)을 그 이상으로 하는 전덕원계(全德元系)의 노년층 인사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주장하는 신진인사와 대립 끝에 이탈하여 1923년 별도로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함으로써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 이후 통의부와 의군부의 상쟁은 한국 민족운동의 비극이었으며 보수파(保守派)와 공화파(共和派)의 갈등이었다.

 

● 3부의 성립과 활동

 

통의부(統義府)와 의군부(義軍府)의 상호대립에 실망한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임을 자각하고 임정군무부(臨政軍務部) 산하의 군사단체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를 정부에 파견하여 전에 있었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부직속의 군사단체로 승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하고 부대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로 하고 집안(輯安),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하(柳河) 등의 각 현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여러 차례 조직이 개편되었는데 1923년 창립 당시의 편제는 참의대장 겸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에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에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에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에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에 박응백(朴應伯), 중앙의회의장에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에 김소하(金篠厦)가 각각 담당하였다.

 

이처럼 정부직속의 참의부(參議府)가 결성되었을 때 참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단체들이 별개의 통합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정의부(正義府)였다. 이 정의부에는 통의부의 일부와 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8개 단체의 연합체로서 1924년 11월에 결성되었는데 동부(同府)는 헌장을 마련하여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기관(行政機關)을 설치하여 지방 정부로서의 대규모의 행정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군사조직으로서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을, 사령관에 오동진(吳東振)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상비군(常備軍)으로서 8개 중대와 헌병대(憲兵隊) 및 민경대(民警隊)를 두었다.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

사령관 오동진(吳東振)

부관 조송림(趙松林) 김기해(金基海)

경리 이성근(李成根)

제5중대장 안홍(安鴻)

제6중대장 문학빈(文學彬)

제7중대장 이규성(李圭星)

제8중대장 김창룡(金昌龍)

헌병대장 김창헌(金昌憲)

 

정의부의 군대는 동포 사회의 치안확보와 독립군으로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한 일제(日帝)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만주의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의용군이라 불렸는데 정의부의 의용군은 김창환(金昌煥), 이청천(李靑天), 오동진(吳東振), 이진탁(李振卓)이 차례로 사령관 혹은 군사위원장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정이형(鄭伊衡), 양세봉(梁世奉), 문학빈(文學彬), 장철호(張喆鎬), 이규성(李奎星) 등이 중대장 또는 유격대장으로 직접 대일항전 전선에 참가하고 있었다. 상비군으로서 8개 중대 및 헌병대와 민경대를 두어 1927년 현재 7백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 및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치하여 매년 장교를 파견,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동포 사회의 부락 부락마다 독립운동의 준비 태세를 완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상조계(相助契),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같은 친일 단체를 분쇄하고 동포 사회 자체 내의 질서를 도모하기에 노력하면서 국내 진격을 수행하였다. 국내진공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1925년 3월 19일 초산(楚山)과 암동군(岩潼郡)의 경찰서를 공격한 사실이다. 이것은 참의부가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 일본 경찰대와 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42명의 사상자를 낸 직후이어서 더욱 뜻있는 항일전(抗日戰)이었다.

 

독립군은 3월 18일 밤에 3대를 편성하여 9월 새벽에 모두 공격하였다. 제1대는 예정대로 초산군 성면 마암리(摩岩里)와 추동리(秋洞里) 주재소를 공격하여 추동의 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 경찰관 7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제2대는 압록강변에서 일본 경찰대와 만나 싸워 예정대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제3대는 벽동군 오북면의 여해동(如海洞) 주재소를 공격하여 니시카와[西川隆吉] 경부(警部)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

 

이와 비슷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은 정의부 창설이래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1925년 6월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된 후에는 참의부처럼 그 활동에 제약이 많아 용이하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의 경우는 정의부가 참의부만큼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의부보다 참의부가 국경선 근방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참의부는 원래 군사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정의부는 독립전쟁도 중요했지만 동포 사회의 안녕 질서와 산업이나 교육의 향상도 돌보아야 하는 자치단체로 출발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도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1925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계열 등 10개 단체와 각 지역대표들이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통합기관으로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 동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위원장 나중소(羅仲昭)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정신(鄭信)

