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1.서언(序言)

 

1910년부터 36년간 계속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 통치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처음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었다. 다 알듯이 이 협정의 “기본관계조약” 제2조는 과거 양국의 관계를 규정했던 조약들에 대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양국 외무당국은 이 구절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놨다. 한국 측이 “이미 무효”의 시점을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체결된 당시 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으로 해석한 반면, 일본 측은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시기부터라고 확인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은 과거문제에 대한 분쟁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한국은 기본조약 제2조의 자구 해석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제2차 일한협약(1905년 11월 17일)”이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이며, 이에 근거한 한국 병합은 원인무효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대표 강제는 이후 오랫동안 한국 병합 무효론의 핵심 논제가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의 한국 국권 침탈 조약 원문서(原文書)들에 대한 실증적 검토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병합 불성립론(不成立論, non-existence theory)이 새로 제기되었다. 러일전쟁이 개전(開戰)되면서 일본이 국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국에 강요한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 1904년 2월 23일), 제1차 일한협약(日韓協約, 1904년 8월 22일), 제2차 일한협약(1905년 11월 17일), 제3차 일한협약(1907년 7월 24일), 한국병합조약(韓國倂合條約, 1910년 8월 22일) 등의 문서에 대한 검증을 통해{1} 형식과 절차에 큰 하자가 확인되어 한국 병합은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필자가 제기한 이 불성립론은 세카이[世界]지 1998년 7, 8월호에 그 요지가 처음 일본 측에 소개되었고, 이에 대한 일본 측으로부터의 반응도 곧 뒤다랐다. 세카이지는 일한대화(日韓對話) 난을 만들에 이 논제에 관한 일본 측 전문학자들의 견해를 싣기 시작해 2000년 11월호까지 7차에 걸친 의견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일본 측에서 사카모토 시게키[坂本茂樹],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두 교육자가 구조약(舊條約)의 유효부당론(有效不當論)을 펴고, 사사가와 노리카쓰[笹川紀勝],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두 교육자는 한국 측으 불법무효론(不法無效論)을 지지했다.

{1}▶註;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의해 강제된 조약들의 명칭에 이렇게 차수(次數)를 붙인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과거 일본인들이 제목을 붙이지 못한 조약들의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나, 이에 대한 비판은 이미 확실하게 된 상태이므로 독자 특히 외국인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이 방식을 택한다.

각 조약으로 침탈된 국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한의정서는 시정개선 수용 승인, 군사기지 사용권을 보장하고 이에 위배되는 내용의 조약을 제3국과 체결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1차 일한협약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교 및 재정 고문을 고용하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시 도쿄의 일본 외무성과 사전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2차 일한협약은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고 그 임무 수행을 위해 한국 황제 관하(關下)에 통감을 파견하고 개항지에 이사관을 보내 통감의 지휘를 받게 하며, 제3차 일한협약은 한국 정부가 시정개선을 위해 통감의 지휘를 받고, 필요한 법령재정과 행정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게 하고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임명하되 그의 승인 없이는 다른 외국인도 고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병합조약은 한국 황제가 한국 전체에 관한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하는 것을 각각 보장하였다.』

유효부당론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도덕적으로는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사카모토와 운노는 불성립론(不成立論)을 비판하면서 이런 견해를 제시했지만, 정작 필자 주장의 중요한 근거인 “형식과 절차에서 확인되는 기만, 강제, 범법의 하자”가 가지는 국제법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조약의 형식은 국제법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이 정하는 것일 뿐이므로 형식과 절차를 문제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견해를 되풀이하였다.

필자의 불성립론은 2001년 4월 26일에 개최된 제2차 도쿄 워크숍에서 사사가와 노리카쓰가 국제법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찾는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처음으로 진지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국제법상 “합의의 하자”에 대한 기존의 학설 내지 평가를 최대한 조사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사실이 확인될 경우 법적으로 해당 협정들은 모두 취소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하면서, 5개 조약들을 통해 확인된 기만, 강제, 범법 등도 이 관점에서 앞으로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1965년 한일협정은 현재의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약이다. 그러나 이 협정의 기본조약이 명시한 양국 간의 과거에 대한 규정은 위와 같이 해석상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고, 이에 대한 학술적 검토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세카이[世界]지의 일한대화(日韓對話)는 곧 이 상황을 깨뜨리는 역할 수행으로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다. 한국 병합 불성립론(韓國倂合不成立論)을 처음 제기한 필자로서도 이후의 여러 논의들을 통해 많은 새로운 지식과 이해를 얻게 되었다. 이 장편의 논문은 그 성과 위에 불성립론의 토대를 좀더 체계화해 본 것이다.

