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한국의 터부,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보상의 필요없음!그러나, 일제는 배상 책임 있어!

문화의 차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일본만 꾸짖고 있을 수 없다」의 소리도

「피해자 사관」한국을 흔드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가해 책임」···어디선가 (들)물은 것 같은 논의는, 그러나 베트남이 사죄도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오히려 국내의 정치 문제가 될 가능성도 나왔다.

「보상의 필요는 없다」라고 한 전직 사령관

베트남 전쟁이 끝나, 남북 베트남이 통일해 이미 4반세기가 지났다.그리고 한국에서는 최근 몇년, 그 전쟁을 둘러싸 오랫동안 터부로 여겨져 온 과거에 대해서, 전에 없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그 과거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의 학살 문제다.

최초로 터부를 찢은 것은, 한국의 한겨레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한겨레21」이었다.같은 잡지는99년,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에 일으킨 학살 사건에 대하고 기사를 게재했던 것이다(56일 호/한국의 민주화 중(안)에서 태어난 한겨레사는88년 창업, 현재 신문 발행 부수는 한국 제4위).어느 지역에서, 맹호 부대(한국군 부대) 등에 의한1개월간의 작전에서1200명의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하는66년 당시의 베트남측의 보고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생존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학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생존자의 증언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방법으로 몇개인가 공통된 유형이 있던 것 같다면, 동기사에는 기록되고 있다.이하, 그 부분을 생략해 인용하면

l  대부분이 여성이나 노인, 아이들인 주민을 1이나 곳에 모아 기관총을 난사.

l  아이의 머리를 나누거나 목을 치고 다리를 자르거나 하고 불에 던진다.

l  여성을 강간하고 나서 살해.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깨져 나올 때까지 군화로 밟아 잡는다.

l  터널에 추적한 마을사람을 독가스로 죽이는 등등이다.

공개된 사진(촬영은 미군) 한국헌병의 밤일반 시민 처형 현장의 사진

(약어)

베트남에의 한국인 파병은64년에 시작해, 펴로30만명 이상의 병사를 보냈다.미국에 뒤잇는 대파병이었다.이 전쟁으로 약5000명의 한국인이 죽었다.한겨레사에 난입한 전 병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의 피해에 괴로워하는 전 병사외가, 지금도 한국에는 많다.

베트남 전쟁 당시 , 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은, 앞의 「뉴스 위크지」로의 인터뷰로

「누구에 대해서도 갚을 필요는 없다.저것은 전쟁이었다」라고 명언하고 있다.

미군에 의한 손미 사건등의 학살 행위가 베트남 전쟁 당시부터 국제적으로 비판을 접수 논의의 목표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군에 의한 학살 행위에 대해서는, 일한국 국내에서는 길게 침묵이 유지되어 왔다.

냉전시대, 반공산 주의가 우선된 한국에서는,자국의 치부가 될 수 있는 문제는 숨겨져 왔다.그 뿐만 아니라 자국민이 피해자가 된 케이스에서도, 문제는 숨겨져 왔다.예를 들면 한국 전쟁하에서의 미군에 의한 한국 피난민 대량 학살의 사실조차, 한국 미디어로 보도된 것은 김영삼 정권이 되고 나서의94년이다.

또 전두환·노태우 양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으로 무 이사오를 둔 군인이었다고 하는 정치 사정도 있어, 베트남전에서의 과거는, 한국에서는 겹겹이 터부로 계속 되었다.

그러나, 냉전 종결과 한국의 민주화에 의해, 이 터부는 찢어졌다.그럼 한국의 극히 일반의 시민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세대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방법은 꽤 다르겠지요.젊은 세대에 있을 수 있는 , 그다지 반발도 없게 보통에 생각되겠지만」

그러한 것은, 미국의 대학에 유학중의 한국인 남성(28)이다.

