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 편에 더 가까웠다.”


모리가네 센슈, 중국 전선에서 5년간 종군했던 일본군 병사



굳이 따지자면 구타 자체는 일본군만의 특이한 전유물은 아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구타가 흔했고 어느 정도 잦아든 20세기 와서도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당장 2차대전 때의 소련군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군만 하더라도 이게 문제시되어 소원수리 제도를 도입해서라도 해결을 보려 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군만 하더라도 월남전에서 많은 상관 살해가 발생하였고 이걸 구타에만 한정할 수야 없겠지만 구타가 어느정도 원인이 된 건 사실이다. 영국 해병대만 하더라도 21세기 초반 가혹한 병사 신고식 동영상이 퍼지면서 말이 많았다.


한편 전근대 유럽의 경우를 보자면 전열보병의 시대에는 병사들에게 구타로 심한 압박을 줘서 “전열에서 이탈해서 맞아죽느니 그냥 싸우지” 라고 생각하도록 세뇌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잘한 건 아니라서 인권의식이 높아진 19세기 중반이 되면 채찍질과 같은 체벌은 공식적으로는 폐지된다. 게다가 유럽 군대에서 체벌은 어디까지나 지휘관들의 입회하에서 집행하는 군법회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 해군 같은 경우 이미 18세기부터 각종 위반사항에 대해 채찍질 회수를 법으로 정해놨고 심지어 채찍 규격도 정해져 있었다. 또 시행시간대도 보통 정해져있고 다른 승조원들도 모두 모여 채찍질을 지켜보아야 했다.


일본군의 진짜 문제는 총의 개선과 상비군 제도로 인한 병사 사기 향상 등의 이유로 이미 저런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여전히 그리고 대놓고 구타를 자행한 것과 그나마도 명시된 조항에 따른 체벌이 아닌 상급자의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일정한 규정 없이 마구 시행되었고 그 정도도 타국에 비해 심각했다는 점이다.


일본군은 단기간 안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대면서 구타를 묵인했다. [5] 하급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맞은 하급 장교는 상급 부사관들을 때렸다. 하급 장교에게 맞은 상급 부사관은 하급 부사관을 때리고 맞은 하급 부사관들이 상급 병사들 때리며 상급 병사가 하급 병사를 때리는 구타의 쉴 새 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군대 뿐만 아니라 일본 조직 문화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형이다. 1990년대 일본에 용병으로 왔던 미국 여자 농구 선수가 자신은 맞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체 구타나 체벌에 항의하여 계약기간도 채우지 않고 돌아가서 일본의 체육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학원 스포츠 만화를 보면 최근까지도 선후배간 사제지간의 구타가 가끔씩 묘사되는 걸로 봐서는 현재도 근절되지는 않은 듯.


게다가 “강한 군기” 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 정도도 못 견디는 약골이 실전 상황은 어떻게 견뎌내겠느냐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아래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한 폭력이 가해졌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했으며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고 암기를 하지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심지어 아침점호 시간에 환자는 보고하라고 해 놓고 진짜로 아픈 병사가 보고하러 오면 정신머리가 썩었다고 패질 않나, 총기수입 시간에 제식 소총에 새겨진 국화 문장이 더러우면 더럽다고, 너무 열심히 닦아 흐릿해지면 흐릿해졌다고 패는 등 별의별 황당한 트집거리가 다 구타의 이유가 되었다.
 
해군은 아예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이라는 구타 전용 몽둥이까지 애용했다.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각개전투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시킨다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몇십 분씩 세워놓는 식의 가혹행위 또한 일상이었다.
 
이 지경이다 보니 하급병들은 차라리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바랬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나가면 그나마 구타는 후방에 있을 때보다 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도 행군 중에 무거운 것은 무조건 하급병들이 들어야 한다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아사자 비율은 하급병으로 내려올수록 급증하는 등의 부조리는 어김없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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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만세일계에 길이 이어야할 졸라 자랑스런 군인정신주입봉 (...) 
사람갖고_야구하는_황군의_패기.jpg (...)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선생이 이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나온다. 일제 시대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한 지역이었다.
 
아니, 이것도 일본군에서 하던 원조 뺨때리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순화된 거다! 원조는 병사들끼리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봐주려고 하면 바로 고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 며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거나 슬리퍼로(!)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대기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걸 면하려면 서로 죽기살기로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병사들은 판단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지만 실상은 가혹행위로 인하여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자행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인종차별에 눈이 먼 독일군이나 그들의 잔인한 행각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은 소련군이 벌인 유럽의 동부전선보다도 훨씬 더 심했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전쟁 중의 점령지라기보다는 식민지긴 하지만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 중 일부가 민간인에 대한 겁탈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이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평가했을 지경이다.
 
