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韓国人「李舜臣の捏造の歴史を簡単に信じる韓国人」







【李舜臣】作られた英雄

口を開けば嘘をつく種族らしく、歴史についても口を開けば嘘をつくのが韓国人だ。 数字のポン菓子〔※誇張〕が基本の中国人亜種である韓国人は365日嘘をつき、後には自分が言った嘘に自分も騙される醜態まで見せたりもする。

韓国では壬辰倭乱、日本では文禄慶長の役と呼ばれる戦争で「李舜臣は日本軍を10~15万人水葬した!」と依然として大多数の韓国人は信じている。 閑山島大捷〔※閑山島海戦〕で李舜臣が日本軍3万人を水葬したと堂々と主張する一方、東郷平八郎提督は李舜臣を尊敬し、「李舜臣はネルソンより優れた指揮官だった」と発言したとして露骨に歴史歪曲に、日露戦争でロシア海軍を撃破した日本海軍が勝利した理由は李舜臣を学んだ結果だと語るなど。 うそを息づくようにしゃべっている。

当時、脇坂安治の石高は3万程度で、いくらせいぜい兵力動員力は1500~1800人が限界だ。 明と朝鮮は将帥に官職を与え、官職による兵力がついてくる専制政体制だが、封建制日本は大名の石膏によって兵力数が決まる。 例えば、Aという企業が下のB企業に仕事を任せれば、B企業は自分の生産性によって仕事を処理する形式だと言える。 中小大名である脇坂家の石高が3万石以上動員できる兵力は普通1500人で、実際に戦争中に脇坂が率いる兵力数も1500人だった。 ところで、何?閑山島で3万人が死ぬの??

同時代を比べてみても、どれほど狂気の沙汰なのか簡単に分かる。 脇坂がウルグ・アリ〔※オスマン帝国海軍の提督〕かハイレディン〔※後のオスマン帝国の提督〕級だというのか。 韓半島の海戦は1592年で、レパントの海戦は1571年に勃発したが、地中海の覇権をめぐってオスマン帝国はオスマン海軍とバルバリ海賊を総動員し、戦闘結果は合わせて死傷者が約3万人だ。 李舜臣を浮上させるために脇坂をオスマン帝国以上に浮かべる狂ったことをしたのが韓国人だ。 それでも最近は3万人死亡から8千人死亡に数字を減らしたとはいえ、依然として扇動していることは変わっていない。

封建制で兵力は該当領地に限定されるため、本当に致命的な大敗だったとすれば、家臣団も兵力も簡単に回復することはできない。 封建制は、マンパワー被害が領地ではなく、全国に分散する専制政ではない。 しかし、その後、脇坂が1200人の兵力を指揮したことからも分かるように、韓国が主張するように壊滅的な被害などはなかった。 しかも4大海戦だなんて? 口を開けば구라が出てくるよね?

1隻当たり100人ずつ死亡したと計算しているが、これは朝鮮軍の主力船舶である板屋船が125人であることを根拠に、日本船舶にも同様に適用したわけだ。 ところでそうかな? 日本の水軍は中型船舶の関船(せきぶね)と小型の小早船(こばやぶね)で構成されていた。 最大の船舶である安宅船は主に旗艦用に使われた。 便宜上と呼ばれたもので、近代海軍のようにクラスが決まったわけでもないので、すべて大きさがまちまちで関船は40~70人、小早は15人程度から多ければ20人といえる。

1576年、織田家に対抗して毛利家は村上水軍を中心に800隻の船団を派遣したが、韓国式の兵力解釈によると、この時の兵力は8万人か。 村上の石膏は15万石と推定され、兵力動員力は最大1万人と見るのが一般的な定説だが? 駆逐艦が沈没したら、戦艦が沈没したものとみなすべきか? どこでそんなにとんでもないことを言うんだろう。

東郷平八郎提督が李舜臣を尊敬したという発言は、当然韓国以外ではどこにもない扇動であり、 詐欺劇で日本側のいかなる記録にもない。 日本海軍が李舜臣を学んだというのも嘘で、明治維新によって日本人がアメリカ-イギリスに留学まで行って成し遂げた結果であって、何が李舜臣に学ぶの?

