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사망
BC 69 ~ 4
직업
신라의 시조
신라의 시조. 재위 기원전 57~기원후 4.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경주(慶州) 지방에 양산촌(揚山村)ㆍ고허촌(高墟村)ㆍ진지촌(珍支村) 등 6촌(村)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그 중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중턱에 있는 나정(蘿井) 곁 숲속에서 자줏빛 알을 발견하고 그것을 깨어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또는 「밝다」는 말에서 박(朴)이란 성이 붙여져 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으로 혁거세(赫居世)란 칭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를 양육하니 기골이 준수하고 영특하여 13세에 6촌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혁거세 5년(기원후 53) 1월에 용이 알영(閼英) 우물가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었으므로 혁거세는 알영을 왕비로 맞아들여 함께 6부(部)를 순행(巡幸)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니 이들을 2현(賢)이라 하였다. 혁거세 21년(기원전 37)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계속하여 궁성(宮城)을 축조,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였다. 혁거세 30년(기원전 28) 낙랑(樂浪)이 침범하였으나 국경(國境)의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들에 곡식더미가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하여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혁거세 38년(기원전 20) 일본에서 귀화한 호공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조하(朝賀)하였으며 재위 61년 만에 승하하자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현재 경주시 남쪽에 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이야기는 책마다 약간씩 다르게 쓰여 있던데 왜 그럴까요?
알쏭이가 여러 책을 읽었나 보네요. 그래요, 알쏭이 말이 맞아요. 그러나 박혁거세 신화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그런 편이죠. 그 이유는 각 나라의 건국 신화가 여러 역사책에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즉, 중심 줄거리는 같으나, 세부적인 부분들은 책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어 있어요.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어떤 역사책의 내용을 기본으로 삼아 글을 쓰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약간씩 달라져요. 참고로 장콩샘은 박혁거세 건국 신화를 『삼국유사』를 기본 자료로 삼아 『삼국사기』 내용을 약간 첨가하여 재구성했어요.
신라는 처음부터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요?
예, 그래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초기에는 서라벌 또는 서벌, 사라, 사로, 계림으로 불렀어요. ‘신라’라는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초반 지증왕 때부터예요.
生まれ - 死亡
BC 69 ‾ 4
新羅の詩調
新羅の詩調. 在位B.C. 57‾紀元後 4. 不具内(弗矩内)とも言う. ワングホは居西干(居西干). 競走(慶州) 地方に梁山村(揚山村)・古墟村(高墟村)・陣地村(珍支村) など 6村(村)が散らばって暮していたが, その中古墟村の村長ソボルゴング(蘇伐公)が梁山中腹にあるナゾング(蘿井) のそば林の中で紫分かる見つけてそれを壊して見たら一子供が出た. 朴のような卵から出たとして, または 「明るい」と言う言葉で朴(朴)と言う(のは)性が付けられて朴さんの詩調になったし, 光明にしよう(光明理世)の意味でヒョックゴセ(赫居世)と言う(のは)称号と呼ぶようになったと言う. この子供を養育したら気骨が守って賢くて 13歳に 6村人々の振り子どおり王位に上がったし国号を徐羅伐(徐羅伐)といった.
ヒョックゴセ 5年(紀元後 53) 1月に容易アルヤング(閼英) 井戸の周りに現われて小娘を生んだが, 井名をつけてアルヤングと言った. アルヤングは育つほど徳器(徳気)があったのでヒョックゴセはアルヤングを王妃に迎え入れて一緒に 6部(部)を巡行(巡幸)しながら民たちに農業と養蚕を奨励したらこれらを 2賢(賢)といった. ヒョックゴセ 21年(B.C. 37) 首都を金星(金城)といって続いて宮城(宮城)を築造, 国旗(国基)を強固にした. ヒョックゴセ 30年(B.C. 28) ナクラン(楽浪)が侵犯したが国境(国境)の民たちが夜にドアを閉ざさないし野に穀食ダミーが整然と並ぶことを見て道徳(道徳)のナララして自ら退いたと言う. ヒョックゴセ 38年(B.C. 20) 日本で帰化したホゴングを馬韓(馬韓)に送って早夏(朝賀)したし在位 61年ぶりに崩御すると思陵(蛇陵)に葬った. 思陵は現在慶州市南側にある.
新羅を建てた朴赫居世話は本ごとに少しずつ違うように書いていていたがなぜだろうです?
アルソングイが多くの本を読んだようですね. そうです, アルソングが言葉がそうです. しかし朴赫居世神話だけそうではいいえ. 高句麗, 百済, 新羅を建てた人々の話が皆そうな方です. その理由は各国の建国神話が多くの歴史書に少しずつ違うように記録されているからです.
すなわち, 中心筋書は同じだが, 詳細的な部分たちは本によって少しずつ違うように敍述されています. 状況がこのようだ見たら, どんな歴史書の内容を基本にして文を書くのかによって話の流れが少しずつ変わります. 参照でザングコングセムは朴赫居世建国神話を 『三国有史』を基本資料にして 『三国史記』 内容をちょっと添加してゼグソングヘッです.
新羅ははじめから ‘新羅’という名前を使わなかったんですか?
はい, そうです. 『三国有史』によれば, 初期には徐羅伐または徐伐, 紗羅, 死で, 桂林と呼んだんです. ‘新羅’という国名が使われ始めたことは 6世紀初盤ジズングワング時から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