당장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 오키나와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 등지로 숨었지만 전투 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도 있다. 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이 수통을 건네주면서 자기가 먼저 한 모금 마신 후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고 안심하고 받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군들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 그리고 이 증언 중엔 일본군의 만행도 나오는데 동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 장교가 아기를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범죄사례나 위에서 나왔듯이 오키나와에서의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미군이 종교와 인종이 다른 현지인들과 그리 잘 지내는 군대가 아님에도 이러한 평가가 나왔다. 대체 일본군이 얼마나 맛이 갔으면 저런 반응이 나왔을까?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결국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에 대한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술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이런 구타는 사병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급장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다. 가령 일본군 최고의 맹장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지휘한 조 이사무(長勇) 중장은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영관급) 장교들까지도 전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먹뺨을 갈겼다.


이런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구타와 내무부조리의 실태는 이미 당시 일본 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 청년들이 군 복무를 기피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도망쳐 숨어버려 실종자로 처리되거나, 도피성 유학과 해외이민, 심지어 고의로 자해하거나 범죄자가 되어 징병을 모면하려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당연히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보니 그리 맛이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고 결국은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때리고 맞는 게 너무 일상화가 되어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 해산으로 더 이상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전투 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 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때에는 병사들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존재한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점은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그대로 물려 받았다는 것. 일단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가 대량으로 유입되기도 했으며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계속되었으나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21세기가 넘어갈 때쯤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해병대와 전의경 부대에서는 여전히 구타가 남아있다.


반면에 오히려 일본 자위대는 육상자위대의 경우 해상자위대가 구 일본 해군 출신이 상당수 참여한 것과 달리 경찰예비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아예 구 일본 육군 소속 인물을 배제하기도 했고 모병제라서 여러가지 처우 개선을 하다 보니 구타 사례가 없다고 한때 자랑하였으나 현실은... 일본군 시절보다 덜할 뿐이지 구타는 여전히 남아있다.
 
더 충격적인 건 일본 자위대 내의 연평균 자살자수가 한국군보다도 많다! 물론 자살원인을 구타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겠지만 모병제인 데다가 한국군보다 숫자도 적으면서 자살자수가 한국군보다 많다는 것아무래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日本軍の殴り

兵営は刑務所と地獄の間で地獄便にもっと近かった.

モリがのセンシュ, 中国戦線で 5年間従軍した日本軍兵士



敢えて計算しようとすると殴り自体は日本軍だけの珍しい専有物ではない. 20世紀以前には全世界的に殴りが有り勝ちだったしどの位だんだん無くなった 20世紀来ても暗黙的に存在した. 今すぐ 2次大戦の時のソ連軍は言うまでもなくてドイツ君ばかりでもこれが問題視されて願い修理制度を取り入れても解決を見ようと思った. 2次大戦以後米軍ばかりでもベトナム戦で多くの上官殺害が発生したしこれを殴りにだけ限定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殴りがどの位原因になったことは事実だ. イギリス海兵隊ばかりでも 21世紀初盤苛酷な兵士申告式動画が広がりながらうるさかった.

一方前近代ヨーロッパの場合を見ようとすると戦列歩兵の時代には兵士らに殴りでひどい圧迫を与えて ¥"戦列で離脱して叩かれて死ぬよりそのまま争うの¥" と思うように洗脳しそうだった. もちろんこれがよくしたのないので人権意識が高くなった 19世紀中盤になればむち打ちのような体罰は公式的には廃止される. それにヨーロッパ軍隊で体罰はあくまでも指揮官たちのイブフェハで執行する 軍法会議の一種と見られる. イギリス海軍みたいな場合もう 18世紀から各種違反事項に対してむち打ち回収を法で定めておいたし甚だしくは鞭規格も決まっていた. また施行時間帯も普通決まっていて他の乗務補助員たちも皆集まってむち打ちを見守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日本軍の本当の問題は総意改善と常駐軍制度による兵士詐欺向上などの理由で もうあんな行為をする必要がないことにも 相変らずそして つけておいて 殴りをほしいままにしたこととそれさえもも明示された条項による体罰ではない上級者の個人的な目的によって決まった規定なしにでたらめに施行されたしそれ位も他国に比べて深刻だったという点だ.