日本で李舜臣が知られたきっかけは、柳成龍の『徴秘録』の影響といえる。 それまでは関心がなかったが、徴秘録が広がり、無批判的に受け入れた結果で、これがそれさえも根拠のある最も好意的な評価と言える。 何かの国を救ったと騒ぐが、当時の朝鮮支配層が本当に国を救ったと評価した人物は明の万暦帝だった。 宣祖が明に関連した人物を功臣扱いしたのも、明の派兵が戦争の版図を変える最も決定的な契機になったためだった。

制海権を握って海上封鎖したということは、敵の港に行く物流を遮断したことを意味する。 しかし、朝鮮水軍は戦争が終わるまで九州-対馬-釜山という海上ラインを遮断できなかった。 遮断したなら、これ以上武器·兵力の補充が不可能であるため、戦争が7年も続くということ自体が不可能だが、制海権を掌握して補給遮断したことがないため、戦争が長引くしかない。 制海権掌握云々は、単語の意味さえ理解できない韓国被支配層の愚昧さをよく知っている韓国支配層の扇動にしかならない。

李舜臣はできることとできないことを区分し、日本水軍の小型艦隊を急襲して戦果を得ることに主として集中した有能な人であって、大した大海戦を繰り広げて勝利した人ではない。 李舜臣の功績とは、主に漢山島周辺海域に出現した小型艦隊との戦闘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韓国支配層は歴史歪曲のために脇坂をメジャー級に変身させる詐欺を働いただけだ。 海戦と関係なく流れたのが7年間の戦争だったので、徴秘録以外は日本も明もそれで大きく扱わなかったのだ。

戦争は明が参戦して膠着状態になり、日本軍の戦略変化は李舜臣ではなく明に対する対応で行われ、補給困難で凄惨な戦闘を行った事例もやはり李舜臣のためではなく明に包囲された蔚山城の戦いだ。 加藤清正は蔚山城の戦いでトラウマが生じ、日本に帰還した後、城を建築する際に大量の井戸と食糧備蓄を必須としたほどだった。

それでも黄海に向かう海上補給は遮断したのではないか」と文句を言うだろうが、前近代において食糧補給は現地補給が大きな比重を占めている。 そのため、青野戦術が効果を得るしかないのだ。 朝鮮に来た明の軍が補給で大きな苦労をしたことからも分かるように、薄っぺらな朝鮮の生産力と明と日本ですでに確立された貨幣経済も実現していない朝鮮の凄惨な原始性のためであって、何が李舜臣のためなのか。 万暦帝が朝鮮で買って食べろと銀の字を積んで送ってあげたら、明の国では当然の貨幣経済が朝鮮土人国では銀の字で買って食べること自体が不可能だね? じゃあ、どうするの? 生きるためにも略奪しなければならない。

日本軍も同じだ。 はたいても銀行をはたいてこそ、わらぶき屋根の家を歩き回りながら、何の時間の無駄で人材の浪費なのか。 当時、韓半島で生産力のある地域は全羅道と慶尚道で、それで戦争後半期に日本軍は慶尚道に城を築き、持ちこたえ始めたのだ。 これでは最大の理由だった朝鮮の原始性は教育もせず略奪したことだけを教えるのが韓国の教育。 「厚顔無恥」という言葉を悟ること。

李舜臣の最後の露梁海戦は数万人を撃破した朝鮮軍の勝利だと主張するが、これも説得力がない。 閑山の海戦と同様に日本軍数万人が死んだと言い張るが、その後も島津家は動員力においてこれといった変化はなかった。 家臣団皆殺し? 当然事実ではない。 すでに述べたように、数万人が死ぬほどの大敗なら、該当家門はマンパワーの復旧が事実上不可能で、周囲の家門に吸収されるしかない。

