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50万名という数字の史料上根拠は, 虜につかまった人口がおおよそ 50余万人に達したという崔明吉の発言だ. 60万名という数字は “後日沈陽の朝鮮疲れである出身奴隷を取り引きする人間市場の人口が 60万人だったが, モンゴリアンたちに捕らわれた人はこの数に入らない”と書いたナマンガブの記録に根拠したのだ. この以外に疲れ人の総帥を言及したことではないが, 平安道と黄海道地域で青軍に虜につかまってから逃げて帰って来る人が日々に布地で数を推し量るという丁丑年 3月の承政院日記記事や, 沈陽で逃げる疲れ人が日々に布地で数を推し量るという沈陽長計の丁丑年 8月 19日記録などは崔明吉の 50余万人やナマンガブの 60万人が事実だろうという印象を与える. しかしナマンガブの記録を事実で受け入れたら, 朝鮮出身奴隷だけでも 60万人に達した沈陽を当時世界で一番人口が多い都市の中で一つで指折るといただけないか? 1590年代足掛け 7年も持続した倭乱期間に発生した疲れ人の数字が 5万人から 20万人に推定されているというのに, やっと2ヶ月の戦争で 50万人または 60万名の疲れ人が発生したという記録をゴッイゴッどおり信じなければならないか? 崔明吉の 50余万人は朝鮮が丙子胡乱で被った被害を人に知らせる文書に登場する数字だ. 明に朝鮮の戦争被害を強調するための外交的動機に秋冬された課長である可能性を念頭に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た日々に布地で数を推し量るという言葉は数が多いということを強調する時書く捜査的慣用句だ. 額面そのまま読んではいけない表現であることだ. 信頼するに値する史料記録が不足だからここで今すぐ疲れ人の規模を推算する作業をすることはできない. しかし次の何種類事項を考慮する時, 少なくとも 50余万人や 60万人が途方もない数字というのだけは難しくないように分かる. 第一, 丙子胡乱頃清の人口だ. 前で指摘したように, 1648年売る全体の人口は 130万人から 240万人範囲にあった. 時期が約 10年の前では丙子胡乱頃清の人口はこれより多くなかったはずだが, 本当に 50余万人や 60万名の朝鮮人が沈陽でザブヒョガッダならかなり多い数が逃げるとか身の代金を出して帰って来たと言っても清の最大人口集団は朝鮮人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しかし朝鮮人は青黛の腕欺俗株, 腕期モンゴル, 腕期限君, その中でも腕欺俗株中に限った少数集団に過ぎなかった. 第二, 疲れ人は品物ではなく人だ. 疲れ インを沈陽まで連れて行こうとすれば一応食わさなければならない. 戦争が終わった後虜たちを連れて帰国の道に上がった青軍がシムヤングウ 路帰還したことは丁丑年 4月中旬だった. 沈陽に到着するまでの 70‾80日間 50万人が超えた虜たちをどうに 食わすことができたのか? 第三, 丙子胡乱前後清の食糧事情だ. 朝鮮で撤収する途中にはどのようにしても虜たちを食べさせてサルリョッダチザ. しかし虜たちを食わす問題は沈陽到着以後にも変わりがない. ところで清で病者年は深刻な凶年だった. 洪タイ誌が分限者に残る穀食を市場に売るとか飢える人々に無想で施すとかしなさいと急き立てている都合だった. 病者年の不作による食糧不足は丁丑年の秋の取り入れ以後になればこそ初めて解消される見こみがイッオッゴ, それさえも丁丑年の農業が豊年になるだろうと言う保障もなかった. したがって丙子胡乱当時朝鮮に出征した青軍の中ただ家に食糧を十分に備蓄した者等だけが沈陽まで虜を連れて行く意慾を出すことができたと思わなければならない. 第四, 丙子胡乱当時の青軍は少なくともソウルに到着するまでは虜狩りに夢中になる暇がなかった. 次の第2章で詳らかによく見るが開戦初期青軍の戦略はできるだけ早くソウルに到着するのだった. 進軍途中の虜狩りは進軍速度を緩め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 沈陽長計が “清軍事がソウルに攻めこむ時にはその行進が非常に早くて黄海道と平安道で奪われたのがあまりすごくなかった”と指摘したそのままだ. 以上の四種類事項だけ考慮しても疲れ人が 50万人以上もなったという話は不合理説だとせざるを得ない. もちろん砲への扶養はものともしなくてただ身の代金だけ狙って虜狩りに夢中になった者等もあったはずだ. また戦争が終わった後本国に帰る途中罪のない良民を相手で虜狩りをした場合もあった. しかし少なくとも小現世者と一緒に沈陽に間青軍部隊は帰国途中の虜狩りを禁止したしもしか禁令を破って取った砲でが発見されれば直ちに釈放措置した. 他の経路で帰国した青軍部隊たちもこれと同じだったと保障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 清は戦争が終わった後の虜狩りで疲れ人になった人々に対しては後にでも事実が現われれば直ちに釈放する措置を取った. そうだったら, 丙子胡乱の時の疲れ人は一体どの位だったという話か? の上で言及したように史料が十分ではないせいにここで今すぐこの質問に対する解答を出すことはできない. ただ数十万人が絶対不可能な数字というのだけは自信あるように言える. たぶん数万人水準がその上限線だったろう. けたを一つ減らしたと言ってもしか丙子胡乱の悲劇を縮小することなのかと聞き返すかも知れない. しかし数十万人になると初めて悲劇になるのではない. 数万人だと言って悲劇の程度が減ることでもない. これから今までのように史料上の非合理的な数字にだけ頼るのではなく信頼するに値する関連史料をたくさん掘り出して合理的推算を試みる研究が出るのを期待するだけだ.