2.한국 측의 조약에 대한 인식

 

◆ 편람(便覽) 형태의 조약집(條約集) 간행

한국의 조선왕조(朝鮮王朝, 1392년~1897년)는 1876년 2월 27일 최초의 서양식 국교 관계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이후 미국(1882년 5월 22일), 영국(1883년 11월 26일), 독일(1883년 11월 26일), 이탈리아(1884년 6월 26일), 러시아(1884년 7월 7일), 프랑스(188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1892년 6월 23일), 중국 (1899년 9월 11일), 벨기에(1901년 3월 23일), 덴마크(1902년 7월 15일) 등과도 차례로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이러한 새로운 국교관계 수립에 대해서는 종래 다음과 같은 부정적 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첫째, 첫 조약인 일본과의 수호조규부터 어디까지나 피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능동적 문호개방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왕조는 그리스도교의 유입을 우려하여 문호를 개방할 의사가 없었는데, 일본이 이 쇄국의 굴레를 밧겨주어 비로소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혜론(施惠論)적 입장에서 한국의 소극적인 자세를 과장한 것으로 정당한 이론이라고 하기 어렵다.{2}

{2}▶註;『이태진 저술 “근대 한국은 과연 은둔국이었던가?” 한국사론(韓國史論) 41, 42 합집 1999년 735~736면』

고종(高宗) 군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왕정을 대신하던 기간(1864년~1873년)에 대외정책이 폐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73년 12월 군왕이 직접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청년 국왕 고종은 아버지의 배외정책(排外政策)이 나라를 고립시켜 패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 아래 개방주의(開放主義)로 전환했다. 그는 친정(親政)에 나서자마자 그간 교착상태에 빠졌던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해결짓기 위해 관계직을 신임하는 신하들로 전원 교체하여 국교가 수립되는 방향으로 이끌게 하였다.{3} 그리고 1876년 2월 특명전권사절단(特命全權使節團)이 강화도(江華島)에 도착하여 준비해 온 조약안을 내놓았을 때도 군왕의 태도는 아주 개방적이었다. 군왕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조선 대표단의 적극성에 오히려 일본 사절단이 당황할 정도였다. 조선 대표단은 일본 측이 준비해 온 수호조규안 13개조 중 9개조를 수정시키고 최혜국(最惠國) 관련 1개조는 삭제시킬 정도로 능동적이었다.{4}

{3}▶註;『이태진 저술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년 151~152면』

{4}▶註;『이태진 저술 “1876~1910년 조일간(朝日間) 조약체결(條約締結)에 관한 중요자료(重要資料) 정리 제1장 4절 (1)-(4)”, 일본 해군 함정 1척이 강화도 해협 통과를 저지당하자 근처 영종도를 습격한 이른바 윤요호사건[雲揚號事件]은 문제의 함정이 일본 선박이라는 사실을 조선 조정은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둘째,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은 중국 청나라의 재상 이홍장(李鴻章)이 주관하여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다. 이홍장은 한국이 동쪽에서 외세(外勢)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나라로 인식, 어느 특정 국가가 한국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여 미국과 수교할 것을 권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조선 자체의 전망을 가지고 별도로 미국과의 수교를 준비한 사실이 확인되었다.{5} 그리고 조선, 미국 양국 정부가 이홍장이 조약문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국 관계를 명시할 것을 요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영향의 한계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이 조약은 수입품에 대한 관세율 책정에서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례가 없이 10-30%선을 적용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6} 이것은 이 시기에 조선 조정이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 조약에 관한 많은 정보 입수와 분석을 통해 거둔 성과였다. 이런 성과는 다른 나라 정부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5}▶註;『김경태 저술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 기정 교섭의 전개”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1권 1975년 192, 196면. 이 확인은 꽤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부정적 편견의 굴레를 쉽게 깨지 못하고 지금껏 소수의견으로 묻혀 있다시피 했다.』

{6}▶註;『김경태 저술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 기정 교섭의 전개”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1권 1975년 199~200면』

