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한국인은, 일본을 공격한다든가 말하지만 , 정쟁에 의한 중우 정치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부를까가 좋은 사례로서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을 채택한다.


사례 연구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군사도 배도, 일 극히 없어져 그렇게도의 대군도 고국에 돌아온 것은, 셀수있는 정도 밖에 없었다」

역사가 트키디데스가 이와 같이 적는 만큼, 페로포네소스 전쟁(전 431년-전 404년)에 있어서의 아테네군의 시칠리아 원정 작전은 처참한 싸움이 되었습니다.


원래 전쟁이 발발한 당시의 아테네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적국 스파르타가 보유하는 우세한 육군의 침공을 정면에서 막는 것은 위험이라고 판단해, 아테네군으로서 지상에서 방세 작전을 전개하면서, 우세한 아테네 해군을 가지고 스파르타의 동맹국에 해상으로부터 공격을 더해 시간을 들여 소모시킨다고 하는 전략을 책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에 걸치는 칩거로 아테네 시가에 역병이 발생하면,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목숨을 잃어 버려, 또 상정 이상으로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장기화한 것으로, 아테네 시민의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에 있어서 전황을 일변시키는 한 방법으로서 아르키비아데스의 주도아래에 실시되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아테네군은 많은 병사를 잃어, 아테네가 페로포네소스 전쟁에 패배하는 요인이나 되어 버렸습니다.왜, 이러한 사태가 되어 버렸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책 과정과 작전 지도의 관계를 모르면 안됩니다.


아테네의 정치 시스템과 시칠리아 원정 문제


아테네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프뉴크스라고 하는 언덕은 민회에 있어서의 논단.

페로포네소스 전쟁 당시로는 민중 선동을 실시하는 정치가가 복수 나타나 그것이 정책 결정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의 아테네의 정치 시스템은 민주제였습니다.의회에 해당되는 민회에서는 복수의 시민이 각 당 각파로 나누어져 있어 전쟁에 관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한 다음 다수결에 의해 결정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사후, 아테네의 민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시민은 복수 있었습니다만, 모두 시민을 선동하고 정치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역사가에게서는 선동정치가(데마고고스 demagogos)로 불리고 있었습니다.그 중에서도 특히 유력했던 정치가에게 페리클레스의 조카인 주전파의 아르키비아데스가 내려 그는 평화파의 니키아스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전 421년에 니키아스가 주도해 체결한 강화 조약에 의해서 당시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만, 조약으로 정해진 영토 반환이 진행되지 않았기(위해)때문에, 아르키비아데스는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르키비아데스는 전 415년, 시칠리아섬의 아테네가 있는 동맹국으로부터 원군의 요청이 있던 것을 받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재개해, 시칠리아에 원정군을 파견 해야 할것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아르키비아데스는 의회에서 의원에 일해 걸어 민회에서 시칠리아 원정군의 파견에 필요한 예산안을 심의하려고 했습니다.아르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에 필요한 부대 규모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 견적, 출동을 요청하는 군선의 수는 60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심의의 장소에서 이 작전을 어떻게 해서든지 중지에 몰아넣으려고 다음과 같이 발언해, 원래 시칠리아 원정의 필요가 있다 의 것인지 아닌지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문제로 했습니다.

「오늘의 백성 의회는, 시케리아(시칠리아)에의 원정군출항에 임하여, 우리들이 실시해야 할 준비의 실눈을 의논하기 위해서 개최되었다.그러나 여기서 사견을 말한다면, 우리들은 아직, 원정 그 자체의 시비를 검토해야 할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즉, 선대 파견이 과연 취해야 할 길인가 아닌가, 이것을 충분히 판별해야 하는 것이어, 중대한 작전을 의논하는에, 쓰는 것도 경솔하게 외국인의 감언에 유혹해지고 사려를 잘못해, 본래 우리들의 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닌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한다」(하30 페이지)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지가 퍼지지 않고, 추적할 수 있었던 니키아스는, 시칠리아 원정군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 한층 더 그 병력의 규모를 대규모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시민에게 원정군이 직면하는 문제의 심각함을 인상지워 작전의 중지에 동의 시키려고 했습니다만, 이것도 불발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 민회에서는 니키아스가 주장한 대규모 원정군의 편성에 대해서는 동의 해, 또 아르키비아데스인 만큼 작전의 지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니키아스도 지휘관으로서 이 작전에 참가시키는 것, 한층 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아르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의 양자를 쥐기 위해, 라마코스라고 하는 장군도 이 작전에서 지휘를 하게 하는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시칠리아 원정 작전은 개시되게 되었습니다.