出典 : 丙子胡乱, 洪タイ誌の戦争, ソウル大東洋史学科教授旧犯陣



要約 :

当時清の人口は,130万‾240万人, そして 瀋陽は小さな都市だった.

現実的に 50万‾60万人の砲では全然収容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に当時清は深刻な食糧不足状態だからもっと不可能だ.


50万‾60万人 朝鮮人が清へ行ったのが事実なら清で朝鮮人が人口多数集団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

当時清で満洲人を除いた多数集団は漢族とモンゴル族だったし朝鮮人は少数に過ぎなかった.

清側記録では朝鮮人砲でが数十万名とか, 多かったという記録も全くない.

むしろ清部隊に虜捕獲を禁止したという記録が残っている.


そして丙子胡乱は 2ヶ月間の戦争だった. ただ 2ヶ月間の戦争の中に 50万‾60万人の砲では最初に現実的に不可能な数値だ.


結論は 50万‾60万人が虜につかまったと言ったことは明に朝鮮の戦争被害を強調するために誇張したことに過ぎない.


병자호란 포로 피해 규모

 50만명이라는 숫자의 사료상 근거는,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 명에 달했다는 최명길의 발언이다. 60만명이라는 숫자는 "훗날 심양의 조선 피로인 출신 노예를 거래하는 인간 시장의 인구가 60만 명이었는데, 몽고인들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이 수에 들지 않는다"라고 쓴 나만갑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밖에 피로인의 총수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이 날마다 천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정축년 3월의 승정원일기 기사나, 심양에서 도망치는 피로인이 날마다 천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심양장계의 정축년 8월 19일 기록 등은 최명길의 50여만 명이나 나만갑의 60만 명이 사실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만갑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조선 출신 노예만 해도 60만 명에 달했던 심양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1590년대 햇수로 7년이나 지속되었던 왜란 기간에 발생한 피로인의 숫자가 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마당에, 겨우 두 달의 전쟁에서 50만 명 또는 60만 명의 피로인이 발생했다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최명길의 50여만 명은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를 명에 알리는 문서에 등장하는 숫자이다. 명나라에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동기에 추동된 과장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천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말은 수가 많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수사적 관용구이다.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표현인 것이다. 신뢰할 만한 사료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기서 당장 피로인의 규모를 추산하는 작업을 벌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적어도 50여만 명이나 60만 명이 터무니없는 숫자라는 것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첫째, 병자호란 무렵 청나라의 인구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648년 팔기 전체의 인구는 130만 명에서 240만 명 범위에 있었다. 시기가 약 10년 앞서는 병자호란 무렵 청나라의 인구는 이보다 많지 않았을 터인데, 정말로 50여만 명이나 60만 명의 한국인이 심양으로 잡혀갔다면 상당수가 도망치거나 몸값을 내고 돌아왔다 하더라도 청나라의 최대 인구 집단은 한국인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청대의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 그 중에서도 팔기만주 안에 국한된 소수집단에 불과했다. 둘째, 피로인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피로 인을 심양까지 데려가려면 일단 먹여 살려야 한다.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청군이 심양으 로 귀환한 것은 정축년 4월 중순이었다. 심양에 도착하기까지의 70~80일 동안 50만 명이 넘은 포로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었겠는가? 셋째, 병자호란 전후 청나라의 식량 사정이다.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야 어떻게 해서든 포로들을 먹여 살렸다치자. 하지만 포로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는 심양 도착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병자년은 심각한 흉년이었다. 