韓国は鷺梁海戦の歴史歪曲のために関ヶ原の戦いで島津兵力を口実にする場合がほとんどだが、この時の兵力規模はただ重臣たちが参戦反対した結果であり、徳川家が警戒し続けたほど島津家の地位は変わらなかった。戦争は1598年に終わったが、1年後の1599年に発生した島津家の内乱である庄内の乱で島津家が動員した兵力は4万に達する。 一体数万人が死んだ証拠がどこにあるの?

明の軍を壊滅させた泗川城の戦い〔※泗川の戦い〕で島津兵力が約8千人であることを勘案すれば、海戦に参加した13万石膏の橘家の5千、宗家の1千、高橋500、寺沢家の1千を合わせたとしても、鷺梁海戦で日本側兵力は1万5千程度だ。 数万人という数字自体が全く出てこないのだ。

数万人が死ぬほどの惨敗なら、指揮部も打撃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が、当然そのようなことはなく、指揮部が死んだのは島津家ではなく、明·朝鮮連合軍だった。 明側は鄧子龍が戦死し、朝鮮軍は李舜臣、方徳龍、李彦良、高得将、李英男戦死。 明の指揮官が戦死し、朝鮮軍の李舜臣と李舜臣指揮下の名士達が流されたということは、指揮部が致命打を受けた証拠だ。 明の朝鮮連合軍が奇襲を行ったにもかかわらず、日本の水軍の長所である接近戦に巻き込まれたということであり、1人程度ならネルソンと比べて無理矢理でもいいが、この程度の打撃を受けたということは敗北以外に説明できない。 日本軍が苦戦したという評価までは可能だが、「対捷」云々するのはプロパガンダしかない。

明には暗君だったが、朝鮮には救世主だった万暦帝に朝鮮両班たちは一途に仕え、明が滅びても、朝鮮が日本帝国に合併された後も祭祀を続けた。 韓国戦争の主力が米軍なら、7年間の戦争で朝鮮を救ったのは明であり、この点を先祖や両班たちもよく知っていた。 戦前まで朝鮮の中国に対する崇拝意識が理念的な面が強かったとすれば、戦後は肌で感じられる現実だった。 理念が現実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儒者の間で再造之恩〔重たい恩義〕は絶対的な名分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 ただでさえ小チャンケだったが、チャンケの恩恵を受けてさらに小チャンケになってしまったきっかけといえる。

救世主であるかのように李舜臣を浮かべることは、日本と中国に対する劣等感を隠すための道具になっても、決して真実にはならない。 韓国が歴史の中でできることだとしても、扇動と歪曲しかないだろうが。



한국인 「이순신의 날조의 역사」

한국인 「이순신의 날조의 역사를 간단하게 믿는 한국인」







【이순신】만들어진 영웅

구를 열면 거짓말하는 종족다워서, 역사에 대해서도 입을 열면 거짓말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숫자의 폰 과자〔※과장〕이 기본의 중국인 아종인 한국인은 365일 거짓말해, 후에는 자신이 말한 거짓말에 자신도 속는 추태까지 보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일본에서는 문녹게이쵸의 역으로 불리는 전쟁으로 「이순신은 일본군을 1015만명 수장했다!」라고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인은 믿고 있다. 한산도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이 일본군 3만명을 수장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한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이순신을 존경해, 「이순신은 넬슨보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다」라고 발언했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역사 왜곡에,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 일본해군이 승리한 이유는 이순신을 배운 결과라고 말하는 등. 거짓말을 숨쉬도록(듯이) 말하고 있다.

