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1905년 일본, 부당한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 결정

- 독도는 현재 세계 해도에서 주로 “리앙쿠르”라 불리는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달라.

“울릉도와 독도는 서양인으로서는 프랑스 선박들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때문에 이 두 섬이 서양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프랑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세기 중엽 이래 서양의 주요 해양국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해군 함정들은 세계 전 해역을 탐사, 조사· 측정해 수로지와 해도를 작성해 오고 있는데 독도는 프랑스의 포경선이 1849년에 발견했다 하여 “리앙쿠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보다 앞선 1787년 5월 27일, 울릉도의 경우,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라페루즈 탐험대에 의해 목격돼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 “다줄레”의 이름이 붙여졌다. 다줄레는 1797년 간행된 <라페루즈 탐험기> 부속 지도첩의 해도에 사상 최초로 정확한 위치에 올려져 1950년대까지 서양의 해도와 지도에서는 이 명칭이 사용됐다.

섬이 없는 동해 그 한가운데 누워 있는 독도는 선박 항해시 장애물로 인식돼 서양 해군 함정의 주의를 끌게 된 까닭에 동양 여러 나라의 그 어떤 섬보다도 많은 서양 명칭을 갖고 있다. “리앙쿠르(1849, 프랑스 명칭)”, “올리부차/메넬라이(1854, 러시아)”, “호넷트(1855, 영국)”가 그것이나 이 중에서도 리앙쿠르가 가장 널리, 오래 그리고 일관되게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 호사카 유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은 1876년에 작성된 대일본전도에도 “독도는 없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했음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 “독도” 혹은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또 독도 영유권을 밝히는 자료로 19세기 서양 지도를 주장하는 이유는?

“1850~1910년대는 어떤 서양 지도에도 동양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다. 독도의 서양 명칭이 등장하는 1850년대 이후부터 1920년까지 서양에서 간행된 해도, 수로지, 지도 등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을 포함한 어떤 동양 명칭도 사용되지 않았다. “독도”와 “다케시마”는 20세기에 들어서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다. 특히 “독도”라는 이름은 한국이 해방된 후인 1946~1947년경부터 일반에 알려져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고 1953년 한·일간 독도를 둘러싼 논쟁이 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05년에 일본이 부당하게 시마네 현 고시라는 것을 만들어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다고 했고 한국은 일제 지배 하에 놓일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후 간행된 지도는 서양에서 제작됐든 일본에서 제작됐든 대개 일본 지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05년 이후의 지도는 별 의미가 없다. 독도의 영유권 관계를 밝히려면 1905년 이전에 제작된 고지도 및 근대 지도여야 한다.”

- 일본이 이전에는 독도를 “마츠시마”라 불렀다고 하는데.

“일본은 과거에 독도를 “마츠시마”로,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으나 서양 지도와 해도에서 다케시마가 존재하지 않는 섬 “아르고노트”에 맞춰졌다가 아르고노트가 사라지면서 다케시마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마츠시마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다줄레 섬에 대응해 사용됐다. 과거 일본 고지도에서 독도를 가리키던 마츠시마라는 명칭이 울릉도로 옮아간 결과가 된 것이다. 하여 독도에 대해서는 어떤 동양 명칭도 사용되지 않게 됐다. “

서양 해군 수로지·해도, 19세기 중엽부터 100여 년간 독도를 한국 동해안에 분류

▲ 1866, <大日本海陸全圖 附 朝鮮 琉球 全圖> 중 朝鮮國全圖 부분. -竹島(Take-shima=울릉도, 다줄레), 松島(Matsu-shima=독도, 리앙쿠르)가 조선(한국)에 포함돼 있어 한국 소속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 그렇다면 현재 서양 지도에서 독도는 어떻게 표기되고 있나?