셋째,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잇따른 수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술책에 일방적으로 끌려든 것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은 후대 제국주의 비판의 시각에서 이론적으로 적용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당시 실정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거친 것이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새로운 국제관계를 추구하여 1882년 4월 미국과 수교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같은 해 6월에 배외주의자 대원군이 개화정책에 대한 구식 군사들의 불만을 이용해 재집권을 위한 정변(壬午軍亂)을 일으킴으로써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간파하여 이 군란을 영향력 회복 내지 강화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군란 주동자 색출을 구실로 삼아 군사 6천여명을 한국에 진주시켰다. 청나라 황제 덕종(德宗)은 그가 책봉한 조선 국왕의 뜻에 반대하는 군란을 묵과할 수 없으므로 그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군대를 직접 파견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청군은 대원군을 압송함으로써 그 표면적 임무는 끝냈다.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 강화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은 그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그러던 중 1884년 10월 반청(反淸)의 기치를 내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청국(淸國)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등조선통상교섭사절(駐等朝鮮通商交涉事節)로 삼아 내정간섭 체제 수립을 추진하였다. 조선 조정이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수교를 계속 추진한 것은 청국으로부터의 이런 압박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조선 조정으로서는 서구 열강과의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이 곧 중국의 압박을 저지하거나 벗어나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던 듯하다.{7} 조선 국왕의 이런 태도는 이홍장과 위안스카이가 그를 강제 퇴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일 정도로 진지하고도 단호하였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직접 끌어들이는 것을 시도하였다. 이른바 제1차 한.러 밀약사건(1882년 9월~ 1885년 7월), 제2차 한.러 밀약사건(1886년)은 그런 시도가 사전에 탄로난 결과였다. 조선 조정은 청의 종주관계 강조가 새로운 국제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이에 저항하였지만, 서로 다른 두개의 질서가 공존하는 양재(兩載)의 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8}

{7}▶註;『영국 등 서양 열강과의 연속적인 수교는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시급히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8}▶註;『임규형 저술 “한로밀약(韓露密約)과 그 후의 한로관계(韓露關係). 한로관계(韓露關係) 1백년사(一百年史) 1984년” 참조.』

서양 열강과의 잇딴 국교 수립은 제국주의 체제로의 흡인보다 자립(自立)의 길을 찾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군왕은 청군이 진주(進駐)한 지 열흘밖에 안 된 시점인 1882년 8월 5일 교유문(敎諭文)을 통해 개국, 개화가 불가피한 점에 대해 “밀려오는 외세를 과거처럼 척화(斥和)로 응대하면 전쟁만 하게 되고 그 결과는 고립무원 끝에 스스로 붕망(崩亡)하게 될 것이며, 싸워서 일시 이긴다고 해도 결국은 매한(梅恨)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개국, 개화를 하면 기독교가 퍼질 것을 우려하나, 우호를 맺는 것[聯好]과 포교(布敎)를 금하는 것[禁敎]은 별개 문제로서 만국공법에 근거하여 입약통상(立約通商)을 해도 하루아침에 우리의 정교(正敎)를 버리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강약의 형세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데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면 저들이 우리를 모멸하고 넘겨보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9}고 하였다. 군왕의 이러한 대외개방 자세는 구국의 최선의 길로서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청년 국왕 고종은 1881년 1월 초 조사(朝士) 가운데 영명(英明)한 자 12명을 선발하여 비밀리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해{10} 일본 정부의 내무성(內務省), 문부성(文部省), 사법성(司法省), 공부성(工部省), 외무성(外務省), 육군성(陸軍省), 대장성(大藏省), 세관(稅關) 등을 시찰하여 그 운영방식을 조사해 오게 하였다. 개화를 목표하여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는 서양식 국가운영 방식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4개월 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은 각각 시찰기를 작성하여 군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가운데 외무성과 세관을 시찰한 민종묵(閔鍾默)은 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이란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국왕 열람용으로 준비된 이 보고서는 단순한 조약집이 아니라 항목별 분류에 의한 형세 분석판이었다.
  
