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우선 한일양국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이 다른 것 같다.

 

대륙에 붙어있어 역사적으로 대륙 정세에 민감했던 한국과 섬나라로 따로 떨어져 있던 일본은 서로 입장이나 생각하는게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한국을 강대국들 눈치나 살피고 강대국들에게 빌붙는 나라로 여기는 것 같고 한국은 일본을 섬나라로 떨어져 있어 외적침입 걱정없이 편하게만 살아온 족속들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 말고도 아직도 일본은 정한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정한론에 따르면 일본에게 있어 한국은 자기네들의 필요에 의하면 침략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일 뿐이다.

 

정한론의 대표적 주장자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명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꽤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와서 더 심회되지만 멀리보면 고려 말 일본인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등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 같다.(다만 일본인의 경우는 해적에 가까우므로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일단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들과 그들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면

막부 말기

하야시 순사이

막부 말기, 일본의 국력배양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하야시 순사이는 한반도는 “일본의 신화에서 나오는 신인 스사노오 노미고도가 경력한 곳으로 이 신이 삼한의 조”라고 주장하였다.

하야시 시헤이 & 혼다 도시아키

1785년 삼국통람도설을 저술한 하야시 시헤이와 혼다 도시아키는 그 책에서 한반도와 류큐왕국이 일본의 국가 방위에 깊은 관계가 있다 주장하며, 국방의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만이 국가 이익을 위한 길이라 주장하였다.

사토 노부히로

19세기에 들어 국방논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사토 노부히로는 한반도 침략의 구체적인 작전을 구상하여, 대총과 화전을 내세워 함경, 강원, 경상, 충청 지역으로 공격하여 점령하자는 작전을 제의하여, 한반도의 점령을 국가 정책 목표로 삼자 주장하였다.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1854년 유수록을 통해 양이들이 일본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해야 한다 주장하며, 조서에 대해서 과거 한반도는 일본의 속국[1]이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복하여 복속시키는게 옳다 주장하였다.

하시모토 시나이

1857년 일본도 서양의 국가동맹체를 모방하여, 한반도와 중국을 병합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한반도와 만주의 병합을 촉구하였다.

이타쿠라 카츠키요

막부 고관이었던 이타쿠라 카츠키요는 사츠마, 초슈세력의 반발에 따른 일본내 체제위기를 막기 위해 중국 태평천국의 난을 틈타, 중국과 한반도의 공격을 제안하였다.

카츠 카이슈

후일 사츠마와 초슈를 도와 메이지 유신에 협력하게 된 카츠 카이슈 역시 유럽인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선 한반도를 설득한 뒤, 응하지 않으면 정복해야 한다 주장했다.


원래 카이슈의 경우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중국이 연대해야 한다는 아시아 연대론자였다. 하지만 해군 건설을 지원해주던 쿠게 아네가코지 긴토모가 암살되자 정한론을 주장한다. 이후 청일전쟁에 반대하거나 조선합병에 반대하였다.

메이지 유신 시기

기도 다카요시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뒤, 정부고위직에 오른 키토 타카요시는 메이지 신정부가 조선에 보낸 수교 요청이 거부당하자, “사절을 보내 그들의 무례를 묻고 그들이 만약 불복한다면 그 죄를 따져 한반도를 공격하여 세력을 신장하여야 한다” 라는 주장을 하며 1870년 6월, 내각에 사절단 파견을 건의하였다.
 
덧붙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로 많이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 단신으로 조선을 방문하려던 사이고를 가로막은게 기도 다카요시.
 
