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의 이시와라 대좌. 그는 이 시기에 센다이 주둔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이시와라 간지(일본어: 石原 莞爾 (いしわら かんじ), 1889년 1월 18일 ~ 1949년 8월 15일) 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활약한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별명으로 “육군의 이단아”가 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 근무하였으며, 1918년 장교의 출세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로 있을 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와 함께 1931년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나 육군, 심지어는 관동군 상부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일으킨 일이었다. 그 뒤 1936년 청년 장교 쿠테타인 2.26 사건 때에는 참모본부 제2작전과장으로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동아연맹의 주창자
1935년 이시와라는 요직인 육군 참모부의 작전 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만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연맹체인 동아연맹을 구상했고, 이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연방을 패배시킨 후, 서양 각국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해방”시키고, 이후에 미국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가 그는 모든 정당을 하나로 묶고 군사 국가를 표방하는 일당제 국가로 탈바꿈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과 유사한 신념을 가진 청년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인 2·26 사건이 터졌으나, 그는 반란을 규탄하고 오히려 계엄사령부에서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이시와라가 만주에서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던 쇼와 천황조차 그가 반란 진압에 앞장 선 것을 의아해 했다고 한다.
1937년 3월 이시와라는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 전쟁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반대했다. 특히 그는 전선을 확대시키려는 부하들의 발호를 막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출처 필요]. 이시와라의 확전 불가론은 육군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그는 중앙 요직으로부터 해임되어 관동군의 부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향유하는 관동군의 지휘부를 비판하였고, 관동군 장교들의 월급을 삭감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동군의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마찰을 빚어 해임당하고 교토 근처의 마이즈루에 있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일본에 돌아와서도 동아연맹을 위한 강연과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위해 중국과 전쟁을 반대했다. 1939년 그는 중장에 임명되었고 제16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앙숙인 도조 히데키가 승승장구하여 수상까지 오른 반면, 이시와라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 비난하여 군에서 강제로 예편당했다. 그는 도조가 남방자원 확보를 위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자, “기름때문에 전쟁을 시작하는 놈도 있나”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반대했다고 한다.
1934年のイシワだと対座. 彼はこの時期に仙台駐屯第4連帯の連隊長になった.
イシワだと悪知恵(日本語: 石原 莞爾 (いしわら かんじ), 1889年 1月 18日 ‾ 1949年 8月 15日) 銀製2次世界大戦直前まで活躍した日本帝国陸軍の軍人だ. ニックネームで陸軍の李単芽がある.
韓日併合以後朝鮮で勤めたし, 1918年将校の出世である陸軍大学を卒業した. 関東軍作戦株参謀である時イタがキセイの時で(板垣征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