{9}▶註;『고종황제실록(高宗皇帝實錄) 권 19, 광무(光武) 19년 8월 5일.』

{10}▶註;『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高宗) 18 년 9월 초 1일조; 허동현(許東賢) 저술 “근대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 연구-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본관(日本觀)과 국가구상(國家構想) 2000년 참조.』

이 보고서는 일본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이루어진 상거래와 상세(商稅)의 현황, 1858년의 미국과 체결한 조약을 필두로 1871년 청국(淸國)과의 조약까지 23개 조약의 간추린 내용, 각국거유조례(各國居留條例), 세관규례(稅關規例) 등을 차례로 소개하였다.{11} 이 조사는 물론 일본 당국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만, 항목별 분류에 의한 전체 형세 분석은 어디까지나 조사자에 의;한 것으로, 당시 조선 관리들의 정세 파악력을 보여주는 예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향후 군왕의 국제조약에 관한 구체적 지식도 이에 힘입은 것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각국조약을 펴낸 민종묵은 귀국 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취임하여 외교, 통상 분야의 직무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1898년부터는 수년 간 탁지부 대신으로서 외부 대신을 겸임할 정도로 이 분야의 전문관료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런 인물인 만큼 그가 통상과 조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조선왕조,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력의 기반과 관련해 중요시할 만하다. 이 보고서는 서문에 해당하는 일본상세론예(日本商稅論例)에서 “통상(通商)이란 것은 오늘날의 시세(時勢)에서 대단히 중요한 나랏일로서 이는 저울의 원리와 같이 저쪽이 무거우면 이쪽은 가벼운 것이 되어 아주 작은 빠짐이 있어도 눈 앞에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법(稅法)은 “항구에 들어오는 물화(物貨)에 대해 내가 원하지 않으면 세금을 올려 저지하고 내가 많이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세금을 줄여 들어오게 하는 것이므로 가격을 파악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제어를 잃지 않아야 나라에 이익이 되고 백성이 손실을 입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1}▶註;『윤정 저술 “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의 편찬목적과 성격에 대한 고찰” 서울 국제법 연구 제8권 제1호. 2001년 7월.』

일본의 사정에 대해서는 1858년으 5개국과의 수조약에서는 서양인들의 위협 가운데서도 주류세(酒類稅) 100의 15, 수입품에 대해 100의 20, 수출품에 대해서는 100의 5를 부과하여 자기의 권리를 잃지 않았으나 1862년 이후로는 주류세가 100분의 6 이하로 떨어지고 다른 세목도 재조정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18 년간 물가가 오르고 국가재산이 모두 고갈되고 민생이 곤궁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무역은 왕성한 것보다 자주(自主)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과세(課稅)는 많은 것보다 균등하게 하여 해가 도지 않도록 하면 자연히 교역이 왕성해지고 수세가 많아지는 것이라 하였다. 글고 세법의 요체는 오로지 조규(條規)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힘의) 강약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니 이것을 무형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조규가 없이는 상법(商法)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조규에 대한 조사와 기록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양식 조약과 통상 세법에 관한 한국 최초의 공식 조사, 정리라고 할 수 있는 일본각국조약의 서문에 나타나는 조약과 통상에 관한 인식은 곧 조선 조정의 조약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할 만하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힘이란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규정을 만들지 않거나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 준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조선 조정의 외교자세로서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는 조약에 대한 조선 조정의 인식과 자세는 외국과 체결한 조약들에 대한 편찬작업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궁내부안(宮內府案)이란 사료에 의하면 일본의 조약체결 실태에 대한 보고서인 1881년의 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 이후 1885년부터 정부가 조약집 편간사업을 계속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체결된 조약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중앙의 관련 관서나 개항장에 근무하는 관리들에게 우선적으로 보급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편간사업은 실무상의 효용성에 앞서 조약 내용의 이(利), 불이(不利)를 떠나 일단 합의에 체결된 것이면 준수해야 한다는 의식 없이는 계속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각국약장합편(各國約章盒篇)으 1887년 서문은 이런 의식을 직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서문{12}은 외교에서는 신의(信義)가 중요하고, 그 신의는 예의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언어와 문자가 서로 다른 나라 사이에 예의를 지켜 대우하고 신의로 관계를 맺어 애정으로 약서(約書)를 제정하여 맹부(盟府)에 싣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 내용을 출판해서 백성들이 알도록 하면, 이 책으로 인해 다른 여러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다른 나라도 이로 인해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곧 양국의 영원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일은 결국 백성을 위해 이익을 구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동맹국가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신의를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며 동시에 천하 각국의 행복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조선 조정 나름의 새로운 국제관이 잘 반영된 글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12}▶註;『외부 대신에 해당하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식(趙秉式)이 썼다.』

◆ 국제법에 근거한 국제(國制; 헌법)의 제정.

