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日帝)의 침략자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삼는데 기여했던 원흉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그 이토를 허얼빈역에서 거구려드려 불멸의 애국 지사로서 추앙받고 있는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광석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관직에 올라 진해현감을 지낸 바가 있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은 과거 초급 시험을 치러 진사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지만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가 두 살 때에 그의 일가는 아버지의 고향인 신천군 두라면으로 이사하였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대지주로 커다란 저택 안에 서당이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 신동이라 불렸다. 일곱 살 무렵부터 승마와 궁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두 살 대에 화승총으로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사냥 솜씨를 보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대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장남인 그를 엄하게 가르쳐 무예의 달인으로 키웠지만, 이 재능은 훗날 예기치 않은 곳에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1894년 전라도에서 봉기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은 삽시간에 전국 각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황해도 각지에서도 가난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악덕 관리를 추방하며, 높은 소작료를 거두어 사치스럽게 살고 있는 대지주를 습격하여 창고의 곡식을 도로 빼앗아 갔다.

대지주인 그의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지키려고 수백명의 젊은이를 고용하여 무장시키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면서 관군을 도와 농민군을 토벌하러 나섰다. 평소 개화사상을 주창하며 애국적인 발언을 하던 그의 아버지였지만, 갑부였던 만큼 관청에 적극 협력하여 혁명적인 농민군을 진압하는 반동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열여섯 살이던 안중근(安重根)은 주위의 부추김을 받고 진압군의 선두에 서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적인 혁명을 주도하던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합동공격으로 패배하고, 조선의 주권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강압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다감한 소년인 안중근이 편안히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혁명적인 농민군에 적대한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무렵 민씨 일파의 무정견한 개방 정책으로 프랑스인과 미국인들이 맹렬하게 그리스도교를 포교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잇었다. 1895년 지주인 그의 일족은 빠짐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열일곱 살인 안중근도 인생 문제에 관한 번뇌를 프랑스인 선교사에게 호소하다가 마침내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안중근은 어느 날 아버지가 청나라의 상인에게 모욕을 받은 것에 분노하여 그 상인을 뒤쫓아가 산속에서 엽총으로 사살한 사건을 일으켜 한때 몸을 피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가정에서도 가족간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말썽이 많아 여러 가지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결국 신앙을 갖고 나서 얌전해진 그는 그 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역시 신자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여 얼마 후 2남 1녀를 얻었다. 그러나 향학심이 강한 그는 홍석구(洪錫九)라는 한국식 이름을 쓰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에게 프랑스어와 서양 과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는 한편 세계사 책도 구하여 읽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이 잇달아 간행되었다. 그는 그러한 출판물을 애독하고 애국적인 논설에 감동하고 흥분하였다. 아무튼 그는 몇 년 동안 아무 불편함이 없는 유복한 환경에서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공공연하게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그러한 정세 속에서 헛되이 나날을 보내는 자신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우선 애국계몽운동을 실행하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겠다고 혼자서 결정하여 진남포로 가서 석탄상을 시작하였다.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런데 아음해인 1905년이 되자 러시아를 이긴 일본 침략자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무력(武力)으로 위압하여 빼앗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였다. 전국의 애국지사들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구국(求國)을 위한 투쟁에 떨쳐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편안하게 장사 따위나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격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항일투쟁(抗日鬪爭)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둘도 없는 효자인 그는 즉시 향리에 돌아가 복상하였다. 장남인 그는 아버지가 남긴 가산의 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한 해 동안 향리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듬해인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진보적 청년들이 눈부시게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안절부절 못하는 심경에 사로잡혔다. 1878년에 평안도 강서에서 출생한 안창호는 1902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06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청년들을 결속하여 비무력 반일운동(非武力反日運動) 비밀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동지들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사업을 시작하여 평양에 대성학교, 평안도 정주에 오산학교 등을 세워 뜻있는 청년들을 열광시켰다.

그 안창호 일행이 평양에서 연설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크게 반가워하며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에 벌써 세계 정세에 통달한 안창호의 열변을 듣고 완전히 심취하여 즉시 안창호와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조국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안중근은,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 가지 목표를 세우기로 하였다. 즉 첫째는 육영사업이고, 둘재는 산업진흥이며, 셋째는 항일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하여 우선 친구들과 함께 경영하던 석탄 상점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세우고, 곧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였다. 그는 이 학교에 안창호 등을 초빙하여 성대한 강연회를 열어 젊은 학생들의 가슴속에 애국심을 불어넣었다. 돌아오지 못한 밀사로 유명한 이준(李儁)도 이 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 행위는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 이듬해인 1907년에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구실로 황제 고종(高宗)을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한국의 주권을 남김없이 빼앗아가고 말았다.