당시 ,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수확량은 3만 정도로, 아무리 겨우 병력 동원력은 15001800명이 한계다.명과 조선은 장수에게 관직을 주어 관직에 의한 병력이 따라 오는 전제 정체제이지만, 봉건제 일본은 오나의 석고에 의해서 병력수가 정해진다. 예를 들면, A라고 하는 기업이 아래의 B기업에 일을 맡기면, B기업은 자신의 생산성에 의해서 일을 처리하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소 오나인 와키사카가의 수확량이 3 망고쿠 이상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보통 1500명으로, 실제로 전쟁중에 와키사카가 인솔하는 병력수도 1500명이었다. 그런데, 무슨?한산도에서 3만명이 죽는 거야?

동시대를 비교해 봐도, 얼마나 광기의 소식인가 간단하게 안다. 와키사카가 우르그·개미〔※오스맨 제국 해군의 제독〕이나 하이레딘〔※후의 오스맨 제국의 제독〕급이라고 하는 것인가. 한반도의 해전은 1592년으로, 레판트의 해전은 1571년에 발발했지만,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오스맨 제국은 오스맨 해군과 바르바리 해적을 총동원해, 전투 결과는 맞추어 사상자가 약 3만명이다. 이순신을 부상시키기 위해서 와키사카를 오스맨 제국 이상으로 띄우는 미친 것을 한 것이 한국인이다.그런데도 최근에는 3만명 사망으로부터 8천명 사망에 숫자를 줄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선동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다.

봉건제로 병력은 해당 영지로 한정되기 위해, 정말로 치명적인 대패였다고 하면, 가신단도 병력도 간단하게 회복할 수 없다. 봉건제는, 인적자원 피해가 영지가 아니고, 전국에 분산하는 전제정은 아니다. 그러나, 그 후, 와키사카가 1200명의 병력을 지휘한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이 주장하도록(듯이) 괴멸적인 피해 등은 없었다. 게다가 4 대해전이라니? 입을 열면이 나오지요?

1척 당 100명씩 사망했다고 계산하고 있지만, 이것은 조선군의 주력 선박인 판자집선이 125명인 것을 근거로, 일본 선박에도와 같이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럴까? 일본의 수군은 중형 선박의 관선(키토대군요)과 소형의 소하야후네(나뭇 조각군요)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대의 선박인 아타카선은 주로 기함용으로 사용되었다.편의상으로 불린 것으로, 근대 해군과 같이 클래스가 정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크기가 가지각색으로 관선은 4070명, 소조는 15명 정도로부터 많으면 20명이라고 할 수 있다.

1576년, 오다가에 대항해 모우리가는 무라카미수군을 중심으로 800척의 선단을 파견했지만, 한국식의 병력 해석에 의하면, 이 때의 병력은 8만명인가. 무라카미의 석고는 15 망고쿠와 추정되어 병력 동원력은 최대 1만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지만? 구축함이 침몰하면, 전함이 침몰한 것으로 간주해야할 것인가? 어디서 그렇게 터무니 없는 말을 하겠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순신을 존경했다고 하는 발언은, 당연히 한국 이외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선동이며, 사기극으로 일본측의 어떠한 기록에도 없다. 일본해군이 이순신을 배웠다는 것도 거짓말로, 메이지 유신에 의해서 일본인이 미국-영국에 유학까지 가서 완수한 결과이며, 무엇이 이순신에 배우는 거야?

일본에서 이순신이 알아진 계기는, 유성용의 「징비록」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까지는 관심이 없었지만, 징비록이 퍼져,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인 결과로, 이것이 그것마저도 근거가 있는 가장 호의적인 평가라고 말할 수 있다.무엇인가의 나라를 구했다고 떠들지만, 당시의 조선 지배층이 정말로 나라를 구했다고 평가한 인물은 명의 만력제였다. 선조가 명에 관련한 인물을 공신 취급했던 것도 , 명의 파병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기 때문에였다.

