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원고 4명은 징용공이 아니게 모집 광고를 보고 온 노동자」
http://news.jtbc.joins.com/html/501/NB11720501.htmlJTBC 2018.11.1
아베 수상은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한국인은 격노해?원고 4명은 징용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1941년에 일본의 구인 광고를 보고 객지벌이하러 온 단순한 지방 노동자인데.
재일아침-선인의 도래 및 인양에 관한 경위, 전시중의 징용 노무자에 대해」
(기사 자료 쇼와 34년 7월 11일:쇼와 35년 2월 외무성 발표집 제 10호부터 발췌)1.(발췌) 1939년말 현재 일본 내지에 거주하고 있던 아침-선인의 총수는 약 100만명가, 1945년 종전 직전에는 그 수는 약 200만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증가한 약 100만명 가운데, 약 70만명은 자로부터 내지에 일자리를 요구해 온 개별 도항과 출생에 의한 자연 증가에 의한이며, 나머지의 30만명의 대부분은 공 광업, 토목 사업등에 의한 모집에 따라 자유 계약에 의거해 내지에 도래한 것이어, 국민 징용령에 의해 도입되어 이른바 징용 노무자의 수는 극히 소부분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는, 당시 , 소정의 임금등이 지불되고 있다.
원래 국민 징용령은 아침-선인(당시는 물론 일본국민)에만 한정하지 않고, 일본국민 전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일본 내지에서는 벌써 1939년 7월에 시행되었지만, 아침-선에의 적용은, 가능한 한 삼가 간신히 1944년 9월에 지연줄, 처음, 아침-선으로부터 내지에 배웅해지는 노무자에 대해 실시되었다.
격이라고 이른바 아침-선인 징용 노무자가 도입된 것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1945년 3월 이후는 관부간의 통상 운항이 두절 했기 때문에 그 도입은 사실상 곤란과 )까지의 단기간.
2, 종전 후, 재일아침-선진`l의 약 75%가 아침-선에 인양 나막신이, 그 귀환 상황을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까지의 사이에, 귀국을 희망하는 아침-선인은, 일본 정부의 배선에연줄, 약 90만명, 개별적 인양로 약 50만명 합계 약 140만명이 아침-선에 인양 나막신.
오른쪽 인양에 용이라고는, 복원 군인, 군속 및 동원 노무자등은 특히 우선적 편의가 주어졌다.
(2) 그 다음에 일본 정부는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지령에 근거해 1946년 3월에는 잔류아침-선인 전원 약 65만명에 대해 귀환 희망자의 유무를 조사해, 그 결과, 귀환 희망자는 약 50만명으로 말하는 것으로 아개가, 실제로 아침-선에 인양 나막신의 것은 그 약 16%, 약 8만명에 지나지 않고, 잔여의 것은 자로부터 일본에 남는 도를 선택했다.
(3) 덧붙여 1946년 3월의 미소 협정에 근거해, 1947년 3월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지령에 의해, 북조선 인양 계획을 세울 수 있어 약 1만명이 신청했지만, 실제로 북조선에 귀환한 것은 350명너무 가쓰타.
(4) 아침-선전쟁중은 아침-선의 남북 어느 지역에의 귀환도 실시해가쓰타가, 휴전 성립후남선에는 상시 우편선이 있다 게여름의 것으로, 1958년말까지 수천인이 남선에 인양 나막신.
북조선에는 직접적인 우편선은 여전히 없지만, 홍콩형 `o사정등으로 수십명이, 자로부터의 비용으로, 우편선을 찾아내고, 북조선에 인양 나막신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해 아침-선에 인양하지 않고서, 자로부터의 의사로 일본에 잔것의 대부분은 일찍부터 일본에 와 주 해 생활 기반을 쌓아 올리고 있던 사람.전시중에 도래한 노무자나 복원 군인, 군속 등은 일본 내지에 친숙함이 적은 만큼, 종전 후일책에 잔것은 지극히 소수이다.
3, 즉 현재 등록되어 있는 재일아침-선인의 총수는 약 61만이지만, 최근, 관계성의 당국에 대하고, 외국인 등록표에 대해서, 하나 하나 도래의 사정을 조사한 결과, 오른쪽 중 전시중에 징용 노무자로서 온 것은 245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키라등일까하고.
그리고, 전술대로, 종전 후, 일본 정부로서는 귀국을 희망하는 아침-선인에는 상시 귀국의 도를 열어, 실제로 귀국한 사람이 다수 있다 나름으로 연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전기 245명을 포함해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에연줄 일본에 류자 또 일본 생의 것이다.
했지만 연줄 현재 일본 정부가 본인의 의지에 반하고 일본에 두고 있는 아침-선인은 범죄자를 제외해 1명도 없다.