“서양의 자료에는 1850년대부터 “리앙쿠르”가 사용돼 오다가 1920년대 말 경부터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알려지자 수로지에서는 주로 “다케시마”를 썼다. “리앙쿠르”는 그 뒤에 쓰여지거나 괄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60년대에 “독도”라는 명칭이 알려지면서 ‘독도”명칭이 “다케시마/리앙쿠르” 뒤나 괄호 속 또는 “한국인들은 독도라 부른다” 등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그 후 차츰 독도와 “다케시마”가 혼용되고 있고 “리앙쿠르”가 함께 쓰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첩에는 “독도/다케시마”라 표기하고 “한국과 일본이 영유를 주장함”이라는 문구를 표기해 놓은 경우도 있다. 분쟁을 의식한 지도 제작자들은 중립적인 “리앙쿠르”만 쓰기도 한다.”

- 서양의 수로지와 해도에서의 독도 표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변천돼 왔나?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 지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50년 하반기 프랑스 수로지(항해 지침서)였다. 영국 해군의 수로지는 1858년이 최초여서 프랑스보다 다소 늦다.

독도에 대해 서양 국가들은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시각은 객관성을 지닌다. 따라서 1905년 일본 시마네 현 고시와 일본이 발간하는 수로지 혹은 해도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19세기 말까지의 서양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세계 주요 해양국 해군이 해도·수로지에 울릉도와 독도를 목격 당시부터 한국 영토로 인식해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해 왔다는 점이다. 독도와 가장 관계가 깊은 프랑스 해군의 수로지는 독도와 울릉도를 함께 묶어 1850~1955년까지 100여 년 간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했다. 그러나 1955년 판에서 한 번 한국과 일본에 2중으로 분류한 후 1971년 판부터는 독도를 울릉도에서 완전히 분리해 오키시마 위에 놓았다.

영국은 1858~1941년까지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 동해안에 분류했으나 1914~1983년 사이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오키시마와 함께 일본에 2중으로 분류해 오다가 1983년부터는 한국에서 완전히 분리해 일본 혼슈 북서부 오키 열도 아래에 분류하고 있다.

반면 미국 해군이 발간하는 항해 지침은 독도가 일관되게 한국에 분류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이 독도를 확고하게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사실은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행정 관할 구역에서 제외한다”는 1946년 1월 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훈령(SCAPIN 677)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일본, 1970년대부터 해도 제작...서구 국가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 이진명 교수는 지난 1998년 4월 독도 연구서 <서양자료로 본 독도>를 출판했으며 이것을 수정보완해 같은 해 9월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소개했다. 그는 오는 23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신문화연구원의 새 이름), 한국문화홍보센터, 동해연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발표회 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2005 박영신
- 목격 당시부터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한 서양 해도 제작국들이 점차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2중 분류하다가 다시 일본쪽으로 분류하게 된 이유는 뭔가?

“19세기 말엽까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은 과학적인 측정과 관찰로 주변 해역에 대한 수로지나 해도를 작성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의 해군이 먼 해역까지 와서 자체적으로 탐사하고 측정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수로지와 해도를 작성했다.

일본은 동해와 태평양 해역에 대해 이들 서양 자료를 1890년대부터 그대로 수용, 번안해 사용하다가 점차 스스로 조사·측정한 수로지와 해도를 영어와 일본어로 간행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서양 여러 나라들은 비용과 노력이 막대하게 드는 극동 해역의 조사 활동 대신 일본 자료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양 자료에서 19세기 내내 울릉도와 함께 묶여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돼 오던 독도가 20세기 전반기부터는 한국의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오키시마와 함께 2중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 때는 한국이 일제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독도의 명칭이 어떠하든 어디에 분류되든 누구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2중 분류”는 해방 후에도 계속되다가 최근에 울릉도에서 완전히 분리돼 일본의 오키시마 곁에 놓이게 됐다.