선전부위원장 허백도(許白島)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경(金儆)

 

그리고 신민부(新民府)의 군사조직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제1대대장에 백종렬(白鍾烈), 제2대대장에 오상세(吳祥世), 제3대대장 겸 별동대장에 문우천(文宇天), 제4대대장에 주혁(朱赫), 제5대대장에 장종철(張宗哲) 등이 각각 선임되어 편제를 이루었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독립전쟁을 제1차의 목표로 하였던 만큼 자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배출한 인원은 도합 5백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김혁이 교장, 김좌진이 부교장, 박두희·오상세 등이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중반기 이후에 재만(在滿) 독립운동 군사단체는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로 정리되었으며 3부가 정립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수행하였다. 잡다한 독립운동 단체가 3부로 정리되었으나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통합(大同統合)이라는 민족적 요구에 의하여 계속 3부의 통합운동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1929년 3부는 다시 개편되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재탄생되었다.

 

혁신의회는 정식 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1년간의 과도기 조치로 결성된 것으로 1929년 5월에 해체되었으나 1930년 한국독립당 조직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를 보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이청천이, 부사령관에 남대관, 참모장에 신숙(申肅)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국민부는 1929년 4월 1일에 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이 사령관을 겸하고 그 휘하에 8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년 9월 국민부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으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게 되자 동년 12월 이에 편입되었다. 이때의 조선혁명군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이었으며 각 중대를 7대로 재편성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각기 중국의 무장단체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했다.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및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한국독립군은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서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을 격파하였으며 중국의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조선혁명군은 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계속」


1920・30年代日帝強制占領期間(日帝強占期) 抗日独立戦争(抗日独立戦争) (3)

4.독립군의 재정비(再整備)와 항일전(抗日戰)

 

● 통의부(統義府) 결성과 분열


 

1920년 독립군(獨立軍)의 계속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및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의 대승전(大勝戰)은 한국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일대 쾌거였으나 그 뒤를 이은 일본군의 만주침입(滿州侵入)과 잔인한 보복행위, 독립군의 시베리아 이동, 그리고 시베리아에서의 적군(赤軍)의 배신행위로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등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가은 역경은 독립군 지도자들을 크게 각성시켜 이전의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항일전(抗日戰)이 크게 역효과를 가져왔음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독립군 세력의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즉 1921년 장백현(長白縣)과 무송현(撫松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흥업단(興業團)·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의 4개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결성되고 김호(金虎)가 단장, 이은향(李殷鄕)이 부단장, 윤병용(尹秉庸)이 총무로 각각 취임하였다. 1922년에는 서간도(西間島)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한교회(韓僑會)·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단체가 결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 후 이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개방하여 8개 단체를 영입하고 1922년 8월에 남만(南滿) 독립군 통합기관으로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발족시켰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의 민사(民事)·군정(軍政)을 시행하는 기관으로 발족하였는데 1923년 12월에는 이를 개편하여 군사방면에 주력할 것을 결정하고 동부(同府) 소속 독립군으로서 통의부 의용군(統義府義勇軍)을 편성하였다.

 

통의부 의용군의 주요 지휘관을 살펴보면 사령관에 김창환(金昌煥), 부관에 김창동(金昌動), 대대장에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정(崔碩渟), 제3중대장에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에 이진산(李震山), 제5중대장에 김오봉(金嗚鳳), 독립소대장에 김우근(金宇根), 유격중대장에 김창룡(金昌龍)·문학빈(文學彬) 등이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대한통의부 결성에 참여한 각 독립군 부대를 통합·편성한 것이었다. 조직은 1개 대대(大隊) 산하에 5개 중대(中隊)와 독립중대인 유격대(遊擊隊) 및 헌병대(憲兵隊)의 7개 중대로 편제된 단일 지휘체계였으며, 각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의용군은 대한통의부의 통치권을 수호하는 한편, 한국인사회와 국내를 무대로 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친일파 응징 및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기습공격 등을 수행하였다.