 
이렇게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정한론이 여러 국가 요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주장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한 것은, 막부 말기부터 서양 세력이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느낀 일본 인사들이 일본을 키워놓으려는 의미였으며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상당한 근대화와 서구화를 이룩하였지만 여전히 서구와는 불평등조약을 맺고 있는 등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여전히 업신여기고 깔보고 있었던 상황이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해있었고 그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조선, 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의 평등외교관계 수립이 지상과제였으며,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철저하게 서구식 외교관계를 거부하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일본 내부사정으로 벌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사정이 급하니 너네 집에 도둑질하러 간다는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어떻게든 구실거리나 좋은 변명을 대야했기에 일본이 붙인 이유는 왕정복고 후,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선 정부와의 수교를 거부당한 데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천황이 권력을 되찾은 뒤 보내온 외교문서에 천황이라고 찍혀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역대 막부의 장군들을 일본왕으로 보고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서한이 이전 형식과 다르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메이지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이없는 주장인데 일본 내부에서 정변이 일어나건 말건 이웃 국가인 조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조선이 일본과 통상관계를 맺고 안맺고는 조선의 자유이다. 게다가 조선과 통상관계가 없다고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는 것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통상관계를 수립하자마자 조선을 뜯어먹겠다란 이야기가 되는데 애초에 일본은 평등관계에 입각한 정상적인 통상관계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입각한 불평등한 통상관계를 맺으려고 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정한론은 그 시기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주요 요인들이 모두 동감한 주장이었으며, 이 이론의 실천을 위해 억지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서 조선을 강제 개항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멸망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셈이 되고,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졌던 청과 러시아를 물리친 후, 경술국치를 일으켜서 기어이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고 만다.
 
물론 이후에도 어떻게든 포장은 해야했기에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시켜주려 한다거나(사실 이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하던 주장이니 딱히 일본이 특별한 건 없기는 하지만) 내선일체나 일선동조론 등의 주장으로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대우해주려 했다던가 등의 주장을 한다.
 
어찌 보면 아직 일본이 한일합방을 강제병합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역사관도 이런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일선동조론, 내선일체 등과 같은 사상에 기인하는 것일수도 있다. 자기네들은 한국을 잘 대해주려고 했다는 식의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우리의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미워하고 사과만 해달라니 한국이 싫다. 이것이 바로 혐한들과 일본 우익들의 기본적인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포장이 좋다고 내용물이 바뀌지는 않는다. 명분이야 어찌됐든 이건 엄연한 침략논리이며 이 정한론은 점점 확대되어 다음 타겟이 중국으로 변경되었으며, 이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데, 결국 이런 침략으로 인해 미국과 마찰이 생기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는 대실책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일본 제국은 패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한론은 내 사정이 어려우면 남을 공격해서 강도짓을 하겠다는 것을 적당히 둘러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 이론이며, 동시에 침략의 연속으로 인해 결국 임자를 만나서 붕괴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시초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미국에게는 워낙 호되게 당한지라 미국에게는 조아리고 고개 숙이며 굽실거리지만 한국의 경우 자기네들의 것인데 연합군 때문에 멋대로 빠져나간 것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아직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하기에 아직도 한일합방은 강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한국인들이 일본을 대할 때 감정적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주장을 했고 그리도 아직도 그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본은 한국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우릴 또 침략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이라는 같은 동맹국이 있고 또 이제는 한국 국력이나 군사력도 일본이 함부로 대했다가는 자기네들도 큰 피해와 손해를 입을 것이기에 가만 놔두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이 이런 망령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역사는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日製の真実に対する返事文

まず韓日両国は基本的にお互いを眺める認識が違うようだ.

 

大陸に付いていて歴史的に大陸情勢に敏感だった韓国と島国に別に落ちていた日本はお互いに立場や思うのがお互いに違うと思う.

 

日本は韓国を強大国たち気付きや察して強大国たちに取り入る国で思うようで韓国は日本を島国に落ちていて外的侵入心配なしに楽に暮して来た族属たちだと思うようだ.

 

しかし私が思うのにこれではなくてまだ日本は鼎韓論で完全に脱することがしたようだ事ができない.

鼎韓論によれば日本にあって韓国は自分らの必要によれば侵略の対象と同時に征服の対象であるだけだ.

 

鼎韓論の代表的主張者では福沢勇吉が有名だが実はこの主張はかなり多い人々が主張したし明治維新以後入って来てもっと心懐されるがモルリボなら高麗ではないなぜだね豊臣秀吉の壬辰の乱などずいぶん前から腹中に持っていた考えみたいだ.(ただ倭寇の場合は海賊に近いのでちょっと語弊があったりするが言葉だ.)