日本軍は短期間の内に兵士らの忠誠心を高揚して統制するという名目をつけながら殴りを見逃した. [5] 下級将校は上級将校にあってあった下級将校は上級副詞官たちを殴った. 下級将校にあった上級副詞官は下級副詞官を殴って当たった下級副詞官たちが上級兵士ら殴って上級兵士が下級兵士を殴る 殴りの休む新ない掛けがねが軍生活を支配したと言う.

これは実は軍隊だけでなく日本組職文化の問題でもあった. そして 現在型だ. 1990年代日本に用兵で来たアメリカ女バスケットボール選手が自分は当たら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団体殴りや体罰に抗議して契約期間も満たさないで帰って日本の体育界を責める記者会見をしたりした. 日本の学院スポーツマンガを見れば最近までも先後輩間師弟之間の殴りが時たま描写されることで見ては現在も根絶されなかったよう.

蟹に ¥"強い軍旗¥" を言い訳で兵士らには暴力にあってからも不満や哀訴をする権利さえ剥奪された. 殴り位も耐える事ができない弱骨が実戦状況はどんなに耐えるのかは 話にならない 論理の下殴りを避けるとか苦痛を訴えれば下克上に扱って加えた暴力が加えられた.
 
服装, 内務生活, 軍旗, その他すべての言い訳が暴力を正当化したし幾多の暗記事項を強要して暗記ができなければ殴る式で暴力の方式が研究された. 甚だしくは朝点呼時間に患者は報告しなさいと言っておいて本気に痛い兵士が報告しに来れば精神頭が腐ったとぶんなぐらないが, 聡気収入時間に制式小銃に刻まれた菊文章が汚ければ汚いと, あまり熱心に磨いて薄暗くなれば薄暗くなったとぶんなぐるなどありとあらゆる荒唐な言い掛かり距離(通り)がすべて殴りの理由になった.
 
海軍はてんから軍人精神注入峰(軍人精神注入棒)という 殴り専用棒まで愛用した. 直接的な殴り外にも各個戦闘を何時間ずつ休まないでさせるとか, 奉じてすべて姿勢にミョッシブ分ずつ立てて置く式の苛酷行為も日常だった.
 
が地境なので下級病たちはかえって部隊が戦闘に投入されるのを切に見送ったと言う. 命が行ったり来たりする戦地に出ればそれさえも殴りは後方にある時よりちょっとだんだん無くなるからだった.
しかし電線でも行軍の中に重いことは無条件下級病たちが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か, 食糧が落ちれば餓死者の割合は下級病で下るほど急増するなどの不條理は間違いなく存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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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が万歳日計に道が引き継がなければならない超誇らしい軍人精神注入峰 (...) 
サラムガッゴ_野球する_黄君の_覇気.jpg (...)


甚だしくは自分たちどうし頬を殴るようにさせたりした. パク・ワンソのその多かったシングアは誰がすべてモックオッウルカという本に自分が小学校の時の受け持ちだった先生がこの似ている着をよく与えたという出る. 日帝時代に学校で開いた事だから日本ミリタリズムの影響を受けたことだから見ても違った解釈ではないだろう. そして日帝強制占領期間当時朝鮮総督は皆軍人出身で日本軍部の影響が特に強い地域だった.
 
いや, これも日本軍でした援助ピァムテリギに比べればおびただしく 順化になったのだ! 援助は兵士らどうし少しでも妄説や見てくれようと思えばまさに古手が示範を見せてくれると拳でズックパンを飛ばすとかスリッパで(!)顔を事情なしにガルギョデギにいくら親しい関係でもそれを兔れようとすればお互いに死に物狂いで殴るしかなかった.

このような暴力の結果で兵士らは判断能力と理性を喪失したし見掛には上部で降りる命令に無条件的に従うことのように見えたが実際では精神健康に大きい悪影響を及ぼしたことを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

結局表で見るにはおびただしい軍旗と精神力を見せるものの実際は苛酷行為によって精神病的な気質を保有するしかなかった. 実際に日本占領地で恣行された民間人や虜虐殺, 苛酷行為などをよく見ればそれ位が違う国で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地境だ. 人種差別に目がくらんだドイツ君や彼らの残忍な行為に対する復讐を唱えたソ連軍がしたヨーロッパの東部戦線よりも ずっと ひどかった位だ.

どんなにせっぱつまれば戦争中の占領地と言うよりは植民地だと言うが沖繩に進駐したアメリカ海兵隊の中で一部が民間人に対する劫奪や殺害などをほしいままにしたという話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沖繩の住民たちが 大体的に米軍は日本軍よりはずっと住民たちによくもてなしてくれたと評価したはめに陷る.
 