 

의용군의 계급은 장사(將士), 정사(正士), 부사(副士), 참사(參士)의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지휘관인 중대장과 소대장의 복장은 중국군 장교의 복장과 비슷한 다갈색의 군복을 착용하였다. 군모(軍帽)의 휘장(揮帳)은 대한제국 시기의 태극기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은 은과 구리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외의 의용군 복장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으나, 통의부의 관할지역이었던 압록강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복장을 조사한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쥐색 무명 군복에 중국 군대식 금장(襟章)과 편장(扁章)을 부착하고 중국 군대식 군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군복은 한국인사회 부녀자들이 제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통의부는 의용군의 편제와 계급 및 복장 등을 제정함에 있어 당시 남만주 일원을 무대로 할거하던 중국 동북지역 군벌 군대의 예를 원용·참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의용군의 무장은 일반적으로 중국 군대식이었는데, 주된 무기로는 러시아식 보병총(步兵銃), 일본군 38식 보병총, 브로우닝 권총(拳銃), 일본제 26식 권총 등이 개인화기(個人火器)로 충당되었을뿐 아니라 폭탄도 소유·사용하고 있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효과적인 임무수행을 위하여 중대별로 각기 관할 구역과 특수 임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중대별 관할구역은 제1중대가 집안현(輯安縣)·통화현(通化縣) 일대, 제2중대가 환인현(桓仁縣)·관전현(寬甸縣) 일대, 제3중대가 환인현 북전구(北甸溝) 일대, 제4중대가 집안현·유하현(柳河縣) 일대, 제5중대가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汪淸門) 일대였다.

 

각 중대에는 정규 무장병력 외에 초모원(招募員) 등으로 불리는 예비인원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의용군의 일본군 습격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위한 정세조사 및 지형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5중대의 경우, 중대장을 보좌하는 내무·외무비서가 있었고, 기본편제인 3개 소대 외에도 예비소대장·참사·부사·중국 측 교섭원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참사와 부사는 의용군 운영을 위한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따로 중국 측 교섭원을 둔 것은 통의부 및 의용군의 활동에 있어서 일제(日帝)의 직접적인 탄압과 공격에 못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제약으로 가로놓여 있던 중국 동북군벌과의 대외교섭을 경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복벽(復辟)을 그 이상으로 하는 전덕원계(全德元系)의 노년층 인사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주장하는 신진인사와 대립 끝에 이탈하여 1923년 별도로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함으로써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 이후 통의부와 의군부의 상쟁은 한국 민족운동의 비극이었으며 보수파(保守派)와 공화파(共和派)의 갈등이었다.

 

● 3부의 성립과 활동

 

통의부(統義府)와 의군부(義軍府)의 상호대립에 실망한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임을 자각하고 임정군무부(臨政軍務部) 산하의 군사단체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를 정부에 파견하여 전에 있었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부직속의 군사단체로 승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하고 부대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로 하고 집안(輯安),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하(柳河) 등의 각 현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여러 차례 조직이 개편되었는데 1923년 창립 당시의 편제는 참의대장 겸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에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에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에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에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에 박응백(朴應伯), 중앙의회의장에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에 김소하(金篠厦)가 각각 담당하였다.

 

이처럼 정부직속의 참의부(參議府)가 결성되었을 때 참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단체들이 별개의 통합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정의부(正義府)였다. 이 정의부에는 통의부의 일부와 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8개 단체의 연합체로서 1924년 11월에 결성되었는데 동부(同府)는 헌장을 마련하여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기관(行政機關)을 설치하여 지방 정부로서의 대규모의 행정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군사조직으로서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을, 사령관에 오동진(吳東振)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상비군(常備軍)으로서 8개 중대와 헌병대(憲兵隊) 및 민경대(民警隊)를 두었다.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

사령관 오동진(吳東振)

부관 조송림(趙松林) 김기해(金基海)

경리 이성근(李成根)

제5중대장 안홍(安鴻)