해상권을 잡아 해상 봉쇄했다고 하는 것은, 적의 항에 가는 물류를 차단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큐슈-대마도-부산이라고 하는 해상 라인을 차단할 수 없었다. 차단했다면, 더 이상 무기·병력의 보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이 7년이나 계속 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해상권을 장악 해 보급 차단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해상권 장악 운운은, 단어의 의미마저 이해할 수 없는 한국피지배층의 우매를 잘 알고 있는 한국 지배층의 선동 밖에 되지 않는다.

이순신은 할 수 있는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일본수군의 소형 함대를 급습하고 전과를 얻는 것에 주로 집중한 유능한 사람이며, 대단한 대해전을 펼쳐 승리한 사람은 아니다. 이순신의 공적이란, 주로 한야마시마 주변 해역에 출현한 소형 함대와의 전투인 것에도 불구하고, 한국 지배층은 역사 왜곡을 위해서 와키사카를 메이저급으로 변신시키는 사기를 쳤을 뿐이다.해전과 관계없이 흐른 것이 7년간의 전쟁이었으므로, 징비록 이외는 일본도 명도 그래서 크게 취급했던 것이다.

전쟁은 명이 참전해 교착 상태가 되어, 일본군의 전략 변화는 이순신은 아니고 명에 대한 대응으로 행해져 보급 곤란하고 처참한 전투를 실시한 사례도 역시 이순신이기 때문에는 아니게 명에 포위된 울산성의 싸움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의 싸움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일본에 귀환한 후, 성을 건축할 때에 대량의 우물과 식량 비축을 필수로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황해로 향하는 해상 보급은 차단한 것은 아닌가」라고 불평하겠지만, 전근대에 있어 식량 보급은 현지 보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아오노 전술이 효과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에 온 명의 군이 보급으로 큰 고생을 한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얄팍한 조선의 생산력과 명과 일본에서 벌써 확립된 화폐 경제도 실현되지 않은 조선의 처참한 원시성이기 때문에에서 만나며, 무엇이 이순신이기 때문에인가. 만력제가 조선에서 사 먹으라고 은의글자를 쌓아 보내 주면, 명의 나라에서는 당연한 화폐 경제가 조선 토인국에서는 은의글자에서 사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 어떻게 하는 거야?살기 위해서도 약탈해야 한다.

일본군도 같다. 털어도 은행을 털어야만, 초가 지붕의 집을 걸어 다니면서, 무슨 시간의 낭비이고 인재의 낭비인가. 당시 , 한반도에서 생산력이 있는 지역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그래서 전쟁 후반기에 일본군은 경상도에 시로를 쌓아, 유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으로는 최대의 이유였던 조선의 원시성은 교육도 하지 않고 약탈한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한국의 교육. 「후안무치」라고 하는 말을 깨닫는 것.

이순신의 마지막 로량해전은 수만인을 격파한 조선군의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한산의 해전과 같게 일본군수만인이 죽었다고 우기지만, 그 후도 시마즈가는 동원력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가신단 몰살? 당연히 사실은 아니다.벌써 말한 것처럼, 수만인이 죽을 정도의 대패라면, 해당 가문은 인적자원의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주위의 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은 로량해전의 역사 왜곡을 위해서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시마즈 병력을 구실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때의 병력 규모는 단지 중신들이 참전 반대한 결과이며, 토쿠가와가가 계속 경계했을 정도 시마즈가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전쟁은 1598년에 끝났지만, 1년 후의 1599년에 발생한 시마즈가의 내란인 쇼나이의 란으로 시마즈가가 동원한 병력은 4만에 이른다. 도대체 수만인이 죽은 증거가 어디에 있는 거야?

