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전파의 루트는 일본→한반도
2005년, 오카야마현 히코자키 패총의 죠몽 시대 전기( 약 6000년전)의 지층으로부터 벼의 플랜트·오팔이 발견되고 있어 죠몽 중기에는 벼농사(밭벼)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학설이 다수 나왔다.
근년, 장강 문명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에 따라, 벼농사는 장강 하류역의 수도 경작을 발상으로 하는 설이 유력시 되고 있다.
죠몽 시대의 유적으로부터 출토하는, 벼의 세포 형태의 규산 화석이 열대 쟈포니카인 것.또, 사토 요우이치로우(시즈오카 대학 조교수)가, 장강 하류역의 몇개의 유적으로부터 출토한 탄화미 20 알갱이로부터, DNA를 꺼내 조사한 결과, 가보토 유적으로부터 출토한 탄화미 2알갱이가, 열대 쟈포니카인 것이 판 모`세 했다.
벼의 DNA나 연대 측정에 의해, 현재는, 강남→일본→조선(남부) 루트가 지지를 받고 있다(조선의 벼와 일본의 벼의 DNA에 공통성이 없는 일이 원인).
요동 반도나 조선 북부에서의 물코다 자취가 근대까지 발견되지 않는 것, 한반도에서 확인된 탄화미가 기원 전 2000년이 최고이며, 밭농사미의 확인 밖에 잡지 못하고, 일본에서(보다)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 극동 아시아에 있어서의 쟈포니카종의 벼의 유전 분석에 있고,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로부터 쟈포니카종의 유전자의 일부가 확인되지 않는 것등의 복수의 증거로부터, 수도는 대륙으로부터의 직접 전래 루트(대마도 난류 루트·동남아시아로부터 남방 전래 루트)에 의한 전래인 학설이 재검토되어 일본에서 한반도에 전해진 가능성을 지적한다.
중국 강남 지방으로부터, 장강 문명(포함한 열대 쟈포니카종의 벼)이, 세트가 되어 이 열도에 유입하고 있었다.
유전자 공학의 분야로부터의 연구의 결과에서도, 중국 남부에서 일본에 직접 전래한 설이 유력하고, 거의 모든 학계에서 정설이 되어 있다.이것은 중국 정부 기관이 20년 이상 걸치고 만주에서 실시한 품종의 조사에 의하는 것.이 조사에 의해 한반도 경유로 일본에 벼농사가 전래한 가능성이 없어졌다.
또 중국 의 벼농사 연구계에서는 수도종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전파 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게 되어 있다.
A와 B의 유전자는 각각 온대 쟈포니카와 열대 쟈포니카라고 하는 품종의 특유 유전자다.
중국은 물론 인디카종, 열대 쟈포니카, 온대 쟈포니카 등, A로부터 G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한반도의 미는 B로부터 G까지의 6 종류가 갖추어져 있지만, A만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기온이 낮으면 존재할 수 없는 유전자이기 때문에 중국 북부에서(보다) 북쪽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재배벼에 관한 타네오태학문적 연구」(마츠오 타카시령저)
왕래가 활발하게 되면 그렇구나, 많은 종류의 유전자를 가지는 요네가 들어오는 확률이 높아지지만, 일본에는 2 종류 밖에 없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이것이 벼농사 개시의 초기부터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부터, 미의 전래는 극히 한정된 회수로 특정의 지역으로부터 전래한 것을 안다.
근년, 탄소 14 연대 측정법이라고 하는 최신의 연대 측정법의 성과로 한반도의 벼농사보다 일본 분이 꽤 낡은 것이 알게 되고 있다.일본의 벼농사 개시는 밭벼 재배로 6700년 정도전까지, 수도 재배로 3200년 정도전?`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판명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한반도에서는 수도 재배는 1500해정도전까지 밖에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점, 큐슈 북부와 재배법이 아주 비슷하는 것이나 유전자 학문적으로 일본의 고대미에 만주로부터 들어간 미의 유전자가 교잡한 미가 많은 일등에서, 수도는 일본에서 한반도에, 밭벼는 만주 경유로 한반도에 전해졌던 것이 판명되었다.중국 정부의 연구기관에서도 조사가 진행되어 틀림없다고 하는 결론이 나와 있다.