한국이 서양의 국제법을 준수하려는 의식은 대한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7년 10월에 출범한 대한제국은 1899년 6월 23일 제국(帝國) 운영에 필요한 규칙을 제정할 목적으로 교정소(校正所)를 설치하였다. 이 부서는 같은 해 8월 17일에 국제(國制)를 마련하여 황제에게 올려 채택되었다. 이때 서양인 고문관으로 미국인 C. W. LeGendre(한국식 이름은 李善得), C. R. Greathouse, 영국인 J. McLeavy Brown(한국식 이름은 柏貞安) 등도 의정관(議定官)으로 참여하였다. 전문 9개조로 된 국제(國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는 바 자주적인 독립 주권을 갖는 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는 5백년간의 전래(傳來)를 거치고 이후로 뻗쳐 만고(萬古)에 불변할 전제정치(傳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하시니 공법(公法)에 이르는 바 자립정체(自立政體)이다.

제4조 대한제국(大韓帝國) 신민(臣民)이 태황천제(太皇天帝)가 향유하는 군권(君權)을 침손할 행위를 하게 되면 그 기행(己行), 미행(未行)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국내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시어 편제를 정하고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법률을 제정해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效放)하여 국내법률도 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 복권을 명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정법율(自定法律)으 예이다.

제7조 대한제국(大韓帝國)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행치이(自行治理)이다.

제8조 대한제국 태황천제(太皇天帝)께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출척(黜陟), 임면(任免)을 행하시고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처탈(處脫)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다.

제9조 대한제국 태황천제께서는 각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을 파견, 시찰하게 하시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하시니 공법에 이르는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다.

국제(國制)는 황제 전제정치의 제국인 것을 선언하고, 황제 절대권과 신민의 도리를 밝히고, 육해군 통솔권, 법률제정권, 행정통치권, 관리임면, 출척, 포상권, 외교권 등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 9개조 중 5개조에 걸쳐 각 권한의 근거로 공법(公法)을 명시한 점이다. 이 공법이 당시에 알려진 만국공법 곧 국제법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제에서 거론한 공법의 용어는 구체적으로 Johannes 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의 그것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나와 있다. 이 연구가 밝힌 공법회통의 해당 조관 및 일본제국 헌법과 대조해 보자.

여기서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C. Bluntschli의 공법회통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제국 헌법과 비교할 때, 국제의 제2조, 제3조, 제4조의 조항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제국 헌법에도 제1, 3, 4조에 있어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국제 5~9의 5개조 내용이 일본제국 헌법에서 5, 6, 9, 10, 11, 12, 13, 14, 16 등 9개조로 분산되어 있어 이를 직접 따르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제가 전문 9개조로 간략한 형식을 취한 것은 처음부터 공법회통의 68장에 집약되어 있는 국가의 법적 요건을 취할 의도가 컸던 것을 의미한다.

1896년 5월 9일 조선왕조의 학부(學部) 편집국은 미국 선교사 William A. P. Martin이 번역한 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을 보급판으로 간행하였다. 그 간행 서문에 의하면, 3개월 전 국왕이 일본군이 감시하는 경복군에서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임시로 옮겨 자주권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애쓰는 마당에, 위로 조정의 대신료(大臣僚)에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의 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날로 개명(開明)에로 매진하여 일군왕(一君王)의 통치를 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우해 이 책을 간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자주독립 국가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의 국제법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졌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런 의지와 의욕이 3년 뒤 국제(國制)의 제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 조약에 관한 국내법

조선왕조는 1876년부터 외국과 서양식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관한 법적 규정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 1894년에 제정된 명령반포식(命令頒布式)이 가장 앞선다. 그 제8조에 국서(國書), 조약(條約), 비준(批准) 등에는 반드시 어압(御押)으로 기명(記名)하고 어새(御璽)를 찍는다고 하였다.{13} 외국과의 외교적 행위에 대해서는 군주가 일체의 권한을가지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원칙만 언급한 것으로 조약체결의 절차에 대해서는 밝힌 바가 없다.

{13}▶註;『장정좌안(章程佐案)』(규장각도서 17237). 규장각도서 금호시리즈 근대법령 편. 의안(議案), 엄령(儼令) 상(上). 서울대학교 도서관, (1991) 79면.

