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러시아에서 폴란드의 아이를 구출한 일본군





시베리아는 오랫동안, 폴란드 독립 주의자의 유형의 땅이었다.
1919년, 폴란드는 간신히 독립을 차지했지만, 극동에 사는 수십 만명의 폴란드인
특히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비참했다.

적어도 이 아이들만으로도 살리고 조국에 데려다 주고 싶다

그 해의 9월에 「폴란드 구제 위원회」가 조직 되지만
다음 20년 봄에는 폴란드와 소련·러시아와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1920~1921 폴란드·소련 전쟁)
고아들을 시베리아 철도로 돌려 보내는 것은 불가능이 되었다.

구제 위원회는 구미제국에 구조를 요구했지만, 죄다 거부되어
궁여 지책으로서 일본 정부에 구조를 요청하기로 해 외무성을 방문하고 원조를 간절히 원했다.

외무성은 일본 적십자사에 제의해 불과 17일 후에는 시베리아 고아 구제가 결정되었다
독립 얼마 되지 않은 폴란드란, 아직 외교관의 교환도 하고 있지 않는 놀랄 만한 즉석결단이었다.

시베리아 출병중 (1918~22) 의 제국 육군의 지원도 얻고, 결정의 불과 2주일 후에는, 56명의 고아 제일진이 도쿄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21년까지 5회에 걸쳐, 고아 375명이 일본 방문.
게다가 22년 여름에는 제2차 구제 사업으로서 3회에 나누고, 390명의 고아가 일본 방문했다.

일본에 도착해, 일본 적십자사의 극진한 보호를 받은 고아들은, 그 때의 추억을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의복을 열탕 소독된 것
지급된 유카타의 소매에 엿이나 과자류를 충분히 들어갈 수 있어 받아 감동한 것
특별히 야위고 있던 여자 아이는, 일본인의 의사가 걱정해 특별히 영양제를 주었지만,
몹시 맛있었기 때문에 하룻밤에 동료에게 전부 먹을 수 있어 버려 분했던 일, ,

일본 출발전에는 각자에게 양복이 신조 되어 한층 더 항해중의 추위도 고려되어 모사의 조끼가 지급되었다.
이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의류나 장난감의 선물을 했다.

요코하마항으로부터, 조국에 향하여 출발할 때, 어린 고아들은,
자기일 같이 돌본 일본인의 보모와의 이별을 슬퍼해, 승선하는 것을 울어 싫어했다.
부두의 고아들은, 「아리가트우」를 반복해, 「키미가요(일본국가)」를 제창 하고, 어린 감사의 기분을 나타냈다.

코베항으로부터의 출발도 동여`l로, 고아 한사람 한사람에게 바나나와 기념의 과자가 배부되어
많은 전송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행복을 빌면서, 눈물을 흘리며 배가 안보이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765명의 고아를 시베리아로부터 구출한 일본의 은혜를 폴란드인은 지금도 잊지 않는다

헨리크·새디즘 빈틈씨
헤세이 11년 8월에, 폴란드로부터 「제치·프오트크 소년 소녀 무용 합창단」이 일본 방문했을 때에 맡긴 메세지

「20 세기의 초, 고아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구해졌습니다.
시베리아에 있던 폴란드의 아이는, 다양한 열악한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 무서운 곳으로부터 일본에 데리고 가, 그 후, 조국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친절하게 해 준 것을 잊지 않습니다.
····(합창단은)
우리의 감사로 가득 찬 생각을 옮겨 주겠지요.
일본의 여러분, 고마워요.」
 새디즘 빈틈씨는 한층 더 「제일 소중히 하고 있는 것을 황실에 건네주어」라고 구출 당시의 사진을 맡겼다.「고아 수용소를 위문 한 황후폐하(테이메이 황후)에게 껴안았던 것이 잊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극동 위원회 부회장(당시 ) 야크브케비치씨

「일본인은 우리 폴란드와는 완전히 연고?`후 먼 이인종이다.
일본은 우리 폴란드와는 완전히 다른 지구의 반대 측에 존재하는 나라이다.
게다가, 우리 불운한 폴란드의 고아에게 쓰는 것도 깊게 동정을 대어
진심으로 연민의 정을 나타내 준 이상, 우리 폴란드인은 가슴 속 깊이 새겨 그 은혜를 잊을 것은 없다. ···

우리의 고아들을 자주 문병하러 와 준 유복한 일본인의 아이가, 고아들의 복장의 비참한 것을 보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가장 예쁜 의복을 벗어 주려고 하거나
머리카락에 결리본, 빗, 장식대, 그러고 보니 반지까지도 벗어 폴란드의 아이들에게 주려고 했다.
이런 일은 한 번이나 두 번은 아니다.자주 있었다. ···

폴란드 국민도 또 고상한 국민이기 때문에, 우리는 몇 시까지도 은혜를 잊지 않는 국민인 것을 일본인에 고하고 싶다.」
일본인이 폴란드의 고아를 위해서 다해 준 것은, 폴란드는 원래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

여기에, 폴란드 국민은 일본에 대해, 가장 깊은 존경, 가장 깊은 감명, 가장 깊은 감은, 가장 온이나 나무 우정,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해 하고 싶다.