초부터 파탄하고 있던 시칠리아 원정의 전략


아테네로부터 시칠리아까지의 원정군의 이동 경로.본국으로부터의 병참선이 성장해 잘랐기 때문에, 현지에 가까운 동맹국에 기지를 두는 것이 불가결했지만 , 원정군의 규모가 너무나 크게 동맹국이 원조를 거절한 것으로 작전은 한계를 보였다.


시칠리아를 향해서 출발해, 해로로 나아간 원정군은, 동맹국의 레기움으로 금족 되었습니다.

아르키비아데스의 계획으로서는, 레기움으로 기지를 개설해, 거기로부터 시칠리아로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아테네군의 규모가 너무나 대규모였었기 때문에, 레기움 정부는 아테네군을 성내에 받아 들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니키아스의 제안이 생각치 못한 형태로 아르키비아데스의 전략의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르키비아데스는 이대로 귀국하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저하하는 것을 무서워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아르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의 삼자 협의에서, 아르키비아데스는 당초의 전략 계획을 재검토해, 시칠리아에서 원정군에 기지를 제공하는 다른 나라를 찾아, 현지에서 충분한 체제를 정돈한 후에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한다고 할 방침을 주장했습니다.이것에 니키아스는 반대해, 아테네군은 시칠리아에서 적의 시라크사에 일격을 더했다면 즉시 귀국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이것은 군사적인 의미는 대해 있지 않습니다만, 본국에서 니키아스의 주장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고 기대되었습니다만, 당연히 아르키비아데스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라마코스는 지금부터 시라크사군에 직접적으로 쳐들어가는 전략을 주장했습니다만, 결국 삼자의 의견은 결정되지 않고, 최종적으로 라마코스는 아르키비아데스의 안에 동의 합니다.


그러나, 아테네 본국으로부터 아르키비아데스에 있어서 놀랄 만한 소식이 들어옵니다.아르키비아데스가 아테네 본국에서 고발되었습니다.

원정군이 아테네를 떨어진 다음에, 아르키비아데스의 정적은 신을 모독 한 용의로 아르키비아데스를 고소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이 고소를 받아 아르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 귀국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 적국의 스파르타에 망명해 버렸습니다.또 라마코스도 전사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원정군의 지휘관은 이 작전에 반대하고 있던 니키아스다만 한 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라크사에 대한 공위는 장기에 걸쳐서 계속 되었습니다만 전과가 부족하고, 본래이면 니키아스는 되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만, 이 시기가 되면 니키아스만이 작전의 책임을 지게 되기 위해, 자신의 판단으로 귀국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니키아스는 아테네 본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꺼내려고 대규모 증원을 파견하도록(듯이) 요청했습니다만, 니키아스의 본심과는 정반대로 대규모 원군이 실제로 이송되어 버렸습니다.니키아스는 더 이상의 증원을 얻어도 시칠리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본국에 있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하는 것을 무서워해 철퇴를 가능한 한 늦추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테네군의 전력은 착실하게 소모를 거듭해서 가 최종적으로는 시칠리아 원정군은 괴멸적인 손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칠리아 원정 작전의 교훈

아테네군에 있어서 시칠리아 원정 작전은 큰 실패였지만, 그것을 회피할 수 있을 기회는 1회만이 아니었습니다.

니키아스는 민회에서 아르키비아데스에 대한 반대 공작의 일환으로서 부대 규모의 확충을 주장해, 불필요할 정도로 시칠리아 원정의 리스크를 크게 했고, 아르키비아데스는 당초의 계획이 실행 불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원정 작전의 전체상을 재검토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아테네 본국은 작전이 진전하고 있는 한중간에 지휘관의 한 명을 고소해 망명시켜 버려, 라마코스가 전사한 후에 니키아스는 패전의 실패가 자신이 되는 것을 무서워해 철퇴의 결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아르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는 서로 스스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우선해, 군사적으로 필요한 처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중대한 실패에 연결되었습니다.