또, 중국 남부의 일본의 미의 기원과 추정되는 지역은 열대 쟈포니카도 온대 쟈포니카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양자를 1 품종씩 가져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한반도의 미는 B의 유전자가 70%를 차지하므로, 미가 한반도에 도입된 초기 단계에서 B의 유전자가 많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으로부터 2 종류의 유전자를 가진 미가 한반도에 건넜지만, A의 온대 쟈포니카종은 한반도에 뿌리 내리지 않고 B의 유전자만이 퍼져, 거기에 만주로부터 미가 들어 오고, B의 유전자를 가지는 미와 교잡했다고 생각하면 한반도의 미에 유전자적인 설명이 붙는다.
중국에는 모든 유전자가 만편 없고 있다의로, 특정의 종류의 유전자를 가지는 미만을 한반도에게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덧붙여 일본의 품종 개량 기술은 나라~가마쿠라 시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아스카 시대에도 인의 초`I별 기술등이 확립하고 있어, 5 세기무렵에는 단위 수량이 아시아에서 톱 클래스가 되어 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 했을 때에 조선에 일본의 경작 기술이 이출 되어 단위 수량이 병합전에 비해 2.2배라고 하는 폭발적 증가를 보았지만, 이것은 관개 설비의 외, 식물 방역, 시비법의 전수에 의하는 것이다.단위 수량의 증가는 도전에 있어서의 생활의 안정을 가져와, 식료 계획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섭취 칼로리가 하루 쯤병합전에 비해 한 명 당 400칼로리, 섭취 단백질량이 한 명 당 7그램이나 증가했다.영양상태의 큰 개선등에 의해 병합 후의 조선의 인구는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중국도 조선과 동일한 정도의 수량인 것 등을 보면 일본의 벼농사 기술은 20 세기 초두의 아시아에서는 뛰어나고 톱이었던 것이 방문한다.
20 세기 초기의 충청북도의 벼농사
종 선별 하지 않는 파종 뿌릴 뿐 못자리 모종 잡기 후 방치해, 다음 해의 파종의2-3히쿠마에 청초를 말린 것을 비료로서 혼합하는 모내기 난잡하게 심는 비료 격년으로 퇴비를 베푼다
稲作伝播のルートは日本→朝鮮半島
かつては遼東半島→北朝鮮周りの陸路ルートが考えられていたが、遼東半島及び北朝鮮が今でも稲作に適さないこと、稲作が伝播した年代が今より寒気(弥生時代は今より1-2℃気温が低いとされる)だったことから今は支持されていない。(古墳時代は今と同じ程度、飛鳥・奈良時代の5-7世紀は今より1-2℃気温が低く、750年頃を境に温暖に転じ、今より1-2℃気温が高かったとされ、920年頃を境に寒冷に転じ、今と同じ気温、江戸時代の17-19世紀は小氷期で、今より2-3℃低かったとしている。)
2005年、岡山県彦崎貝塚の縄文時代前期(約6000年前)の地層から稲のプラント・オパールが見つかっており、縄文中期には稲作(陸稲)をしていたとする学説が多数出た。
近年、長江文明の全貌が明らかにされるにつれ、稲作は長江下流域の水稲耕作を発祥とする説が有力視されている。
縄文時代の遺跡から出土する、稲のプラントオパールが熱帯ジャポニカであること。また、佐藤洋一郎(静岡大学助教授)が、長江下流域のいくつかの遺跡から出土した炭化米20粒から、DNAを取り出して調べた結果、河姆渡遺跡から出土した炭化米2粒が、熱帯ジャポニカであることが判明した。
稲のDNAや年代測定により、現在は、江南→日本→朝鮮(南部)ルートが支持されている(朝鮮の稲と日本の稲のDNAに共通性が無い事が原因)。