「스스로의 세대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면, 우선 한국이 고도 성장을 이루었던 시대라고 하는, 밝은 이미지와 세트가 되어 있다.원래 베트남 전쟁에 대하고 학교에서 배우거나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한 기억도 없다.자주(잘) 「잊을 수 있었던 전쟁」등이라고 하는 말해지는 방법도 되었습니다만, 정말로 그대로였기 때문에」

실제로,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거의 기술은 되어 있지 않다.중학생 전용의 국정교과서에 기록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공산 침략을 받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서 국군을 파병했다」의 약1행만이다( 「입문 한국의 역사—국정 한국 중학교 국사 교과서」아카시 서점보다).

 (약어) 

서울 거주의 회사원(35·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학살는 미디어로 다루어져 알았습니다.그렇지만 자세하게 읽은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모른다.베트남과 한국은 좋은 관계에 있어, 일한 관계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문제화하지 않는 한, 이대로 가만히 놔 두고 싶은 기특입니다.베트남 전쟁에서는 피해를 당한 한국인 병사도 많아, 자신의 가족에게 전쟁으로의 부상자가 있으면, 복잡한 기분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인의 친구의 미묘한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학살」과「책임」이 되면, 아무래도 「일본」이 나와 버리는곳도, 이 논의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서울 거주의 대학생(24·남성)은 「징 이상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으로서는(학살의 보도는) 쇼크였습니다.베트남은 관광 붐이 되었을 때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현지의 젊은이와 이야기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은가 헤매네요.같은 세대의 일본인과 만났을 때, 그들이 징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안 것 같은 생각도 든다.교과서나 야스쿠니로 격렬한 일본 비판이 있지만, 스스로도 같은 일을 했지 않은지, 일본만을 꾸짖을 수 있는지, 라고 하는 기분으로도 된다.무엇보다, 그것을 일본에서 말해지면, 역시화난다하지만

서울 거주의 회사원(24·여성)도

일본을 비난 한다면, 한국도 더 베트남에 사죄해야 한다.단호히 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반대로일본을 이용해질 우려가 있는것은 아닐까요」

과 일본을 의식한 발언을 했다.

덧붙여서, 베트남 정부는 지금까지 사죄나 보상은 일절 요구하지 않았다.98년,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베트남 방문을 한 김대중은 「유감의 뜻」을 표명.한국 외교성도 「사죄는 아니다」라고 코멘트하고 있었다.그러나, 이824일, 서울에서 행해진 정상회담에서, 베트남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방한한 르온 대통령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불행한 전쟁에 참가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것을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사죄」에 한 걸음 발을 디딘 발언을 했다.

「능숙한 방식이군요.의도는 차치하고, 이것으로 일본으로부터 「한국은 사과해 조차 없지 않은가」와 돌진해지는 빈틈을 없앤 것이니까」

과 한국 정치에 밝은 한국인 져널리스트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한국인 전체가 「스스로도 가해자였다」라고 인식했다고 생각 없는 것이 좋다.오히려, 이 사죄는 일본으로 향한 외교 카드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역사 인식이 온 세상에서 「외교 툴」이 되어 버렸던 시대에, 게다가 베트남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일본」도 관련되어 오는 만큼, 이 문제, 한국내에서는 어려운 논의가  될 것 같다.

(약어)

한국은 일본에 종군위안부등이라고 하는 날조 된 과거의 거짓말을 꺼내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고 있는,일본의 과거에 있어 그러한 말은 없고 일본 제국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했다고 하는 증거도 나와 있지 않은, 단순한돈을 노림의 지원 매춘부였던 것이다, 그러나한국은 어떻습니까, 베트남 전쟁에 대해닥치는 대로의 강간,무기를 가지지 않는 일반 시민 대학살,1만명을 넘는 라이타이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한국이다.

병사의 나중에 강을 건너는 위안부

강제 연행된 위안부가 왜「웃는 얼굴」?

