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벗겨져 산을 초록으로 할 구실로 한국인을 산으로부터 내쫓아 생활의 기반을 빼앗은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1/24/2020112401633.html조선일보 (한국어) 2020년 12월 10일
100년전, 700미터 이하의 저지대는 하게야마였던~일제는 주민을 미개인 환경 파괴범이라고 봐 내쫓았다
▲박·소크콘 교수는 논문으로 조선 총독부와 큐슈 제국대학이 각각 1915년과 1934년에 작성한 식생 분포도를 거듭하고 지도에 나타냈다.자료 국립공원 공단
일제 강제 점령 기간, 덕평(트크폴) 봉일대의 화전의 마을.
논문의 저자는 박·소크콘 국립 쥰텐 대학 산림 자원·조원 학부 교수로, 일제 강제 점령 기간, 식물학자, 나카이 타케시 유키노부와 제국대학 연습숲관계자가 기록한 지리산 관련 문헌 4권을 번역해 당시의 상황을 분석했다.동논문에 의하면, 100년전의 지리산의 모습은 지금의 식생과 완전히 차이가 났다고 한다.
불명료한 정국이 계속 된 조선 말기, 산림 관리가 온전히 되지 않고, 지역 주민이 퇴비나 연료, 농기구 재료등을 얻기 위해서 산림 벌채를 계속했기 때문이다.도쿄 제국대학 연습숲보고서에는 1925년 당시 , 지리산 일대의 약70%가 일시적 있다 있어는 영구적무입목지(나무가 대부분 없는 산림)에서, 수림을 형성하는 장소는28%였다고 있다.
식물군락도 역시 현재와는 분명히 차이가 났다.조선 총독부와 큐슈 제국대학이 각각 1915년과 1934년에 작성한 식생 분포도와 2018년 국립공원 공단 정밀 식생도를 비교하면 적송숲은 18.18%로부터 7.29%에 급감해, 몬고리나라 군락은 11.87%로부터 41.78%에 급증한 것을 알았다.이것은 길고 지리산권이 보존되어 자연스러운 숲의 천이 과정이 진행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한편, 당시 기술된 문헌은 「일제 강제 점령 기간, 일본 제국대학이 지리산에 연구 목적으로 연습숲(현재의 학술숲)을 설치해, 조림 사업을 진행시키면서 지역 주민의 화전과 산림 벌채를 금지해 산림 보호에 기여했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박·소크콘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로 「단편적으로 해석하면 일본 제국대학이 지리산의 숲의 보전에 힘쓴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진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일축 했다.
「당시 , 지리산에 연습숲을 설치한 대학 중 큐슈 제국대학과 쿄토 제국대학은 관련 학과의 농학부가 없는데 연습숲을 설치했다.이것은 명확하게 연구 목적보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연습숲을 설치했다고 추측된다.실제로 지역 주민에게 연습숲에서 벌채한 나무나 생산한 숯을 판매한 기록도 있는 것 같다.즉 연습숲은 식민지 수탈이 목적이었다고 하는 추측이다.」
박 교수는 덧붙여 「지금의 자로 당시의 지역 주민들의 산림 이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로서 「당시의 선조에게 저치산지는 보존 대상이 아니고 유일한 생계의 수단이었다.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층의 인식으로 고름 `″들을 마치 미개인 환경 파괴범과 같이 산으로부터 내쫓았다」라고 이야기했다.
「연습숲설치에 의해서 지리산에서 살아 온 선조는 산으로부터 내쫓아져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나는 이러한 선조들과 지금의 국립공원 내부나 근린에서 사는 거지화한 지역 주민이 동등이라고 보고 있다.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해 지역민을 관리 대상이 아니고 국립공원 보전을 위한 협력자로서 거지가 되지 않게 정부가 시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큐슈 대학 대학원 농학 연구원
큐슈 제국대학 농학부는 1919년 설치이므로 기사는 거짓말
100년전, 우리의 삼림.하게야마에 어린 소나무만
https://www.yna.co.kr/view/AKR20090908123300063연합 뉴스 (한국어) 2009년 9월 8일
100년전, 한국 산림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조선 임야 분포도
100년전 우리 쿠니야마숲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8일, 국립 산림 과학원에 의하면, 1910년에 제작된 「조선 임야 분포도」를 보면, 숲의 구성은 큰 나무의 숲(손슨님) 32%, 젊은 나무의 숲(치스림) 42%, 하게야마(무림모크치) 26%였다.
한국 지역은 백두산맥에 일부 큰 나무가 남아 있을 뿐 해발이 낮은 저지대에는 하게야마가 대부분을 완수했다.
100년전 우리 쿠니야마숲은 범이 출몰하는만큼 고목이 울창한 것이라고 하는 예상과는 별도로, 하게야마 투성이였던 것이 밝혀진다.
