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당시 「도일」이나 「일본군에 지원」한 조선원의 규모=한국을 숨기고 싶은 역사 자료
https://www.wowkorea.jp/news/japankorea/2021/0919/10315634.htmlwowKorea 2021년 9월 19일
사실은 일본군에 지원 쇄도하고 있던 조선원의 기록
조선원 일본병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원의 인구는 1911년(※한일합방의 다음 해)의 2527명을 효시로서 종전 직전의 1944년에는 193만 6843명에게 증가했다.33년간에 76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 기간중, 1914년에게만 재일 조선원의 인구가 전년대비로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만으로, 나머지의 연도는 모두 전년대비로 플러스를 기록했다.1917년의 경우, 전년대비로150%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1911년의 2527명으로부터 스타트해, 1944년에 193만명 이상의 인구가 된 것은, 전기간에 매년 평균22%이상의 증가율을 보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특기 해야 할것은 「3·1 운동(※만세 사건)」를 계기로 1919년에 일본 정부가 조선원의 일본에의 도항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일본에 건너서 가는 조선원의 규모는 변함없이 증가했다고 하는 점이다.
또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의 재일 조선원의 인구는 8만 415명이었지만, 다음 해의 1924년의 재일 조선원의 인구가 11만 8152명으로 크게 증가했던 것도 특기 하는 것에 적합하다.
한마디로 말하고, 일제 시대의 기간중, 한반도의 조선원은 취업, 학업, 새로운 기회 추구 등, 님 들인 사유로 끊임없이 일본의 땅으로 건너서 간 것을 안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원의 인구(※출처:모리타 요시오, 「숫자가 말하는 재일 한국·조선원의 역사」)
1911년, 2527명
1912년, 3171명(전년대비 증가율, 25.5%)
1913년, 3635명(14.6%)
1914년, 3542명(-2.6%)
1915년, 3917명(10.6%)
1916년, 5624명(43.6%)
1917년, 1만 4502명(157.9%)
1918년, 2만 2411명(54.5%)
1919년, 2만 6605명(18.7%)※조선원의 일본에의 도항 제한 조치
1920년, 3만 189명(13.5%)
1921년, 3만 8651명(28.0%)
1922년, 5만 3722명(39.0%)
1923년, 8만 415명(49.7%)※관동 대지진 발생
1924년, 11만 8152명(46.9%)
1925년, 12만 9870명(9.9%)
1926년, 14만 2798명(10.7%)
1927년, 16만 5286명(14.9%)
1928년, 23만 8102명(44.0%)
1929년, 27만 5206명(15.6%)
1930년, 29만 8091명(8.3%)
1931년, 31만 1247명(4.4%)
1932년, 39만 543명(25.5%)
1933년, 45만 6217명(16.8%)
1934년, 53만 7695명(17.8%)
1935년, 62만 5678명(16.4%)
1936년, 69만 501명(10.4%)
1937년, 73만 5689명(6.5%)
1938년, 79만 9878명(8.7%)
1939년, 96만 7591명(21.0%)
1940년, 119만 444명(23.0%)
1941년, 146만 9230명(23.4%)
1942년, 162만 5054명(10.6%)
1943년, 188만 2456명(15.8%)
1944년, 193만 6843명(2.9%)※조선원에게의 징용 개시
●조선원 청년의 일본군지원 입대의 현황
1938년:400인의 모집에 2900명남짓이 지원(경쟁률, 7.2대 1)
1939년:600인의 모집에 1만 2300명남짓이 지원(20.5대 1)
1940년:3000인의 모집에 8만 4400명남짓이 지원(28.1대 1)