 

一応鼎韓論を主張した人物たちと彼らの主張を先によく見れば

幕末

Hayashiスンサイ

幕末, 日本の国力培養のために韓半島を占領しようという意見があった.
当時, Hayashiスンサイは韓半島は日本の神話から出る新人スサノ−オ乃美高度が経歴した所にこの神さまが三韓の組と主張した.

Hayashi時ヘイ & ホンダ都市あき

1785年三国通覧図説を著わしたHayashi時平和ホンダ都市あきはその本で韓半島と琉球王国が日本の国家防衛に深い関係があって主張して, 国防の強化と膨脹主義政策だけが国家利益のための道だから主張した.

佐藤Nobuhiro

19世紀に入って国防論議がもっと活発になりながら佐藤Nobuhiroは韓半島侵略の具体的な作戦を構想して, 大塚と火田を立ててハムギョン, 江原, 慶尚, 忠青地域で攻撃して占領しようという作戦を申し入れて, 韓半島の占領を国家政策目標にすると主張した.

吉田松陰

吉田松陰は 1854年ユスロックを通じて壌夷たちが日本を侵略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はシベリアでフィリピンに至る地域を掌握しなければならない主張して, 調書に対して過去韓半島は日本の属国[1]であったからこれをまた征腹して服属させるのが正しい主張した.

Hashimoto時年

1857年日本も西洋のグックがドングメングチェを模倣して, 韓半島と中国を竝合しなければ亡びると主張して, まず韓半島と満洲の併合を促した.

利他区だとカツキです

幕府高官だった利他区だとカツキヨはサツマ, チォシュセリョックの反発による日本内体制危機を阻むために中国太平天国の私はを乗じて, 中国と韓半島の攻撃を提案した.

カツカイシュ

後日サツマとチォシュを手伝って明治維新に協力するようになったカツカイシュやはりヨーロピアンに対抗するためにまず韓半島を説得した後, 応じなければ征腹しなければならない主張した.

元々カイシュの場合日本を中心に韓国, 中国が連帯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アジア連帯論者だった. しかし海軍建設を支援してくれた区なのアネがコだギントモが暗殺されると鼎韓論を主張する. 以後日清戦争に反対するとか朝鮮合併に反対した.

明治維新時期

祈祷ダカー要の時

1868年明治維新を成功させた後, 政府高位職に上がったキトタカ要の時は明治新政府が朝鮮に送った修交要請が拒否されると, ¥"謝絶を送って彼らの無礼を問って彼らがもし不服したらその罪を計算して韓半島を攻撃して勢力を伸びなければならない¥" という主張をして 1870年 6月, 内閣に使節団派遣を建議こんにちはだった.
 
付け加えて西郷ダカー森が鼎韓論の代表にたくさん認識されているが, 実際西郷が鼎韓論者だったかは不明だ. むしろ外交関係樹立のために単身で朝鮮を訪問しようとしていた西郷を塞いだのが祈祷ダカー要の時.
 
 
こんなに持続的で繰り返し的に鼎韓論が多くの国家要因から持続的に主張されてこれを実践しようと思ったことは, 幕府末期から西洋勢力が侵攻し始めながら危機を感じた日本人士が日本を育てておこうとする意味だったし明治維新を通しながら相当な近代化と西欧化を成したが相変らず西欧とは不平等條約を結んでいるなど西で列強たちは日本を相変らず馬鹿にして見下していた状況が作用した.
 
こんな状況で日本は西欧列強たちの植民地になる危険に処していたしその解決策の中一つで朝鮮, 清を含めたアジア国家との平等外交関係樹立が至上課題だったし, ウンヨホ事件は朝鮮が徹底的に西欧式外交関係を拒否すると切迫した状況に追い出された日本内部事情で起こした事だ. どんなに見れば 私の事情が急だからお前の家に盗みを働きに行くは主張ともできる.
 