또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동해와 태평양 해역의 국제 해도를 일본 해상보안청이 제작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일부 해도에 “다케시마”라는 명칭 하나만 쓰이게 됐다. 이렇게 제작된 프랑스의 해도들에는 “리앙쿠르” 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서양의 자료에서 독도가 울릉도로부터 분리되고 또한 일본 명칭인 다케시마만 사용된 것은 비판과 확인 없이 일본 자료와 정보에만 의존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

- 결과적으로 해도를 제작하는 국가가 된 일본의 입맛에 따라 세계 해도 상 독도 분류가 결정됐다는 말인데.

“그렇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독도에 이해관계가 없는 서양의 주요 국가들의 제3자적 관점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서양의 주요 국가의 인식을 바꿔 보고자 2차 대전 이전에는 일본 해군이, 이후에는 일본 해상보안청이 기울인 ‘노력’을 간단히 말하면 종이 위에서나마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해 일본의 오키시마와 함께 분류되도록 하는 것이었고 최근에는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인위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관계국 담당자들의 약간의 관심과 주의 그리고 역사적 사실 확인으로 쉽게 시정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각 관련 부서, 학자, 전문가는 물론 국민 모두에 의한 냉정하고 설득력 있는 자료 제시 등의 꾸준한 노력이 절실하다.”


独島見ようとすれば見てしまおうとすればマルリョムやインタビュー内容に過ぎないの..

1905年日本, 不当なシマの現考試を通じて独島を日本領土に編入決定

- 独島は現在世界ヘドで走路 ¥"リアングクル¥"だと呼ばれるのに名前に絡んだ話を聞こえて違う.

鬱陵島と独島は西洋人としてはフランス船舶たちが一番先に見つけた. だからこの二つの島が西洋名称と呼ばれることはフランソワ直接的な関連がある. 19世紀中葉であると言う西洋の主要海国であるフランス, イギリス, ロシアそしてアメリカの海軍艦艇たちは世界戦海域を探査, 調査・ 測定して水路誌とヘドを作成して来ているのに独島はフランスの捕鯨船が 1849年に見つけたと言って ¥"リアングクル¥"という名前が付けられて今日に至る.

これより先に進んだ 1787年 5月 27日, 鬱陵島の場合, 西洋人では初めてフランスの有名なラペルズ探険台によって目撃されてこれを仮装(家長)先に見つけた天文学者 ¥"ダズルレ¥"の名前が付けられた. ダズルレは 1797年刊行された <ラペルズ探険期> 部属ジドチォブのヘドに史上最初で正確な位置に上げられて 1950年代まで西洋のヘドと地図ではこの名称が使われた.

島がない東海その真ん中横になっている独島は船舶航海の時障害物に認識されて西洋海軍落とし穴の注意をひくようになったわけに東洋多くの国のどんな島よりも多くの西洋名称を持っている. ¥"リアングクル(1849, フランス名称)¥", ¥"今年里副次/メネルライ(1854, ロシア)¥", ¥"ホネット(1855, イギリス)¥"がそれやこの中でもリアングクルが一番広く, 長くそして一貫されるように現在までも使われている.

▲ ホサカ維持教授が所蔵している, 韓国と日本が江華島条約を結んだ 1876年に作成された大日本前途にも ¥"独島はない¥". ホサカ維持教授は当時日本政府が鬱陵島と独島を朝鮮領土で認めたことを立証すると明らかにした.

c。2005 oh my newsナムソヨン
- ¥"独島¥" あるいは ¥"竹島¥"という名前が使われ始めた時期はいつか. また独島領有権を明らかにする資料で 19世紀西洋地図を主張する理由は?