95년 10월, 병등장 수컷 폴란드 대사가 8명의 고아를 공저 에 초대했을 때의, 있다 노부인의 코멘트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한번 더 일본에 가는 것이 생애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분들에 직접 인사를 하고 싶었다.더이상 그것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사로부터 공저에 불러 주셨다고 (들)물었을 때, 겨서라도, 묻고 싶었습니다.
왜는, 여기는 작은 일본의 영토도 (들)물었던 것.
오늘, 일본 분에게 나의 오랜 세월의 감사의 기분을 전해 있으면, 더이상 미련을 남길 것은 없습니다.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카운터 파트에서 폴란드의 사람들은 토고 원수, 노기 대장의 이름을 알고 있어요 , 일본은 훌륭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인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몹시 행복합니다와 들어 앙천 했다.
폴란드인이 이와 같이 친일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1) 러일 전쟁으로 작은 일본이 큰 러시아(폴란드인이 싫은 나라)를 다운시켰다.
(2) 일본 정부는 제1차 대전 후에 시베리아에 유형 떠날 수 있어 폴란드인의 고아 구제 요청을 폴란드 구제 위원회로부터 받았다.일본 적십자는 단기간에 765명의 고아를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일본에, 또 말·습관이 다르기 위해 고아 대리인 65명을 본국에서 초대해, 고아들에게 시중들게 한 병치료, 휴양을 시킨 후, 고아의 조국 복귀를 실현했다.(구제 위원회는 구미제국에 동일한 구제 요청을 냈지만 거부되었다)
(3) 그 후, 시베리아 고아는 폴란드에서 성장해, 조직 「극동 청년회」를 만들었다.나치스가 폴란드에 침공했을 때 이 청년회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 일본 대사관은 「극동 청년회」의 활동을 삼국 동맹을 방패에 몇 번이나 나치스로부터 옹호 했다.
(4) 제2차 대전 초기에 리투아니아 영사 스기하라천민은 본성의 비동의를 무시해 수천인의 유태계 폴란드인에 통행 비자를 발행, 나치스의 추궁으로부터 개방해 많은 인명을 구했다.
 폴란드는 오랫동안, 근린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계속 받아 온 나라에서, 상기와 같은 사건은 우호적인 일본의 인상을 폴란드에게 주어 그 결과적으로 친일파의 사람들이 대부분졌다고 생각된다.







ポーランド子供をロシアから救出

ロシアからポーランドの子供を救出した日本軍





シベリアは長い間、ポーランド独立主義者の流刑の地だった。
1919年、ポーランドはようやく独立を勝ち取ったが、極東に住む十数万人のポーランド人
特に親を失った子供たちは悲惨であった。

せめてこの子供たちだけでも生かして祖国に送り届けたい

その年の9月に「ポーランド救済委員会」が組織されるものの
翌20年春にはポーランドとソビエト・ロシアとの間に戦争が始まり、(1920~1921 ポーランド・ソビエト戦争)
孤児たちをシベリア鉄道で送り返すことは不可能となった。

救済委員会は欧米諸国に救助を求めたが、ことごとく拒否され、
窮余の一策として日本政府に救助を要請することにし外務省を訪れて援助を懇願した。

外務省は日本赤十字社に働きかけ、わずか17日後にはシベリア孤児救済が決定された
独立間もないポーランドとは、まだ外交官の交換もしていない驚くべき即断であった。

シベリア出兵中 (1918~22) の帝国陸軍の支援も得て、決定のわずか2週間後には、56名の孤児第一陣が東京に到着した。
それから、翌21年まで5回にわたり、孤児375名が来日。
さらに22年夏には第二次救済事業として、3回にわけて、390名の孤児が来日した。

日本に到着し、日赤の手厚い保護を受けた孤児たちは、その時の思い出をこう語った

日本に着いてすぐ衣服を熱湯消毒されたこと
支給された浴衣の袖に飴や菓子類をたっぷり入れて貰って感動したこと
特別に痩せていた女の子は、日本人の医者が心配して特別に栄養剤をくれたが、
大変おいしかったので一晩で仲間に全部食べられてしまって悔しかったこと、、

