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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칸 넘는 조선 살림집의 비밀은 족제비?

[한겨레]102칸 짜리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0%95%EB%A6%89%20%EC%84%A0%EA%B5%90%EC%9E%A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강릉 선교장…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 족제비가 만들어준 부잣집

한국 최고의 부잣집 한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은 99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 전통 한옥을 살펴보면 99칸보다 큰 집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102칸 집이 있다.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던 집이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 가장 큰 집이다. 바로 강릉의 명물 “선교장”이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문만 12개가 있을 정도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이다. 역사가 300년에 이르는 이씨 집안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그리고 이 집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큰 전통 한옥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다. 먼저 그 이름부터 다르다.

보통 양반집들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이 집은 유독 “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집의 경제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선교장은 “장원”이기 때문에 이름에 “장”자가 붙었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한 집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말한다. 선교장은 이 집의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전용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장원 체계의 부잣집은 조선 시대 만석꾼 집안 중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집안이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것이다. 농토가 넓은 전라도나, 세력가들이 많았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나온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한때 선교장 집 땅은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넓은 것인지는 지도를 펴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곡창지대가 아닌 변방 강원도에서 이 집이 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은 족제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설마 그 족제비? 맞다. 그 족제비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켜세운 이내번이란 사람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고 한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그는 족제비들을 좇아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족제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의아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봤는데,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놀라운 명당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다. 어떤 신기한 기운이 족제비 떼를 시켜 그에게 명당 터를 일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명당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법도 해보인다.

좌우지간 이렇게 집터를 고른 선교장 집안은 1760년께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 집이 점점 커져 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갔다. 그럼 이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선교장은 전면이 통째로 집으로 이어져 있다. 집은 무지하게 앞면이 길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다.
이 집 앞쪽으로 수구(水口)가 넓게 벌어져 있으므로 선교장은 집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열린 수구를 비보하기 위해 긴 건물로 닫힌 형태를 만들어 풍수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부터 나온다. 저 사진 오른쪽으로 대문이 보인다. 이 집은 앞서 말했든 집안에 문이 12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 대문은 하나가 아니라 2개다. 집 앞쪽이 이렇게 길게 처리되고 대문이 2개가 있다는 점에서 선교장은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B0%BD%EB%8D%95%EA%B6%81%20%EB%82%99%EC%84%A0%EC%9E%AC&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창덕궁 낙선재와 비슷하다.

저 평대문 말고 더 멋진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6%9F%EC%9D%84%EB%8C%80%EB%AC%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솟을대문이 그 옆쪽에 있다.

자, 여기가 가장 중요한 이 저택의 대문이다. 이 솟을대문으로는 남성들과 손님들이, 옆쪽 평대문으로는 가족들과 여성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구조를 문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보자.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인지.

들어가면 또 문이다. 이 문 너머로 사랑채 공간이 있다. 언뜻 문 사이로 봐도 넓다.

선교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인 사랑채가 그 어떤 집보다도 크고 중요했던 집이다. 그래서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채가 크다.

그 이유는 이 집안이 손님을 환대하고 교류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신경을 쓴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옥들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 사랑채가 집 한 채가 아니라 무려 3채나 된다는 점이다.

작은 두번째 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으로 간다. 정말 길다. 입구에서 보았던 그 긴 전면 건물이다. 행랑 건물인데, 행랑이 줄지어서 있어서 “줄행랑”이라 부른다.

이 무지하게 긴 행랑채는 모두 23칸이다. 우리나라 집의 규모를 세는 단위는 칸(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가장 작은 집은 3칸짜리다(초가삼간 같은).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세칸집 8채를 붙여지은 수준이다.

저 행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저 맞은 편 건물, 딱 보기만 해도 이상해 보인다.

한옥 건물 앞에 뭔가를 붙였다. 그 모양이 생소하다. 저건 뭘까?

저 앞에 붙인 부분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다. 마치 한옥 같지 않아 보인다. 외국 양식을 한옥에 혼합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저런 집이 아주 드물 뿐,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다. 가령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B0%BD%EB%8D%95%EA%B6%81%20%EC%97%B0%EA%B2%BD%EB%8B%B9&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다.