今すぐ米軍が住民たちを虐殺すると洗脳させて沖繩戦闘の中で多い住民たちが米軍を避けて洞窟等地で隠れたが戦闘後住民たちを救護する米軍たちに驚いたという証言もある. この証言者は水と食糧もなしに何日を洞窟の中に隠れている途中米軍たちに救われたが一米軍が水筒を渡してくれながら自分が先に一服飲んだ後渡してくれて毒がないと安心して受けて飲んだと言う.
 
あれほど日本軍たちが住民たちを統制するために虚偽に洗脳したということ. そしてこの証言の中には日本軍の蛮行も出るのに洞窟の中に隠れているうちに赤んぼうがウルオデザ静かにさせなさいと急き立てた日本将校が赤んぼうを殺したりしたと言う.

在韓米軍の犯罪事例や上から出たように沖繩での米軍の民間人に対する犯罪事例を見れば分かるが米軍が宗教と人種が他の現地人たちとあまりうまく行く軍隊ではないことにもこのような評価が出た. 一体日本軍が いくらいたんだら あんな反応が出ただろうか?

それに自発性がないこのような外形的な軍旗は結局兵士らの無断離脱, 脱営, 命令不服従, 甚だしくは上官暴行などにつながったりした. はなはだしくは 副詞官や将校まで 処罰を恐れて脱営して馬賊団になった事例もある. 暴力的で抑圧的な内務生活に対する不満解消次元で日本軍はお酒を利用したがひどい飲酒で起る各種買ってからも大きい問題だった.

こんな殴りは兵たちにだけ適用されるのではなく高級将校たちの間でも一般的だった. たとえば日本軍最高の盲膓で沖繩戦闘を指揮した組李事務(長勇) 中将は連隊長や旅団長級(領官級) 将校たちまでも全部隊員が見る前で直接ズモックピァムをぶんなぐった.

こんな血なまぐさいこと言い尽くせない日本軍の殴りと内務省料理の実態はもう当時日本社会中でもどの位知られていたし, 当然日本青年たちが余分の服務を忌避する主な理由になった. 逃げて隠れてしまって失踪者に処理されるとか, 逃避性留学科海外移民, 甚だしくは故意に自害するとか犯罪者になって徴兵を兔れようとする青年たちが続出した.

当然弊害があまり深刻してみたらあまりいたんだ日本軍さえ殴りの深刻性に対してはどの位認知をしていたし結局はとても廃海歌ひどくて日本軍も 1944年に大本営の命令で殴りや領内暴力を禁止させる発表をするなど内務生活で殴りと暴力を放逐しようと思ったがもう殴って当たるのがあまり日常化になっていて易しく直らなかった. そうするうちに終戦以後日本軍解散でこれ以上の改革が成り立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に戦闘の中にもこのような暴力と苛酷行為で兵士らを統率する事はなかったので戦闘の中にはちょっと暴力の掛けがねが緩んで行ったがこの時には兵士らに対する押しも緩んで行くという大きい問題が存在する.
 
実際に監視の雪道が消えた日本兵士らは自発的に敵と争わないでまさにちりじり散らばって戦闘力が形体もなく 消滅する場合も起きた.

それよりももっと恐ろしい点はこのような暴力の掛けがねを 大韓民国国軍及び韓国社会がそのまま受け継いだということ. 一応国軍の創設期に句日本軍将校が大量に流入されたりしたし 20世紀後半まで軍隊ではこのような殴りと苛酷行為が続いたが何年の間の努力あげく 21世紀が移る時頃ほとんど消えた. しかし海兵隊と戦意頃部隊では相変らず殴りが残っている.

一方にむしろ日本自衛隊は陸上自衛隊の場合海自が旧日本海軍出身がかなり多い数参加したことと違って警察予備台を土台に設立されたし初めから旧日本陸軍所属人物を排除したりしたし募兵制なのでさまざまな処遇改善をして見たら殴り事例がないとひととき誇ったが現実は... 日本軍時代より減るだけであって 殴りは相変らず残っている.
 
もっと衝撃的なことは日本自衛隊内の年平均自殺自首が韓国軍よりも多い! もちろん自殺原因を殴りにだけ局限させることはできないが 募兵制であるうえで韓国軍より数字も少ないのに自殺自首が韓国軍より多いというのどうしても問題があるという話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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