군대 해산령을 들은 대한제국 육군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朴昇煥) 참령이 자결하고 그의 휘하 장병들이 일본군과 시가전(市街戰)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인중근은 통분한 나머지 밤새 통곡하였다고 한다. 역시 직접 행동을 일으켜 일본군을 조국에서 추방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는 투쟁할 만한 장소를 찾아 러시아의 연해주로 향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하여 한국 교민이 거주하는 연해주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고, 다시 중국 동북지방의 간도 일대를 찾아다니며 동포 청년들의 귈기를 호소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곤란에도 견디며 조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야만 합니다. 특히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지 정책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젊은이들은 모두 일어나 나와 함께 총을 들고 싸웁시다. 또한 소년들은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애국자가 되시오.”

이러한 그의 외침은 많은 청년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08년에 이범윤(李範允)이 3천여명의 젊은이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이범윤의 휘하에 들어가 대한의용군참모중장(大韓義勇軍參謨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에 임명되었다. 그는 6월에 3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다시 회령의 수비대를 쳐서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회령 부근에서 5천여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만나 접전을 벌이다가 패배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근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책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무력 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해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포들에게 협조를 호소했다.

이런 가운데 안중근은 1909년 3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인 가리에서 일본 침략자의 두목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이완용 등과 같은 매국노를 처단하기로 굳게 맹세하고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태극기에 혈서를 썼다. 같은 해 10월,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지들의 밀보를 받고 급히 근거지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애국적인 대동공보(大東公報)라는 민족 심문을 발행하던 동지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것을 신문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조선 지배를 완성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통감의 자리를 후임에게 넘겨주고 일단 일본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다시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허얼빈으로 가서 그곳에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귀국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만주 침략을 도모하기 위한 예비 행동이었다고 한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다시없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 평소 저격할 기회를 노리던 침략국의 거두가 비교적 행동하기도 쉬운 만주에 일부러 찾아와 줄 줄은 몰랐다. 그는 동지인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이토를 저격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10월 15일 기차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사람들 눈을 피해 22일 허얼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우덕순, 조도선 두 사람을 허얼빈역 앞의 정거장인 관성자에 대기시키고, 안중근은 단신(單身)으로 허얼빈역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허얼빈역의 연도에는 일찍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준비를 위하여 화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이토 일행이 지나가는 동청 철도(東淸鐵道)의 각 역과 철도에는 엄중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허얼빈역의 연도에는 수천의 러시아 군인들과 의장대가 정렬하고 외국의 사절단과 일본의 거류민들이 눈부시게 화려한 복장으로 열지어 서 있었다.

오전 9시 10분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허얼빈역의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오자, 축포가 메아리치며 장중한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득의만면한 이토의 뒤에 러시아 주청공사(駐淸公使)를 비롯하여 청나라의 고급 관리들이 줄지어 있고, 이토 바로 옆에는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와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비서ㅗ관 모리가 따르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이토는 러시아군 의장대를 통과하여 각국 영사관 직원들이 도열해 있는 앞자리에 가서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방향을 바구어 장교단이 서 있는 쪽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러시아 장교단 뒤에 숨어 있던 안중근이 사람들의 울타리를 밀어 헤치며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뛰어나와 권총을 들고 이토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하였다. 백발의 이토 히로부미는 불의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이어서 이토 곁에 있던 가와카미, 다나카, 모리에게 한 발씩 쏘아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을 내던지고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조선 독립 만세!”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토를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역 앞은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이내 대혼란에 빠졌다. 안중근은 그곳을 경비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출혈 과다로 25분 뒤에 숨을 거두고, 안중근은 일단 러시아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이틀 뒤인 28일에 일본 헌병대에 인도되었다.

공작(公爵)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애국 청년 안중근에게 허얼빈역에서 사살되었다는 뉴스는 금세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전해졌다. 이는 분명 세계를 경악하게 할 대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민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애국적인 쾌거에 환호성을 질렀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중국의 언론들은 “중국인 수십만이 해내지 못한 일을 작은 나라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안중근의 의거(義擧)를 매우 통쾌한 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토가 살해되어 크게 당황한 일제는 미친 듯이 날뒤며 전국 각지의 애국지사들을 이 사건의 관계자라 하여 총검거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결국 그와 함께 동지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고,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제는 이 공판이 국제화하여 세계의 여론이 끓어오를 것을 두려워하여 예심도 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공판을 진행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심문에 답변하는 대신, 우리 민족의 분노를 당당히 진술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최대의 적이요 만고의 역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야만 한다는 확신을 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으나, 이번 의거는 대한의용군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서 적장 이토를 살해한 것이지 결코 개인 자격으로 행한 행위는 아니다. 적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나를 형사 피고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이다.