▲ 창덕궁 선향재. 건물 전면에 큰 차양을 달았다. 출처=문화재청 누리집 선향재말고도 서울 종로의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C%A4%EB%B3%B4%EC%84%A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에도 저렇게 차양을 댄 건물이 있다.
그런데 선향재와 윤보선 고택 차양은 모두 나무로만 만들었다. 반면, 이 건물의 차양은 지붕을 구리로 했다.
구리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다. 구한말, 이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저 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선교장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건물이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7%B4%ED%99%94%EB%8B%B9&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열화당”이다.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이다.
열화당이란 이름은 아마도 미술이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낯익을 것이다. 미술전문출판사로 유명한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이 이 건물에서 따왔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선교장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화당이 선교장의 사랑채 3종 세트의 으뜸이다. 큰사랑으로, 여기서는 손님들과 선교장 주인이 이야기도 나누고 중요한 손님이 숙식을 하고, 토론도 하고 파티도 했다.

선교장은 사랑채가 3개여서, 손님의 등급을 보고 머물 숙소를 정해줬다고 한다. 저 열화당 옆으로 중사랑이 있는데, 이 중사랑에 집사가 머물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 내력과 학식을 테스트한 뒤 가장 뛰어난 손님이면 당연히 저 열화당으로, 중간급이면 중사랑으로, 그리고 좀 처지는 사람이면 아래사랑에 방을 내줬다.

그 아래사랑이 바로 우리가 본 길디 긴 행랑 건물이다.

23칸, 다시 봐도 길다.
일반적으로 조선 양반집에서 행랑은 하인들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는 건물이다. 그러나 선교장 행랑은 사랑채 기능을 했다. 열화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선교장이 불러 온 각종 전문인력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도대체 손님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손님 공간을 크게 마련했을까?
선교장은 손님 환대 전략으로 집안을 키웠다.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이 변방에서 선교장이 명성을 유지한 것은 “문화적 소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양반들 최고의 유람 코스는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4%80%EB%8F%99%ED%8C%94%EA%B2%BD&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당대의 인사들이 찾아와 선교장에 머무는 것이 코스가 되었다. 워낙 환대해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님들은 선교장을 문화 인맥의 핵심이자, 한양 정계와 이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선교장이 얼마나 손님을 잘 치렀느냐면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사랑에 머물다가 떠날 때에는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들의 글씨와 그림들이 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낮은 급 손님은 때가 되면 상차림의 국과 밥의 그릇 위치를 바꿔 알아서 떠나달라고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건축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저 길고 긴 행랑은 특별한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선교장은 도면으로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행랑채 건물이 뒤쪽 건물들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다.

집을 지을 때는 직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한옥들을 보면 뜻밖에도 한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 구성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 사람들은 굳이 정확하게 각을 잡고 정확한 대칭 구조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선교장에서 행랑 각도를 본채와 평행으로 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건축 전문가들은 시각적 효과 때문일 것으로 분석한다. 행랑채를 열화당 쪽으로 더 좁아지게 배치해 중사랑 쪽 마당이 너무 휑하게 넓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 이 마당에서 보면 줄행랑 건물이 비스듬한 것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런 배치는 조선 왕실의 궁궐인 창덕궁의 인정문 앞마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지형적 요인을 시각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인정문 앞마당에 가보면 양쪽 끝의 거리가 멀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 구획이 평행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 사랑채 건물 3개가 몰려있는 공간 뒤로는 근사한 쉼터 건물도 따로 있다.

집 뒷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단을 내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도 되도 숙소도 되는 집을 지었다.
일부러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로 한 지붕이 더욱 정겹다. (이 근사한 집과 아래 긴 행랑채는 여행자 숙박이 가능하다.)

그럼 이제 남자와 손님들 공간을 봤으니 여성과 가족들의 공간 안채로 갈 차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문 안에 또 문, 그리고 그 문 안에 다시 문이 보인다. 반대쪽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그 느낌이 사뭇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우뚝 올라서 앞을 굽어보는 오른쪽 건물은 안채와 붙어있는 동별당이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판이 일품이다.

“오은고택”.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여초가 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독특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작은 쪽문이 달렸다.

무엇에 쓰는 문일까? 수납공간?
열어보면 알게 된다.

저 문은 건물 아궁이 출입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문으로 저 비좁은 아궁이 공간을 드나들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게 신분 계급 사회다. 당시 하인들에겐 저런 것이 일상이었다.

이 동별당 건물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채 건물의 변화하는 지붕 선이다.

지형에 따라 건물과 지붕 높이가 삼단으로 꺾이는 모습이 근사하다.