日本出発前には各自に洋服が新調され、さらに航海中の寒さも考慮されて毛糸のチョッキが支給された。
この時も多くの人々が、衣類やおもちゃの贈り物をした。

横浜港から、祖国へ向けて出発する際、幼い孤児たちは、
親身になって世話をした日本人の保母さんとの別れを悲しみ、乗船することを泣いて嫌がった。
埠頭の孤児たちは、「アリガトウ」を繰り返し、「君が代」を斉唱して、幼い感謝の気持ちを表した。

神戸港からの出発も同様で、孤児一人ひとりにバナナと記念の菓子が配られ、
大勢の見送りの人たちは子供たちの幸せを祈りながら、涙ながらに船が見えなくなるまで手を振っていた。

765名の孤児をシベリアから救出した日本の恩をポーランド人は今も忘れない

ヘンリク・サドスキさん
平成11年8月に、ポーランドから「ジェチ・プオツク少年少女舞踊合唱団」が来日した際に託したメッセージ

「20世紀の始め、孤児が日本政府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
シベリアにいたポーランドの子供は、さまざまな劣悪な条件にありました。

その恐ろしいところから日本に連れて行き、その後、祖国に送り届けてくれました。
親切にしてくれたことを忘れません。
・・・・(合唱団は)
私たちの感謝に満ちた思いを運んでくれるでしょう。
日本のみなさん、ありがとう。」
 サドスキさんはさらに「一番大事にしている物を皇室に渡して」と救出当時の写真を託した。「孤児収容所を慰問した皇后陛下(貞明皇后)に抱き締めてもらったことが忘れられない」と話したという。

極東委員会副会長(当時) ヤクブケヴィッチ氏

「日本人はわがポーランドとは全く縁故の遠い異人種である。
日本はわがポーランドとは全く異なる地球の反対側に存在する国である。
しかも、わが不運なるポーランドの孤児にかくも深く同情を寄せ、
心より憐憫の情を表してくれた以上、われわれポーランド人は肝に銘じてその恩を忘れることはない。 ・・・

われわれの孤児たちをしばしば見舞いに来てくれた裕福な日本人の子供が、孤児たちの服装の惨めなのを見て、
自分の着ていた最もきれいな衣服を脱いで与えようとしたり、
髪に結ったリボン、櫛、飾り帯、さては指輪までもとってポーランドの子供たちに与えようとした。
こんなことは一度や二度ではない。しばしばあった。・・・

ポーランド国民もまた高尚な国民であるが故に、われわれは何時までも恩を忘れない国民であることを日本人に告げたい。」
日本人がポーランドの孤児のために尽くしてくれたことは、ポーランドはもとより米国でも広く知られている。・・・

ここに、ポーランド国民は日本に対し、最も深い尊敬、最も深い感銘、最も深い感恩、最も温かき友情、愛情を持っていることを伝えしたい。

95年10月、兵藤長雄ポーランド大使が8名の孤児を公邸に招待した際の、ある老婦人のコメント

私は生きている間にもう一度日本に行くことが生涯の夢でした。
そして日本の方々に直接お礼を言いたかった。もうそれは叶えられません。
しかし、大使から公邸にお招きいただいたと聞いたとき、這ってでも、伺いたいと思いました。
何故って、ここは小さな日本の領土だって聞きましたもの。
今日、日本の方に私の長年の感謝の気持ちをお伝えできれば、もう思い残すことはありません。


 初めてポーランドを訪れた際、カウンターパートからポーランドの人たちは東郷元帥、乃木大将の名前を知ってますよ、日本は立派な国ですから日本人と共に仕事が出来るのは大変幸せですと聞かされ仰天した。
ポーランド人がこのように親日感を持っている理由は、
(1) 日露戦争で小さい日本が大きいロシア(ポーランド人が嫌いな国)をダウンさせた。
(2) 日本政府は第一次大戦後にシベリアに流刑されていたたポーランド人の孤児救済要請をポーランド救済委員会から受けた。日本赤十字は短期間に765名の孤児をウラジオストックから日本へ、また言葉・習慣が違うため孤児付添人65名を本国から招き、孤児たちに付き添わせ病気治療、休養をさせた後、孤児の祖国復帰を実現した。(救済委員会は欧米諸国に同様な救済要請を出したが拒否された)
(3) その後、シベリア孤児はポーランドで成長し、組織「極東青年会」をつくった。ナチスがポーランドに侵攻した時この青年会はレジスタンス活動に参加、日本大使館は「極東青年会」の活動を三国同盟を楯に幾度となくナチスから擁護した。
(4) 第二次大戦初期にリトアニア領事杉原千畝は本省の不同意を無視し数千人のユダヤ系ポーランド人に通行ビザを発行、ナチスの追及から開放して多くの人命を救った。
 ポーランドは長い間、近隣諸国から侵略を受けつづけてきた国で、上記のような出来事は友好的な日本の印象をポーランドに与え、その結果として親日派の人たちが多くなった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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