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있다 사이트의 발췌
(A)【락랑해중에 왜인 있어.나뉘어 백여국을 한다.세시를 이라고 래
헌견, 라고 말한다】·················「한서」지리뜻(연지)
(C)【회 계해외에 동쪽?사람(동〔어 시〕인) 있어.나뉘어 20여국을 한다.
세시를 이라고 래헌견, 라고 말한다】··········「한서」지리뜻(쿠레지)
(A)와(C)의 차이는, 「락랑해중」·「회 계해외」, 이라고 「백여국」·「20여국」
의 2개곳에 도착하고 차이가 있는 것은 압니다.후자의 「백여국」·「2
10여국」의 차이는 납득이 갈 곳이 있어요가, 전자의 「락랑해중」·
「회 계해외」, 에 대해서는, 논의가 나뉘는 곳은 있어요.
···, (이)가 하나산 핀은 다음과 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제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은, 「해중」과「해외」의 차이
에 대해입니다.
이 차이는 크고, 「한서」저자 반고는“있다 의도를 가진 차이”를 표현한
샀다, 라고 생각합니다만···동쪽?사람과 왜인은 서로 인종도 같이, 형제의 것
인 관계에 있지만, 완전하게 다른 나라·전혀 다른 나라로서의 의식 중(안)에서의 나타내
분에게 보입니다만.
그 의식이란, 쌍방의 위치 관계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표현한
샀다, 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됩니다.
같은 열도내에 존재하고 있고, 인종적으로는 별로 차이는 없지만, 근처끼리
정치 형태의 차이도 있어, 거기에 별로 사이가 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
일이지요.그리고 서로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 아래에서, 이러한 기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락랑해중」의 의미는, (당시 , 한반도나 왜인의 나라들은 락랑군
의 치하에 있었다고 하는 역사 상황속에서) 락랑군에 인접하는 바다,
의 안에 존재하는 섬들(대마도·이키)과 키타큐슈의 북해안 가의 나라들을 가리켰다
말로서 생각합니다.
(2) 「회 계해외」란, 회 계군치(현재의 소슈 근처인가)에서 보면,
와에는 황해라고 하는 넓은 바다가 있어요.회 계해중이라고 하면, 이 넓은 황해
(을)를 가리키는에 적당한 말이 됩니다.그런데 , 회 계해외라는 것이 된다
라고 넓은 황해를 넘고, 그 또 저 편으로 존재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그러면, 당연, 일본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것에
라고 옵니다.
결과, 일본해 연안에 퍼지는 지역에 사는 주민을 가리키는 것에 됩니다.
게다가 이 두 개의 민족국이 서로 서로 근접하는 위치 관계에 있던 것을 시
증거가, “동〔어 시〕인”이라고 하는 문자안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후루타씨의 발견에 의하는 것입니다만)
그, 문자에 잠복하는 장치를, 여기서 소개시켜 줍니다.
「동〔어 시〕인」(동쪽?사람)의〔어 시〕의 문자입니다.
이 문자에 대해서는, 타이틀의 설명속에서 썼습니다만,「물고기 헨」에 「시라고 하는 방(트크리)」로부터 성립되는 문자입니다.
이 안의, 「시」라고 하는 방(트크리)의 문자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개의 읽는 법이있어요.
*시→「제」, 「시」, 이라고 읽을 때는, 「좋다」 「이것」이라고 할 때의 대명에 사용하는 말
입니다.
*시→「티」, 이라고 읽을 때는, 「」 「경계」 「젓가락」이라고 하는 의미에 개나 지금
.즉, 「제일 가장자리」라고 할 때 사용되는 문자라는 것이 됩니다.
거기서,
「동시인」이 되면, “동쪽의 제일 가장자리의 민족”이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시」의 문자에 사카나(어) 편이 붙어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후루타씨는 풀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안의 「려」의 몬지에 도착해입니다.
3세기 「위지」 중(안)에서는 모두, 이 「려」의 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 송의 시대가 되면 달라집니다.
「고구려」의 「려」의 문자가, 5 세기의 「송서」속에서는 「려」라고, 말마변의 첨부 있어
이것에는,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의입니다.
(원가 16년〔439〕) 태조, 북투천도 바라,?에 조 해 말을 송.?,
말8백 마리를 헌두. ··················( 「송서」고구려전)
〔주, 「?」(은)는, 고구려왕(장수왕)의 다음의 왕의 이름입니다〕
즉, 「?」왕 때, 말이 특산물로서 송왕조에 헌상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어, 그 특산물의 말에 연관되고, 「고구려」의 「려」의 글자에 말마변을
붙이고, 서류상의 기재시에는 「고구려」라고 하는 이름의 국명에 바꾸어 사
라고 있었습니다.
후루타씨는, 여기로부터 힌트를 얻었습니다.
「시」에 「물고기」편을 붙여〔어 시〕라고 하는 문자의 창출로.
즉, 「한」의 시대부터, 이 특산물에 연관된 이름의 붙이는 방법에 유래하며 있어의 것이라면.
그처럼 읽으면, 그 수수께끼는 눈앞에 분명해지는 것을 압니다.
「동〔어 시〕인」의 의미란,
“열도의 제일 동쪽의 가장자리의, 물고기를 헌상 해 온 민족”에서 만났다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열도에 사는 「왜인」의 근처의 제일 동쪽의 가장자리에 사는, 물고기를 헌상 해 온민족””에 대해서, 「동〔어 시〕인」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었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왜인」 동린의 제일 가장자리에 사는 민족으로, 물고기를 헌상 해 나무
국”의 위치 증명과 「해중」·「해외」의 위치 증언을 곱하면,
“ 「동〔어 시〕국」”의 등장이 되어 집니다.