이 건물이 안채다. ㄱ자로 꺾어져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쪽이 당연히 여성들의 대장인 안방마님의 숙소이고, 그 옆으로 꺾이는 부분에 며느리가 산다.

안방마님의 방에는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찾아보시라.

자세히 보면 방 구조가 2겹이다. 앞쪽에 넓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좁은 방이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쪽 방이 주인인 마님 방이다. 뒤쪽은 하녀의 방이다.
하녀는 마님 옆 저 방에서 마님과 함께 잤다. 중간마다 심부름 해야 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하녀가 마님 옆에 자는 주된 이유는 마님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하녀는 곧 “인간 텔레비전”이었던 것이다. 역시 신분사회의 모습이다.

온 김에 부엌도 보자. 뒤쪽에 돌담을 만들어 부엌에서 보이는 풍경이 액자처럼 멋지다. 한옥 특유의 매력.

그런데 솥 옆에 또 까맣게 뭔가 솥은 아닌 것이 부뚜막에 콕 박혀 있다.
이 부뚜막 일체형 그릇은 물을 데우는 것이다. 불을 땔 때 저기에 물을 부어놓으면 가열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

선교장이 다른 고택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이런 크고 복합적인 구조에 있다.
선교장을 연구한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이 집의 특별함으로 “남성 공간과 여성 공간”, “손님 공간과 가족 공간”, “주인 공간과 하인 공간”, 그리고 “산자의 공간인 생활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인 제사 공간”이 공존하는 점을 꼽았다.

곧 선교장은 건축사전 같은 집인 동시에 조선 시대 양반 생활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건축으로 보여주는 문화사전 같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건축과 조경의 조화”를 빼놓을 수 없다.

선교장과 그 앞 활래정 연못은 지금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활래정은 선교장의 독특한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좋은 “스타” 건물이다.

선교장 입구 연못 가에 지은 활래정은 뒤쪽은 연못 가장자리 땅에 기대고 있고, 앞쪽은 돌기둥에 의지해 연못 위에 올라서 있다. 줄행랑이 창덕궁의 낙선재를 닮았다면, 이 건물은 창덕궁 부용지 연못가의 부용정을 연상시킨다.

“활수(活水)가 계속 들어오는 정자”란 뜻의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곳 다실에서 연꽃이 가득한 못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궁궐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지금도 활래정에선 전통차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이 멋진 경치와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선교장은 특별한 전통 건축이다.
선교장은 독특한 건축을 활용해 집안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다른 부잣집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장을 둘러볼 때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선교장 옆에 있는 이 건물들이다.

선교장 다른 건물들에 견주면 평범한 건물들이다. 별 특징도 없다.
왼쪽 건물은 창고다. 선교장의 위세를 보여주는 건물이라고는 할 수 있다. 오른쪽 건물은 지금의 선교장 관리사무소다.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뜻깊고 소중한 곳이었다. 강원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가 여기 있었다.

선교장의 여섯 번째 주인이었던 이근우는 조선이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던 1908년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동진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7%AC%EC%9A%B4%ED%98%9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여운형과 이시영 등 당대 최고의 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학생들에겐 숙식과 교복 등을 모두 무료로 지급했다.

그러나 동진학교는 3년 만에 문들 닫고 만다. 민족의식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켰기 때문이었다.

이근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전국 부자들을 모아 만든 중추원 참의를 맡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해주었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동진학교를 운영할 때 인연을 맺은 여운형 등을 도왔던 것이다.

그 지원 방법이 무척 흥미롭다. 이근우는 사람을 시켜 집안 사당에서 위패를 몰래 훔쳐가게 했다. 위패는 제사 지낼 때 조상의 혼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조선 시대 양반들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이근우는 이 위패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독립운동 연락책에게 돈을 건넸다고 한다.

선교장 집안의 성공 비결은 지금의 기업가들 못잖은 경영 마인드였다.

조선 후기 선교장은 당시 시대 변화를 잘 포착해 `염전 사업”으로 부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새로운 농사법으로 떠오르던 이앙법을 도입했다.

또한 “벤처 정신”도 강했다. 번 돈으로 땅을 사들이기보다는 농토 개간에 “올인”했다.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씨 집안으로선 강릉 토박이 세력들의 견제와 충돌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선교장 집안은 주변 뻘을 논밭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땅을 늘렸는데, 새로 개간한 땅은 세금이 면제되는 이점도 있었다.

선교장이 성공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최고의 방법인 “혼맥”이었다.