권력을 둘러싼 투쟁은 정치의 본질입니다만, 중요한 정책 결정을 적절히 하기 위해서는, 권력 투쟁의 레벨이 불필요하게 확대하고는 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아테네에서는 민주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정치가에게는 설명 책임이 있어, 시민의 의향이 정책의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만, 정치 제도 그 자체가 뛰어난 정치를 확증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시칠리아 원정의 사례로부터 읽어낼 수 있습니다.


http://militarywardiplomacy.blogspot.jp/2016/04/blog-post_17.html


韓国人に警告 衆愚政治の末路 アテネのシチリア遠征

韓国人は、日本を攻撃するとか言っているが、政争による衆愚政治がいかに悲惨な結果を招くかのよい事例としてアテネのシチリア遠征を取り上げる。


事例研究 シチリア遠征の失敗から学べること

「兵も船も、ことごく失われ、さしもの大軍も故国に帰り着いたものは、数えるほどしかいなかった」

歴史家トゥキディデスがこのように書き記すほど、ペロポネソス戦争(前431年-前404年)におけるアテナイ軍のシチリア遠征作戦は凄惨な戦いとなりました。


そもそも戦争が勃発した当時のアテナイ指導者だったペリクレスは、敵国スパルタが保有する優勢な陸軍の侵攻を正面から食い止めることは危険と判断し、アテナイ軍として地上で防勢作戦を展開しつつ、優勢なアテナイ海軍をもってスパルタの同盟国に洋上から攻撃を加え、時間をかけて消耗させるという戦略を策定していました。

しかし、長期にわたる籠城でアテナイ市街に疫病が発生すると、それでペリクレスは命を落としてしまい、また想定以上にスパルタとの戦争が長期化したことで、アテナイ市民の間で不満が高まっていました。


このシチリア遠征はアテナイにとって戦況を一変させる一手としてアルキビアデスの主導の下に実施されましたが、結果的にアテナイ軍は多くの兵士を失い、アテナイがペロポネソス戦争に敗北する要因とも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なぜ、このような事態になってしまったのかを理解するためには、当時の政策過程と作戦指導の関係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アテナイの政治システムとシチリア遠征問題


アテナイの中心部に位置するプニュクスという丘は民会における論壇。

ペロポネソス戦争当時では民衆扇動を行う政治家が複数現れ、それが政策決定を難しくしていたとされている。


当時のアテナイの政治システムは民主制でした。議会に当たる民会では複数の市民が各党各派に分かれており、戦争に関する重要な問題については議論した上で多数決により決定を下していました。

ペリクレスの死後、アテナイの民会で影響力を拡大していた市民は複数いましたが、いずれも市民を扇動して政治力を拡大しようとする傾向があり、歴史家からは扇動政治家(デマゴーゴスdemagogos)と呼ばれていました。その中でも特に有力だった政治家にペリクレスの甥である主戦派のアルキビアデスがおり、彼は和平派のニキアスと激しく対立していました。

前421年にニキアスが主導して締結した講和条約によって当時のアテナイはスパルタとの戦争を中断していましたが、条約で定められた領土返還が進んでいなかったために、アルキビアデスは戦争を再開するべきだと考えていたためです。


アルキビアデスは前415年、シチリア島のアテナイのある同盟国から援軍の要請があったことを受けて、スパルタとの戦争を再開し、シチリアへ遠征軍を派遣すべきことを強く主張します。

アルキビアデスは議会で議員に働き掛け、民会でシチリア遠征軍の派遣に必要な予算案を審議しようとしました。アルキビアデスはシチリア遠征に必要な部隊規模については最小限に見積り、出動を要請する軍船の数は60隻とされていました。


しかし、ニキアスは審議の場でこの作戦を何としても中止に追い込もうと次のように発言し、そもそもシチリア遠征の必要があるのか否かを次のように論じて問題としました。

「今日の民議会は、シケリア(シチリア)への遠征軍出航に際して、われらの行うべき準備の細目を議するために催された。しかしここで私見を述べるならば、われらはまだ、遠征そのものの是非を検討するべき段階に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つまり、船隊派遣がはたしてとるべき道か否か、これを充分に見極めるべきであり、重大な作戦を議するに、かくも軽々しく他国人の甘言に惑わされて思慮を誤り、本来われらの関与するべきではない戦争を始めることがあってはならぬと思う」(下30頁)

しかし、自分に対する支持が広がらず、追い詰められたニキアスは、シチリア遠征軍が任務を遂行するには、さらにその兵力の規模を大規模にすべきであると主張し、市民に遠征軍が直面する問題の深刻さを印象付け、作戦の中止に同意させようとしましたが、これも不発に終わりました。


ところが、民会ではニキアスが主張した大規模な遠征軍の編成については同意し、またアルキビアデスだけに作戦の指揮を委ねるのではなく、ニキアスも指揮官としてこの作戦に参加させること、さらに政治的に対立しているアルキビアデスとニキアスの両者を取り持つため、ラマコスという将軍もこの作戦で指揮をとらせることを決議しました。