그후 5년 뒤에 제정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9조는 황제가 조약 체결국에 사신을 파견(派遣), 주무(駐務)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모든 약조(約條)를 체결하는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황제가 타국과 외교의 모든 권한을 가지는 주체란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약체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헌법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는 앞에서 살폈듯이 공법회통(公法會通)의 국가 요건을 간명하게 취하여 반영한 것이므로 이런 세부적 사항이 언급될 자리는 아니다. 조약체결과 비준절차 등은 국제의 불위법(不位法)에서 찾는 것이 옳다.

1894년 5월 청국(淸國)과 일본은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 진압을 명분으로 한반도에 동시 출병(出兵)하였다. 이때 일본 정부는 농민반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정개혁(內政改革)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파견한 군대를 동학농민군의 점령지인 전주가 아니라 서울로 향하게 하였다. 8천명 규모의 일본군은 서울에 도착하여 국왕이 사용하고 있던 경복궁(景福宮)을 강점하기까지 하면서 미리 준비해온 내정개혁안의 채택 시행을 강요하였다. 이런 폭압적 상황은 1895년 8월 왕비를 시해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왕비는 삼국간섭(三國干涉){14}이 성공하는 상황을 보고 러시아, 미국의 힘을 빌려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러시아, 미국 공사관과 접촉하였다. 일본 측은 이를 간파하고 군대와 낭인들을 동원하여 10월 8일에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국왕은 이렇게 갈수록 더 심해지는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의 도움을 빌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기를 시도하여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은 왕권회복 차원에서 그간 일본 정부가 만든 내각제(內閣制)를 폐지하고 군주가 의정부(議政府)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형태로 의정부관제(議政府官制)를 새로 정하였다. 1896년 9월에 처음 행해진 이 관제는 1898년 6월, 1904년 3월 두 차례 개정을 거쳤다. 조약체결을 비롯한 중요한 외교정책에 대한 심의절차가 바로 이 의정부관제에 규정되어 있다.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강요한 조약들은 모두 1904년 2월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여기서는 3차 중 1904년 3월 개정의 것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14}▶註; 1895년 4월 23일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둥 반도를 획득했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국에 의해 반환을 요구받고 내놓은 사건.

그 제8조 4항에 따르면 국율조약(國律條約) 및 중요한 국율조건(國律條件)은 의정부 회의를 거친 후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승가(承可)를 청해야 하는 사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제정된 의정부회의규정(議政府會議規程) 제6조의 회의절차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즉 어떤 조약안이 의정부 회의에 회부되어 논의를 거쳤으면, 회의결과를 정리해 군주에게 아뢰는 문서를 작성하여 의정(議政)과 주임대신(主任大臣)이 이에 서명(署名)을 하고, 그것에 대한 황제의 의견 지시가 나오면 다음 회기(會期)에 이를 낭독하여 결과를 알렸다. 한편, 황제가 재가를 한 조약문은 어압(御押)과 어새(御璽)를 찍는 절차를 거쳐 관보(官報)를 통해 반포하는 순서가 규정되었다. 조약문에 대한 어압, 어새 날인은 곧 비준서 작성에 해당한다,

1899년 8월 개정의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15}는 제1조에 의정부가 추인(追認)하는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에 관한 사항, 각 부(部), 원(院) 청의(請議)에 의해 의정부에서 의논해 올리는 사항 등은 중추원에서 심사, 의정한다고 하였다. 조약체결에 관한 건은 곧 각 부, 원이 청의하여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쳐 올리는 사항에 속한다. 중추원은 황제 추천, 사회단체 추천의 의원들로 구성되는 심의기관으로, 의정대신 회의를 거친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다시 재심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중추원은 곧 의회 기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익에 관련되는 조약은 이로부터의 동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15}▶註;『중추원관제개정건(中樞院官制改正件)』1899년 8월 25일. 1899년 칙령 제34호. 앞의 책, 474-475면.

이상의 두 가지 사실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1899년 이후 외국과의 조약체결에 관한 국내법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의정부 회의와 중추원 심의를 이중적으로 거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군주의 승인도 중추원의 동의 없이는 실행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런 법규가 있는 한 1904년 2월부터 일본이 한국에 강요한 국권침탈 관련 조약들도 모두 이 소정(所定)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출처; 서울대학교 출판부 編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해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계속}


1904‾1910年韓国国権侵奪条約たちの手続上不法性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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