집안이 흥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돈을 많이 벌던, 과거에 붙어 고위 공직자가 되던 자력갱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결혼이다. 자기 능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흔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반면 결혼은 “엘리베이터”다. 훨씬 더 높이, 그리고 빨리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어서다.

선교장은 당시 조선의 세도가인 “벌열”들과 통혼을 하면서 집안 지위를 올려갔다. 그리고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8C%80%EC%9B%90%EA%B5%B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대원군의 후원자가 되어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등 당대의 세도가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문화적으로 소통을 중시했던 점에서 이 집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교장을 찾은 이는 실로 많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부터 일제 강점기 몽양 여운형까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쟁쟁한 이들은 물론 문화계에서 당대의 스타들이 줄줄이 이 집을 찾아왔다.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이 집안의 재력과 위세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대신 이 멋진 건축만은 그대로 남아있다.

강릉은 묘한 곳이다. 큰 도시라 해도 나라 끝에 있어 외진 입지이지만 문화사적으로 보면 그 위상은 중요하다. 불교와 유교 두 우리 문화축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선 불교 면에서 보면 성지 오대산이 가까워 다양한 불교 유적들이 많다. 유교 면에서 보면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강릉에서 배출됐다.

문학은 또 어떤가. 조선 3대 여류 시인 중 2명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강릉 사람이다.

그러면 건축은? 아쉽게도 그리 대단한 것은 많지 않다. 특히 새로 복원한 강릉 관아의 수준은 눈뜨고 못 볼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강릉에서 꼭 봐야 할 건축은 있다. 고려시대 건물로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국보 건물 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0%95%EB%A6%89%20%EA%B0%9D%EC%82%AC%EB%AC%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강릉 객사문과 이 선교장이다. 이 둘은 진정 강릉의 보물이다.


100間過ぎる朝鮮最高の金持ち集

100間過ぎる朝鮮生活の家の秘密はいたち?

[ハンギョレ]102間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0%95%EB%A6%89%20%EC%84%A0%EA%B5%90%EC%9E%A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江陵宣教場…江原道唯一の万石師

# いたちが作ってくれた金持ち

韓国最高の金持ち韓屋はどこだろう.
一般的に宮廷ではない一般両班集で一番大きく作ることができる家は 99間だと知られている. 度が外れた無駄使いを阻むために家の規模を制限したというのだ. しかし必ずそうだったのではない.

実際私たち伝統韓屋をよく見れば 99間より大きい家が存在する. 正確には 102間家がある. 下人たちが住んだ家たちまで皆合すれば 300間に至った家だ. 現存生活の家韓屋の中で一番大きい家だ. すぐ江陵の名物 ¥"宣教場¥"だ. 家があまりにもカーソルー家の中に門だけ 12個があるほどだ.

src=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206/15/hani/20120615160008611.jpg

宣教場は私たちが会ってみることができる最高金持ちだ. 歴史が 300年に至る李さん家の鯨等同じ瓦の家だ. そしてこの家はさまざまな点で他の大きい伝統韓屋たちと区別される特徴が多い. 先にその名前から違う.

普通両班集たちは ¥"‾党¥"や ¥"‾各¥" などの名付ける. ところでこの家は有毒 ¥"章¥"と言う(のは)名前が付いた. 家の経済規模があんまり大きかったからだった. 宣教場は ¥"主席合格¥"であるから名前に ¥"章¥"者が付いた.

主席合格は単純に家族が多くて大きい家ではなく一家が自ら自給自足する経済的システムを取り揃えたことを言う. 宣教場はこの家の建物と家具などを専担する木手, 服類を作る針母などさまざまな品物を作る専用専門人力たちを従え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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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んな主席合格体系の金持ちは朝鮮時代万石師家の中でも類例がほとんどない.

もっとおもしろい点はこの家が江原道で万石師になったのだ. 農土が広い全羅道や, 勢力家たちが多かった慶尚道ではない山多くて気候が荒い江原道で万石師の出た場合はこの家が唯一だ. ひととき宣教場家地は北をもってはジュムンジン, 南側をもっては蔚珍までつながったと言う. これがいくら広いのかは地図を開いて見れば実感す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穀倉地帯ではない辺方江原道でこの家の興った理由はさまざまがあるものの実はいたちのためだった指導分からない.
まさかそのいたち? 当たる. そのいたちだ.