こうした政治的妥協の産物としてシチリア遠征作戦は開始され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はじめから破綻していたシチリア遠征の戦略


アテナイからシチリアまでの遠征軍の移動経路。本国からの兵站線が伸びきったため、現地に近い同盟国に基地を置くことが不可欠であったが、遠征軍の規模があまりに大きく同盟国が援助を拒んだことで作戦は行き詰まりを見せた。


シチリアに向けて出発し、海路を進んだ遠征軍は、同盟国のレギウムで足止めされました。

アルキビアデスの計画としては、レギウムで基地を開設し、そこからシチリアへと侵攻する予定だったのですが、アテナイ軍の規模があまりに大規模であったため、レギウム政府はアテナイ軍を城内に受け入れることを拒否したのです。ニキアスの提案が思いがけない形でアルキビアデスの戦略の妨げとなりました。


しかし、アルキビアデスはこのまま帰国すれば自分の政治的影響力が大きく低下することを恐れ、何とか別の方法を見出そうとしました。

そこで、アルキビアデス、ニキアス、ラマコスの三者協議で、アルキビアデスは当初の戦略計画を見直し、シチリアで遠征軍に基地を提供する別の国を探し、現地で十分な体制を整えた後に本格的な作戦を開始するという方針を主張しました。これにニキアスは反対し、アテナイ軍はシチリアで敵のシラクサに一撃を加えたならば直ちに帰国すべきと主張しました。これは軍事的な意味は対してありませんが、本国でニキアスの主張の正しさを裏付ける結果となると期待されましたが、当然アルキビアデスは強く反対しました。

ラマコスは今からシラクサ軍に直接的に攻めかかる戦略を主張しましたが、結局三者の意見はまとまらず、最終的にラマコスはアルキビアデスの案に同意します。


しかし、アテナイ本国からアルキビアデスにとって驚くべき知らせが入ります。アルキビアデスがアテナイ本国で告発されたのです。

遠征軍がアテナイを離れた後で、アルキビアデスの政敵は神を冒とくした容疑でアルキビアデスを告訴する準備を進めていたのです。この告訴を受けてアルキビアデスはアテナイに帰国することは政治的に危険すぎると判断し、敵国のスパルタに亡命してしまいました。またラマコスも戦死したために、シチリア遠征軍の指揮官はこの作戦に反対していたニキアスただ一人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シラクサに対する攻囲は長期にわたって続きましたが戦果が乏しく、本来であればニキアスは引き返したかったはずですが、この時期になるとニキアスだけが作戦の責任をとることになるため、自分の判断で帰国することは避けたいと考えました。

そこでニキアスはアテナイ本国から帰国命令を引き出そうと大規模な増援を派遣するように要請したのですが、ニキアスの本心とは裏腹に大規模な援軍が実際に送り込まれてしまいました。ニキアスはこれ以上の増援を得てもシチリアで軍事的勝利を得ることは難しいと理解していましたが、本国において自分の政治的影響力が低下することを恐れて撤退を可能な限り遅らせたのです。

こうしている間にもアテナイ軍の戦力は着実に消耗を重ねていき、最終的にはシチリア遠征軍は壊滅的な損害を受けてしまったのです。


シチリア遠征作戦の教訓

アテナイ軍にとってシチリア遠征作戦は大きな失敗でしたが、それを回避することができる機会は一回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ニキアスは民会でアルキビアデスに対する反対工作の一環として部隊規模の拡充を主張し、不必要なまでにシチリア遠征のリスクを大きくしましたし、アルキビアデスは当初の計画が実行不可能になったにもかかわらず、シチリア遠征作戦の全体像を見直すことを拒否しました。アテナイ本国は作戦が進展している最中に指揮官の一人を告訴して亡命させてしまい、ラマコスが戦死した後にニキアスは敗戦の失敗が自分になることを恐れて撤退の決断を下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アルキビアデスとニキアスは互いに自らの政治的影響力を拡大することを優先し、軍事的に必要な処置を講じなかったことが、結果として重大な失敗に繋がったのです。

権力をめぐる闘争は政治の本質ですが、重要な政策決定を適切にするためには、権力闘争のレベルが不必要に拡大してはなりません。

当時のアテナイでは民主制が確立されていましたので、政治家には説明責任があり、市民の意向が政策の形成に影響を与えていましたが、政治制度それ自体が優れた政治を確証す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シチリア遠征の事例から読み取ることがで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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