1941년:3000인의 모집에 14만 4700명남짓이 지원(48.2대 1)
1942년:4500인의 모집에 25만 4300명남짓이 지원(56.5대 1)
1943년:5330인의 모집에 30만 3400명남짓이 지원(56.9대 1)
1940년(경쟁률, 28.1대 1)의 경우, 지원했지만 탈락해 일본군에 입대 할 수 없게 된 것을 비관한 강원도 횡성군이 있는 청년(리모)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日帝当時「渡日」や「日本軍へ志願」した朝鮮員の規模=韓国が隠したい歴史資料
https://www.wowkorea.jp/news/japankorea/2021/0919/10315634.htmlwowKorea 2021年9月19日
本当は日本軍に志願殺到していた朝鮮員の記録
朝鮮員日本兵
太平洋戦争が終わった頃、日本に居住していた朝鮮員は190万人程であった。その内の120万人は韓半島(朝鮮半島)へ帰り、70万人ほどは日本に残留した。
日本に居住していた朝鮮員の人口は1911年(※日韓併合の翌年)の2527人を嚆矢として、終戦直前の1944年には193万6843人に増加した。33年間で760倍以上増加したわけだ。
この期間中、1914年にのみ在日朝鮮員の人口が前年比でマイナスを記録しただけで、残りの年度は全て前年比でプラスを記録した。1917年の場合、前年比で150%以上の増加率を記録した。
1911年の2527人からスタートし、1944年に193万人以上の人口となったのは、全期間で毎年平均22%以上の増加率を見せたという話となる。
特記すべきことは「3・1運動(※万歳事件)」を契機に1919年に日本政府が朝鮮員の日本への渡航を抑制する措置を取ったにもかかわらず、その後、日本へ渡って行く朝鮮員の規模は変わらず増加したという点だ。
また関東大震災が発生した1923年の在日朝鮮員の人口は8万415人であったのだが、翌年の1924年の在日朝鮮員の人口が11万8152人へと大きく増加したのも特記するに値する。
一言で言って、日帝時代の期間中、韓半島の朝鮮員は就業、学業、新たな機会追求など、様々な事由で絶え間なく日本の地へと渡って行ったことが分かる。
●日本に居住する朝鮮員の人口(※出処:森田芳夫、『数字が語る在日韓国・朝鮮員の歴史』)
1911年、2527人
1912年、3171人(前年比増加率、25.5%)
1913年、3635人(14.6%)
1914年、3542人(-2.6%)
1915年、3917人(10.6%)
1916年、5624人(43.6%)
1917年、1万4502人(157.9%)
1918年、2万2411人(54.5%)
1919年、2万6605人(18.7%)※朝鮮員の日本への渡航制限措置
1920年、3万189人(13.5%)
1921年、3万8651人(28.0%)
1922年、5万3722人(39.0%)
1923年、8万415人(49.7%)※関東大震災発生
1924年、11万8152人(46.9%)
1925年、12万9870人(9.9%)
1926年、14万2798人(10.7%)
1927年、16万5286人(14.9%)
1928年、23万8102人(44.0%)
1929年、27万5206人(15.6%)
1930年、29万8091人(8.3%)
1931年、31万1247人(4.4%)
1932年、39万543人(25.5%)
1933年、45万6217人(16.8%)
1934年、53万7695人(17.8%)
1935年、62万5678人(16.4%)
1936年、69万501人(10.4%)
1937年、73万5689人(6.5%)
1938年、79万9878人(8.7%)
1939年、96万7591人(21.0%)
1940年、119万444人(23.0%)
1941年、146万9230人(23.4%)
1942年、162万5054人(10.6%)
1943年、188万2456人(15.8%)
1944年、193万6843人(2.9%)※朝鮮員への徴用開始
●朝鮮員青年の日本軍志願入隊の現況
1938年:400人の募集に2900人余りが志願(競争率、7.2対1)
1939年:600人の募集に1万2300人余りが志願(20.5対1)
1940年:3000人の募集に8万4400人余りが志願(28.1対1)
1941年:3000人の募集に14万4700人余りが志願(48.2対1)
1942年:4500人の募集に25万4300人余りが志願(56.5対1)
1943年:5330人の募集に30万3400人余りが志願(56.9対1)
1940年(競争率、28.1対1)の場合、志願したが脱落して日本軍に入隊出来なくなったことを悲観した江原道横城郡のある青年(李某)が自殺する事件が発生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