宣教場家をイルウキョセウンイネボンと言う(のは)人には伝説みたいな話がある.
彼が家建てるはずを捜して江陵一帯を歩き回ったある日山奥で急にいたち無理に会ったと言う. いたちが群れを成して押しかけるのが不思議で彼はいたちたちをついて行ったが, どの所に至ったらいたちはあっという間に消えた. 怪しげになった彼が周辺を見回ったが, その瞬間寝るのがある所が驚くべきな明堂なのを見抜いたと言う. その所がすぐ今宣教場があるベダリゴ−ルだ. どんな不思議な機運がいたち群れをさせて彼に明堂敷地を教えてあげたことかは分からないが, 当時明堂と言う(のは)概念がいくら重要だったのかを考えて見ればこんな話が出た法もしたように見える.

左右の間こんなに家の跡地を選んだ宣教場家は 1760年頃家を作り始めたし, この家がますます大きくなって今の宣教場で鎭火して行った. それじゃこの家がいくら大きい家なのか, どうして本当の金持ちで数えられるのか振り返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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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教場は全面が丸ごと家につながっている. 家は非常に前が長くてその前には井がある.
が家の前方へ守旧(水口)が広く起っているので宣教場は家方向を南西向で振った. そして開かれた守旧を急いで知らせるために長い建物で閉まった形態を作って風水の弱点を補おうと思った.

おもしろい点は着てから出る. 私写真右側に大門が見える. この家は前述したといっても家に門が 12個だ.
その中でも一番重要な文人大門は一つではなく 2個だ. 家先方がこんなに長く処理されて大門が 2個があるという点で宣教場は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B0%BD%EB%8D%95%EA%B6%81%20%EB%82%99%EC%84%A0%EC%9E%AC&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昌徳宮楽善斎に似ている.

あの平大門以外にもっと素敵な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86%9F%EC%9D%84%EB%8C%80%EB%AC%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ソッウルデムンがその横向きに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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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あ, ここが一番重要なこの邸宅の大門だ. このソッウルデムンでは男性たちとお客さんたちが, 横向き平大門では家族たちと女性たちが出入りした. 朝鮮時代の社会構造を門でも分かる.

それでは門に入って行って見よう. 一体いくら大きい家な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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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って行けばまた門だ. この門越しでサラングチェ空間がある. ふっと門の間で見ても広い.

宣教場は男性たちの空間と同時にお客さんにお会いする空間であるサラングチェがどんな家よりも大きくて重要だった家だ. それで他の家とは比べることができない位サラングチェが大きい.

その理由はこの家がお客さんを歓待して交流するのに全国で一番気を使った家だったからだ. 他の韓屋たちと一番比較される部分がサラングチェが家一軒ではなくおおよそ 3軒もなるという点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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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さな二番目門を通ってサラングチェ庭先に行く. 本当に長い. 入口で見たその長い全面建物だ. 行廊建物なのに, 行廊が列をなしていて ¥"高飛び¥"と呼ぶ.

が非常に長いヘングラングチェは皆 23間だ. 我が国の家の規模を数える単位は間(柱と柱の間)なのに, 一番小さな家は 3間だ(草屋みたいな). この行廊建物は小さなセカンジブ 8軒をブッヨジウン水準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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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ヘングラングチェでサラングチェ庭先を眺めればこんな風景が広げられる. ところで私当たった方建物, ぴったり見るだけで変に見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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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屋建物の前に何かを付けた. その模様が見知らない. 私でもなに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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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の前に付けた部分は日の光を選り分けるひさしだ. まるで韓屋みたいではなく見える. 外国様式を韓屋に混合したことで思いやすい.
しかし, あんな家がとても珍しいだけ, 私たち伝統建築様式の中で一つだ. 加令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B0%BD%EB%8D%95%EA%B6%81%20%EC%97%B0%EA%B2%BD%EB%8B%B9&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昌徳宮連境当たりの線香嶺の場合これよりずっと大きいひさしを計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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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昌徳宮線香嶺. 建物全面に大きいひさしを計った. 出処=文化財庁ヌリジブ線香嶺を除いてもソウル鐘路の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C%A4%EB%B3%B4%EC%84%A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尹普善 前大統領古宅にもあのようにひさしをつけた建物がある.
ところで線香嶺と尹普善古宅ひさしは皆木にだけ作った. 一方, この建物のひさしは屋根をあかがねにした.
あかがねはおびただしく高い材料だ. 旧韓国末, この宣教場の招請で訪問したロシア工事がお返しでプレゼントしたあかがねであのひさしを作ったと言う.