遼東半島や朝鮮北部での水耕田跡が近代まで見つからないこと、朝鮮半島で確認された炭化米が紀元前2000年が最古であり、畑作米の確認しか取れず、日本より遡れないこと、極東アジアにおけるジャポニカ種の稲の遺伝分析において、朝鮮半島を含む中国東北部からジャポニカ種の遺伝子の一部が確認されないことなどの複数の証拠から、水稲は大陸からの直接伝来ルート(対馬暖流ルート・東南アジアから南方伝来ルート)による伝来である学説が見直され、日本から朝鮮半島へ伝わった可能性を指摘する。
中国江南地方から、長江文明(含む熱帯ジャポニカ種のイネ)が、セットとなってこの列島に流入していた。
遺伝子工学の分野からの研究の結果でも、中国南部から日本へ直接伝来した説が有力であり、ほぼすべての学界で定説になっている。これは中国政府機関が20年以上かけて満州で行った品種の調査によるもの。この調査により朝鮮半島経由で日本に稲作が伝来した可能性がなくなった。
また中国の稲作研究界では水稲種は日本から朝鮮半島に伝播したという説が有力になっている。
米には品種特性を決定づける遺伝子が7種類ある。中国の遺伝子をA-Gとし、このうち古代から現代に至るまで日本で発見された米の遺伝子は2つしかない。日本に存在する遺伝子をAとBとする。
AとBの遺伝子はそれぞれ温帯ジャポニカと熱帯ジャポニカという品種の特有遺伝子だ。
中国はもちろんインディカ種、熱帯ジャポニカ、温帯ジャポニカなど、AからGまですべて揃っている。
朝鮮半島の米はBからGまでの6種類が揃っているが、Aだけは存在しない。これは気温が低いと存在できない遺伝子のため中国北部より北では存在できないためだ。「栽培稲に関する種生態学的研究」(松尾孝嶺著)
往来が盛んになればなるほど、多くの種類の遺伝子を持つ米が入る確率が高まるが、日本には2種類しかないのが確認されていて、これが稲作開始の初期から広く分布していることから、米の伝来はごく限られた回数で特定の地域から伝来したのが分かる。
近年、炭素14年代測定法という最新の年代測定法の成果で朝鮮半島の稲作より日本の方がかなり古いことが分かってきている。日本の稲作開始は陸稲栽培で6700年程度前まで、水稲栽培で3200年程度前まで遡ることが判明している。
これに対し朝鮮半島では水稲栽培は1,500年程度前までしか遡れない点、九州北部と栽培法が酷似していることや遺伝子学的に日本の古代米に満州から入った米の遺伝子が交雑した米が多いことなどから、水稲は日本から朝鮮半島へ、陸稲は満州経由で朝鮮半島へ伝わったことが判明した。中国政府の研究機関でも調査が進み間違いないという結論が出ている。
また、中国南部の日本の米の起源と推定される地域は熱帯ジャポニカも温帯ジャポニカも同時に存在しているので、両者を1品種ずつ持ってきたと考えられる。
また朝鮮半島の米はBの遺伝子が70%を占めるので、米が朝鮮半島に導入された初期段階でBの遺伝子が多く伝わ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から2種類の遺伝子を持った米が朝鮮半島に渡ったものの、Aの温帯ジャポニカ種は朝鮮半島に根付かずBの遺伝子のみが広まり、そこに満州から米が入ってきて、Bの遺伝子を持つ米と交雑したと考えると朝鮮半島の米に遺伝子的な説明が付く。
中国にはすべての遺伝子が満遍なくあるので、特定の種類の遺伝子を持つ米だけを朝鮮半島に伝えるのは不可能だ。
なお、日本の品種改良技術は奈良~鎌倉時代に飛躍的に伸びたが、飛鳥時代にも籾の選別技術等が確立しており、5世紀頃には単位収量がアジアでトップクラスになっている。
日本が朝鮮を併合した時に朝鮮に日本の耕作技術が移出され、単位収量が併合前に比べて2.2倍という爆発的増加をみたが、これは灌漑設備の他、植物防疫、施肥法の伝授によるものだ。単位収量の増加は挑戦における生活の安定をもたらし、食料計画の研究資料によると摂取カロリーが一日あたり併合前に比べて一人あたり400カロリー、摂取タンパク質量が一人あたり7グラムも増えた。栄養状態の大きな改善などにより併合後の朝鮮の人口は2倍以上に増加した。
中国も朝鮮と同程度の収量であったことなどをみると日本の稲作技術は20世紀初頭のアジアでは飛び抜けてトップであったことが伺える。
20世紀初期の忠清北道の稲作
種選別 しない 種まき 蒔くだけ 苗代 苗取り後放置し、翌年の種まきの2-3日前に青草を乾かしたものを肥料として混ぜる 田植 乱雑に植える 肥料 隔年で堆肥を施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