もちろんどうしても言い立て距離(通り)や良い言い訳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日本の付けた理由は王政復古後, 明治政府の伝統性を認められるのに重要な意味を持つ朝鮮政府との修交を拒否されたのに対した怒りが大きかったからだと説明する. 天皇が権力を取り戻した後送った外交文書に天皇だと撮れていたが当時朝鮮は歴代幕府の将軍たちを天皇陛下で見て交流をして来たから公式書簡が以前形式と違うように不遜だという理由で明治政府の権威を認め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日本の主張だ.
 
しかしこれまたあっけない主張なのに日本内部で政変が起きようが巻くのは隣り国家である朝鮮とは何らの関係がないし, 朝鮮が日本と通商関係を結んで結ばなくては朝鮮の自由だ. それに朝鮮と通商関係がないと切迫した状況に追われたということは覆して思えば通商関係を樹立するやいなや 朝鮮をかじると言う(のは)話になるのに最初に日本は平等関係に即した正常な通商関係ではなく帝国主義に即した不平等な通商関係を結ぼうと思ったことになる.
 
したがって鼎韓論はその時期と方法には差があるが日本の主要要因たちが皆同感した主張だったし, この理論の実践のために無理やりにウンヨホ事件を起こして朝鮮を強制開港した江華島条約を結ぶようになる. これとして朝鮮は滅亡のコンベヤーベルトに乗りこんだわけになって, 日本は日清戦争と露日戦争で朝鮮に関心を持った清とロシアを退けた後, 庚戌国恥を起こしてとうとう朝鮮を強制で植民地で作ってしまう.
 
もちろん以後にもどうしても包装は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未開な朝鮮を近代化させてくれようと思うとか(実はこれは西欧帝国主義国々も植民地を作る時たくさん使った主張だからこれといった日本が特別なのはなくはあるが) 内鮮一体や日鮮同組論などの主張で朝鮮人を日本人と一緒に待偶してくれようとヘッダドンがなどの主張をする.
 
どう思えばまだ日本が韓日併合を強制併合ではないと認識する歴史観もこんな植民地近代化論や日鮮同組論, 内鮮一体などのような思想に起因することかも知れない. 自分らは韓国をよくもてなしてくれようと思ったという式の考えをまだしていることかも知れない. ところで韓国はそんな私たちの恩知らずでむしろ憎んで謝りばかりしてくれだから韓国が嫌いだ. これがちょうど嫌韓たちと日本右翼たちの基本的な考えなようだ.
 
しかしいくら包装が良いと内容物が変わらない. 名分はなにしろこれは厳然な侵略論理でこの鼎韓論はますます拡がって次のターゲットが中国に変更されたし, これは満州の変と日中戦争が勃発するようになる原因を提供するようになるのに, 結局こんな侵略によってアメリカと摩擦が生じながら太平洋戦争を起こすという大失策をやらかすようになって, 結局日本帝国は敗亡するようになる.
 
だから鼎韓論は私の事情が貧しければ人を攻撃して強盗をするということを適当に取り巻いて表現したことに過ぎない理論であり, 同時に侵略の連続によって結局壬子に会って崩壊される日本帝国主義の始めだと思うのが当たるでしょう.
 
ただアメリカにはあんまり手酷くあうのでアメリカには額付いて頭を下げながらぺこぺこするが韓国の場合自分らの物なのに連合軍のため勝手に抜けたことだという考えといっしょにまだ韓国の国力が日本に比べて弱いと思うのにまだ韓日併合は強制ではないという考えを持つようになる理由になったようだ.
 
実は韓国人たちが日本を対する時感情的になることは事実だがこんな主張をしたしあまりもまだそのもうろくで完全に脱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日本は韓国立場(入場)ではいつでも ¥"機会になれば私たちまた侵略するでしょう¥"という気がするしかないだろう.
 
たとえ今はアメリカという同じ同盟国があってまたこれからは韓国国力や軍事力も日本がむやみに対したあとは自分らも大きい被害と損害を着るものだからそっと差し置くことかも知れないが日本がこんなもうろくから脱しない限り歴史はいつでも繰り返される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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