 


■한겨레

http://ja.wikipedia.org/wiki/%E3%83%8F%E3%83%B3%E3%82%AE%E3%83%A7%E3%83%AC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타파한다」라고 하고, 퇴역군인회의 반발을 각오 후에 라이타이한 문제를 채택했다.또 피해자의 증언이나 당시의 기록 등에 성공을 거둔 독자적인 조사에 근거해 「베트남 전쟁 참전의 일부 한국 군인이 고의로 베트남 주민을 학살·강간했다」라고의 논진을 쳐, 이것에 대해서 고엽제 후유증 환자인 퇴역군인2000명이 한겨레에 밀어닥쳐 시설을 파괴하는 등 폭력적인 항의 행동을 했다.

 


2000628일, 베트남전에 종군 한 퇴역군인등2000명남짓이 한겨레사에 난입해 컴퓨터등을 파괴했다.그들은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의 멤버로, 나라를 위해서 싸운 전우가 모독(서먹하게)되었다고 격렬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       덧붙여 동지의 입장은, 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각, 진보 지향이다.이것은, 반공 주의를 우선해, 한자 부활을 주장하는 보수·우파계 조선일보의 논조와는 반대극을 이루어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양지는 사설이나 기사등에서 서로를 비판하는 관계에 있다.

 

 


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民間人虐殺問題

韓国のタブー、ベトナム民間人虐殺に償いの必要なし!しかし、日帝は賠償責任有り!

文化の違い

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民間人虐殺問題

「日本ばかり責めていられない」の声も

「被害者史観」韓国を揺るがすベトナム民間人虐殺の「加害責任」 ・・・どこかで聞いたような議論は、しかしベトナムが謝罪も補償も求めていないことで、むしろ国内の政治問題となる可能性もでてきた。

「償いの必要はない」と言った元司令官

ベトナム戦争が終わり、南北ベトナムが統一して既に四半世紀が過ぎた。そして韓国ではここ数年、あの戦争をめぐり長らくタブーとされてきた過去について、かつてない議論が進められている。その過去とは、ベトナム戦争に参戦した韓国軍によるベトナム民間人の虐殺問題だ。

最初にタブーを破ったのは、韓国のハンギョレ新聞社が発行する週刊誌『ハンギョレ21』だった。同誌は99年、韓国軍がべトナム戦当時に起こした虐殺事件について記事を掲載したのだ(56日号/韓国の民主化の中で生まれたハンギョレ新聞社は88年創業、現在新聞発行部数は韓国第4位)。ある地域で、猛虎部隊(韓国軍部隊)等による1か月間の作戦で1200名もの住民が虐殺されたという66年当時のベトナム側の報告を紹介しながら、同時に生存者たちの証言に基づき虐殺の様子を具体的に描いている。

例えば、生存者の証言からは韓国軍による民間人虐殺の方法にいくつか共通した類型があったようだと、同記事には記されている。以下、その部分を略して引用すると

l  大部分が女性や老人、子供たちである住民を一か所に集め、機関銃を乱射。

l  子供の頭を割ったり首をはね、脚を切ったりして火に放り込む。

l  女性を強姦してから殺害。妊産婦の腹を、胎児が破れ出るまで軍靴で踏み潰す。

l  トンネルに追い詰めた村人を毒ガスで殺す等々だ。

公開された写真(撮影は米軍) 韓国憲兵のよる一般市民処刑現場の写真

(略)

ベトナムへの韓国人派兵は64年に始まり、延べで30万人以上の兵士を送り込んだ。米国に次ぐ大派兵であった。この戦争で約5000人の韓国人が死んだ。ハンギョレ新聞社に乱入した元兵士たち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アメリカ軍が散布した枯れ葉剤の被害に苦しむ元兵士らが、今も韓国には多い。

ベトナム戦争当時、韓国軍総司令官だった蔡命新は、先の『ニューズウィーク』でのインタビューで

「誰に対しても償う必要はない。あれは戦争だった」と明言している。

アメリカ軍によるソンミ事件などの虐殺行為がベトナム戦争当時から国際的に批判を受け議論の的となったのとは対照的に、韓国軍による虐殺行為については、こと韓国国内では長く沈黙が保たれてきた。

