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時間) 教科書で教えてくれなかった冷酷な現実主義的韓国史|新羅の三国統一|ソ・ヒの外交談判|武臣政権と大夢抗争|丙子胡乱と三伝島の屈辱|高宗の強大国便乗戦略|#ゴ−ルラディユンダキュ要約
- (01:09) 時代的背景: 2018年韓半島は強大国たちの角逐場で転落する危機に直面. 5千年の間強大国の間で限りない危機を経った韓半島歴史を通じて覇権交代期の生存戦略を模索.
- (02:20) 新羅の危機: 642年百済の大攻勢でたらい性を陷落されて, 高句麗の南下で中性まで陷落される. 647年には非談の乱まで起きて内憂外患に苦しむ.
- (08:47) キム・チュンチュの外交: 新羅の二つの柱キム・チュンチュとキム・ユシンは高句麗に助けを要請するものの失敗. 以後唐と連合して百済と高句麗を滅亡させて三国統一を達成.
- (17:41) ナダングヨンハブ: 唐と新羅はお互いに違う戦略的目標を持っていたが, キム・チュンチュのすぐれた外交術で唐を説得して百済を先に攻撃して高句麗を滅亡させるのに成功.
- (27:07) 高句麗と百済の選択: 高句麗はキム・チュンチュの提案を断って新羅が唐と手を握るようにしたし, 百済は唐の攻撃に備えることができなくていつわりでむなしく滅亡.
- (33:46) 新羅の備え: 新羅は高句麗滅亡の前から唐との戦争を備えて, 百済との戦争でも軍事行動の自由を確保するために努力.
- (40:34) 羅当戦争: 670年新羅は唐に先制攻撃を敢行して 6年間の戦争あげく勝利. 新羅は戦争の中にも唐と妥協する用意ができているという信号を送って冷徹さを維持.
- (47:20) キタイの侵入: 1018年冬, キタイ君が鴨緑江辺に集結して高麗を侵攻. 煮こもうとするキタイとの戦争を通じて東アジア国際秩序を再編.
- (53:05) 高麗の対応: 太祖王健はキタイの使臣を流たく送ってらくだをグムギョ殺すなど強腰な態度を見せたが, これは渤海流民のための政治的歩みだったこと. 煮こもうとする宋の国と連合してキタイを牽制する遠交近攻戦略を使用.
- (1:03:18) ソ・ヒの外交談判: 993年ソ・ヒはキタイとの外交談判を通じて江東 6株を得てキタイとの関係を改善.
- (1:17:37) キジュ大勝: 1019年姜宛賛はキジュでキタイ君を大きく撃破して 30年間の戦争を勝利に導く. 煮こもうとするキタイとの戦争を通じて自主性と平和を同時に得る.
- (1:31:53) モンゴルの侵入: 1225年モンゴル住んだ被殺事件をきっかけでモンゴルが高麗を侵攻. 煮こもうとするモンゴルとの 30年戦争を通じて民族の底力を見せてくれる.
- (1:39:39) 崔氏武臣政権: 崔氏武臣政権は伝統性ないクーデター政権で, 国防より政権安保を優先視してモンゴルの侵入にまともに対応することができない.
- (1:55:25) 江華島遷都: 崔氏武臣政権はモンゴルとの戦争を避けるために江華島に遷都して, 民たちには酸性や島で身を避けなさいと指示.
- (2:03:15) 閔初たちの抗争: 民たちはモンゴル君の掠奪に対立して自ら抗争をして 30年間モンゴルに抵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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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当連合軍でキム・チュンチュ(太宗武烈王)の戦略は新羅が糖菓手を握って百済を滅亡させる過程で核心的な役目をした. 彼の戦略は大きく 外交戦略と 軍事戦略で分けることができる.
1. 外交戦略
キム・チュンチュは新羅の生存のために党との同盟を積極推進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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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に援助要請失敗: キム・チュンチュは初めに高句麗を訪問して助けを要請したが, ヨンゲソムンに断られてむしろ監禁される所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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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との連合成功: 以後彼は唐を尋ねて だ太宗と直接交渉して羅・党同盟を結んだ(64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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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過程で彼は唐に 百済と高句麗征伐のための協力を要請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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対価で 韓半島内で唐依利益を日程部分保障してくれると約束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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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軍事戦略
キム・チュンチュの戦略は 百済滅亡 → 高句麗滅亡の手順に進行された.
(1)百済征伐 (66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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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当連合軍は 蘇ジョンバンが導く唐軍(13万)とキム・ユシンが導く新羅だね(5万)が挟攻して百済を攻撃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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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山伐戦闘(660年): 百済のギェバック将軍が新羅君を阻んだが敗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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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ビー城陷落で百済が滅亡.
(2)高句麗征伐 (66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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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滅亡後, 高句麗を攻撃するために羅当連合軍が準備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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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 高句麗の南側を圧迫したし, 党は 搖れ地域で北に攻撃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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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年平壌城が陷落されながら高句麗が滅亡した.