또, 더욱 후루타씨는, 「시」의 문자안에 흥미 츠츠의 발견 을 하고 있던 것
입니다.
以下、あるサイトの抜粋
(A)【楽浪海中に倭人有り。分かれて百余国を為す。歳時を以て来り
献見す、と云う】・・・・・・・・・・・・・・・・・『漢書』地理志(燕地)
(C)【会稽海外に東鯷人(東〔魚是〕人)有り。分かれて二十余国を為す。
歳時を以て来り献見す、と云う】・・・・・・・・・・『漢書』地理志(呉地)
(A)と(C)の違いは、「楽浪海中」・「会稽海外」、と「百余国」・「二十余国」
の二箇所について違いのあることはわかります。後者の「百余国」・「二
十余国」の違いは納得のいくところがありますが、前者の「楽浪海中」・
「会稽海外」、については、議論の分かれるところではあります。
・・・、がハナサンピンはつぎのように考えています。
まず、前提として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は、「海中」と「海外」の違い
についてです。
この違いは大きく、『漢書』著者班固は“ある意図を持った違い”を表現した
かった、と思うのですが・・・東鯷人と倭人はお互い人種も同じく、兄弟のよ
うな関係にあるが、完全に違う国・全然別の国としての意識の中での表し
方にみえますが。
その意識とは、双方の位置関係をハッキリ区別できるように、表現した
かった、と云う理由があったからだ、と、思われます。
同じ列島内に存在していて、人種的にはあまり差異は無いが、お隣同士
政治形態の違いもあり、それにあまり仲が良く無いらしいと思っての
ことでしょう。でお互いをハッキリ区別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考えのもとで、このような記載となったものと思います。
(1)「楽浪海中」の意味は、(当時、朝鮮半島や倭人の国々は楽浪郡
の治下にあったという歴史状況の中で)楽浪郡に隣接する海、そ
の中に存在する島々(対馬・壱岐)と北九州の北岸沿いの国々を指した
言葉として考えます。
(2)「会稽海外」とは、会稽郡治(現在の蘇州あたりか)から見ると、そ
こには黄海という広い海があります。会稽海中といえば、この広い黄海
を指すに相応しい言葉になります。ところが、会稽海外ということになる
と、広い黄海を越えて、そのまた向こうに存在る海を指すもので、
黄海の外とは、黄海から対馬海峡を越えてそのまた向こうの海、と
いうことになります。そうすれば、当然、日本海を指す言葉ということにな
ってきます。
結果、日本海沿岸に広がる地域に住む住民を指すことになってきます。
さらに、この二つの民族国がお互い近接し合う位置関係にあったことを示
す証拠が、“東〔魚是〕人”という文字の中に存在していたのです。
(もちろん古田氏の発見によるものですが)
その、文字に潜むカラクリを、ここで紹介させてもらいます。
「東〔魚是〕人」(東鯷人)の〔魚是〕の文字です。
この文字については、タイトルの説明の中で書きましたが、「魚ヘン」に「是という旁(ツクリ)」から成り立つ文字です。
この中の、「是」という旁(ツクリ)の文字には大きく分けて二つの読み方があります。
*是→「ゼ」、「シ」、と読むときは、「よい」「これ」というときの代名に使う辞
です。
*是→「ティ」、と読むときは、「ふち」「さかい」「はし」という意味につかいま
す。つまり、「一番端っこ」というときに使われる文字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そこで、
「東是人」となれば、“東の一番端っこの民族”という意味となります。・・が、
この場合は違います。
「是」の文字にサカナ(魚)偏が付いているのです。
このナゾを古田氏は解いたのです。
それは、「高句麗」の中の「麗」の文字についてです。
三世紀「魏志」の中では全て、この「麗」の文字を使っています。
ところが、宋の時代となると違ってくるのです。
「高句麗」の「麗」の文字が、五世紀の『宋書』の中では「驪」と、馬偏の付い
た文字に変化して使われているのです。
これには、歴史的な由来があるのです。
(元嘉十六年〔439〕)太祖、北闘せんと欲し、璉に詔して馬を送らしむ。璉、
馬八百匹を献ず。・・・・・・・・・・・・・・・・・・(『宋書』高句驪伝)
〔注、「璉」は、高句麗王(長寿王)の次の王の名です〕
つまり、「璉」王のとき、馬が特産物として宋王朝に献上されたことを述べて
いるのであり、その特産物の馬に因んで、「高句麗」の「麗」の字に馬偏を
付けて、書類上の記載時には「高句驪」という名の国名に取り替えて使っ
ていたのです。
古田氏は、ここからヒントを得たのです。
「是」に「魚」偏を付けて〔魚是〕という文字の創出へと。
つまり、「漢」の時代から、この特産物に因んだ名前の付け方に由来していたのだと。
そのように読めば、そのナゾは眼前に明らかとなってくるのが分かります。
「東〔魚是〕人」の意味とは、
“列島の一番東の端っこの、魚を献上してきた民族”であったと。
もう少し詳しく説明すると、
““列島に住む「倭人」の隣の一番東の端っこに住む、魚を献上してきた民族””に対して、「東〔魚是〕人」と名付け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この“「倭人」の東隣の一番端っこに住む民族で、魚を献上してき
た国”の位置証明と、「海中」・「海外」の位置証言を掛け合わせれば、
これはもう、当然、出雲から奈良へと連なる(「今で言う近畿王朝」以前の)国、
“「東〔魚是〕国」”の登場となってくるのです。
また、更に古田氏は、「是」の文字の中に興味津々の発見をされていたの
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