冷戦時代、反共産主義が優先された韓国では、自国の恥部となり得る問題は隠されてきた。それどころか自国民が被害者となったケースでも、問題は隠されてきた。例えば朝鮮戦争下での米軍による韓国避難民大量虐殺の事実でさえ、韓国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のは金泳三政権になってからの94年である。

また全斗煥・盧泰愚両大統領がベトナム戦争で武勲を挙げた軍人であったという政治事情もあり、ベトナム戦での過去は、韓国では幾重にもタブーであり続けた。

しかし、冷戦終結と韓国の民主化により、このタブーは破られた。では韓国のごく一般の市民はこの問題をどう受けとめているのだろう。

「世代によって、受けとめ方はかなり違うでしょうね。若い世代であれぱ、さほど反発もなくふつうに考えられるでしょうが」

そういうのは、米国の大学に留学中の韓国人男性(28)だ。

「自分たちの世代にとって、ベトナム戦争といえば、まず韓国が高度成長を遂げた時代という、明るいイメージとセットになっている。そもそもベトナム戦争について学校で習ったり、語り合ったりした記憶もない。よく『忘れられた戦争』などといういわれ方もされましたが、本当にそのとおりでしたから」

実際に、韓国の歴史教科書には、ベトナム戦争についてほとんど記述はされていない。中学生向けの国定教科書に記されているのは「そして、共産侵略を受けているベトナムを支援するために国軍を派兵した」の約1行のみだ(『入門 韓国の歴史—国定韓国中学校国史教科書』明石書店より)。

 (略) 

ソウル在住の会社員(35・男性)は、こう語る。

「虐殺のことはメディアに取り上げられて知りました。でも詳しく読んだわけでもないし、どこまでが事実なのかわからない。ベトナムと韓国はいい関係にあり、日韓関係とは違うと思う。問題化しないかぎり、このままそっとしておきたい気特ちです。ベトナム戦争では被害にあった韓国人兵士も多く、自分の家族に戦争での負傷者がいれば、複雑な気持ちだと思いますよ」

「日本人の友人の微妙な表情がわかった」

そして「虐殺」と「責任」となると、どうしても「日本」が出てきてしまうところも、この議論を複雑にしている。ソウル在住の大学生(24・男性)は「徴妙な気持ち」と語った。

「自分としては(虐殺の報道は)ショックでした。ベトナムは観光ブームになったときに行きたいなと思っていたけど、現地の若者と話すときにどういう態度を取ったらいいか迷いますね。同じ世代の日本人と会ったとき、彼らが徴妙な顔付きをしていたのが、わかったような気もする。教科書や靖国で激しい日本批判があるけれど、自分たちだって同じようなことをやったじゃないか、日本だけを責められるのか、という気持ちにもなる。もっとも、それを日本からいわれれば、やっぱりムカつくけれど

ソウル在住の会社員(24・女性)も

日本を非難するなら、韓国ももっとベトナムに謝罪するべき。きっぱりした態度をとらないと、逆に日本につけこまれる恐れ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と、日本を意識した発言をした。

ちなみに、ベトナム政府はこれまで謝罪や補償は一切求めていない。98年、韓国大統領として初めてベトナム訪問をした金大中は「遺憾の意」を表明。韓国外交省も「謝罪ではない」とコメントしていた。しかし、この824日、ソウルで行なわれた首脳会談で、ベトナム大統領として初めて訪韓したルオン大統領に対し、金大中大統領は「我々が不幸な戦争に参加し、不本意ながらベトナム国民に苦痛を与えたことを申し訳なく思う」と、「謝罪」に一歩踏み込んだ発言をした。

「うまいやり方ですね。意図はともかく、これで日本から『韓国は謝ってさえいないじゃないか』と突っ込まれるスキをなくしたわけだから」

と、韓国政治に詳しい韓国人ジャーナリストはいう。

「だが、これで韓国人全体が『自分たちも加害者だった』と認識したと考えない方がいい。むしろ、この謝罪は日本に向けた外交カードとみた方がいいでしょう」

歴史認識が世界中で「外交ツール」となってしまった時代に、しかもベトナムだけでなく、そこに「日本」も絡んでくるだけに、この問題、韓国内では難しい議論となりそうだ。

(略)