내가 독립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전부 일본의 기만 정책 때문이다. 보라! 러일전쟁시에도 일본은 전쟁 목적의 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조선 사람은 그것을 믿고 일본군에 협력하고 일본의 승전(勝戰)을 축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사(大使)로 파견된 이토는 돈을 가지고 국적 일진회(一進會)의 두목들을 매수하여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매국 선언을 발표시키고 병력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황실과 정부를 위협하여 우리 주권을 짓밟는 5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일제히 항일(抗日)을 외치며 궐기하고,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죽어갔다.

우리 대한의 황제 폐하를 퇴위시키고 사법, 외교권을 박탈하고 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하는 등 이토의 죄상은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교활한 수단으로 조선 인민이 일본의 보호 정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허위 선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이토를 죽여 조국의 독립에 대한 정당성을 외치기 위하여 3년 전 본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나는 다시 언명한다. 내가 허얼빈에서 이토를 살해한 것은 이토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또한 우리가 일본 법정에서 일본의 재판을 받는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탓이다. 조국의 의병들이 항상 일본군과 싸우는 것도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4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조국을 위하여, 또한 2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적을 살해한 것이므로, 나의 목적은 이처럼 정의로운 것이다. 나는 국민 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몸바쳐 일을 끝냈을 뿐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일이므로 후회할 일은 없다. 나의 염원은 다만 조국의 독립, 이 한가지뿐이다.”

안중근의 연설을 듣고 있던 재판관이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하도록 주의시켜라.”라고 하자, 큰소리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나는 이토의 악랄한 정책을 어떤 방법으로든 세계에 폭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죄상 열다섯 가지를 주장하였는데, 그 냐용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일본 무사들을 시켜 황후 폐하를 시해항 죄. 두번째, 병력으로써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를 위협하여 5조약을 맺게 한 죄. 세번째, 다시 병력으로 위협하여 7조약을 맺게 한 죄. 네번째,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번째,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죄. 여섯번째, 양민을 다수 학살한 죄. 일곱번째, 이권을 모조리 강탈한 죄. 여덟번재, 교육을 방해하고 학교를 폐쇄한 죄. 아홉번째, 조선 백성들에게 신문을 못 보게 한죄. 열번째, 은행권을 강제로 발행하여 전국 재정을 고갈시킨 죄. 열한번째, 국채 1300만원을 강제로 한국에 부담시킨 죄. 열두번째, 동양 평화를 교란한 죄. 열세번째, 보호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불리한 시정을 한 죄. 열네번째, 일본 황제의 부친을 죽인 죄. 열다섯번째, 조선 국민이 분개하는데도 한국은 태평하다고 일본 황제와 세계 각국을 속인 죄.”

그러자 재판관은 당황하여 재판을 비공개로 하기로 하고 만장한 방청객들을 퇴장시키는 소란을 일으켰다. 공판 말미에 재판관이 “계획이 성공하면 자살할 예정이었나?” 라고 묻자 안중근은 안색을 고치며 “죽을 작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죽였던 것이므로 내가 죽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하였다. 가능한 한 살아남아서 정정당당하게 소신을 말하고 우리나라의 실정을 만국에 알리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죽으면 다시 천 사람 만 사람의 안중근과 우덕순이 나타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의 변론을 맡은 일본인 관선변호사는 “그의 범죄의 동기는 비록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곳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으며, 검사는 논고에서 그에 대해서 “안중근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서 한국인 가운데서도 특이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상당한 재산이 있어서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며, 지방의 명족이며 천주교 신자로서 성격은 매우 강직하며 의지가 강하고, 정치 사상이 철저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910년 2월 14일의 판결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기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재판관이 “판결에 불복할 것이라면 5일 이내에 항소하라.”고 하자 그는 태연히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진정코 미련이 생기지 않을 것이니 항소는 포기한다.”고 대답하면서 재판관을 조소하듯이 물었다.

“이보다 더 심한 형벌은 없는가?”

안중근은 사형 판결을 받고 나서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겨우 서론을 마쳤을 때 형집행 예정일이 되었다. 안중근은 미조부치 검사에게 부탁하여 그 논문이 탈고될 수 있도록 형집행을 15일간 연기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논문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은 채, 안중근은 3월 26일 오전 10시에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그는 사형을 받기 전에 동포 전체에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일제는 그를 칭송하는 한국 국민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하찮은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유해를 유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여순의 공동 묘지에 매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여순 감옥의 일본인 간수들은 그의 고결한 인격을 존경하였으며, 재판소 직원들과 취조관들도 앞을 다투어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간청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2백장 남짓의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죽어간 안중근의 애국적 정열은 그 후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서,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서도 “안중근 의사의 듯을 이어 궐기하자!”는 슬로건은 모든 애국적인 청소년들의 한결같은 표어가 되었다.

 


韓国の歴史人物 5.安重根(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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