が独特の宣教場の中でも一番独特な建物が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7%B4%ED%99%94%EB%8B%B9&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烈火だ¥"だ. 家族どうし集まって楽しく話を交わす家と言う(のは)意味だ.
烈火当たりと言う(のは)名前はたぶん美術や本が好きな方々には顔なじみだろう. 美術専門出版社で有名な出版社烈火当たりの名前がこの建物から取った. 烈火だイギウング社長が宣教場人だったからだ.

そしてこの烈火当たりが宣教場のサラングチェ 3種セットの最高だ. 大きい愛情で, 思ってはお客さんたちと宣教場主人が話も交わして重要なお客さんが宿泊をして, 討論もしてパーティーもした.

宣教場はサラングチェが 3個であって, お客さんの等級を見てとどまる宿所を決めてやったと言う. あの烈火だ横でズングサラングのあるのに, このズングサラングに執逹吏がとどまりながらお客さんが尋ねて来れば話を交わしながら家来歴と学識をテストした後一番すぐれたお客さんなら当然あの烈火当たりで, 中間級ならズングサラングで, そしてちょっとおくれる人ならの下愛に部屋を渡した.

そのの下愛がまさに私たちが見たギルデ−長い行廊建物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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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間, また見ても長い.
一般的に朝鮮両班集で行廊は下人たち宿所と馬屋, 倉庫などで使う建物だ. しかし宣教場行廊はサラングチェ機能をした. 烈火当たりに尋ねて来るお客さんは勿論, 宣教場が呼んで来た各種専門人材たちがとどまった所だ.

一体お客さんがいくら多かったからこんなにお客さん空間を大きく用意しただろうか?
宣教場はお客さん歓待戦略で家を育てた. 江原道は漢陽を基準で見る時辺方だ. この辺方で宣教場が名声を維持したことは ¥"文化的疎通¥"を追い求めたからだった.
当時朝鮮両班たち最高の遊覧コースは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4%80%EB%8F%99%ED%8C%94%EA%B2%BD&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関東八景と金鋼山だった. 江陵宣教場はまさにその町角にあった. 当代の人士が尋ねて来て宣教場に泊まるのがコースになった. あんまり歓待してくれて文化的雰囲気が良かったと定評があったからだった. こんなお客さんたちは宣教場を文化人脈の核心と同時に, 漢陽政界と受け継ぐ存在たちだった.

宣教場がいくらお客さんをよくチロッヌだったら絶頂期にはお客さん用食膳小盤だけ 300個が超えたし, とどまって去る人々にはいちいち服を一着ずつ作ってくれたと言う. それで服作る針母用建物が別にあるほどだ.
こんなに全国あちこちから尋ねて来たお客さんたちは愛にとどまって行って去る時には文や絵を残して歓待に報いた. 今の宣教場あちこちにある名筆たちの字と絵たちが皆こんな愛お客さんたちの作品だ. 低い級お客さんは時になればお膳立てのお吸物とご飯の器位置を変えて分かってトナダルだとヒントを与えたと言う.

建築話をちょっとしようとするならば, あの道で長い行廊は特別な效果を出す装置とも見られる.

宣教場は図面で見れば思いがけない事実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ヘングラングチェ建物が裏側建物と水平を成さないでななめによれていて全体的に台形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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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を建てる時は直四角形で作るのが当たり前に見える.
ところで我が韓屋たちを見れば意外にも一方が斜めな台形構成たちが意外に多い. 朝鮮人々は敢えて正確に各を取って正確な対称構造を作ることを好まなかった.

宣教場で行廊角度をボンチェと平行にしなかった正確な理由は把握することは難しいが建築専門家たちは視覚的效果のためであることに分析する. ヘングラングチェを烈火だ方でもっと細くなるように配置して中佐と方庭先がとてもだだっ広く広く見えなくしたという推定だ. 実際この庭先で見れば高飛び建物が斜めなことか全然見抜くことができない.

こんな配置は朝鮮王室の宮廷である昌徳宮の仁政門前庭でも見られる. この場合は地形的要因を視覚的に補ったことで見られるのに, 実際仁政門前庭に行って見れば両方末の距離が遠くてあまりにも自然に空間区画が平行で成り立ったことと間違えるようになる.