1850‾1910年代はどんな西洋指導にも東洋名称が使われなかった時期だ. 独島の西洋名称が登場する 1850年代以後から 1920年まで西洋で刊行されたしても, 水路だ, 指導などでは韓国や日本を含んだどんな東洋名称も使われなかった. ¥"独島¥"と ¥"竹島¥"は 20世紀に立ち入って使われ始めた名称だ. 特に ¥"独島¥"という名前は韓国が解放された後人 1946‾1947年頃から一般に知られて使われ始めたように見えて 1953年韓・日間独島を取り囲んだ論争がおこりながら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

1905年に日本が不当にシマの現かきなさいということを作って独島を日本領土に編入させると言ったし韓国は日製支配の下に置かれる状態だからその後刊行された指導は西洋で製作されたといっても日本で製作されたといってもたいてい日本指導の影響を受けたと見られる. だから 1905年以後の指導は別に意味がない. 独島の領有権関係を明らかにしようとすれば 1905年以前に製作された古地図及び近代地図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

- 日本が以前には独島を ¥"Matsushima¥"だと呼んだと言うが.

日本は過去に独島を ¥"Matsushima¥"で, 鬱陵島を ¥"竹島¥"と歌ったが西洋指導とヘドで竹島が存在しない島 ¥"アルゴーノート¥"に合わせられてからアルゴーノートが消えながら竹島も一緒に消えた. 代わりにMatsushimaが鬱陵島を示すダズルレ島に対応して使われた. 過去日本古地図で独島を示したMatsushimaという名称が鬱陵島に移って行った結果になったのだ. して独島に対してはどんな東洋名称も使われなくなった.

西洋海軍水路だ・しても, 19世紀中葉から 100余年間独島を韓国東海岸に分類

▲ 1866, <大日本海陸全図 附 朝鮮 琉球 全図> 中 朝鮮国全図 部分. -竹島(Take-shima=鬱陵島, ダズルレ), 松島(Matsu-shima=独島, リアングクル)が朝鮮(韓国)に含まれていて韓国所属なのを確かに現わしている.
- それなら現在西洋指導で独島はどんなに表記しているか?

西洋の資料には 1850年代から ¥"リアングクル¥"が使われて来ている途中 1920年代末頃から ¥"竹島¥"という名前が知られると水路誌では走路 ¥"竹島¥"を使った. ¥"リアングクル¥"はその後に書かれるとかカッコの中に入って行ってしまった. 1960年代に ¥"独島¥"という名称が知られながら ‘独島¥"名称が ¥"竹島/リアングクル¥" 後やカッコの中または ¥"韓国人たちは独島だと呼ぶ¥" などに表示され始めた. その後徐々に独島と ¥"竹島¥"が混用されているし ¥"リアングクル¥"加えることに使われる場合もある. どんなジドチォブには ¥"独島/竹島¥"だと表記して ¥"韓国と日本が領有を主張する¥"という文具を表記しておいた場合もある. 紛争を意識したのも製作者たちは中立的な ¥"リアングクル¥"だけ使ったりする.

- 西洋の水路誌とヘドでの独島表示は具体的にどんな経路に移り変わりされて来たか?

鬱陵島と独島が西洋指導に初めて登場したことは 1850年下半期フランス水路だ(航海指針書)だった. イギリス海軍の水路誌は 1858年が最初なのでフランスよりちょっと遅れる.

独島に対して西洋国々は利害関係がないからこれらの視覚は客観性を持つ. したがって 1905年日本シマの現考試と日本が発刊する水路だあるいはヘドの影響を受ける以前である 19世紀末までの西洋資料の見せてくれる事実は真実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る.

重要なことはフランス, イギリス, ロシア, アメリカなど世界主要海国海軍がしても・水路誌に鬱陵島と独島を目撃当時から韓国領土で認識して韓国の東海岸に分類して来たという点だ. 独島と一番関係が深いフランス海軍の水路誌は独島と鬱陵島を一緒に縛って 1850‾1955年まで 100余年の間韓国の東海岸に分類した. しかし 1955年版で一番(回)韓国と日本に 2中に分類した後 1971年版からは独島を鬱陵島で完全に分離してOkiシマ上においた.