산림 과학원 관계자는“100년전 우리 쿠니야마숲의 모습을 보이는 유일한 지도에서 몹시 중요한 자료”라고 이야기했다.
日帝は禿げ山を緑にする口実で韓国人を山から追い出し生活の基盤を奪った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1/24/2020112401633.html朝鮮日報 (韓国語)2020年12月10日
100年前、700メートル以下の低地帯は禿山だった~日帝は住民を未開な環境破壊犯と見なして追い出した
▲パク・ソクコン教授は論文で朝鮮総督府と九州帝国大学がそれぞれ1915年と1934年に作成した植生分布図を重ねて地図に示した。資料国立公園公団
日帝強制占領期間、徳坪(トクピョン)峰一帯の焼き畑の村。
「母の山」智異山(チリサン)の100年前の姿を調べた論文が発表された。11月16日、国立公園論文公募展で最優秀賞を受賞した<日帝強制占領期間、文献を中心にした智異山国立公園の時代的状況考察>だ。
論文の著者はパク・ソクコン国立順天大学山林資源・造園学部教授で、日帝強制占領期間、植物学者、中井猛之進と帝国大学演習林関係者が記録した智異山関連文献4冊を翻訳して当時の状況を分析した。同論文によれば、100年前の智異山の姿は今の植生と全く違っていたという。
不明瞭な政局が続いた朝鮮末期、山林管理がまともになされず、地域住民が堆肥や燃料、農機具材料などを得るために山林伐採を継続したからだ。東京帝国大学演習林報告書には1925年当時、智異山一帯の約70%が一時的あるいは永久的無立木地(木が殆どない山林)で、樹林を形成する場所は28%だったとある。
植物群落もやはり現在とははっきりと異なっていた。朝鮮総督府と九州帝国大学がそれぞれ1915年と1934年に作成した植生分布図と2018年国立公園公団精密植生図を比較するとアカマツ林は18.18%から7.29%に急減し、モンゴリナラ群落は11.87%から41.78%に急増したことが分かった。これは長く智異山圏が保存され、自然な森の遷移過程が進んだものと解釈される。
一方、当時記述された文献は「日帝強制占領期間、日本帝国大学が智異山に研究目的で演習林(現在の学術林)を設置し、造林事業を進めながら地域住民の焼き畑と山林伐採を禁止して山林保護に寄与した」と記述した。
しかし、パク・ソクコン教授は本紙との通話で「断片的に解釈すれば日本帝国大学が智異山の森の保全に尽くしたように見えるが、歴史的真実はそうではない」と一蹴した。
「当時、智異山に演習林を設置した大学のうち九州帝国大学と京都帝国大学は関連学科の農学部がないのに演習林を設置した。これは明確に研究目的より経済的利益を創出するために演習林を設置したと推測される。実際に地域住民に演習林で伐採した木や生産した炭を販売した記録もあるらしい。つまり演習林は植民地収奪が狙いだったという推測だ。」
パク教授は付け加えて「今の定規で当時の地域住民たちの山林利用を判断してはならない」として「当時のご先祖に低地産地は保存対象でなく唯一の生計の手段だった。日本人たちは植民地支配層の認識で彼らをあたかも未開な環境破壊犯のように山から追い出した」と話した。
「演習林設置によって智異山で暮らしてきたご先祖は山から追い出されて生活の基盤を失うことになった。私はこれらのご先祖達と今の国立公園内部や近隣で暮らす乞食化した地域住民が同等とみている。過去の歴史を教訓にして地域民を管理対象でなく国立公園保全のための協力者として乞食にならないように政府が市民を助けるべきだと思う。」
九州大学大学院農学研究院
九州帝国大学農学部は1919年設置なので記事は嘘
100年前、私たちの森林。禿山に幼い松のみ
https://www.yna.co.kr/view/AKR20090908123300063聯合ニュース (韓国語)2009年9月8日
100年前、韓国山林はどんな姿だったのか。
▲朝鮮林野分布図
100年前我が国山林はどんな姿であったか。
8日、国立山林科学院によると,1910年に制作された「朝鮮林野分布図」を見ると、森の構成は大きい木の森(ソンスンニム) 32%、若い木の森(チスリム) 42%、禿山(ムリムモクチ) 26%だった。
韓国地域は白頭山脈に一部大きい木立が残っているだけ海抜が低い低地帯には禿山が大部分を成し遂げた。
100年前我が国山林は虎が出没する程古木がうっそうとしたことという予想とは別に、禿山だらけだったことが分かる。
山林科学院関係者は"100年前我が国山林の姿を見せる唯一の地図で大変重要な資料"と話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