がサラングチェ建物 3個が追われている空間後ではすてきな憩い場建物も別に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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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後方の山につながる傾斜誌を階段式で団を出してその上に草屋根を上げた精子もなっても宿所もなる家を建てた.
わざわざ瓦を上げないで草家にした屋根がもっと情があふれる. (このすてきな家と下長いヘングラングチェは旅人宿泊が可能だ.)

それではもう男とお客さんたち空間を見たから女性と家族たちの空間奥に行く順番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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奥に入って行く門. 個人的に宣教場で一番好きな場面だ.
門の中にまた門, そしてその門の中にまた門が見える. 反対側で見ればまた他の感じの風景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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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門の中に入って行けば建物の高さがお互いに違うように配置されてその感じが全く風変りな空間が開か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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にょっきと立ち上がって前を見下ろす右側建物は奥と付いている同別当たりと言う(のは)建物だ. この建物は懸板が一品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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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ウンゴテック¥". 韓国最高の書家に数えられた秒余りギムウングヒョンの字だ. 宣教場に泊まった秒余りがプレゼントしたのだ.

そしてこの建物は独特に建物の下気団部に小さなくぐり戸が走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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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に使う門だろう? 収納空間?
開けてみれば分か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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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門は建物炊き口門戸だ.
まったくもう, あのように小さな門であの窮屈な炊き口空間を出入り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か?
それが身分階級社会だ. 当時下人たちにはああなのが日常だった.

が同別だ建物で奥を眺めれば個人的に宣教場で二番目で好きな場面が出る. 奥建物の変化する屋根線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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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形によって建物と屋根高さが三段で折れる姿がすてきだ.

が建物がひったくらない. 定木に折られているのに正面を眺める方が当然女性たちの大将印奥様の宿所で, その横で折れる部分に嫁女が住む.

奥様の部屋にはどこかおもしろい隅がある. 下の写真で捜してみ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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詳らかに見れば部屋構造が 2重だ. 先方に広い部屋があって, その中にまた狭い部屋がある. どうしてこのようにしただろうか?

先方部屋が主人である奥様部屋だ. 裏側は下女の部屋だ.
下女は奥様そばの私部屋で奥様とともに寝た. 中間ごとにおつかい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

そんなこともあったが下女が奥様横に寝る主な理由は奥様が眠るまで話を聞かせるためだ.
だから下女はすなわち ¥"人間テレビ¥"だったのだ. やはり身分社会の姿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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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長さに台所も見よう. 裏側に石垣を作って台所で見える風景が額縁のように素敵だ. 韓屋特有の魅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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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釜横にまた真黒く何か釜ではないのがかまどにひきこもっている.
がかまど一体型器は水を暖めるのだ. 火を炊く時あそこに水を注いでおけば加熱される原理を利用した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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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教場が他の古宅と一番区別される点はこんな大きくて複合的な構造にある.
宣教場を研究したチァザングソブ江原大教授はこの家の特別することで ¥"男性空間と女性空間¥", ¥"お客さん空間と家族空間¥", ¥"主人空間と下人空間¥", そして ¥"山紫の空間である生活空間と死亡者の空間である祭祀空間¥"が共存する点を指折った.

すぐ宣教場は建築辞書同じ家である同時に朝鮮時代両班生活文化の多様な側面を建築で見せてくれる文化辞書同じ家でもある. そしてここに一つをもっと加えれば ¥"建築科造景の調和¥"を漏らすことができない.

宣教場とその前ファルレゾング池は今も絵はがきみたいな風景をおさめている. このファルレゾングは宣教場の独特の建物の中でも一番人気良い ¥"スター¥" 建物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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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教場入口池街に建てたファルレゾングは裏側は池端地によっているし, 先方は石柱に頼って池の上に立ち上がっている. 高飛びが昌徳宮の楽善斎を似ていたら, この建物は昌徳宮芙蓉誌池加衣芙蓉亭を連想させ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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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水(活水)がずっと入って来る精子¥"と言う意味のファルレゾングは宣教場で一番美しい空間だ.
こちら茶の間で蓮華が一杯なくぎを眺めてお茶を飲む気持ちは宮廷が羨ましくない位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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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もファルレゾングでは伝統茶を体験するプログラムを運営していてこの素敵な景色と趣を味わうことが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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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んないくつかの点のため宣教場は特別な伝統建築だ.
宣教場は独特の建築を活用して家文化を作り出したという点で他の金持ちたちと区別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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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して私たちが宣教場を見回す時必ず落としてはいけない所がある. 宣教場の隣にいるこの建物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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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教場他の建物に比べれば平凡な建物だ. 別に特徴もない.
左側建物は倉庫だ. 宣教場の威勢を見せてくれる建物とはできる. 右側建物は今の宣教場管理事務所だ.
こちらは韓国近現代史の意味深くて大事な所だった. 江原道最初の近代式学校である ¥"トンジン学校¥"がここにあった.