イギリスは 1858‾1941年まで独島を鬱陵島とともに韓国東海岸に分類したが 1914‾1983年の間は鬱陵島とともに韓国に, Okiシマとともに日本に 2中に分類して来ている途中 1983年からは韓国で完全に分離して日本本州北西部Oki列島の下に分類している.

一方アメリカ海軍が発刊する航海くたびれることは独島が一貫されるように韓国に分類されているのにこれはアメリカが独島を確固に韓国領土で認めていることを反映したものと言う. この事実は ¥"鬱陵島, 独島, 済州島を日本の行政管轄区域から除く¥"は 1946年 1月 29日付け連合国最高司令部訓令(SCAPIN 677)の精神科も一致する.

日本, 1970年代からしても製作...西欧国々無批判的に受け入れて

▲ 二陣人教授は去る 1998年 4月独島研究で <西洋資料で本独島>を出版したしこれを修正補完して同じ年 9月 <独島, 地理上の再発見>という題目でまた紹介した. 彼は来る 23日韓国学中央研究員 (精神文化研究員の新しい名前), 韓国文化広報センター, 東海研究会が共同に主催する学術発表会講演のために韓国を訪問する.
c。2005 朴迎神
- 目撃当時から独島を韓国領土で認識した西洋しても製作国たちが漸次的に韓国と日本に 2中分類している途中また日本方へ分類するようになった理由は何か?

19世紀末葉まで韓国や中国, 日本は科学的な測定と観察で周辺海域に対する水路誌やヘドを作成する能力がなかった. だからイギリスやフランスの海軍が遠い海域まで来て自主的に探査して測定して得た情報を土台で水路誌とヘドを作成した.

日本は東海と太平洋海域に対してこれら西洋資料を 1890年代からそのまま収容, 飜案して使ってから徐徐に自ら調査・測定した水路誌とヘドを英語と日本語で刊行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したがって西洋多くの国々は費用と努力が莫大に入る極東海域の調査活動代わりに日本資料に寄り掛かるようになったのだ. こういうわけで西洋資料で 19世紀始終鬱陵島とともに縛られて韓国の東海岸に分類されて来た独島が 20世紀前半期からは韓国の鬱陵島とともに, 日本のOkiシマとともに 2中に分類され始めた.

の焚く韓国が日帝の支配の下にあったので独島の名称がどうでもどこに分類されても誰も気に止めなかったはずだ. このような ¥"2中分類¥"は解放後にも続いている途中最近鬱陵島で完全に分離して日本のOkiシマのそばに置かれるようになった.

また 1970年代後半期からは多くの国が共同で使う東海と太平洋海域の国際ヘドを日本海上保安庁が製作するようになったがこれにより一部ヘドに ¥"竹島¥"という名称一つだけ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 こんなに製作されたフランスのヘドドルには ¥"リアングクル¥" マージャーも影をひそめた. 西洋の資料で独島が鬱陵島から分離してまた日本名称である竹島だけ使われたことは批判と確認なしに日本資料と情報にだけ寄り掛かることで発生したのだ.

- 結果的にヘドを製作する国家になった日本の口当たりによって世界しても上独島分類が決まったという話だが.

そうだ. もう言ったところのように独島に利害関係がない西洋の主要国々の第3自適観点は合理的で客観的と言える. このような西洋の主要国家の認識を変えて見ようと 2次大戦以前には日本海軍が, 以後には日本海上保安庁が傾けた ‘努力’を早い話が紙の上で独島を鬱陵島で分離して日本のOkiシマとともに分類されるようにすることだったし最近には ¥"結実¥"を見たと言えるだろう.

これは人為的で非合理的なのだ. 関係国担当者たちの少しの関心と注意そして歴史的実は確認で易しく是正されることができる. 韓国政府の各関連部署, 学者, 専門家はもちろん国民皆による冷情で説得力ある資料提示などのたゆまぬ努力が切実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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