명의 군을 괴멸 시킨 사카와시로의 싸움〔※사천의 싸움〕으로 시마즈 병력이 약 8천명인 것을 감안하면, 해전에 참가한 13 망고쿠고의 타치바나야의 5천, 종가의 1천, 타카하시 500, 테라사와가의 1천을 맞추었다고 해도, 로량해전에서 일본측 병력은 1만 5천 정도다. 수만인이라고 하는 숫자 자체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수만인이 죽을 정도의 참패라면, 지휘부도 타격을 받지 않으면 안 되지만, 당연 그러한 것은 없고, 지휘부가 죽은 것은 시마즈가가 아니고, 명·조선 연합군이었다. 명측은 자용이 전사해, 조선군은 이순신, 방덕류, 이언양, 고득 마사, 이영남 전사.명의 지휘관이 전사해, 조선군의 이순신과 이순신 지휘하의 명사들이 흘러갔다고 하는 것은, 지휘부가 치명타를 받은 증거다. 명의 조선 연합군이 기습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군의 장점인 접근전에 말려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어, 1명 정도라면 넬슨과 비교해서 무리하게라도 좋지만, 이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패배 이외에 설명할 수 없다. 일본군이 고전했다고 하는 평가까지는 가능하지만, 「대첩」운운하는 것은 선전 밖에 없다.

명에는 어리석은 군주였지만, 조선에는 구세주였던 만력제에 조선 양반들은 한결같게 시중들고 명이 멸망해도, 조선이 일본 제국에 합병된 후도 제사를 계속했다. 한국전쟁의 주력이 미군이라면,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을 구한 것은 명이며, 이 점을 선조나 양반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전까지 조선의 중국에 대한 숭배 의식이 이념적인 면이 강했다고 하면, 전후는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이념이 현실이 되어 버렸으므로, 유생의 사이에 재조지은〔무거운 은의〕는 절대적인 명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소체케였지만, 체케의 혜택을 받아 한층 더 소체케가 되어 버린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구세주인 것 같이 이순신을 띄우는 것은, 일본과 중국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도구가 되어도, 결코 진실하게는 안 된다. 한국을 역사 중(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선동과 왜곡 밖에 없을 것이지만.




TOTAL: 2693634

番号 タイトル ライター 参照 推薦
3/31(水) パッチ内容案内させていただ… 관리자 2023-03-24 238480 18
2693634 韓国純対外金融資産世界 7位 ^_^ (5) Ca21 04:55 140 0
2693633 嫌韓倭人を殺す恐ろしい御兄さん来....... pplive112 04:33 141 0
2693632 【1つでも当てはまったら天才】本当....... kaminumaomiko2 02:45 190 0
2693631 韓国のコマクちゃんぽん ^_^ Ca21 02:08 137 0
2693630 ウクライナドでは爆弾 3Dプリンター....... cris1717 02:04 120 0
2693629 トランプ・プーチンが教えてくれた....... GreaterJapan 01:43 137 0
2693628 主人の手助けを拒否する猫 Ca21 01:43 135 0
2693627 日本はトランプ信じる? (1) cris1717 01:41 168 0
2693626 韓国人「李舜臣の捏造の歴史」 JAPAV57 01:37 174 1
2693625 福岡式天麩羅定食の元祖の店 JAPAV57 01:24 172 0
2693624 青と赤、どっちが勝つと思う? 樺太州 01:20 179 0
2693623 ロシア,アメリカにウクライ占領地稀....... (1) Ca21 01:00 188 0
2693622 グランランドにい貝がいる cris1717 00:49 148 0
2693621 李舜臣にはまったアメリカ人たち w Ca21 00:38 176 1
2693620 中, 韓国がびっくり公開した無人戦闘....... propertyOfJapan 00:35 203 0
2693619 反日から急に「お前のお父さん日本....... (1) 樺太州 00:17 214 0
2693618 日本がパーク里した donzzamon あかさたなはまやら 00:11 207 0
2693617 チキン屋の開業費用を秘密にする韓....... (1) ben2 00:00 167 0
2693616 chuchu booq 02-27 165 0
2693615 三星 Dラムシェア 1位, 2位 SK Ca21 02-27 11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