宣教場の六番目主人だった李根優は朝鮮が風前のともしびの運命だった 1908年人才養成のために私財をはたいて新しい学問を教えるトンジン学校を建てた. そして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97%AC%EC%9A%B4%ED%98%9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呂運亨と李始栄など当代最高の人士を教師に招いた. 学生たちには宿泊と制服などを皆無料で支給した.

しかしトンジン学校は 3年ぶりに門たち閉めてしまう. 民族意識が高くなることを憂慮した日帝が強制で閉校させたからだった.

李根優は日帝強点期の時の日本が全国分限者を集めて作った中枢院参議をマッギもした. 現実的には日本に協調してくれたが後では秘密裡に独立運動資金を出した. トンジン学校を運営する時縁を結んだ呂運亨などを助けたのだ.

その支援方法がすごくおもしろい. 李根優は人をさせて家祠堂で位牌を密かに盗むようにした. 位牌は祭祀を行う時先祖の魂を象徴する品物で, 朝鮮時代両班たちには一番大事な品物だ. 李根優はこの位牌を取り戻すという言い立てで独立運動連絡責任者にお金を渡したで言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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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教場家の成功秘訣は今の企業家たち劣らない経営マインドだった.

朝鮮後期宣教場は当時時代変化をよく捕捉して `塩田事業¥"で金持ちになり始めた. そしてこんなに溜めたお金で新しい農業法で浮び上がった田植え法を取り入れた.

も ¥"ベンチャー精神¥"お金を出さないで講義を聞いた. 番(回)お金で地を買受けるよりは農土開墾に ¥"オールイン¥"した. 外部から移住して来た李さん家としては江陵地付き勢力たちの牽制と衝突を阻むための方便でもあった. 宣教場家は周辺程度を田畑で作る作業で地をふやしたが, 新たに開墾した地は税金が免除される利点もあった.

宣教場が成功したまた一つの秘訣は事新しいこともない最高の方法である ¥"ホンメック¥"だった.

家の興る方法は二つだ. お金をたくさん儲けた, 過去に付いて高位公職者になった自力更正する方法がある. そしてもう一つが結婚だ. 自分の能力だけで成功することはよくエスカレーターに乗って上がることとようだと比喩する. 一方結婚は ¥"エレベーター¥"だ. ずっと高さ, そして早く社会的地位をあげることイッオソだ.

宣教場は当時朝鮮の勢道家である ¥"閥閲¥"野と通婚をしながら家地位をあげて行った. そして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8C%80%EC%9B%90%EA%B5%B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大院君の後援者になって政治資金を支援するなど当代の勢道家で威勢がすごかった.

といえども文化的に疎通を重視した点でこの家の特徴が目立つ.

宣教場を尋ねたこれは実に多い. 朝鮮後期秋史金正喜から日帝強点期夢陽呂運亨まで歴史教科書に出る名うての人々はもちろん文化界で当代のスターたちが幾列にもこの家を尋ねて来た.

これから時代が変わりながらこの家の富力と威勢はたくさん減ったが代わりにこの素敵な建築だけはそのまま残っている.

江陵は妙な所だ. 大きい回りなさいと言っても国あげくあって外診立地だが文化史蹟に見ればその位相は重要だ. 仏教と儒教二人の私たちムンファツックでその意味が大きい. まず仏教面で見れば聖地五台山が近くて多様な仏教遺跡たちが多い. 儒教面で見れば最高の儒者栗谷李イが江陵で排出された.

文学はまたどうなのか. 朝鮮 3台女流詩人の中で 2名の新サイムタンと許蘭雪軒が江陵人だ.

それでは建築は? 惜しくもあまりすごいことは多くない. 特に新たに修復した江陵官煬の水準は目覚めて見られないほどだ.
しかし, それでも私たちが江陵で必ず見なければならない建築はある. 高麗時代建物で残っている何ならない国宝建物 検索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0%95%EB%A6%89%20%EA%B0%9D%EC%82%AC%EB%AC%B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615153019608 target=new>江陵客舍門とこの宣教場だ. このふたつは本当江陵の宝物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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