제6중대장 문학빈(文學彬)

제7중대장 이규성(李圭星)

제8중대장 김창룡(金昌龍)

헌병대장 김창헌(金昌憲)

 

정의부의 군대는 동포 사회의 치안확보와 독립군으로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한 일제(日帝)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만주의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의용군이라 불렸는데 정의부의 의용군은 김창환(金昌煥), 이청천(李靑天), 오동진(吳東振), 이진탁(李振卓)이 차례로 사령관 혹은 군사위원장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정이형(鄭伊衡), 양세봉(梁世奉), 문학빈(文學彬), 장철호(張喆鎬), 이규성(李奎星) 등이 중대장 또는 유격대장으로 직접 대일항전 전선에 참가하고 있었다. 상비군으로서 8개 중대 및 헌병대와 민경대를 두어 1927년 현재 7백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 및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치하여 매년 장교를 파견,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동포 사회의 부락 부락마다 독립운동의 준비 태세를 완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상조계(相助契),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같은 친일 단체를 분쇄하고 동포 사회 자체 내의 질서를 도모하기에 노력하면서 국내 진격을 수행하였다. 국내진공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1925년 3월 19일 초산(楚山)과 암동군(岩潼郡)의 경찰서를 공격한 사실이다. 이것은 참의부가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 일본 경찰대와 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42명의 사상자를 낸 직후이어서 더욱 뜻있는 항일전(抗日戰)이었다.

 

독립군은 3월 18일 밤에 3대를 편성하여 9월 새벽에 모두 공격하였다. 제1대는 예정대로 초산군 성면 마암리(摩岩里)와 추동리(秋洞里) 주재소를 공격하여 추동의 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 경찰관 7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제2대는 압록강변에서 일본 경찰대와 만나 싸워 예정대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제3대는 벽동군 오북면의 여해동(如海洞) 주재소를 공격하여 니시카와[西川隆吉] 경부(警部)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

 

이와 비슷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은 정의부 창설이래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1925년 6월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된 후에는 참의부처럼 그 활동에 제약이 많아 용이하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의 경우는 정의부가 참의부만큼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의부보다 참의부가 국경선 근방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참의부는 원래 군사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정의부는 독립전쟁도 중요했지만 동포 사회의 안녕 질서와 산업이나 교육의 향상도 돌보아야 하는 자치단체로 출발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도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1925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계열 등 10개 단체와 각 지역대표들이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통합기관으로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 동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위원장 나중소(羅仲昭)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정신(鄭信)

선전부위원장 허백도(許白島)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경(金儆)

 

그리고 신민부(新民府)의 군사조직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제1대대장에 백종렬(白鍾烈), 제2대대장에 오상세(吳祥世), 제3대대장 겸 별동대장에 문우천(文宇天), 제4대대장에 주혁(朱赫), 제5대대장에 장종철(張宗哲) 등이 각각 선임되어 편제를 이루었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독립전쟁을 제1차의 목표로 하였던 만큼 자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배출한 인원은 도합 5백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김혁이 교장, 김좌진이 부교장, 박두희·오상세 등이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중반기 이후에 재만(在滿) 독립운동 군사단체는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로 정리되었으며 3부가 정립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수행하였다. 잡다한 독립운동 단체가 3부로 정리되었으나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통합(大同統合)이라는 민족적 요구에 의하여 계속 3부의 통합운동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1929년 3부는 다시 개편되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재탄생되었다.

 

혁신의회는 정식 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1년간의 과도기 조치로 결성된 것으로 1929년 5월에 해체되었으나 1930년 한국독립당 조직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를 보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이청천이, 부사령관에 남대관, 참모장에 신숙(申肅)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국민부는 1929년 4월 1일에 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이 사령관을 겸하고 그 휘하에 8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년 9월 국민부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으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게 되자 동년 12월 이에 편입되었다. 이때의 조선혁명군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이었으며 각 중대를 7대로 재편성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각기 중국의 무장단체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했다.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및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한국독립군은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서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을 격파하였으며 중국의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조선혁명군은 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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