【재일아침-선인의 와 주특별 내역표】
등록 재일아침-선인원수 611085인
《내역》
(1) 소재 불명의 것 13,898명
(1956년 8월 1일 이후 등록히츠지 전환해)
(2) 거주지의 분명한 것 597,187명(100%)
···(2)의 내역···
(A) 종전 전부터의 재류자 388,359명(65·0%)
내역
(이) 1939년 8월 이전에 와 주 한 것 107,996명(18·1%)
(로) 1838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사이에 와 주 한 것 35,016명(5·8%)
(하) 와 주시 불명의 것 72,036명(12·1%)
(니) 종전 전날 본성 173,311명(29·0%)
(B) 종전 후의 일본 생 및 입국자 208,828명(35·0%)
安倍「原告4人は徴用工じゃなく募集広告を見て来た労働者」
http://news.jtbc.joins.com/html/501/NB11720501.htmlJTBC 2018.11.1
安倍首相は真実を言っただけなのに何故韓国人は激怒してるの?原告4人は徴用がまだ始まってない1941年に日本の求人広告を見て出稼ぎに来たただの地方労働者なのに。
在日朝-鮮人の渡来および引揚げに関する経緯、戦時中の徴用労務者について」
(記事資料 昭和34年7月11日:昭和35年2月外務省発表集第10号より抜粋)1.(抜粋)1939年末現在日本内地に居住していた朝-鮮人の総数は約100万人であつたが、1945年終戦直前にはその数は約200万人に達していた。
そして、この間に増加した約100万人のうち、約70万人は自から内地に職を求めてきた個別渡航と出生による自然増加によるのであり、残りの30万人の大部分は工鉱業、土木事業等による募集に応じて自由契約にもとづき内地に渡来したものであり、国民徴用令により導入されたいわゆる徴用労務者の数はごく少部分である。
しかしてかれらに対しては、当時、所定の賃金等が支払われている。
元来国民徴用令は朝-鮮人(当時はもちろん日本国民であつた)のみに限らず、日本国民全般を対象としたものであり、日本内地ではすでに1939年7月に施行されたが、朝-鮮への適用は、できる限り差し控え、ようやく1944年9月に至つて、はじめて、朝-鮮から内地へ送り出される労務者について実施された。
かくていわゆる朝-鮮人徴用労務者が導入されたのは1944年9月から1945年3月(1945年3月以後は関釜間の通常運航が杜絶したためその導入は事実上困難となつた)までの短期間であつた。
2、終戦後、在日朝-鮮人の約75%が朝-鮮に引揚げたが、その帰還状況を段階的にみると次のとおりである。
(1)まず1945年8月から1946年3月までの間に、帰国を希望する朝-鮮人は、日本政府の配船によつて、約90万人、個別的引揚げで約50万人合計約140万人が朝-鮮へ引揚げた。
右引揚げにあたつては、復員軍人、軍属および動員労務者等は特に優先的便宜が与えられた。
(2)ついで日本政府は連合国最高司令官の指令に基づき1946年3月には残留朝-鮮人全員約65万人について帰還希望者の有無を調査し、その結果、帰還希望者は約50万人ということであつたが、実際に朝-鮮へ引揚げたものはその約16%、約8万人にすぎず、残余のものは自から日本に残る途をえらんだ。
(3)なお、1946年3月の米ソ協定に基づき、1947年3月連合国最高司令官の指令により、北鮮引揚計画がたてられ、約1万人が申し込んだが、実際に北鮮へ帰還したものは350人にすぎなかつた。
(4)朝-鮮戦争中は朝-鮮の南北いずれの地域への帰還も行わなかつたが、休戦成立後南鮮へは常時便船があるようになつたので、1958年末までに数千人が南鮮へ引揚げた。
北鮮へは直接の便船は依然としてないが、香港経由等で数十人が、自からの費用で、便船を見つけて、北鮮へ引揚げ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こうして朝-鮮へ引揚げずに、自からの意思で日本に残つたものの大部分は早くから日本に来住して生活基盤を築いていた者であつた。戦時中に渡来した労務者や復員軍人、軍属などは日本内地になじみが少ないだけに、終戦後日本に残つたものは極めて少数である。
3、すなわち現在登録されている在日朝-鮮人の総数は約61万であるが、最近、関係省の当局において、外国人登録票について、いちいち渡来の事情を調査した結果、右のうち戦時中に徴用労務者としてきたものは245人にすぎないことが明らかとなつた。
そして、前述のとおり、終戦後、日本政府としては帰国を希望する朝-鮮人には常時帰国の途を開き、現に帰国した者が多数ある次第であつて、現在日本に居住している者は、前記245人を含みみな自分の自由意志によつて日本に留まつた者また日本生れのものである。
したがつて現在日本政府が本人の意志に反して日本に留めているような朝-鮮人は犯罪者を除き1名もない。
【在日朝-鮮人の来住特別内訳表】
登録在日朝-鮮人数 611,085人
《内訳》
(1) 所在不明のもの 13,898人
(1956年8月1日以降登録未切替)
(2) 居住地の明らかなもの 597,187人(100%)
・・・(2)の内訳・・・
(A) 終戦前からの在留者 388,359人(65・0%)
うちわけ
(イ)1939年8月以前に来住したもの 107,996人(18・1%)
(ロ)1838年9月1日から1945年8月15日までの間に来住したもの 35,016人(5・8%)
(ハ)来住時不明のもの 72,036人(12・1%)
(ニ)終戦前の日本生れ 173,311人(29・0%)
(B) 終戦後の日本生れおよび入国者 208,828人(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