홍타이지가 부자들에게 남는 곡식을 시장에 내다 팔든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베풀든가 하라고 재촉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병자년의 흉작으로 인한 식량 부족은 정축년의 가을걷이 이후가 되어야만 비로소 해소될 가망이 있엇고, 그나마 정축년의 농사가 풍년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청군 가운데 오직 집안에 식량을 넉넉히 비축한 자들만이 심양까지 포로를 데려갈 엄두를 낼 수 있었으리라고 보아야 한다. 넷째,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은 적어도 서울에 도착하기까지는 포로 사냥에 열중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의 제2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개전 초기 청군의 전략은 가능한 한 빨리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진군 도중의 포로 사냥은 진군 속도를 늦추기 마련이다. 심양장계가 "청나라 군사가 서울로 쳐들어갈 적에는 그 행진이 매우 빨라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약탈당한 것이 그리 대단치 않았다"고 지적한 그대로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사항만 고려하더라도 피로인이 50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물론 포로의 부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몸값만 노리고 포로 사냥에 열중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이 끝난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무고한 양민을 상대로 포로 사냥을 벌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간 청군 부대는 귀국 도중의 포로 사냥을 금지했고 혹 금령을 어기고 잡은 포로가 발견되면 즉각 석방 조치했다. 다른 경로로 귀국한 청군 부대들도 이와 같았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청은 전쟁이 끝난 뒤의 포로 사냥으로 피로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때의 피로인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다는 말인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료가 충분하지 않은 탓에 여기서 당장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다만 수십만 명이 절대 불가능한 숫자라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수만 명 수준이 그 상한선이었을 것이다. 자릿수를 하나 줄였다고 해서 혹 병자호란의 비극을 축소하는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십만 명이 되어야 비로소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만 명이라고 해서 비극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지금까지처럼 사료상의 비합리적인 숫자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관련 사료를 많이 발굴하여 합리적 추산을 시도하는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出典 :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구범진



요약 :

당시 청나라의 인구는, 130만~240만人, 그리고 瀋陽은 작은 도시였다.

현실적으로 50만~60만人의 포로는 전혀 수용할 수 없었다.

거기다 당시 청나라는 심각한 식량 부족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불가능하다.


50만~60만人 한국인이 청나라에 간게 사실이면 청나라에서 한국인이 인구 다수 집단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 청나라에서 만주인을 제외한 다수 집단은 한족과 몽고족였고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청나라 측 기록에서는 한국인 포로가 수십만명이라든가, 많았다는 기록도 전무하다.

오히려 청나라 부대에 포로 노획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2달간의 전쟁이었다. 단 2달간의 전쟁 중에 50만~60만人의 포로는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이다.


결론은 50만~60만人이 포로로 잡혔다고 말한 것은 명나라에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했던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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