3. 戦略的結末及び後続対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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党は新羅とともに百済と高句麗を滅亡させた後, 韓半島を **唐依支配の下に置こうとする野心(熊津道毒婦, 安東都護府設置)**を見せ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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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にキム・チュンチュの息子 文武王が羅当戦争(670‾676年)を通じて党勢力を追い出して三国統一を完成した.
キム・チュンチュ戦略の核心
外交的に強大国(党)を引き入れて国益を企図
軍事的に新羅単独ではない連合軍を活用して百済・高句麗征伐
最終的に唐依脅威をとり除いて新羅中心の統一達成
キム・チュンチュの戦略おかげさまで新羅は韓半島で一番強い国で位置づくことができた.
<iframe width="668" height="376" src="https://www.youtube.com/embed/if9D-zhpz-M?start=1803" title="(4시간)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주의적 한국사|신라의 삼국통일|서희의 외교담판|무신정권과 대몽항쟁|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고종의 강대국 편승전략|#골라듄다큐"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4시간)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주의적 한국사|신라의 삼국통일|서희의 외교담판|무신정권과 대몽항쟁|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고종의 강대국 편승전략|#골라듄다큐 요약
- (01:09) 시대적 배경: 2018년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 5천년 동안 강대국 사이에서 무수한 위기를 겪었던 한반도 역사를 통해 패권 교체기의 생존전략을 모색.
- (02:20) 신라의 위기: 642년 백제의 대공세로 대야성을 함락당하고, 고구려의 남하로 중성까지 함락됨. 647년에는 비담의 난까지 일어나 내우외환에 시달림.
- (08:47) 김춘추의 외교: 신라의 두 기둥 김춘추와 김유신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실패. 이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
- (17:41) 나당연합: 당나라와 신라는 서로 다른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김춘추의 뛰어난 외교술로 당나라를 설득하여 백제를 먼저 공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
- (27:07) 고구려와 백제의 선택: 고구려는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게 만들었고, 백제는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해 허망하게 멸망.
- (33:46) 신라의 대비: 신라는 고구려 멸망 전부터 당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도 군사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
- (40:34) 나당전쟁: 670년 신라는 당나라에 선제 공격을 감행하고 6년간의 전쟁 끝에 승리. 신라는 전쟁 중에도 당나라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냉철함을 유지.
- (47:20) 거란의 침입: 1018년 겨울, 거란군이 압록강변에 집결하여 고려를 침공.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재편.
- (53:05) 고려의 대응: 태조 왕건은 거란의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는 발해 유민을 위한 정치적 행보였음. 고려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원교근공 전략을 사용.
- (1:03:18) 서희의 외교담판: 993년 서희는 거란과의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어내고 거란과의 관계를 개선.
- (1:17:37) 귀주대첩: 1019년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고 30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끔.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자주성과 평화를 동시에 얻음.
- (1:31:53) 몽골의 침입: 1225년 몽골 사신 피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이 고려를 침공. 고려는 몽골과의 30년 전쟁을 통해 민족의 저력을 보여줌.
- (1:39:39) 최씨 무신정권: 최씨 무신정권은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권으로, 국방보다 정권 안보를 우선시하여 몽골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
- (1:55:25) 강화도 천도: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백성들에게는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하라고 지시.
- (2:03:15) 민초들의 항쟁: 백성들은 몽골군의 약탈에 맞서 스스로 항쟁을 벌이며 30년간 몽골에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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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에서 김춘추(태종 무열왕)의 전략은 신라가 당과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전략은 크게 외교 전략과 군사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1. 외교 전략
김춘추는 신라의 생존을 위해 당과의 동맹을 적극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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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원조 요청 실패: 김춘추는 처음에 고구려를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하고 오히려 감금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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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의 연합 성사: 이후 그는 당나라를 찾아가 당 태종과 직접 교섭하며 나·당 동맹을 맺었다(6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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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그는 당나라에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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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로 한반도 내에서 당의 이익을 일정 부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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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사 전략
김춘추의 전략은 백제 멸망 → 고구려 멸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백제 정벌 (6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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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은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13만)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5만)이 협공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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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660년):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군을 막았으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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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 함락으로 백제가 멸망.
(2)고구려 정벌 (6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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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나당연합군이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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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의 남쪽을 압박했고, 당은 요동 지역에서 북쪽으로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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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멸망했다.
3. 전략적 결말 및 후속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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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신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를 **당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 설치)**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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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이 나당전쟁(670~676년)을 통해 당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김춘추 전략의 핵심
✔ 외교적으로 강대국(당)을 끌어들여 국익을 도모
✔ 군사적으로 신라 단독이 아닌 연합군을 활용하여 백제·고구려 정벌
✔ 최종적으로 당의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중심의 통일 달성
김춘추의 전략 덕분에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