韓国は日本に従軍慰安婦などという捏造された過去の嘘を持ち出し謝罪と賠償を請求している、日本の過去においてそのような言葉はなく日本帝国が慰安婦強制連行をしたという証拠も出てきていない、ただの金目当ての志願売春婦だったのだ、しかし韓国はどうでしょう、ベトナム戦争において手当たり次第の強姦武器を持たない一般市民の大虐殺1万人を超すライタイハン、謝罪と賠償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韓国である。

兵士の後から河を渡る慰安婦

強制連行された慰安婦がなぜ「笑顔」?

 


■ハンギョレ新聞

http://ja.wikipedia.org/wiki/%E3%83%8F%E3%83%B3%E3%82%AE%E3%83%A7%E3%83%AC

「偏狭なナショナリズムを打破する」として、退役軍人会の反発を覚悟の上でライタイハン問題を取り上げた。また被害者の証言や当時の記録などに当たった独自の調査に基づき「ベトナム戦争参戦の一部韓国軍人が故意にベトナム住民を虐殺・強姦した」との論陣を張り、これに対して枯葉剤後遺症患者である退役軍人2000人がハンギョレに押しかけて施設を破壊するなど暴力的な抗議行動が行われた。

 


2000628日、ベトナム戦に従軍した退役軍人ら2000人余りがハンギョレ新聞社に乱入しコンピュータなどを破壊した。彼らは「大韓民国枯葉剤後遺症戦友会」のメンバーで、国のために闘った戦友を冒涜(ぼうとく)されたと激しく抗議したそうだ。

       なお、同紙の立場は、反共イデオロギーからの脱却、進歩志向である。これは、反共主義を優先し、漢字復活を主張する保守・右派系朝鮮日報の論調とは対極をなしハンギョレと朝鮮日報の両紙は社説や記事などで互いを批判する関係にある。

 

 



TOTAL: 960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6582 ▲시간때우기 しゃおこーbe 2012-09-19 2992 0
6581 日本が財政破綻した 1999 2012-09-19 3626 0
6580 골목 수상한 것 뇌내 のうみん 2012-09-19 3991 0
6579 xiaoke씨의 브로그로 yume라고 하는 분으....... numlk 2012-09-18 3499 0
6578 대마도를 한국 땅으로 표기한 일본지....... wc21 2012-09-18 4546 0
6577 이제 곧 중일전쟁 시작이군요 ( ′-`)....... sarutrainer2012 2012-09-17 3085 0
6576 ( ^д^)<잡담 스레입니다만 w farid 2012-09-17 3171 0
6575 중국은 열도인 때려잡기 축제중 ( ′-....... sarutrainer2012 2012-09-15 4385 0
6574 러스크 서간의 위력 kemukemu1 2012-09-17 4097 0
6573 아직도 이케골목 수상한 gamojin 2012-09-15 2957 0
6572 중국, 釣魚島에 감시선 2척 파견 ( ′-....... sarutrainer2012 2012-09-11 3092 0
6571 중국, 釣魚島 영해기선 선포 ( ′-`) y sarutrainer2012 2012-09-11 3098 0
6570 날것등 다실 바라에티마리모린! ユーニバーースあなご 2012-09-10 3375 0
6569 참배 gamojin 2012-09-08 3847 0
6568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실시한 잔학행....... DogKorean 2012-09-08 2879 0
6567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 DogKorean 2012-09-08 2928 0
6566 ( ^д^)<러브 레터? farid 2012-09-08 3002 0
6565 ( ′з`) <~극장(3) ユーニバーースあなご 2012-09-08 2910 0
6564 100여년전 한국인과 일본인 ( ′-`) y sarutrainer2012 2012-09-07 3845 0
6563 ▲청에 의한 50만명의 강제 연행? しゃおこーbe 2012-09-08 349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